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골로새서1장9절-14절 (그러므로 감사하라)

남수연 2016. 11. 23. 18:21

 

올 한해도 벌써 짧은 저녁볕처럼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에게 모든 은택을 아끼지 않고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농부들은 땀 흘려 키운 곡식을 추수해서 곳간에 들일 때 결실의 뿌듯함을 맛보겠지만 도시 생활에서는 그런 맛이 없죠.

게다가 한해를 부지런히 달려왔지만 뭔가 손에 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올해 같은 경제불황 속에서는 빚이나 늘지 않았다면 그나마 선방한 것이죠.

그러나 한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돈을 많이 번 것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히 차고 넘쳤다고 믿습니다.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건강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공감하실 분들도 많으십니다.

또 가족들이 큰 탈 없이, 큰 우환 없이 산 것만 해도 일 년 간 하나님을 잘 섬긴 성도님들께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만큼 사는 것만도 충분히 감사한 일입니다.

대개 감사절에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입니다.

오늘은 바울사도의 편지를 통해 우리가 감사를 잊기 쉬운, 그러나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장 큰 축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축복이야말로 현실세계까지 더욱 복되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울사도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전도해서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사도와는 사실 상관이 없는 교회죠.

말로만 교회 얘기를 들었지 이 성도들의 얼굴을 본 적도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골로새교회의 사역자인 에바브라의 방문을 받고 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든든히 세워져간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섬기고 따른다는 소식은 참 흐뭇하고 기쁘죠.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9절을 보면 한번도 본적 없는 골로새 성도들을 향한 바울사도의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바울의 성격으로 볼 때 이건 빈 말이 아닙니다.

나하고 전혀 상관없던 사람에 대해서조차 설명할 수 없는 유대감과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은 참된 성도들 간의 독특한 유기체적인 특징입니다.

정말 한 몸이라는 소리죠.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서로 희생하고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올해 다른 누군가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성도들을 믿음 안에 세워주기 위해서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큰 위로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바울사도는 왜 자기도 갇혀있는 곤고한 상황에서, 냉기가 올라오는 감옥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그치지 않고 기도했겠습니까?

기도 하는 분들은 기도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인내심과 노동력이 필요한지를 압니다.

바울사도는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신다는 것을 알기에 옥중에서도 기도를 그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도도 사역이고 기도도 사역입니다.

가정과 자녀와 직장이 축복 속에 세워지길 원하신다면 꼭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부터 12절까지가 바울의 기도내용입니다.

그런데 기도내용이 좀 낯설고 심오하죠?

우리가 흔히 기도하는 내용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건강문제라거나 사업의 성공이나 좋은 배우자나 진로문제 같은 내용들이 없어 좀 당황스럽습니다.

기왕이면 우리가 원하는 이런 복을 마음껏 빌어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바울이 인간들이 그런 기도 좋아하는지 몰라서 안했겠습니까?

최순실집사님댁의 기도제목도 딱 그거잖습니까?

가족이 다 건강하고, 정유라, 승마대회에서 좋은 성적 주시고 가족이 축복받게 해주세요.

최순득집사님 기도제목은 꼭 각자 기도에 응답해주세요더군요.

우리가 이러려고 예수님 믿은 게 아닌데언론에까지 이런 교회의 치부가 드러나고 정말 자괴감이 듭니다.

요즘은 기복적인 기독교를 기복적인 세상사람들 마저 조롱합니다.

교회주보에 나온 감사제목들이 훤히 공개되고 보니 참 부끄럽더군요.

물론 누구든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바울의 기도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건강하고, 성공하려면 세상에 정해주신 법칙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공히 주신 자연의 법칙입니다.

좋은 대학 들어가려면 열심히 공부하면 되고, 안정 된 노후를 위해선 덜 쓰고 저축해야죠.

건강하려면 몸에 도움이 될 좋은 음식 먹고 운동해야 합니다.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면 탈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은데, 자세가 안 좋고, 근력 운동을 안하다보니 디스크 증세가 생겨서 요즘 물리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병원에서 팔십쯤 되 보이는 어르신을 한분 만났습니다.

평생 식당을 하셨다는 어르신은 오른쪽 팔이 구부러져 잘 펴지지가 않아서 치료를 받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딸이 전날 배추 팔십포기를 배달시켜 집에 있다고 울상을 지으시며 가서 배추를 절여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는 팔이 나을 수가 없죠.

부모님들 자식을 위해 늘 꾹 참고 희생만 하니 자식들은 어디가 얼마나 안좋은지도 잘 모릅니다.

