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3장1절-11절)

남수연 2013. 9. 18. 12:50

지난 주 몇 번이나 하늘을 올려다 보셨나요?

바빠서 땅만 보고 뛰다 겨우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오늘은 위의 것을 찾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지난 주에 나누었던 라오디게아교회하고는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다음 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그리고 그 편지가 오늘 주는나의산성교회에서 읽혀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수감자의 처지입니다.

수감생활 중에 편지를 써 보낸 것을 보면 단순한 안부편지는 아니겠죠.

무언가 믿음을 위협하는 문제가 좀 생겼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도를 해보면 일단 믿음을 갖는 게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리고 믿음의 발걸음을 띤 다음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기 까지도 우리가 자식을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그 신앙의 여정 중에 우리의 죄와 환경과 마귀의 방해가 뒤얽혀 믿음의 길을 굳세게 걸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에 여기 까지 온 것입니다.

신약의 이 많은 편지들은 대개 믿음에 문제가 생긴 교회와 성도를 위해 보내졌습니다.

바울사도의 결론은 단 한가지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굳세게 붙들라.

그리스도인이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고 바짝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목자와 양무리를 벗어난 한 마리의 양처럼 위태한 것이 연약한 성도들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땅을 살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도 섬길 수도 없습니다.

현대교회가 함정에 빠진 것은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께 배우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더 확고하게 깨닫고 믿음의 심지가 더 견고해지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문제는 당시 어느 교회에나 있었던 구원의 진리를 혼란시키는 이단사상들이었습니다.

아직 기독교 초창기이고 신학도 교리도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고 완성된 성경도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손에 들고도 이렇게 믿음에 대해 잘 모르지 않습니까?

골로새교회에 있던 문제는 앞 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교 출신자들과  철학 우월주의와  신비주의자들이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편지는 이에 대한 처방입니다.

앞 부분의 2장에 걸쳐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고 두 장에 쭉 변증을 합니다.

바울의 변증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만물이 다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의 화평이 이루어졌다.

너희를 교묘하게 후리려고 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바짝 정신을 차려라.

이런 내용입니다.

앞 장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교리들이 너무나 명쾌하고 수려하고 깔끔하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읽고 배워야 예수님에 대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골로새교회나 지금이나 마귀의 목적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지옥을 만들고 사람을 심판하시겠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 이런 말은 얼마나 달콤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모든 종교를 통해 인간들을 다 구원하신다는 종교다원주의는 얼마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소개합니까?

정말 그러면 전도할 필요도 없고 얼마나 좋습니까?

며칠 전 프란치스코교황이 무신론자에게 보낸 서신이 공개되었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에 교황은 하나님의 구원은 한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으니 양심을 따라 살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죄인의 오염된 양심이 무엇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합니까?

또 선악을 판단한들 자기 이익을 버리고 선을 행할 능력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각자의 양심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다니 참 너그럽고 인자한 교황입니다.

만인에게 구원을 자기 마음대로 나눠주고 있으니, 그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까?

세상은 예수님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 통속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 없다면 사람들은 죄와 심판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이 거짓평화를 누리며 멋대로 살 수 있는 것이죠.

주인도 심판자도 없으니 뭐가 신경 쓸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인류의 공공의 적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죄와 심판이 꿈틀거리며 생각나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흑암의 세력과 철없는 죄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세상에서 밀어내려고 지금도 공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실체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낭만적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리고 계신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서 아무도 우리의 구원을 뺏지 못하게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다음,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과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구체적인 이 실천 지침을 우리가 배우고 잘 따라야 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도들을 의로 교육하고 온전하게 세워줍니다.

성경의 명령과 교훈이 우리의 행동반경인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성경이라고 하죠.

그런데 세계에서 제일 많이 읽혀지지 않는 책도 성경이라고 합니다.

