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FMrAIhfekrM
<주일설교 영상>
요즘 우리 성도님들 기도생활은 잘 하고 계신가요?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꾸준히 기도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틈틈이 기도에 대한 격려를 받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기도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오늘은 골로새서에서 기도를 배우려고 합니다.
말씀 중에 은혜를 주시고 다시 복된 기도의 자리로 나가는 모두가 되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기도는 쉬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를 계속하라는 말은 원래 의미로는 아주 끈질기게 기도에 전념하라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죠.
그런데 쉬지 않고 기도할 수가 있나요?
사람이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쉼쉬기일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는 말을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숨쉬기이기에 계속해서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갓난 아이들이 태어나면 자력으로 숨을 쉬기 시작하죠.
죽기 전까진 숨쉬기를 멈추면 안됩니다.
성도들이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영이 새롭게 태어났다는 징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고, 기도가 안 나온다면 아직 영이 태어나지 않아서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해야 하는 데’ 말을 하면서 뒤로 미루다 못하는 경우와는 좀 다릅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비교해 보면 제자들에게 일어난 확실한 변화가 하나 눈에 띕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기도했다는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개 혼자 기도하러 다니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동반해서 기도하러 가실 때가 간혹 있었죠.
한번은 예수님의 용모가 빛나게 변화되었던 일명 변화산에서였고, 한번은 겟세마네동산에서 입니다.
그런데 두 사건에서 공통점은 제자들이 기도를 못하고 다 졸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처지와 같아서 굉장히 위안이 되죠?
이상하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훈련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죽하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먼저 기도 좀 가르쳐주십사 요청을 했겠어요?
그때 가르쳐 주신 게 주기도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훈련은 시키지 않으셨던 것이죠.
그랬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사도행전에선 갑자기 맹렬히 기도하는 사람들로 바뀌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오셔서 죽은 영을 살려 놓으시니 영이 다시 호흡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새신자들도 믿음이 생기면 기도하기 시작 합니다.
기도가 어느 정도 믿음의 척도가 되는 것이죠.
아직 십자가와 부활을 내 사건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성령이 오신 과정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기도가 힘든 게 당연합니다.
기도를 한다 해도 종교적인 염원의 수준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음에 확신이 오고, 영이 거듭나서 스스로 기도하기 까지는 절차와 긴 과정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제자들도 삼년 반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며 배우는 단계가 있었잖아요?
신자들에게도 다 그런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꾸준히 예배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교회생활을 통해 거듭남에 필요한 과정을 잘 거쳐 가야 합니다.
이 거듭남의 과정 안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도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듭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한번에 모든 죄를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간증하는 것처럼 살면서 지은 모든 죄가 영화필름처럼 한꺼번에 보여주셨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저도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한번에 죄를 깨닫는 줄 알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겐 도덕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다 있습니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잘 한다거나, 이성의 시험에 잘 빠지거나, 시기심이 많다거나, 이런 분명한 도덕적 죄를 한 두 가지 성령께서 꼬집어 보게 하심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깊숙한 곳에 도사리 있고, 폭넓게 자리 잡은 수많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속죄해 주셨는지를 알게 되죠.
구원의 과정들이 하나님의 신비에 속했다는 것을 목회를 하면서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교회나 한번 가볼까’ 이런 생각이 든 자체가 정말 기적입니다.
그렇게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기도 잘 하는 오래 된 신자들만 있으면 안됩니다.
새롭게 복음을 듣고 새생명으로 거듭나 가는 과정의 신자들도 많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도가 뭔지 잘 모르겠고,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잘 안되니 그냥 기도를 안 해도 되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청하고 구하라고 가르치신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구하라는 말씀이 분명하죠?
기도가 잘 안 돼도, 믿음이 부족해도, 이 말씀을 믿으시고 내 영이 거듭날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시길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반드시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아직 기도가 잘 되지 않는 분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전혀 듣지 않으시는 건 아닙니다.
일반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던 구약성경시대엔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사람들만 주로 기도했습니다.
모세나 사무엘, 다윗, 예레미야, 다니엘 이런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죠.
그런데 하나님은 모두에게 기도하라고 하셨고 응답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심지어 가인 같이 아벨을 죽인 자의 기도에도 하나님이 응답을 하셨습니다.
므낫세나 아합 같은 악한 왕의 회개와 기도에도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잖아요?
그렇기에 새신자들, 믿음에 아직 확신이 부족한 성도들도 당연히 모든 문제들을 기도하고 응답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우리 신앙선배들이 새신자 때는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고들 했었습니다.
그게 다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믿음이 없다고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 기도응답 받고 먹튀하는 게 문제일 뿐입니다.
