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자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무엇인지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가정생활의 만족도’가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 1위로 나타났습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 10위 안에는 가정생활과 관련 된 항목이 다섯가지나 들어갔습니다.
직장문제는 단 한 가지 항목이 10위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세대의 결혼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고통이 더 많은 결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 선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죠.
제주도의 경우 미혼 여성의 절반이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일단 결혼하라’고 충고합니다.
결혼이 주는 이점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싱글’에 비해 대체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가정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지정해 주신 놀라운 조직입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은 성경을 통해 바른 결혼관을 잘 정립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생애를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가정에 부족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고 개선하는 큰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선 부부간에 주어진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수많은 여성들의 공분을 살만한 위험천만한 명령입니다.
교회 안이기에 망정이지 여성운동가들이 들으면 분노의 피켓을 들어 올릴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받는 남편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속으로 실소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해석하기에 앞서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직장생활에서의 관계들에 대한 오늘 말씀은 이 관계들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내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게 아닙니다.
남편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도 아닙니다.
60세를 앞 둔 베이비부머 세대 중 절반이 현재 결혼생활이 심각한 위기나 또는 해체 될 상황에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만큼 현재 결혼생활이 고통스럽다는 것이죠.
가정이 불행한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불행한 가정을 들여다보면 분명히 오늘 말씀하신 행복한 결혼생활의 원리가 빠져 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오늘 말씀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불신 가정이라도 절대 깨지고 망가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이 약간 불편할지 몰라도 역시 우리의 행복을 위한 매뉴얼이라는 것을 알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아내들에게 명령하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문제입니다.
사실 바울사도가 이 편지를 로마의 도시 골로새의 교회에 보낼 당시는 여성들의 인권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여겨지던 때입니다.
‘배가 고프면 남편은 아내를 먹어도 된다.’
이런 법, 들어보셨습니까?
어느 무인도 식인종 부족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지난 달 9일 외신들은 사우디아라비아 현지 매체들을 인용해서 이런 보도 문을 냈습니다.
‘사우디 내에서 극단적으로 배가 고픈 남성이 아내를 잡아먹어도 된다는 내용의 이슬람 율법이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게 지금도 일부 여성들이 받고 있는 인권의 현주소입니다.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인간 대접을 받은 게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시 여자들은 이미 남편들에게 복종할 수 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가 굳이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하는 게 필요했을까요?
이 명령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시대와 문화와 신체적인 연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해 놓으신 원리로 주는 것입니다.
그게 주 안에서 마땅하다는 것은 주님이 그렇게 지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 아내들에게 주신 말씀인지를 납득하려면 창세기 3장16절과 관련해서 보아야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선악과를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으로 도전했던 아담과 하와가 죄책에 대한 벌로 영적인 죽음과 함께 창조 상태와 다른 몇 가지 원칙을 부여 받습니다.
육체의 죽음과 남자들의 과도한 노동의 수고와 여자들의 해산의 고통이 가중되는 것,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의 변화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도와주는 배필로 창조되었지만 범죄 후 달라진 양상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부여한 원칙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부 관계 속에는 이 원칙이 실제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여성에게 불리한 이런 원리를 부부관계 속에 이식시키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땀흘려 노동해서 힘들게 먹고사는 법칙을 주시고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과 남편과의 갈등의 소지를 법규로 이식해 놓으신 것은 죄에 대한 책벌만은 아닙니다.
죄에 대한 가장 처참한 형벌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 이상 인간에게 비참한 형벌은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육체의 죽음이나 노동의 고통이나 해산의 고통, 이런 것들을 더 부과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형수에게 따귀 한대 더 때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입니다.
범죄 후에 추가 된 인간관계의 법칙은 책벌이 아니라 죄성을 통제할 수 있는 백신 프로그램 같은 것과 유사합니다.
인간들의 죄성으로 인생이 최악의 막장으로 치달아 파멸하는 것을 통제시키는 시스템인 것이죠.
결혼관계를 통한 가정의 존치는 땅에서의 행복 뿐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죄의 결과로 가정의 본질이 완전히 파괴되게 되었다는 것은 선악과 범죄 이후 아담과 하와, 하나님과 삼자대면하는 장면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앞으로 가정은 결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행복을 누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법칙을 범죄 이후에 다시 이식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아내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생명의 애틋함을 갖고 자식을 양육하게 됩니다.
또 남편을 사모하기에 가정을 탈출하지 못하는 제동장치를 만들어 놓으신 것이죠.
우리 부모님 세대를 생각해 보면 어머니들이 가난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 자녀들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여자에게만 불리해 보이는 장치를 해 놓으신 게 아닙니다.