미국 기독교 통계를 보면 기독교인의 58%가 성경에서 지혜나 교훈을 얻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호세아 4장 6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이 가장 복있는 사람이라고 시편1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우리 삶에 유일한 길잡이로 삼을 때 우리에게 지혜가 샘처럼 솟아나고 수치와 실패를 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실천 지침을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위의 것을 찾으려면 먼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 됩니다.

새생명으로 부활하지도 않은 사람이 뭐하러 소속도 안된 위의 것을 찾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까?

이건 중요한 영적 진리니 꼭 알아두셔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겠다는 결심의 표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장례를 치렀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해서 우리도 영생하는 몸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인정하고 죽는 것이 바로 세례 받는 것입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세례 받으셨습니까?

나의 옛사람이 죽어서 과거의 나는 그냥 시신만 있고 나의 본질은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잘 기억하고 믿고 따라야 합니다.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성도들은 이제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막연히 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거기 계신 예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곳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이 분명히 계신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스데반집사가 순교할 때 하늘을 보며 외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천국을 다녀온 바울사도도,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사도도 다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목격하고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 우리 시선을 고정하는 이유는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 마음과 생각을 고정하고 찾을수록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신비하고 풍성한 것들로 채워집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리 자신을 바라봐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게 전혀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활생명이 지금은 하늘 위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의 진짜 영광스런 부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냐.

4절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그 때, 재림의 날에 눈부시고 영화롭게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놀라운 신비한 부활의 내 모습은 아직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의 소속은 이미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땅에 얽매여 땅에다 열심히 삽질을 하고 계셨는데 많이 당황하셨나요?

땅에다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난 주에 운동 좀 하려고 큰 맘 먹고 올림픽공원엘 갔었습니다.

주위가 어둑한 데 어디서 가수 남진의 구성진 노래가 점점 크게 들렸습니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 집’이런 노래였습니다.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 스마트폰에 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걷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앞세우셨는 지, 또 흔한 개 한 마리도 없이 혼자셨습니다.

어두운 공원에 울려 퍼지는 고향노래와 과거의 추억을 붙잡고 홀로 걷는 노인의 모습이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던지요.

땅의 것만 위해 살았던 인생의 말년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이런 찬양을 부르며 걸었을 텐데요.

사람들은 평생 위를 올려다 볼 줄 모르고 땅만 보고 살아 갑니다.

그래서 동네 상가 2층에는 무슨 가게가 있는 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기껏 1층만 보고 다니지 그 이상은 올려다보지도 않고들 산다는 것입니다.

그냥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겁니다.

그러다 죽음이 가까워 오는 나이가 되면 앞을 보는 것도 두려워지죠.

공원에서 옛 노래를 들으며 과거의 한 때를 더듬고 있는 노인 분처럼 지나온 세월만 되씹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인 어떤 장로님이 위암에 걸려 고생 끝에 완치가 되었는데 다시 후두암이 와서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발한 암이라 성공률이 매우 낮았습니다.

아내와 손을 잡고 기도하는 데 이것이 마지막 잡아보는 아내의 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기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순간 죽음을 생각해 보니 과연 내가 천국에 가게 될까 자신이 확 없어지며 그렇게 불안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의사로서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많이 보았는데 신자들 중에도 편안한 얼굴로 죽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자기도 지금 죽는다면 하나님의 품을 확신하고 편안한 얼굴로 죽을 것 같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고 합니다.

신자라고 하지만 평생 땅만 보고 달려왔지 위의 것, 예수님과 천국에 대해 너무나 아는 바가 없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지난 한 주도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셨습니까?

지난 주에 앞만 보고 달렸던 그 앞이 바로 오늘입니다.

별로 달라진 것도 없고 더 얻은 것도 없죠.

그렇게 땅의 것을 위해 열심히 달리다 어느날 바로 죽음의 문 앞에서 우리의 구원을 떨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함께 근무하던 교장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이 항상 말씀하던 것이 자기 마음이 진짜 열아홉 살 청춘 때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젊을 때 감흥처럼 지금도 자기 감성이 생생하다는 거예요.