오래 교회를 다녀 거듭난 성도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는 거듭난 새 생명을 키워갈 힘을 호흡해서 채우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질병 중에 호흡을 너무 얕게 해서 생기는 질병이 많다고 하죠.
깊이 공기를 들이마시는 호흡을 하지 않고 얕은 호흡을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원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규칙적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부요하고 풍성한 생명을 깊이 들이마시는 기도의 호흡을 해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거듭난 생명을 자라게 하고 힘을 줄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일어설 때 분명히 영은 강해지고 하나님의 선하고 좋은 것들로 심령이 가득 채워졌을 것입니다.
끈질긴 기도생활은 고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만큼 얻는 유익도 큽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안전함과 평안함은 세상 어디서도 구하지 못합니다.
또 기도 중에 죄의 본성을 다룰 힘을 얻습니다.
본성대로 살면 삼중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안이 깨지고 나 자신의 인격이 점점 나빠집니다.
결국 나 조차도 내가 싫어지고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가족과 이웃에도 조급해 지고 까다로워지니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죠.
저도 기도할 내용이 많다 보니 시작하기도 전에 부담스럽고 무거운 의무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즉각 마음을 바꿔 먹습니다.
‘너 기도하지 않으면 이 일을 네 힘으로 할 수 있니?’
이렇게 제 자신에게 물어보면 답이 바로 나옵니다.
이 문제들이 다 절박하지만 제 힘으로 안 될 일이잖아요?
그러니 기도가 얼마나 축복입니까?
내 힘으로 하면 다 안 될 일들인데,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성도들은 기도할 틈 내기도 어려울 만큼 바쁩니다.
어떤 목사님이 좀 협박조로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힘들고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다 감당하지 못할 위기를 만나는 게 낫습니까, 아니면 힘들고 바쁘더라도 기도해서 큰 시련을 안 만나는 게 낫습니까?
교인들이 특별기도회에 많이 나오지 않은 데 대한 걱정과 섭섭함에서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분명히 위기와 고난을 대비케 하고 피할 수 있는 일은 피하게 해 주십니다.
매일을 살아갈 때도 그렇습니다.
어느날은 모든 상태가 참 좋고 평화롭고 만족하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뭔가 일이 터지고 감정이 한바탕 뒤집어 질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를 잘 살기 위해서도 기도로 마음의 평정심과 인내심과 자제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대로 우리는 계속 끈질기게 기도하는 훈련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훈련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2. 다음은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는 두 가지 기도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먼저, 기도에는 감사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감사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것을 해 주신 분명하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신에게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신 이 사랑을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얼마 전 다이빙선수를 꿈꾸던 한 여중생이 훈련 도중 다이빙대에 머리를 부딪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던 것은 이 가정이 고성산불 때 이재민을 위해 막내의 돌반지와 함께 손편지를 보내 훈훈한 사랑을 전했었던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날 연습이 끝나면 온 가족이 함께 딸이 좋아하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었다고 합니다.
이 기사에 댓글에 보니 누가 이렇게 썼더군요.
‘참으로 가슴 아프다, 도대체 신은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든 불행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린 딸의 죽음과 부모의 아픔을 동정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파 놓은 이 슬픔과 참담한 인생의 모습을 하나님은 결코 원치도 않으셨고 조롱하며 관망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한 세상에도 햇빛과 비를 주시고 만물을 아름답게 빛어서 매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또 인간의 수많은 악이 세상을 다 집어 삼키지 않도록 보존하고 계시잖아요?
세상의 부패를 막으라고 우리를 또 심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세상은 아마도 모두 다 아프리카 내전국들처럼 폐허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다 구원의 은총까지 과분하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걸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하며 기도하라는 것은 희생에 대한 공치사가 아닙니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지금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고 좋은 것을 주실 하나님을 확신하게 하고, 끈기 있게 기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 순간도 분명히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기에 감사로 기도하는 것이죠.
2) 또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는 말씀 안에는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과 ‘깨어 있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는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세상 일에 빠삭한 것을 깨어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깨어 있으라고 하는 말은 세속 세상만 감각하며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우리는 세속 세상에 대한 감각만으로 살았잖아요?
물론 영적인 일에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본성은 여전히 영적으로 잠들고 세속적 감각으로 살기가 쉽습니다.
세상일에는 눈이 반짝거리고, 세상 이익에는 민첩하기 그지없지만 신앙에 대해서는 마치 잠들어 있는 몸처럼 축 쳐져 있는 것이죠.