몸도 적당히 아껴가며 써야 나중에 덜 고생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연법칙과 영적인 법칙을 따라 살면 세상에서는 순리대로 이뤄지는 것이지 굳이 더 받으려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 일상의 소원을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게 노력한 것을 잃지 않고 우리가 결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더 구하려고 계속 기도를 하다보면 신기하게 안달하던 마음이 오히려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가치에 치중하는 우리에게 제동을 거시는 것이죠.

정작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주시려는 가장 중요하고 복된 것은 그게 아니라 바로 오늘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했던 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읽었을 때, 이 기도제목들이 현실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기도제목들이야말로 가장 현재적이고 또 영구히 우리의 유익인 것들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스스로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믿음도 하나님 앞에 진실 되고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성령께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인도해주시지 않습니까?

대단히 신령해서 그런 게 아니라 본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하시는 일 중 하나이십니다.

바울사도의 기도내용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주신 것이고 골로새교인들을 위한 최고의 중보기도입니다.

이 기도대로 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기도 내용을 보면 이대로 된다는 것은 거의 신의 경지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원하는 것은 오늘 기도처럼 거의 신적인 상태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심 공원에서 인간이 먹다 버린 음식부스러기나 탐내는 비둘기처럼 그렇게 세상을 졸졸 따르며 살아가는 것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거창하게도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사도 역시 우리가 이 거룩하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신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가 닮아 신의 아들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넘치는 인자와 사랑, 불의에 대한 정의로우심, 거짓 없는 진실, 차별 없는 겸손.

어떤 대단한 권세가 아니라 이런 것이 바로 신의 형상입니다.

사람들이 돈이 없고 권력이 없어서 무시당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격 중에 무시할만한 부분이 있어서 대개는 무시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서로 더 무시하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점점 닮아가는 성도들은 가난하고, 남을 섬기는 낮은 자리에 있어도 결코 미천해지지 않습니다.

권력자의 자리에 앉는다 해도 오만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추구하고 누릴 것은 바로 바울이 기도하는 이런 삶입니다.

이런 대단하고 능력 있는 모습을 오늘날 성도들이 알지도 못하고 최순실집사의 기도제목만 읊조리며 산다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기도의 내용들을 좀 살펴보고 올해 물질적인 수확만 계산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적인 수확도 점검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이 뜻은 하나님께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꽉 채워지게 해주시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나를 가장 완전하고 행복한 존재로 살게 하는 가이드라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철저히 인식해서 뼛속까지 성도의 도리로 가득 채워진 삶을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창조 된 목적이기에 그렇게 사는 게 가장 복스러운 상태입니다.

들통에 물을 붓고 소금 한 자루를 녹여보십시오.

얼마나 녹이기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 소금가마를 배에 싣다 아차해서 바닷물에 빠트렸다면, 즉시 집어 올린다 해도 소금은 이미 간데없이 순식간에 바다에 녹아버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맹물이 아닌 짠물에서 더 잘 녹는지 이해가 안되시죠?

왜냐하면 거기서 왔기 때문에 닿기만 해도 즉시 거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때 고향처럼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도 살아가는 지혜가 되고, 올바른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쁜 세상에 남들처럼 분주히 살고 즉석에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내 안에 채워진 하나님의 뜻이 시기적절하게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배워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덧 우리의 눈은 점점 총명으로 빛나고 인생의 지혜자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에 대한 지식, 말씀을 받아들일수록 눈빛이 지혜로워진다는 것을 교회 안에서 보며 놀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통장에 몇 천 만원 돈이 들어온 것보다 올해 우리가 하나님께 깊이 감사해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2.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이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우는 것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원문의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이 막 끓어 올라 범사에 주님의 뜻을 행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올 한해 많은 후회와 자책의 순간이 있었다면 백발백중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행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심령이나 환경이나 다 선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현재의 쓰디쓴 고통의 열매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죄악과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 온 열매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관계적으로 알아가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적, 경험적으로 아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행동으로 살아낼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런 점에서 올 한 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지켜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해왔습니다.

그래서 작지만 우리 인격과 삶에서 선한 열매들이 맺혀지고 점점 하나님을 체험하고 알아가고 있음으로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3.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바울사도는 성도들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알 것에 대해 항상 강조합니다.

여기서 능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수완이나 능숙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경험해 갈수록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은 점점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를 능력있게 하십니다.

성도의 능력은 예수님처럼 사는 능력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나를 겸손히 낮출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가족조차도 이해하고 사랑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세속적인 일들을 끊고 예배드리러 나올 능력이 없었습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행할 능력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또 얼마나 세상과 사람과 악의 세력에 대해 강해졌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본래 자신감이 없고 두려워하고 불안하고 초조해하던 사람들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해서 늘 마음이 어둡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나 받고 감정에 질질 끌려 다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올해도 충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중에 점점 담력이 생기고 강한 능력의 자녀들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강한 능력은 우리를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참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올해 어떻게 위기의 순간들을 넘어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삶에는 견디고 참아야 할 일들이 계속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것을 견디고 참을 수 있게 하실 뿐 아니라 기쁨으로 이겨내게 하십니다.