그 분의 그 말이 진실하다도 저는 생각했습니다.

진짜 죄송한 말씀이지만 실력과 경험은 더 갖췄을지 모르지만 인격은 딱 열아홉 살 나이에 멈추신 것 같았거든요.

정말 많은 교사들을 힘들게 하다 불명예스럽게 은퇴하셨습니다.

땅만 바라보고 평생을 사는 성도들의 믿음의 성숙과 진보가 딱 그럴 것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우선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 시선과 마음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장차 내가 가게 될 그곳을 위해 무언가를 계속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지키며 성숙한 믿음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 내게 주어진 이 땅의 모든 자원들을 가지고 이 땅이 아닌 위에다 다음 생애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목적과 동기를 다 장차 내가 영원히 거주할 천국의 삶과 관계맺게 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실 때도, 일할 때도, 삶을 즐길 때도 모든 일이 내 신앙의 진보가 되게 하고 천국을 위해 하는 것이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분리되어 사는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단지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천국 시민권자들입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라지만 나중에 나비가 되면 절대 뽕잎을 먹지 않습니다.

거듭난 새 생명은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노력하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두 번째 행동 지침은 5절에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는 위의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땅의 것은 자꾸 죽이는 것이죠.

우리가 땅의 일만을 보며 옛사람을 죽이려한다면 죄에 대해 철저히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위의 것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과 믿음으로 땅의 지체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죄의 본성으로 태어난 땅의 지체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새사람이 불편하게 한 몸에서 동거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땅의 지체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불쑥 불쑥 죄가 고개를 쳐들고 순식간에 죄에 끌려가는 것이 성도들의 현주소입니다.

다만 세상인과 다른 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법이 하나 들어와 그것들과 싸운다는 것이죠.

성령의 새로운 법이 죄와 사망의 법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편을 잘 먹어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동조하면 죄 아래 팔려갑니다.

성령의 법에 동조하면 죄를 이기고 승리하고 그만큼 강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더 쉽게 땅에 것에 끌리기에 바울사도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강하게 명령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각종 불륜과 자기 욕심에 이끌린 악한 갈망과 끝없이 더 가지려는 탐욕스런 마음들이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분노와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거짓말입니다.

우리 속의 들끓는 죄는 결국은 난폭한 행동과 분노와 비방하는 말과 거짓말로 구사되어 튀어 나옵니다.

이런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우리가 바로 전에 그 가운데서 살며 그 죄들을 짓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형벌을 우리 앞에서, 그 몸으로 막아주셨는데 계속 그런 삶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죄를 끊고 이런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하나님께만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음란과 탐심과 분노와 악의와 비방하는 우리의 옛 성품은 죄악 덩어리로 우리 삶의 행복과 인격을 좀먹는 것입니다.

그런 죄성 때문에 세상이 지옥과 방불하게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이죠.

행복해야 할 가정은 파괴되고 가진 자나 없는 자나 인격은 천박하기 짝이 없고 마귀가 부추기는 대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음란한 존재입니까?

우리나라의 경우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경우 가정파괴의 주범은 배우자의 외도입니다.

‘가족치료의 현장으로의 초대’라는 책을 보면 미국인 남편들의 경우 55%가 외도의 경험이 있고 아내들의 경우 50%정도의 통계가 나옵니다.

가정이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음란이 극에 달하면 동성애 사회가 된다는 것을 성경은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소수자의 인권보호라는 명목하에 동성애자들이 무한정 옹호를 받고 있습니다.

영국에선 동성애자 결혼에 교회 목사가 주례를 거절했다고 고소를 당했습니다.

동성애자 결혼 피로연에 쓸 빵을 팔지 않겠다고 했던 한 빵집은 협박과 테러에 결국 문을 닫았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김조0수 감독의 동성애 결혼이 공개적으로 치러졌죠.