남자들에게는 평생 고되게 일하고 땀 흘려 가정을 먹여 살리고 다스리는 기능을 추가해 놓으셨습니다.
다스리고자 하는 욕구를 위해 가장의 짐을 스스로 지는 것이죠.
그렇지 않은 가장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데 가장의 의무를 무겁게 지고 허덕이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은퇴 후에도 자기 경력과 비교가 안 되는 초라한 일에 가족을 위해 또 뛰어들지 않습니까?
혼자만 먹고 살려면 그 정도 고생은 안해도 됩니다.
그런 본능적인 조항을 하나님이 이식해 놓지 않으셨다면 남편들은 애 낳아놓고 다 나가 돌아다닐 것이고, 아내들 역시 맘에 드는 상대를 찾아 언제든지 뛰쳐 나갔을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이 원칙에 관련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양심의 좌소에 새롭게 이식하신 이 원칙을 남편과 아내가 잘 지키기만 하면 최소한 가정은 세상에서 안식처고 행복을 맛 볼 유일한 보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죄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법칙과 죄성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관계가 일어납니다.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는 기능을 넣어 놓으셨는데, 아내들이 다스림을 받으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편을 불행하게 합니다.
아내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따라주지 않을 때 남편들은 좌절하고 분노합니다.
남편의 상태가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때가 언제겠습니까?
아내들이 다스리고자 하는 남편의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게 순종해 주고 인정해 줄 때 남편의 마음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이죠.
그래서 오늘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다시 이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부관계가 늘 일방적인 복종이 필요하겠습니까?
가정 문제는 서로가 잘 협의하고 좋은 쪽으로 결정하게 되지만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랍니다.
아내를 위해서 남편에게도 명령하십니다.
19절에 보면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사모하도록 조정되었는데, 남편이 거기에 충족되게 사랑을 주지 않아서 아내들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가정을 깨기도 하고, 죽지 못해서 산다고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문제도, 성격차이도 아닙니다.
여자가 원하는 만큼 남편이 완전한 사랑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내들이 원하는 사랑은 월급이나 좀 갖다주고, 아이들 아빠가 되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사도가 이런 방식으로 명령합니다.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목숨을 바친 것 처럼 사랑해라.
이게 아내들이 원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주면 아내들도 남편에게 군말 없이 복종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골수에 희귀병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병간호 하면서 후회스럽던 일이 자꾸 생각난다고 말하더군요.
아내가 끼니때마다 밥을 퍼 놓고 뜨거울 때 먹으라고 그렇게 말해도 자기는 하던 일을 마저 다하고 식은 밥을 먹곤 했다는 거예요.
뜨거운 밥이 맛있기 때문에 그렇게 성화를 받쳤는데 그걸 한 번도 안 들어줘서 아내가 속이 터져서 병이 생긴 것 같단 생각에 자꾸 후회가 된다고 말씀하더군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음 다치지 않게 잘 이해해 주고, 몸이 약한 아내들 힘들지 않게 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가사 분담이 가정생활의 만족감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은 뒤엔 특히 가사분담이 이뤄지지 않으면 행복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매정하고 몰인정한 남편을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같은 말씀을 하면 남자나 여자나 둘 다 난색을 표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죄성이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정해놓으신 법칙을 따르려고 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내 고집과 죄성에 따른 판단대로 오늘 아내와 남편에게 주신 명령을 거부하면 가정의 기능은 역기능이 되고 맙니다.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결혼이 부부와 자식들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게 공격하는 역기능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싫어도 이 말씀대로 지켜야 합니다.
싫다는 본성에 집중하지 말고, 해야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더 바라보십시오.
‘저 인간에게 절대로 그런 대접을 해줄 수 없다 ’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노력할 때 주시는 복된 가정, 나와 내 자식들이 행복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그런 가정의 축복에 집중하고 말씀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내게 돌아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남편은 보란 듯이 아내에게 모질게 굴고 들들 볶고 괴롭힙니다.
아내를 무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복종은커녕 대들고 비웃는 아내의 얼굴을 매일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세상사람과 달리 명령을 순종하고 복된 가정을 세울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런 마음으로 순종할 때 여러모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부부가 때론 원수 같지만 뒤돌아 누운 모습을 보면 측은하기도 하고, 밖에서 만난 남편의 초라한 모습과 처진 어깨를 보면 속이 상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부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와 함께 기업을 나눌 동업자입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들 결혼 잘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가족 중 불신자가 있으면 서로 지켜야 될 부분이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지켜지게 됩니다.
같이 노력해도 어려운 게 부부생활입니다.
반드시 믿음 안에서 배우자를 만나 믿음의 자손들을 키워내길 미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입니다.
