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첫째 주일부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자로 보내주실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신 부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메시야는 우선 다윗의 족보에서 태어난다고 예언되어 있었죠.
또 메시야는 선한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것처럼 자기 백성을 돌보시며 공의와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신다고도 예언되었습니다.
오늘은 신약성경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고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구약성경에 예언 된 백가지가 넘는 메시야 예언대로 모든 것을 성취하시고 본래 영광의 자리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이 구원사역에 함께 했던 사도들은 본 것을 전하기 위해 성경을 기록했죠.
마태, 마가, 누가가 이미 공관복음서를 기록해서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사도가 죽기 전에 예수님의 복음을 기록해 전해 준 것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앞의 세 복음서가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치심을 사실에 입각해서 역사처럼 기술했다면 요한복음은 좀 다릅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좀 상징적인 언어들이 나오고 뭔가 심오한 내용들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자기들의 눈으로 본 것들을 사실적으로만 기록한 공관복음서하고는 다르죠.
요한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 영적인 해석을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는 메리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쏘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라진다고 합니다.
정말 둘러보면 화려한 장식도, 캐롤도 예전 같지 않은 것을 느낍니다.
우리 젊을 때만 해도 크리스마스는 정말 기대되고 대단한 날이었잖아요?
요즘은 할로윈데이 같은 엉뚱한 날이 슬금슬금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점점 더 관심 밖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여러 종교 중 한 종교의 창시자 정도로 생각하겠죠.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알고 믿는 것일까요?
이 점에서 세상 사람들과 신자들은 정확한 선을 긋고 갈리는 것입니다.
우려하는 것은 현대교회의 신자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이 교회 밖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를 요한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들으려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바른 목적지에 도달합니다.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이 항상 들어오던 익숙한 소리로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내용 안에는 천지를 뒤흔들만한 진리가 담겨있고 개인의 운명이 달라지는 소식이 담겨 있습니다.
한 절 한 절 음미하며 깊은 은혜를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믿음의 주추가 될 굵직한 계시들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오늘이야말로 확실히 깨달아 영혼에 깊이 새기고 구원의 큰 기쁨으로 충만케 되길 소망합니다.
1절부터 요한사도는 마치 축포를 터뜨리는 것 같은 감격적인 진리를 선포하며 복음서의 서막을 올립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짧은 말씀 안에는 예수님에 대한 빛나는 진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전제로 할 때에야 비로서 앞으로 전해주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사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지금 요한은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예수님이시고, 태초부터 계신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기 전, 이미 태초부터 예수님은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인명사전의 기록대로 역사의 위인이라는 생각은 어불성설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국조인 아브라함에 대해 ‘내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느니라’ 라고 하셨다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을 뻔 하셨던 것이 기억나시죠.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기에 존재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예수께서 계시더라’ 라고 하지 않고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성탄절에 사람으로 성육신하시기 전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진술입니다.
우리 성경에 ‘말씀’이라고 번역해 놓은 헬라어 성경의 단어는 로고스입니다.
많이 들어 보셨죠?
로고스는 단순히 말이란 의미도 있고 헬라철학에서는 우주를 다스리는 어떤 힘, 이성, 질서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문화에는 없던 사상이라 정확히 이해하기가 좀 힘든 단어입니다.
어림잡아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기 전엔 인간의 육체가 아니셨기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셨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말씀이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역할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부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이 말씀을 통해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창세기는 계시하죠.
빛이 있으라 하셨더니 빛이 생기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실제적으로 행하신 행위자의 역할이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로고스는 단지 하나님의 수행자나 대리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참으로 기이한 진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가르치시며 본문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님도 하나님이시라고 또한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계시입니다.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나 현대인들이나 다 헷갈리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가 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냐, 신이냐.
어떻게 사람도 되고 신도 되냐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신이 자기가 만든 인간의 모습이 되어 내려오셔서 살다 가셨다는 것이 실화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사람인 신비에 가득 찬 존재시라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할 뿐입니다.
신앙에는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지만 이해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 야 할 계시의 영역도 있습니다.
