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3장12절-14절)

남수연 2019. 4. 30. 00:59

https://www.youtube.com/watch?v=fdgEkIyfssg&t=249s

<2019년4월28일 주일설교 영상 >


지난 주에 제가 서원이 웨딩드레스를 고르는데 같이 갔습니다.

웨딩드레스까지 정했으니 이젠 더 이상 이 결혼 물릴 수도 없게 됐네요.

웨딩드레스는 신부의 옷입니다.

옷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사람을 만날 때 옷매무새를 슬쩍 훑어만 봐도 그 사람에 대해 대충 알 수 있잖아요?

오늘 나눌 말씀도 옷에 대해서 입니다.

성도님들 오늘 예쁘게 잘 차려입고 예배에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복 말고 우리가 오늘 입고 있어야 할 옷이 또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입어야 할 옷에 대해 잘 깨닫고 이 옷을 잘 챙겨 입고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성도들은 세상과 다른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에서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다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큰 고난을 수없이 겪죠.

실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복음을 위해 이런 고난을 자청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신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는 좀 힘든 것 같습니다.

신자로서 세상을 상대 해 영향을 미치기 보다는 세상에 묻어서 살아가는 편이죠.

할 수 있다면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다 붙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지도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옛날 방식으로 살면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려는 것에 대해 그럴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다는 것이죠.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교리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싫은 것은 기독교 신앙이 내가 원치 않는 나로 바꾸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한두 번 나와 보다 돌아서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실 일거수일투족을 지시합니다.

애들도 그렇게 지시받으며 살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사람들이 이렇게 나대로 살고 싶은 그 본심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땅에 속한 육의 사람, 옛사람이라고 말합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사람들이 내면에서 갈망하는 것이 이런 것들입니다.

사람이 다 음란하잖아요?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건들을 보면 젊은이나 늙은 사람이나 다 음란합니다.

부정부패가 사회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은 그 구성원인 사람들이 부정하다는 증거입니다.

다 사욕과 탐심에 몰려 온갖 부끄러운 일과 악행을 저지르죠.

며칠 전 멕시코의 한 여성시장이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무려 서른 한 발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멕시코는 이렇게 마약 조직에 협력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수없이 테러를 당하잖아요?

작년 총선을 앞두고는 후보자와 정치인 130명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상대 후보를 아예 죽여 버리고 권력을 잡는 거예요.

멕시코만 이상한 게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악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본성적인 옛지체들은 자꾸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죄성이 저절로 죽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리고 8절에서는 이 본성이 만들어낸 나쁜 습관들을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 거짓말이라

읽어보니까 참 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들이죠.

결국 사람이 고집스럽게 하는 일이 그래봤자 이런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아니면 사람들의 내면의 실체를 이렇게 뒤집어 보이지 못합니다.

절대로 세속 세상과 사람의 본질이 그럴듯한 겉모습처럼 괜찮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본래는 착한 사람인데이렇게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만일 성도들이 이런 옛 옷을 고집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근실히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어떻게 새 사람의 옷을 입을 수 있을까요?
12절에서 찾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우리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이런 내면의 옷들도 우리가 입고 있는 옷처럼 신기하게도 남의 눈에 환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잠깐 만나보고, 얼마간만 대화를 나눠보면 그 사람 내면에 무슨 옷을 걸치고 있는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까?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욕심 많은 게 금방 드러납니다.

우리가 남에게 평가받는 것이 겉모습이 아니라 사실 남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이 내면의 옷입니다.

그렇기에 이 새사람의 옷, 내면의 옷을 잘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사람의 옷은 앞에서 보셨듯이 옛사람과 노선이 완전히 다릅니다.

당연히 옷을 바꿔 입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사람의 옷을 입어야 하는 것에 바울사도는 타당한 이유를 댑니다.

그 이유는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1) 먼저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구원이 내가 교회를 찾아온 날, 내 의지로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심한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 모태에서부터 택하셨다고 합니다.

시편 71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에베소서14절은 우리의 구원이 이보다 더 오래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모태에 조성되기도 훨씬 전, 하나님의 머리 속에 우리가 존재하는 순간 이미 우리를 예수님께 묶어서 구원하기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단이 성경에서 취한 교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적인 구원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나의 선택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성도들의 구원이 견고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만일 구원이 내 선택과 의지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면 수 천 번도 더 하나님을 떠났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죠.

누가 죽는 순간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이야말로 성도들의 구원을 가장 확고하게 보장하는 가장 귀한 은총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 뽑혀서 예배의 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잖아요?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은 내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성령으로 감동하셨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구원에 대해서 아무도 자기 힘이라고 자랑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좀 더 나은 뭔가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선택하시되 무조건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우리가 따진다고 이해되는 차원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할 뿐인 것이죠.

 

2) 또 우리는 거룩한 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이 과거에 이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7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같은 옛지체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룩한 자라고 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정말 거룩한 사람들이었을까요?
물론 편지에서 바울은 골로새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사람이 행실을 좀 고친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고 하잖아요?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12절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사람이 거룩해 지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죄가 깨끗하게 될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종교에 심취하면 대개 세속과 구별된 종교적 거룩을 좀 추구합니다.

수도사들이 그렇고, 수도승들도 그렇잖아요?

오늘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단순한 안부편지가 아닙니다.

골로새교회에 문제가 있기에 긴급처방을 한 것입니다.

골로새교회는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진 소아시아인들의 교회입니다.

그 가운데 유대교 교포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가장 먼저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도 그렇지만 바울이 이방인교회에 보낸 편지들에 너희도 택하신 백성이라는 걸 강조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 출신의 개종자들은 전부터 지키던 율법과 금욕적인 종교 관습들을 여전히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교인들에게 너희도 할례 받아라, 절기 지키고 금식해라 이런 코치를 했던 것입니다.

