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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영상
가정의 달에 행복한 가정을 위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또 하나의 가정이라고 볼 수 있는 직장, 일터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집보다 일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일터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뒤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명령대로 하면 일터가 행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꼭 직장생활을 하는 분께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가장 복된 교훈이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행복하냐 불행하냐의 요인은 사람관계에서 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사람관계가 어떠냐에 따라 사는 내용과 질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이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시는 것이죠.
오늘 말씀의 힘으로 성도님들의 직장과 가정과 학교생활이 더 활기차고 행복해 지시길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일차적으로 종과 상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시대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골로새교회 안에는 일반인 뿐 아니라 노예 신분의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빌레몬서의 주인공인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골로새 교인이었습니다.
둘이 상전과 종의 관계였죠.
사람을 노예로 삼고 부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증거입니다.
역사 이래 세상엔 어느 나라건 노예제도가 있었잖아요?
우리나라도 조선시대까지 양반들이 집집마다 노비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노비 세 명으로 말 한필을 살 수 있었다니 노비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사람을 평등하게 만드셨지만 사람은 노예제도라는 불평등 면허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람 본성에 남을 종 부리듯 하고 싶은 이 마음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서구에서 노예제도가 사라진 것은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렸겠습니까?우리나라도 서양과 비슷한 때 동학혁명으로 시작해 갑오개혁을 거쳐 노비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노예제도가 법적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악한 본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직장 내 갑질 문제, 가정폭력, 대기업과 하청업체들의 불공정 계약, 강대국들의 경제 침탈.
이런 형태로 노예제도의 망령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여러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의 성도들에게도 오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인의 발을 닦아 주고 매를 맞으며 비참한 삶을 살던 노예성도들에게 성경은 어떤 말씀을 주실까요?
대체 무슨 말을 이들에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읽은 대로라면 일단 노예의 삶에 순응하라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이 말씀이야말로 사람이 만든 최악의 제도, 최악의 관계 안에서도 성도들의 일터와 삶이 복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그 방법의 핵심은 23절에 있습니다.
1.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만큼 힘든 명령이죠.
신자들은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대인관계의 방식이 정해집니다.
신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내 맘대로 살아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웠는데 아직도 내 맘대로 살아야겠습니까?
지난 주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간에도 사랑의 새 계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직장관계에서 주시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더 확장하자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김연자집사님이 식당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올 때 예수님이 들어오신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까다롭게 구는 직장 상사를 볼 때 저 분이 예수님이다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도 똑같습니다.
그렇기에 신자들의 직장생활은 눈가림만 하면 안됩니다.
22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고 눈가림을 합니다.
직장인들도 크던 작던 자기 이익을 위해 눈속임을 합니다.
상인들은 돈을 좀 더 벌려고 겉과 속이 다른 상품을 만들죠.
과일을 박스 채 사보면 십중팔구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게 크기와 품질이 다르잖아요?
명절 때 큰 맘 먹고 LA갈비 사시죠?
겉보기엔 괜찮았는데 집에 와서 풀어 보면 밑에 있는 고기는 거의 기름투성이에 맨 뼈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일 뉴스에 이렇게 눈속임으로 돈 벌었다 발각된 사람들 얘기가 나오잖아요?일터에서든 사람관계에서든 이런 눈속임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 앞에서만 잘 하는 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하고 모든 일을 할 때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그렇기에 겉은 다 똑같이 하는 것 같이 보일지 몰라도 내용이 다르고 질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그 상황을 다 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의식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성실히 하는 데 어떻게 사람 눈 앞에서만 잘하는 사람과 같겠습니가?누구를 감쪽같이 속였다 해도 결국 하나님은 모든 걸 보고 계십니다.
남을 좀 속여서 칭찬받고, 돈을 좀 더 벌면 뭐하겠습니까?우리는 모든 평가를 하나님께 받을 거잖아요?
2. 우리가 그렇게 사람에게 주께 하듯 살아야 할 이유를 24절에서 밝힙니다.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모든 사람을 주님 섬기듯 하고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믿고 정직하게 살면 항상 손해 볼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1) 먼저 24절 말씀 안에는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께 다 보고되고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상을 주시려면 당연히 모든 상황을 낱낱이 보고 계시야 되는 것이잖아요?
