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dTbTSD6fgS4&t=26s
<2019년5월26일 주일설교 영상>
오늘 바울은 함께 동역하는 성도들을 소개하며 골로새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읽노라면 마치 대종상 시상식이 떠오릅니다.
대상을 받은 배우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를 도왔던 사람들의 이름을 쭉 언급하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사역의 영광을 이들과 함께 나누겠다는 것이죠.
물론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다 로마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잘 돼야 영광이지 손발이 묶인 죄수의 처지가 뭐가 영예롭냐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는 평안과 축복은 기뻐하지만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과 주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가올 시대에 바울과 동역자들이 받을 영광을 생각할 때 지금 바울이 벅찬 감격으로 영광을 동료들에게 돌리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성도들이 어떻게 서로 동역하며 하나님나라를 이룩해 가냐는 것입니다.
탁월하고 뛰어난 한 사람만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오늘 바울과 동역했던 성도들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복음이 전해 졌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들처럼 주님의 복음의 동역자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 구원받을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ㄹ 자녀로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군으로 다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는 어떤 일군이 되어야 할지를 바울의 동역자들을 통해 배우는 복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엔 아홉명의 동역자가 나오지만 오늘은 그 중 몇 명만 간추려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이 바울의 편지를 골로새 교회에 전하러 가는 두기고입니다.
7절,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두기고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신 분도 있을실거예요.
두기고는 바울의 복음사역에 아주 중요한 동역자로 바울의 소식을 각 교회에 전해주는 일을 주로 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여러 교회에 직접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에베소서와 빌레몬서와 골로새서를 두기고가 배달했습니다.
지금처럼 편지를 배달하는 게 쉬운 때가 아닙니다.
이 골로새서를 배달하려면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터키에 있는 골로새까지 가야하는 여정입니다.
모르긴 해도 한 달이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또 그 당시는 여행자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했던 때잖아요?
언제 강도를 만나 다 털리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기고는 감옥에서 쓴 바울의 편지를 들고 기꺼이 위험한 여행을 떠났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특별히 두기고에게 이 편지를 맡긴 이유가 8절에 있습니다.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두기고가 단순히 편지만 전하러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사역 전체의 그림을 알고 있었고 사도의 형편과 마음을 속속히 알기에 바울의 전령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일을 잘 알고 의논할 사람이 곁에 있으십니까?
그 사람이 가족일 수도 있지만 상황을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의 가족이어야 안전합니다.
우리는 혼자 생각할 때 부정적이고 되고 부정적인 사람과 함께 얘기하면 곱절로 상황을 비관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정을 두기고가 다 알려주고 골로새교인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거라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바울의 처지를 들으면 사람들이 위로받을 상황이 아니잖아요?
두기고가 바울이 구금된 상황만 전한다면 어떻게 걱정하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로할 수 있겠어요?
본문에 보면 바울이 에바브라와 함께 문안한다고 합니다.
이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의 개척자이고 교회를 지도하던 목회자였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나오지 않지만 빌레몬서를 보면 이 에바브라가 바울과 함께 갇혀있다고 합니다.
바울을 방문왔다 어떤 이유인지 함께 갇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골로새교회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죠.
바울의 기별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두기고가 여기 사정을 다 말해주면 저들이 위로를 받을 거라는 좀 이상한 논지입니다.
그 이유는 두기고가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보이는 것 처럼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갇혀 있지만 복음을 들을 사람들이 바울을 찾아오고 있잖아요?
감옥의 문은 닫혔지만 전도의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노령의 사도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유럽과 아시아교회의 소식을 속속히 보고 받고 편지로 모든 걸 지시합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사역자를 교대시키기도 하고 본부로 불러들여 작전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감옥은 선교본부이자 사령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절대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현실만 보는 부정적인 사람에게 고민을 얘기하면 도움 될 것이 없습니다.
지난 주 의정부에서 한 가족의 끔찍하고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빚에 시달리던 가족들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 가족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했었다는 것입니다.
사고 당일에도 빚 문제로 고민하며 부등켜 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이 가족들이 더 이상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눌려 이렇게 평생을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게 비극인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가 당한 박해와 성도들의 시련을 생각하면 세상적으로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벌써 망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는 것과 죄를 부정적으로 말하지 환경을 부정적으로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실패하지 환경이 안 되고 조건이 나빠서 실패하는 삶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어려움과 침통한 상황이라도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 두기고처럼 답답한 환경에 갇힌 다른 사람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실의 답답함에 지친 우리에게는 다 그런 위로가 필요합니다.