먼저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눈물겨운 희생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죄인인 자식들에겐 오히려 부모를 경시할 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불순종은 죄인들의 타고난 속성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로마서 1장에 사형에 해당할 중죄 중에 부모를 거역하는 자가 들어갑니다.
신명기21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식은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악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부모를 더욱 거역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식들의 순종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키워져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자신의 고집과 죄성을 억제하고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미숙한 아이들의 인격에 너무 많은 선택권을 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어릴 때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로 키우지 않으면 그 자식은 장차 부모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잠언 29장 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식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식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십니다.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교육하셔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일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진심어린 사랑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성장한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기 몸이 죽어가도 자식의 반찬걱정을 하는 분들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 때 암으로 입맛이 떨어진 어머니가 종종 고기를 사다 장조림을 좀 해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보니 당신이 드실게 아니라 저 먹으라고 그런 것이더군요.
우리 부모님 마음이 다 똑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자식들이 순종할 때 부모마음이 가장 기쁘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자녀 된 모든 성도님들 오늘 말씀대로 잘 따라 특히 노부모님들 여생을 잘 돌봐드시길 부탁드립니다.
부모들에게 주시는 명령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담자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들을 상담하다보니 공통점을 하나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다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무한정 희생하고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얘기죠.
부모들의 자식사랑인들 어찌 죄성에 오염되지 않았겠습니까?
부모들의 마음이 병들었다면 자식들을 제대로 양육하고 돌볼 수가 없는 것이죠.
최근 TV에 공개되었던 충격적인 보도들이 있었습니다.
자녀가 쓰레기 더미에 방치되어 살고 있는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습니다.
방마다 쌓아 놓은 쓰레기를 끄집어 내봤더니 3톤이 나왔더군요.
ADHD증후군을 겪는 아이들의 원인은 불안한 감정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원인이 엄마의 불안 때문이라고 합니다.
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우종민 교수의 감정전염에 대한 연구에 보면 사람의 감정은 전염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즐겁고 따뜻한 감정보다 미워하고 화를 내는 분노의 감정은 전염속도가 15배가 빠르다고 합니다.
부모가 불안해서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이 그걸 정서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어린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염되어지는 것이죠.
부모들은 자녀들을 키울 때, 부모의 자식 사랑이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내 자식 위해서 그렇게 한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죄성이 섞인 부모의 사랑은 결코 완전한 게 아닙니다.
자식의 장래에 대한 걱정은 지나친 간섭과 즉흥적이고 과도한 훈육을 할 수 있습니다.
대개 부모의 잔소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것이 저러다 뭐가 되려고, 나중에 밥이나 먹고 살려나.
이런 마음 때문에 때로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독한 말도 부모이기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불안과 걱정과 자기 감정이 뒤섞인 꾸지람이기에 자녀의 마음을 낙담시킨다는 것입니다.
과거 부모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우리의 약점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부모 눈에는 그게 다 보이고 아이의 삶에 큰 문제가 될 것이 보입니다.
그러니 그런 행동을 할 때 마다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죠.
아이들이 자기 성격의 문제와 결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가 그것을 발견하고 바르게 지도해야 맞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도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문제로 번번이 야단을 맞다 보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자아상이 생기고 낙심하게 되고, 나중엔 그런 자기를 합리화시키며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교육이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간추려서 딱 한마디 합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해서 낙심시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발생하는 이런 문제들에서 스스로 편안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갈등은 계속됩니다.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부모가 자신의 무능함과 자녀들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문제를 놓고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식들은 부모의 지도에 대해 반항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자식들도 철이 들면서 자기 문제를 자기가 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부모가 해결방법이 없이 지탄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위해 뭔가 도움될 것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이들 마음도 편해지는 것이죠.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을 바르게 양육하기엔 턱도 없이 모자란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자녀들을 키울지 다시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기준은 항상 주의 말씀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아이로 키운다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칭찬받고 귀히 여김을 받는 인재로 자랄 것을 확신합니다.
또 기도로 하나님께 자식들의 문제를 말씀드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지혜로 우리 자녀들을 잘 키우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결론으로 우리가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꼭 기억하고 지켜야 할 것은, 이 모든 일을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과 환경을 우리에게 주신 그 위의 예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악하고, 진심이 통하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환경을 허락하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가정과 직장을 주장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2015년5월3일 주일설교 남수연
'골로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로새서3장18절-21절 (다시 세워지는 가정) (0) | 2019.05.06 |
---|---|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3장12절-14절) (0) | 2019.04.30 |
신년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골로새서2장6절-7절) (0) | 2018.01.12 |
골로새서1장9절-14절 (그러므로 감사하라) (0) | 2016.11.23 |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3장1절-11절) (0) | 2013.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