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1장45절-53절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음)

남수연 2016. 11. 2. 12:43

윌버트 챠프만이라는 사람이 4500명이 모인 한 기독교집회에서 조사해 내놓은 특이한 통계가 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언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냐고 질문을 했는데요.

그 중 4476명이 35세 이전에 신앙을 가졌다고 답했습니다.

36세 이후에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불과 24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 결과에 흥미를 느낀 챠프만 박사는 더 광범위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45세 이후에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은 20만 명에 한 명꼴이라는 산술적인 통계가 나왔습니다.

55세 이후에 신앙을 가지는 사람은 30만 명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게 이 통계가 왜 의미심장하게 다가 왔을까요?

우리 중 많은 분들이 36세 이후, 45세나 55세가 넘어 하나님을 믿으려고 교회에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불가능에 가까운 희박한 확률 안에 들어서 여기에 나오게 되었는지 다들 모르셨죠?

늦게나마 신앙을 가지게 되신 분들은 정말 기적이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과 같은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장년층들은 설교를 통해, 성경을 통해 구원받을 진리를 더 확실하게 배우고 깨닫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게 잘 안되면 처음엔 교회생활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다니지만 결국 30만 명 중 하나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을 만났다이런 고백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힘을 다해 믿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을 인격 대 인격으로 알아가고 신뢰하는 것은 단지 성경에 대한 지식만 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과 살아가는 모든 영역이 점점 더 하나님 안에서 헤아릴 수 없이 풍부하고 깊은 은혜와 복을 실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죠.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

성경은 이모저모로 우리를 가르쳐서 구원의 진리가 이 땅과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감히 비판할 수 없는 견고하고 거대한 기둥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이 요한복음을 읽다가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짧은 내용인 것 같지만 이 안에도 역시 확고한 믿음의 근거들이 담겨있습니다.

오늘은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를 통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한 쪽 말만 들어서는 모르는 일이잖아요?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우리에겐 무엇보다 중한 일입니다.

또 예수님을 구원자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통해 우리의 믿음에도 적용해보려고 합니다.

설교 후에 있을 성찬식의 의미까지 깨닫게 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선 예수님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가 어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삼십세에 메시야로서의 공적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전의 삶은 경건한 유대인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완전하고 사랑스러우신 분이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유대사회의 큰 회오리를 몰고 온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이름도 모르던 최순실이란 사람이 우리 사회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와 그 파장을 가늠하기 힘들게 된 것처럼 당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온 나라가 술렁거렸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당시의 엄청난 소동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45절에 보면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죠.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일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부활시키신 사건을 말합니다.

나흘이면 시체가 이미 부패되어 내장과 살이 썩어가고 있는 때입니다.

잠깐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완전한 주검이 된 시체가 다시 본래의 신체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났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그때 사람들도 당연히 그랬어야 정상입니다.

성경을 보면 나사로의 집이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에 있었고 많은 유대인들과 친분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을 목격한 것입니다.

무덤에 장사한지 나흘이 지나 썩은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나사로야 나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삼베로 동여맨 채 걸어 나온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이 다 혼비백산했을 것입니다.

설마 이런 일이 정말 있었을까 생각이 든다면, 정말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었다면 그게 사실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바로 오늘 공회로 모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허점을 잡으려고 늘 상 사람을 붙여 주님을 염탐했습니다.

46절에 보면 그 중에 어떤 자가 현장에 있다가 이 사실을 바리새인들에게 그대로 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지금 나사로의 부활을 사실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행한 예수님을 점점 메시야로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긴급하게 대책을 강구하려 모인 것이죠.

4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모으고 이 사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공회를 모았단 말은 오늘날로 볼 때 임시 국회를 소집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성경에 기록된 당시 예수님의 표적들이 사실이었다고 인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부활 뿐 아니라 더 앞 서 행하신 표적들이 많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신 일, 맹인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입니다.

이런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얕은 재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고 표적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사람들이 부인할 수 없도록 충분한 표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표적들을 보고 당대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증거라고 믿었던 것이죠.