그것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안정감과 힘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만든 세상제도는 모두가 똑같이 행복하자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억울한 쪽이 생깁니다.
똑같은 시간 일해도 누군가는 많이 벌고 누군가는 끼니도 잇기 어려울 만큼 적게 법니다.
처음부터 태어난 집안이 달라서 아예 시작부터 불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억울한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또 더 심하면 무언가에 종처럼 속박당할 때가 있습니다.
가난에 빠지면 돈에 속박됩니다.
돈 때문에 내 맘대로 살지 못하고 빚을 지면 채권자의 종 같은 심정이 되죠.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잘못만나 폭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서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정신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이죠.
때로는 먹고 살기 위해 다닐 수 밖에 없는 일터가 종살이처럼 비참하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 빠졌을 때 성경은 한편 힘써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잠언에 보면 이렇게 곤궁에 빠진 사람에게 권합니다.
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보증 잘못 섰다가 망한 사람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어쩌다 가난에 빠지고 사업이 망하게 되었다고 해도 부지런히 모든 방법을 다 써서 그 환경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안 되는 때도 있잖아요?
내 맘대로 할 수 없이 사방으로 우겨싸인 환경에 있다면 얼마나 무섭고 절망적입니까?
벗어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극단적인 선택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상 주시기 위해서요.
현재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불가능한 환경이나 악의 세력에 꼼짝 못하게 묶인 것 같지만 그 실마리를 하나님께서 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살짝 잡아 당기시면 언제든 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묶어 놓으신 이유가 있는 것이죠.
지금의 상황이 나를 사랑하시고 반드시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앞에 놓여 있음을 알고, 다만 주님을 섬기듯이 모든 일에 꿋꿋이 성실하라는 것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고 남의 밑에서 일할 때 굴욕감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감정적으로 무너지면 안됩니다.
이런 경우야 말로 내 인격을 훈련하시고 죄의 때를 벗겨내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분명히 들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환경에 나를 두신 하나님의 뜻을 믿고 예수님을 섬기듯 사람을 섬긴다면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는 것이고 우리의 상전은 예수님 밖에 없잖아요?
두렵고 어려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 말씀을 따른다면 하나님은 마음의 위로와 평안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내 처지가 서글픈 게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과제를 잘 풀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삶을 이겨나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그런 믿음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성실히 섬기면 상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돈이 사람 손에서 나오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경험해서 알잖아요?돈도 하나님 승인이 있어야 나옵니다.
변덕스러운 사람을 바라고 열심히 일해 줬다간 반드시 배신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자연인은 그렇게 배신당하고 사람에게 실망해서 아예 산으로 들어가 버렸더군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에 비할 때 몇 푼 이익이 대단치 않잖아요?
그런 걸 소탐대실이라고 합니다.
모든 결과에 대한 상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내 할 일을 성실히 하되 사람의 눈치를 보며 아부할 일도 없습니다.
대충 눈가림으로 일하는 건 더욱 있을 수 없는 것이죠.
우리가 상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성실히 살면 필요할 때 마다 하나나님의 손에서 끊임없이 제공되는 풍성한 공급을 체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3) 또 모든 사람에게 주께 하듯 함으로 우리의 가장 큰 삶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잖아요?결국 성도들의 착한 행실이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음의 문이 열립니다.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에게 성실함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선하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사람들이 기독교를 우습게 아는 이유가 말하는 대로 살지 않아서 그런 것이잖아요?
성도들이 성경대로만 산다면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 하나만 성경대로 살아도 우리 주변이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지난 백상예술대상에서 김혜자씨가 연기부분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그날 수상소감이 지난 주 화제가 되었었죠.
외웠는데 자꾸 잊어버린다고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나왔던 대본을 찢어 가지고 읽으시더군요.
대본의 처음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낮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감동했던 이 말 이전에 김혜자씨가 성경구절로 소감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시편 18편 말씀이죠.
보통 수상소감 때 하나님을 언급하면 반응이 안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자씨의 수상소감에 감동했던 이유는 대사도 좋았지만 선행으로 잘 알려진 김혜자씨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수미씨의 말에 의하면 김혜자씨가 젊어서도 쉬는 날이면 쌀가마를 지고 고아원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지금도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아프리카 백명의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다고 하죠.