고민하던 골로새 교인들에게 바울이 그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인정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하다는 것은 인간이 갈고 닦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성도들이 교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더 믿음이 좋고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기가 쉽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면 더 그렇고, 목회자들의 경우 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신앙에서는 전문가여야 하니 일반 성도들과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인 것이죠.

저도 목회 경험이 짧다 보니 누가 봐서 그렇게 성직자 같은 그런 분위기가 잘 안 듭니다.

그래서 나름 고민을 좀 합니다.

좀 영성이 깊은 척도 하고, 행동과 말도 더 종교적으로 해야 되지 않냐는 생각을 가끔 부질없이 해봅니다.

종교적인 태도를 훈련해서 쓰는 너울은 거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우리는 이미 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3) 다음 너희는 사랑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예배를 잘 드리고 기도를 잘 해서 사랑을 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게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라고 하잖아요?
이미 우리는 행실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신앙의 충성도에 따라 하나님이 사랑했다 안 하셨다 하는 것 같은 것은 인간의 차원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랑이 다 불완전하잖아요?

가장 온전하게 여겨지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죄로 인해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추측하고 이해하기가 사실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식을 내 주는 그런 사랑은 본 적이 없잖아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모태에서 사랑하기로 선택하셨고, 자라면서 보여진 수많은 죄와 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바뀌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쟤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포기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따라 오셔서 예수님의 속죄의 사랑을 부어주신 것이잖아요?

그렇기에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거기에 걸맞는 새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내 신분이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내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목욕했기 때문에 깨끗하고 신분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죠.

목욕하고 다시 더러운 옷을 주워 입을 라면 싫잖아요?

우리의 이런 정체성을 잘 아셨다면 이제 적극적으로 새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3. 그럼 우리가 덧입어야 할 옷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 입으리고 하셨죠?

이 단어의 의미들은 대강 알고 계실 것입니다.

먼저 곤궁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공감하는 긍휼의 옷입니다.

마음이 차가워지고 남의 아픔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진다면 긍휼한 마음을 갖도록 나를 타일러야 합니다.

사람이 자꾸 거슬리고 허물이 보이고 내 기준으로 비판하기 시작한다면 자비의 옷을 점검해야 합니다.

어느새 남보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우월감과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 자라고 있다면 겸손의 옷을 다시 챙겨 입어야 합니다.

온유는 어떤 감정과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있는 신앙의 모습을 말합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마음에 걸리고 상처를 잘 받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있다면 온유의 옷을 입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장기인 오래참음의 옷입니다.

조급함은 죄인들의 본성이고 말세의 특징적인 정서입니다.

오래참지 못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내로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도 견디고 오래 참는 사람이 좋은 열매들을 거두잖아요?
특히 영혼을 구원하는 일엔 오래참음이 필수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우리 자신의 구원에도 모든 시련을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옷을 늘 챙겨 입는 거룩하고 사랑받은 성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사람들 상호간의 지켜야 할 황금률을 권고합니다.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든 곳, 집이든, 회사든, 교회든 반드시 불만이 생깁니다.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라는 것은 그것이 일방적으로 한 쪽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나쁜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수고한 것에 대해 서로 인정받고 되돌려 받기도 해야 합니다.

상대의 노고를 감사해야 하고 나도 수고를 해줘야 합니다.

수고를 당연히 여길 때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도 성도 간에도 그 수고를 피차 알아 주고 서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족과 이웃과 성도 간에 용서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잖아요?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 많은 죄들을 용서하시고 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매일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고 죄를 짓고 있습니까?

그러고도 우리는 한마디 고백과 예수님의 속죄로 매일 또 용서받잖아요?
그러니 서로간의 잘못은 피차 용납하고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의 띠를 매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쉽게 들어오지 않으면 바울사도 당시의 의복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때는 옷을 갖춰 입고 나서 마지막에 띠를 두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겉옷이 너풀거려서 속옷이 다 드러나고 맵시도 없고 활동하기도 불편하죠.

우리가 옷 잘 차려 입고 바지에 지퍼 안 올리고 앞 단추를 안 잠근 거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이 모든 옷을 갖추고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패션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땅의 삶의 행복은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사람을 제일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는 다 사랑이 부족하고 남을 사랑하기보다 비판하고 무시하고 미워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제일 먼저 사랑이 나오는 것은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맞는 사랑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늘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랑의 띠를 주셨다 해도 저절로 묶여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묶어야 합니다.

사랑도 결국 내가 하는 것입니다.

이걸 훈련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힘든 사람들을 붙여 주십니다.

교회 안에도 피차 사랑을 훈련해야 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고 가족도 어떤 의미에선 그렇습니다.

훈련이 안된 것은 실력이 아닙니다.

저절로 사랑스러운 사람들만 있다면 그건 실력이 안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배려로 힘든 사람을 만나서 피차 용납하고 사랑하며 새사람의 복된 옷을 점점 입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많이 달라지고 계시잖아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봉사를 많이 하고 경건훈련을 잘 해나가도 이 새사람의 옷을 입지 못하면 예수님을 잘 따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새사람의 옷을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옷입으라고 표현합니다.

결국 새사람의 옷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옷 입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인도해 가십니다.

어떤 옷인지 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그리고 서로를 대할 때 불만이 생긴다고 했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

예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처럼.

그리고 이 모든 새 옷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상대이든 우리가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힘써 사랑하면 복은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경제성장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보도에 왜 이렇게 살기가 어려워지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서로가 어려울 때는 상대에 대한 배려도 힘들고 마음도 조급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평강을 누리며 내 삶을 침착하게 유지하고 이웃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더욱 오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며 모두가 아름다운 성도의 인격으로 옷 입어 가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