예수님도 스스로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지도층이 예수님과 언쟁하며 추궁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정 못 믿겠으면 내 말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일을 보고 나를 믿으라고 호소하시기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본문을 보니 어떻게든 예수님을 가짜 메시야로 몰고 가려던 유대지도층도 어쩔 수 없이 모든 표적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죠?

우리도 이런 표적을 예수님이 실제로 행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단지 존경할 만한 인류의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들이 실제 일어난 일이고 성경에서 예언 된 메시야의 증거라면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당대에 국민들이 얼마나 메시야의 출현을 열망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배로 수치를 당하고 모든 좋은 것을 다 수탈당하고 있었거든요.

국권 없는 민족의 치욕이 어떤 것인지는 우리민족도 잘 압니다.

구약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어서 나타나 압제당하는 자기 민족을 해방하고 영구한 강성부국을 일으킬 것을 유대인들은 대망했습니다.

무능한 인간 왕들이 민족을 망해먹었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뼈저리게 체득했거든요.

메시야와의 통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은 절대적이고 그들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왕국을 얼마나 대망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 19세기에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사십년이 되지 않아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그 땅에서 다 쫒겨납니다.

그때 도망친 사람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이천년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며 큰 시련을 당합니다.

남의 나라에 얹혀사니 모든 일에 억울하게 불이익을 당하고 사람대접을 못 받는거죠.

툭하면 대량 학살을 당하는 데 나라가 없으니 보호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897년에 세계 각국에 살고 있던 유대지도자들이 모여 시온산, 즉 과거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가 나라를 세우자는 시오니즘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때 영국이 이들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시온에는 이미 아랍사람들이 국가를 세우고 살고 있으니, 우간다 쪽 에 국가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때 모인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나라를 갖자는 쪽과 시온이 아닌 곳도 문제지만 메시야가 없이는 나라를 세울 수가 없다는 쪽이 크게 갈라졌습니다.

메시야가 와서 나라를 회복할 것을 이천년이 지난 그때까지 믿을 뿐 아니라 메시야왕국이 아니라면 국가도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종교인들은 구약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야를 정치적, 현세적 통치자로 알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이 예수님을 바로 그 메시야로 알아보았고, 누가 봐도 예수님은 메시야셨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가짜 메시야, 가짜 왕이라는 죄목으로 로마군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모여 긴급회의를 한 이 유대정치권의 판단과 결정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유대지도층은 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죽음에 넘겨준 것일까요?

오늘 본문이 그 이유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유대지도자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내용을 보면 뭘 중시하고 뭘 두려워하는 지가 분명합니다.

48절입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드는 분위기가 되면 로마군이 들어와 강제로 진압할 거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진짜 메시야냐 아니냐를 놓고 따지고 있는 게 아니죠?

지금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로마인들이 진압하러 들어오면 안정적인 자기 생활이 위태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우국충정으로 이들이 한 마음이 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 땅이란 말은 국토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국토는 이미 로마 것이 된 상태입니다.

우리 땅은 자기들이 권력을 누리고 존경을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본거지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나가면 우러러 보고 복종하며 따르는 자기백성들을 뺏길까봐 겁나는 것입니다.

정작 이들에겐 하나님도, 구원자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겉으로 경건한 모습으로 제사를 이끌고 율법을 떠받드는 이 사람들을 향해 정곡을 찌르셨잖아요?
이들이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단지 현재 자기의 안전과 재산과 명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들만 그렇습니까?

신앙이냐, 아니면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보장받는 성공적인 삶이냐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정말 우리는 충격적인 자신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항시 이 믿음이 다만 현실적인 안위와 번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이 땅의 생애는 아주 소중합니다.

이 현재의 삶을 영원으로 이어서 사는 것이 성도들의 이생살이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몸을 가진 우리는 필연적으로 현실의 안위와 축복에 더 치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면서 지키려했던 현세의 재산과 안전과 권력은 결국 로마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도 내 계획과 인생을 바꾸지 못한다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 가치관, 결정들이 다 신앙으로 인해 영향 받고 변화 받아 온전해질 때 이 땅의 일도 점점 순리대로 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신앙의 기본진리들이 당장 내 현실과 별 관련이 없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깨달을 때 믿음이 확신되며 거기서 오는 막강한 힘이 우리 안에 생깁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 땅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이 가볍게 느껴지고 감당할만하다는 지혜와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제적인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현실의 문제만 바라보면 그 문제는 절대 가볍게 다룰 수가 없습니다.