기도해야만 하나님과 영원에 대한 감각이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깨어있으라는 원어의 의미에는 종말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의 일들이 끝날 시간이 있기에 깨어서 정신 차리고 살라는 뜻이죠.
기도하지 않으면 이런 영적인 감각이 둔해지고 영이 축 늘어진 채로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3. 우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3절,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바울사도는 골로새교인들에게 바울의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길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이상하죠?
바울의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 데, 그 문이 닫힐 수도 있다는 것이죠.여기서 기도의 한 원리를 또 발견하게 됩니다.
전도같이 확실한 하나님의 뜻에도 문을 열어주시길 기도하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완전하고 복된 계획도 이뤄주시길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거기 맞춰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청소년들, 청년들, 하나님이 앞으로의 좋은 진로와 직업을 분명히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게 무엇인지를 기도로 알아가고,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하나님이 움직이시지 않는 데 내가 먼저 성급하게 움직이면 안됩니다.
잠언에서 이미 말씀하셨잖아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뒤 따라가야 계획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하나님이 먼저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서 이런 편지를 쓰고 있는 배경을 좀 아는 게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삼차전도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바울은 유대교인들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됩니다.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은 유대나라에서 판결 받기를 거부하고 로마황제에게 상소합니다.
그래서 지금 로마에 와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온 목적은 무죄판결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환상 중에 말씀하신바가 있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그러니 지금 갇혀있는 바울사도의 목적은 옥에서 나가는 것보다 왕의 재판정과 로마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변론하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의 문이 열리길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지 않고 전도할 문을 열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나가면 안 되는 것이죠.
때로 꽉 묶인 환경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 골로새교회 성도들은 바울사도의 간청을 듣고 그렇게 기도했을까요?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을까요?
당연히 그러셨습니다.
바울의 기도요청은 현실적이었고, 골로새교회는 실제로 기도했고, 하나님은 기도한 대로 분명히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바울이 당한 상황을 사도행전 쪽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로 압송 된 바울은 로마에서 약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가 됩니다.
바로 거기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30절은 이후 바울의 행적을 이렇게 전해 줍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기도했던 대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던 것입니다.
이런 걸 알면 참 성경이 기가 막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골로새서와 사도행전이 이렇게 짝을 이루어 기도응답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죠.
감옥에 갇힌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복음의 문은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앞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어떤 방식으로 풀릴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생각하기 전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수는 무궁무진하다는 걸 기도하며 너무 많이 경험합니다.
오늘 바울사도의 요청대로 성도들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복음의 일군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잘 말하게 해주시길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또 우리 교회에도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길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성도들은 기도로 지혜를 얻어 스스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5절,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외인은 아직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비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분들도 우리처럼 언젠가는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몇 년 전, 혹은 몇 십 년 전엔 외인이었잖아요?
비신자들을 대할 땐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하십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본래 의미로 기회를 잘 포착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얻어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전할 기회를 잘 포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김연자집사님께서 동네 분들을 전도하기 위해 참 애를 많이 쓰신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시죠?
얼마 전에 집사님이 교회에 있는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건물주인 5층 권사님이 쓰러지셔서 아산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 요즘 교회를 안 나가신다는 거예요.
이럴 때 가서 위로도 하고 기도도 해드리면 마음이 좀 열려서 우리 교회에 나오실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 남해연권사님이 싸주신 김밥을 들고 병원심방을 갔었습니다.
김연자 집사님이 지혜롭게 행하며 기회를 얻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겁니다.
늘 전도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 신경 써야만 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 한 명, 이웃 한 사람을 전도하려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사람이 일상이 지속되고 바쁜 땐 신앙에 대한 관심이 잘 안 생깁니다.
일상이 약간 깨질 때, 그 틈으로 무언가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과 이웃들이 힘들 때, 그래도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 관심을 돌리게 되는 축복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변 사람을 보살피고,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을 갖고, 기회가 될 때 이분들을 교회로 잘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언제든지 복음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평소에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은혜롭고 정직하고 바른 말을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우리 말이 신실하지 않다면 우리가 변론하는 복음을 누가 믿겠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영혼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좀 길게 드렸습니다.
이런 믿음의 과정과 단계들을 잘 이해하지 않으면 ‘나는 왜 기도가 안되지?, 왜 나는 잘 믿어지지가 않지?’ 이런 의혹 속에서 교회를 떠나기가 쉽습니다.
기도가 안 되신다면 성령받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또 현재도 유효한 기도응답을 믿으시고 하나님께 모든 필요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또 모든 성도들은 상상치도 못했던 삶과 복을 주시고 영원히 살게 하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 저와 성도님들이 함께 기도하고, 전도의 기회를 포착하여 함께 주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일군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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