남대문교회 권사인 김혜자씨는 믿음대로 살려했기에 그의 믿음에 누구도 태클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으로 섬길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성도들의 직장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생계를 위해서만 일을 한다면 직장도 시간도 힘도 그저 소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현재 일터와 지금의 자리에 나를 두시고 주님을 섬기듯 섬겨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종이 되어 우리를 섬겨주셔서 우리가 그 사랑을 알았잖아요?우리가 섬기는 사람들도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오늘 말씀대로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리고 그래야 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25절,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불의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신자들의 악은 무마하시고, 비신자들의 악은 심판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심판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 역시 선을 행치 않고 불의를 행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삶에서는 보응을 받습니다.
나쁜 걸 심고 어떻게 좋은 게 열리길 기대하겠어요?
또 불쌍한 종이기에 너그럽게 봐주시고 많은 것을 가진 상전이라고 더 깐깐하게 평가하지도 않으십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모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하나님께 중요치 않고 영생에 빗대어 볼 때 잠깐 땅의 삶의 수준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부자 역할을 맞고 싶은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문제 될게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걱정하시는 것은 부자 쪽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도 인정하고 부자도 인정하십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부를 이루었거나 부모에게 물려받은 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각자의 불의한 행동을 심판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4장1절에서 엄중하게 말씀합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상전들, 관리자들, 부자들이 현재 지위에서 마땅히 의와 공평으로 사람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셔서 누리게 하고 관리하게 하시는 하늘의 상전이 계심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것을 잊고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남을 차별하면 그 죄에 따른 보응을 하신다는 것이죠.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아도 사람 본성이 원래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며 살잖아요?
내가 상대보다 더 좋은 조건들을 가졌을 때 사람들은 은연중에 상대를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하늘에 계신 상전인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보신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남들을 대하듯이 그렇게 똑같이 나를 대하신다면 그것만큼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잖아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하나님께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없다면 우리 삶은 분명히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것입니다.
김혜자씨가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존경한다는 말은 잘하면서 왜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말은 꺼리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하나님이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를 돌봐주지 않으셨다면 정말 어쩔 뻔 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러신 것처럼 의와 공평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저도 지난 주 이 말씀을 준비하며 새롭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기도하는 성도들, 가족들, 모두를 예수님을 대하듯 하려했더니 의외로 마음이 훨씬 더 안정되고 편했습니다.
사람 때문에 속 끓일 필요가 별로 없더군요.
나는 저 사람을 대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 감정 상할 일도 없는 것이잖아요?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기쁘게 여기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잖아요?
일터에서 그렇게 일한다면 무시당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사람들도 귀신같이 알고 그런 나와 같이 일하고 싶어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미국 시애틀 교민사회에 몇 년 전 있었던 일입니다.
한 여집사님이 시내의 한 오래 된 건물에서 작은 커피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이 아주 멋있게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자 스타벅스가 건물을 임대하겠다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스타벅스가 하나 들어오면 건물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커지죠.
건물주는 당연히 집사님을 내보내고 스타벅스와 임대계약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인 건물 매니저가 이 집사님의 카페는 절대로 빼서는 안된다며 자기 직책을 걸고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그 건물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참 예삿일이 아니죠.
그런데 스타벅스는 포기하지 않고 3층에 매장을 열었습니다.
어차피 1년 안에 집사님 카페가 손들고 나가면 내려 올 심산이었겠죠.
그래서 이름 없는 작은 커피점과 스타벅스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고 2년여 만에 스타벅스가 손을 들고 매장을 철수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스타벅스를 찾지 않고 영어도 잘 못하는 동양 여성의 커피점을 이용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집사님은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예수님이 들어 오신다’ 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한결같이 가장 반가운 얼굴로, 가장 좋은 커피를, 가장 공손하게 내 놓았던 것이죠.
우리가 고객을 상대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누군가를 만날 때 이렇게 대한다면 하나님이 상을 주시기 이전에 사람들이 먼저 보답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신 명령은 다른 누구를 위해서 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축복하기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가정의 달, 또 하나의 가정인 우리의 일터에도 이런 아름답고 복된 일들이 매일 일어나길 축복드립니다.
주신 말씀대로 힘써 바꾸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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