올해 성도님들의 시련의 때를 곁에서 보아왔던 저는 정말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견디고 참음으로 이겨내는 성도님들의 모습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전히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건재하다는 것이 진정 우리의 감사의 제목일 뿐 아니라 두려움없이 내일을 맞이하는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무엇보다 우리가 가장 크게 감사할 이유를 댑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이가 들어가며 피부에 와 닿는 것은 모든 게 부족해진다는 것입니다.

건강도, 대인관계도, 시간도, 돈도, 외모도, 모든 게 점점 쪼그라들고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죽을 때는 아무 것도 못 챙기고 빈손으로 떠나는 것이죠.

그런데 혼자 가만히 생각할 때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은, 우리에게는 죽음 뒤에 상속받을 기업의 부분이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분명히 여기서 다 쓰고, 사라져 없고, 빈손으로 떠나는 데 다음 세상에 우리가 상속받을 놀라운 기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어서 천국에 갔더니 내 지분으로 예수님께서 따로 떼어 놓으신 땅과 집과 부활체의 완전한 몸과 풍성한 삶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밖에는 좋은 것을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보화와 보물이 이미 내 기업이 되어 있기에 이 땅에서 좀 양보도 할 수 있고, 남과 비교해서 불평하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짧은 이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복된 기업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더 갖고 누리려고 악착같아 지는 것이죠.

우리가 정말 추수감사절을 맞아 아버지께 크게 감사할 제목은 하늘에 우리가 영원히 누릴 기업을 상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우리가 본래 어떤 사람들이었고 어떻게 이런 영광을 얻었는지 바울사도는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예수님 안에서는 내세의 영원한 기업만 보이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오면 우리가 사는 현세가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활기차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세상이 실은 깜깜한 흑암의 권세 아래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본래 이 흑암의 권세에 인질로 잡혀있다 구출되었다는 것입니다.

흑암의 권역 안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면 과거 내가 있던 곳이 흑암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서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셔서 옮기셨고 그 아들 안에서 모든 죄를 속량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는 우리에게는 다 치러야 할 죄 값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인간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고 그냥 최선을 다해 자기를 수양하고, 업적을 이루고 살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그 지은 죄로 인한 죄값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고 진실을 얘기해 줍니다.

하지만 이 모든 죄의 속죄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모든 죄값을 청산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담긴 이런 신비와 비밀은 영적인 눈이 닫힌 세상 사람들에겐 절대로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만 성령으로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놀라서 외치는 것입니다.

크도다, 이 비밀이여,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도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만 깨닫게 되는 비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이렇게 밝히 알겠습니까?

천국이 좋은 것을 어떻게 압니까?

거기가 그만큼 좋으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시려고 고난과 치욕과 아픔을 당하면서 죄를 대속하신 것이잖아요?

천국에는 악이 없고 고통이 없고 눈물이 없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어서 지극히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진짜 좋은 이유는 그곳에서 모든 피조물에 사랑과 복을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가장 완전하게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천국에 계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도 질리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사랑만 있어도 살만하고, 희락만 있어도 살만하고, 화평만 해도 살만하잖아요?

이런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점점 현실처럼 확신이 되기에 지금 세상에 있는 내가 점점 쇠락해간다 해도 허망하고 쓸쓸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후패하나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로워 육신의 소멸되는 부분들을 넉넉히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아래층 식당의 직원을 앞에서 만났는데 아침부터 그 얼굴이 울적했습니다.

그날 수능 날이었는데, 암으로 죽은 조카의 사십구제가 있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은 다 수능치러 갔는데 죽은 조카 생각이 나고 너무 쓸쓸하다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천국을 모르고 내세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낙엽이 뒹구는 가을날이면 쓸쓸해서 그 속에 찬바람이 지나갑니다.

앞 서 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기에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천국을 확신하고 그곳에 아름다운 기업을 준비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으며 감사할 제목들을 찾으셨습니까?

바울의 신령한 기도제목들이 우리에게서 조금씩, 작년보다 올해 조금 더 이루어지고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셨습니까?

우리의 의식주를 돌봐주시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추수감사절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누리는 이 큰 복을 인해 감사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신적인 존귀함과 능력과 성품을 갖고 천국을 이미 누리며 살고 있고 천국에 상속받을 기업이 정해져 있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해 아들을 주신 하나님과 고귀한 피를 흘려 속죄해 주신 예수님과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행할 능력을 주시는 성령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2016년11월20일 추수감사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