다 이해가 되면 과학이고, 학문이지 신의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닌 것이죠.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말씀으로서 실현하셨듯이, 인간이 되셔서도 여전히 인격 전체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베풀고도 자신이 영광을 받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경배했을 때 그들을 만류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이니까요.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기적을 일으켰을 때 헬라인들에게 신으로 추앙받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 외람 된 사실로 인해 자기 옷을 찢으며 만류했던 것과 주님의 경우는 완전히 대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대림절에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른 것은 예수님을 위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이 서두를 이 구절로 시작한 속뜻을 우리가 해석해야 합니다.
저도 설교문을 작성할 때 이 본문을 위해 먼저 무슨 말을 꺼내서 본문의 의미를 잘 전달할지 신경을 많이 씁니다.
사도요한도 고민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할 때 확 떠오르는 성경 말씀이 있잖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사도가 창세기1장1절이 연상되도록 복음서를 시작한 것은 창조가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현 세상이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렇게 진술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창조자이셨다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에서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실행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이 천지창조와 같은 놀라운 새 일의 창조라는 사실을 연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부족함 없고, 흠 없고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죄가 들어와서 모든 게 일그러지고 파괴된 것입니다.
현재 지구상에 죄가 사라지고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벅찬 일이죠.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태초의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이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것은 태초에 이루셨던 그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다시 완전하게 돌려놓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는 유효기간이 정해진 세상이었지만 재창조는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려면 모든 것을 망쳐 놓은 원흉인 죄를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요한사도는 그 관점으로 앞으로 이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고, 복된 신성을 회복했고, 세상을 다스리고, 이웃과 화목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한 것입니다.
가능성을 회복한 것입니다.
얼만큼 영광을 회복할지는 우리의 순종과 하나님이 인도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반드시 이런 영광을 되찾게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창조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명과 빛이십니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천지창조에서 만물에 빛을 비추시고 생명을 불어 넣으신 창조의 모습과 관련시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만물에 생명을 주셨던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어둠과 죽음에 이른 사람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고 빛을 비추십니다.
생명과 빛이라는 말씀이 좀 추상적인 것으로 들리지 않으려면 생명과 빛의 반대를 생각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 아니면 죽음이고, 빛이 아니면 어둠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는 영적 죽음입니다.
그렇기에 본질적이고 영원한 영의 세계는 모르고 일시적이고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만 압니다.
나름 인생을 계획하고 뭔가를 이루며 부지런히 살고자 하지만 사실 칠흑 같은 영적 어두움 속에 더듬으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에게 있는 특징은 영원한 일을 안다는 것과 영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 나이나 배움에 상관없이 인생의 목적지를 분명히 알기에 삶을 더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곧장 걸어갑니다.
5절에 보면 영적으로 죽은 자연인들에게는 이 빛이 비춰도 깨닫지 못한다고 하죠.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일은 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기 전에는 다 어둠에 있었고 그 빛이 비치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빛을 피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자신이 지으신 자기 땅에 내려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을 단지 어둠과 무지의 소치로 돌리지만은 않습니다.
3장19절에서 예수님은 이들을 분명히 판단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모두에게 주셨잖아요?
사람들은 부를 위해 돈을 어디에 투자할지, 건강을 위해서 무슨 운동을 할지, 누구를 사귈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자기 영혼에 대해 누군가가 죽음으로 길을 열어놓았다는 기묘한 사실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단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의 자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할 일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막연한 조물주나 우주너머의 초월적 하나님을 굳이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사람들이 굳이 안 믿을 이유가 없죠.
신에게 빌어 복을 받고 저주를 피하고 그런 것은 사람이 아주 좋아하고 열광하는 것이잖아요?
사람들은 정말 아무데나 빌어서 복받기 좋아합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막연한 신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그런 신은 내게 뭘 요구하지도 않고, 나를 바꾸려 들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신은 현실세계까지 내려와서 내게 간섭하는 신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신이라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신에 속한 영광,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예수님을 영접할 때 주어집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히 잃어버린 자로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그들의 죄악 된 모습으로 영벌에 들어간다는 것이 엄중한 주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이 재창조와 구원에 대한 말씀을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미리 경험한 성도들을 통해 무수히 외치게 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타나 전해주지 않고 택하신 일군을 통해서 전하십니다.
6절과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이 믿도록 세례요한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지난 주일까지 살펴본 대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셨고,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이 오신 예수님을 보고 이 분이 바로 그 분이라고 지목하셨다는 것입니다.