서대문구청에서 혼인신고를 접수받기로 했다고 합니다.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찾아주자며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질서를 부인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소돔이라는 도시를 심판하신 이유 중에 동성애도 중대 요인입니다.

남색자를 그래서 소도미스트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그 때 소돔성 전체가 동성애에 빠져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가 롯을 찾아왔을 때 그 성 모든 남자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관계하겠다고 몰려왔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소수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도 이런 설교하면 나중에 잡혀갈지 모릅니다.

음란한 문제 이외에도 부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하나 하나 살펴볼 것도 없이 우리와 가정과 인생을 파괴하지 않습니까?

이런 죄악들에 점점 우리 나라가 중독되고 있습니다.

알콜, 도박, 게임, 마약, 흡연 같은 5대 중독에 빠진 사람이 8백만명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다섯명 중 1명은 중독으로 인해 비정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삶을 살고 있고 그로 인해 가족도 고통당하고 가정은 파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외도가 아니면 중독, 아니면 경제적인 어려움, 우울증, 자살, 소통의 부제로 인한 고독 이런 것들이 죄가 주렁주렁 낳은 자식들입니다.

죄가 이렇게 지긋지긋한 것입니다.

5절과 8절에 열거한 땅의 지체들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십시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에다 분노, 악의, 비방, 거짓말 등 등.

어느 것 하나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개선하고 복되게 하는 게 있습니까?

12절 이후에 보면 하나님 안에서 옛 지체를 죽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성품들이 나와 있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용서, 평강, 지혜.

얼마나 대비가 됩니까?

혹시 인내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사랑만 한다면 우리가 너무 나약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냐고 물으시겠습니까?

성령이 주시는 새 성품은 절대 유약한 것이 아닙니다.

끔찍하게 질기고 악독한 이 땅의 지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니 그 선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개신교회 교인수가 팍팍 줄어들고 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 ‘목사가 싫어서’, 그 다음이 ‘성도들이 이기적’이라 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땅의 지체를 죽이지 못하고 남들이 보기에도 역겨운 모습에다 위선적이기까지 해서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받아든 성적표입니다.

세상은 성도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을 반대하지 말고 너희들이나 간음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과 우리 삶이 따로 노는 한 아무리 복음이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복된 소식이라 해도 세상은 오히려 귀를 막고 우리에게 악을 쓸 것입니다.

벌써 기독교는 진리를 전하기엔 너무나 무기력하고 파렴치한 집단이 되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삼백년 만에 로마를 무너뜨리고 로마의 국교로 우뚝 세워집니다.

우리는 내 삶과 가정과 생업의 터전에서 어떤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땅의 지체들을 죽이지 않으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나의 천국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험한 말과 화와 분노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 가정에 평안과 위로와 행복은 없습니다.

부정과 사욕과 악의와 거짓말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의 직장에서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고 더 중한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잘 몰라도 남은 정확하게 평가합니다.

우리가 땅의 지체들을 용납하고 차마 버리지 못하고 끼고 있다면 과거 우리의 왕이었던 마귀가 여전히 우리 삶을 간섭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땅의 지체를 죽일 수 가 있을까요?

힘써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옛 죄성을 죽이길 싫어하고 거기에 무슨 신앙행위, 기도나 봉사나 그런 것으로 덮어씌우는 건 소용없는 짓입니다.

힘써 죄악 된 본성과 싸워서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땅의 속한 지체를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장차 내 영원한 삶을 의탁할 예수님께 고정하고 이 땅의 삶을 부지런히 예수님께 관계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정체성은 옛사람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든 생각과 지식까지 새롭게 된 영광스러운 천국의 시민권자임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살 때 이 땅에서도 진정 성공한 인생이 될 것이고 천국의 존귀하고 영화로운 삶이 점점 확신되고 내 것이 되는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년9월15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