다 그렇게 살아보셨잖아요?

우리들교회를 담임하는 김양0 목사님이 지난 주 설교에서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하게 되었다며 자기가 더 성숙할 수 있도록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자신의 암 수술을 그렇게 담담하고, 편하고, 진실 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내 현재 삶에 대해 지나치게 애착을 갖고 좀 더 나은 환경, 좀 더 나은 조건, 이것만 되면 더 완벽할 텐 데 하는 마음으로 매달리면 덫에 걸립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지만 현세의 복은 무궁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받았지만 죄가 끼어들고, 마귀가 끼어들고, 바뀌게 되어 있어요.

언제 우리가 기뻤었냐는 듯 삶에 또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내 삶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리엑션을 크게 할 필요가 없다는 지혜가 생깁니다.

자랑했던 것 때문에 낭패가 오는가 하면 낙담을 보였는데 일이 잘되기도 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초점을 하나님과 영원에 둔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면 반드시 현세와 내세가 다 복되리라 믿습니다.

현실에만 주목하려는 우리의 눈을 자꾸 하나님께 두도록 스스로를 훈련하고 다루어 더 강건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또 한 가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실패를 통해 우리가 깨닫습니다.

이들이 생각했던 메시야는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였기에 지금 정도만 산다면 메시야 없이도 사는데 그닥 지장이 없다 생각한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이젠 먹고 살만해서 하나님 도움 없어도 된다고 그러는 것이잖아요?

이들은 모두 메시야의 속죄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속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속죄가 필요 없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가기 위해 속죄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시 후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되고 이 땅에서 부지런히 쌓아 올린 모든 것이 공개될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때 그 모든 것이 다 죄악이 더덕더덕 묻어있는 더럽고 누더기 같은 인생탑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 부끄러움과 절망감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매순간 불결하고 이기적인 죄와 탐욕을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 뽑아내서 인생의 집을 채워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왜 우리는 그렇게 숨길게 많고, 거짓말로 둘러대고, 사소한 이득을 위해 눈을 번득일까요?

왜 끊임없이 나를 비교해서 누군가를 질투하고, 열등감에 빠지고, 그런가 하면 어느새 가장 높은 곳에 넙죽 올라 앉아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시간들을 보면 죄와 염려와 갈등이 없는 평온한 시간이 얼마나 짧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삶을 원하시지만 죄가 본성인지라 그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쉼 없이 자아낸 죄악을 용서해 주실 속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알았다면 그들 역시 영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예수님께 주의했을 것입니다.

당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에 공개적으로 선포했잖아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속죄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면서, 그것이 인간의 죄를 단번에 속죄해 주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예표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그 자신의 입으로 지금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말하고 있잖아요?

50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을 죽여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지키자는 속내를 감추고 내세운 명분이지만 그것이 실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대속죄일에 양을 잡아 모든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일을 맡았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께서 바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죽을 그 희생양이라는 것을 자기 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입으로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말한 대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백성이 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효력이 미칩니다.

이는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구원 안에 우리가 들어왔다는 것이 얼마만한 영광이고 복락이고 행운인지 점점 더 삶에서 깨닫고 누리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마지막 말씀으로 마칩니다.

53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 결정 된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입니다.

요한사도는 이 두 사건을 관련시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나사로의 장례식장에서 예수님께서 우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비탄에 잠겨 울고 있는 사람들의 눈물 속에서 사망에 대한 인간의 절망을 보시고 불쌍해서 같이 우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말씀을 바로 이 자리에서 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그 나사로를 살린 것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것처럼, 내가 살아난 것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담보로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믿으시는 복된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짓이겨져 상하신 몸을 생각하며 감사로 떡과 포도주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우리 안에 확고해 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실체로 임하시는 것을 믿으시고 경건하게 성찬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2016년10월30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