29절에 그 장면이 바로 나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런 하나님의 증인들의 모든 증언을 듣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증언의 책이잖아요?
여기에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까?
그동안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내 인격과 삶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목적에 있어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성공적인 삶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받겠다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내 힘으로 살만해 지고 더 이상 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면 돌아섭니다.
또 원하는 걸 받지 못하면 실망해서 떠납니다.
삶에 대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최우선이 아니라 차후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결코 놓칠 수 없는 분이심을 끝까지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구원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계획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핵심을 모르면 참된 영접이 아닙니다.
그걸 알기 위해 죄의 자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찢기고 피흘려 돌아가셨다면 그만큼 우리 죄가 심각하다는 뜻이잖아요?
왜 제가 매 주 마다 죄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드리냐면 죄와 심각한 심판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이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돈이 해결하지 못하는 게 없는 세상이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더 도우십니까, 돈이 나를 더 돕습니까?
돈의 도움이 더 빠르잖아요?
선진국이 될수록 그래서 점점 신이 필요 없어지는 것입니다.
삶이 복잡하게 꼬이고 숨통을 조일 때 교회에 나왔다가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면 발길을 끊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평생에 하나님과 타인에게 지은 불의한 죄악을 짊어지고 영원한 심판에 들어가지 말라고 우리 죄를 대신 짊어 지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누가 대신 속죄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사를 보내서 속죄하시겠습니까, 천사가 어떻게 다른 피조물인 인간을 속죄합니까?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을 보내서 속죄하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있습니까?
설령 있다한들, 그 한 사람이 어떻게 대표자가 되어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합니까?
인간의 반역죄와 악행은 속죄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께 지은 죄에 대해 유일하게 속죄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만족되었고, 드디어 죄인을 용서하실 명분을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다른 어떤 문제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하기에 영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예수님을 믿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본인이 압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강력한 믿음이 십자가의 대속을 붙잡고 그 길에서 절대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전제되지 않으면 십자가의 의미도 모르고 사랑도 모릅니다.
죄의 자각과 속죄의 사랑은 짝을 이루기에 죄를 깊이 자각할수록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도 점점 더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에 대해서 13절에서 말씀하죠.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에서 분명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신앙을 알던 모르던 교회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떠나면 죄받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든지, 병이 더 나빠질 것 같은 염려라든지, 하나님 밖에는 매달릴 데가 없어서든지.
아무튼 하나님이 정하시면 누가 욕하고 타박을 해도 하나님 앞을 못 떠납니다.
도망갔다가도 다시 잡혀옵니다.
그리고 억지로 앉아서 이렇게 요한이 설명해 놓은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 저에게 듣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뭘 믿어야 되는지, 내가 믿는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가 되고, 말씀대로 지키려는 의지를 갖고 살다보면 어느 순간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옵니다.
믿어보려고 애쓰는 단계가 아니라 그야말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들은 진리들이 이성으로 이해가 되고 믿어진다면 그건 정신이 이상한 것입니다.
안 믿어져야 정상 자연인입니다.
믿어지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3장의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실례를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거듭나야 되겠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 모인 우리는 거듭나는 단계에 있거나 이미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면 점점 자기가 거듭났다는 사실을 알아가게 됩니다.
아기들이 태어났을 때, ‘아, 내가 태어났구나.’ 라고 깨닫지 못합니다.
자라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영적인 것도 비슷합니다.
새로 태어난 생명도 어느 정도 자라야지만 자신이 이젠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확증될 때까지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히 배우며 말씀대로 따라 살아야 합니다.
믿음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여기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 요한이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백발이 성성한 요한이 여전히 감격에 겨워 이렇게 옛날을 회상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려오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을 보니 그 빛이 너무 좋아 영원히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와 깊은 동정심과 사랑과 참되심은 세상에서 줄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사도는 이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얘기를 할 때 이름대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라고 늘 자랑스럽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하고, 더 따르기 원하고, 진정 구주로 영접하기 원하면 우리도 이런 사랑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습니까?
예수님만이 거짓 없고, 가식 없는 참된 사랑으로 우리에게 영원토록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대림절 셋째 주일에 성령님의 은혜로 이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복된 영광을 되찾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7년12월17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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