바울 같은 강인한 믿음의 사역자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가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가수인 앤디 그래머가 자신에게 있었던 일화를 SNS에 올려 많은 공감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앤디 그래머가 어느날 레스토랑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노년의 여성 대여섯명이 즐겁게 대화하고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나가며 그 테이블의 음식 값을 대신 지불해 주었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종종 그런 일을 하잖아요?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조용히 나갔겠지만 왠지 그날은 그 테이블로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오늘 제가 대신 식사비를 지불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어머니를 떠나보냈습니다. 당신들 모습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나서 잠시 행복했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시간들 가지세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나오려는 데 그 가운데 한 노인이 벌떡 일어나서 눈물을 글썽이며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리 오세요, 그래머씨, 저는 며칠 전 아들을 잃었습니다’
앤디 그래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노인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가 돌아가서 이날 있었던 감동을 페이스북에 올려서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지 사람들은 다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는 지친 어깨를 감싸주는 위로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고난당하고 있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합니다.
요즘은 성도들의 교제도 너무 얕고 피상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고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속내를 다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의 형편을 잘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구체적인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교회를 찾아야 하고 교회는 함께 기도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남의 위로 따윈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강한 척 하다가 병듭니다.
우리 서로가 두기고와 같이 가족들에게, 성도들에게, 직장사람들에게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상황이 안전하다는 위로를 전하게 되길 바랍니다.
2. 다음은 두기고와 함께 갔던 오네시모입니다.
9절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두기고와 동행하는 오네시모는 좀 특수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지금 편지를 들고 전해야 할 골로새교회의 중요한 인물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종입니다.
게다가 주인의 재물에도 손을 댔죠.
도망친 오네시모는 대도시 로마로 숨어들었다 어떻게 해서 로마에 가택연금 된 바울사도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신실한 일군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두기고에게 골로새서 편지를 보내며 편지 한 장을 더 씁니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죠.
이 편지를 오네시모의 손에 들려 빌레몬에게 보낸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이젠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들고 주인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오네시모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하고 착찹했겠습니까?
어떤 얼굴로 주인을 대면해야 할까요?
만일 주인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도망친 노예에 대한 로마법대로 처형당할 게 분명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돌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면서도 그들 주인에게 돌려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죽기보다 싫은 일을 해야 하고 남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기도 합니다.
남의 위에 군림하던 사람도 항상 그렇게 살진 못합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비굴한 기분으로 머리를 숙여야 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잘못함으로 난처한 일이 벌어졌다면 당연히 용서를 구하고 피해를 보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 처음부터 화가 나는 게 아니잖아요?
상대가 내게 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뻔뻔하게 넘어갈 때 불같이 화가 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그렇게 힘든가요?
가족 간에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면 해결되었을 일이 그 말을 안함으로 인해 금이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들에게도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과할 시간을 놓치면 자식들이 성장한 뒤에도 여전히 상처가 남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늘 자신을 회개하고 잘못을 청산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그의 남은 평생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바울의 사역에 함께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복음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평생 성장하며 봉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다음은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힌 아리스다고입니다.
10절, 나와 같이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마게도니아에서 전도할 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뒤 즉시 바울과 동행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바로 봉사하기 시작하기도 하잖아요?
아리스다고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은 얼마나 힘들고 격렬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까?
그러나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따른 이후 한번도 바울 곁을 떠나지 않고 충성스런 동역자가 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귀합니까?
에베소에서는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받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에베소사람들이 믿던 여신상을 만들어 팔던 상인들이 들고 일어나 바울일행을 붙들고 고소합니다.
장사가 잘 안되게 생겼잖아요?
바울은 고소도 참 많이 당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어떻게 해서 위기를 피하지만 같이 있던 이 아리스다고는 붙잡혀 매를 맞게 됩니다.
바울은 도망치고 대신 아리스다고가 매를 맞은 꼴이 된 것이죠.
사람이 아무리 좋은 관계라 해도 이렇게 되면 감정이 상할 수도 있잖아요?
남을 도와주다보면 주객이 전도되고 남의 일을 다 떠맡게 되는 경우가 있죠.
도와주는 자기가 더 곤혹을 치른다면 상대을 원망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리스다고는 매를 맞은 뒤에도 계속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갑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바울이 체포되잖아요?
바울이 죄수가 되어 로마로 이송될 때도 아리스다고는 여전히 떠나지 않고 바울과 함께 갑니다.
자신도 죄수의 신분을 자청했을 것입니다.
바울을 압송하던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던 사건 아시죠?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던 무시무시한 태풍 속 그 배 안에도 아리스도다고가 있었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해 바울이 가택연금 된 이 상황에 아리스다고가 여전히 바울과 함께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아리스다고는 얼마든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바울과 함께 갇혀서 고령의 바울을 섬겼다는 것이죠.
바울은 아리스도가 자기를 섬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아리스다고는 인간 바울만을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해 역사한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남들이 보기에 과하다 싶은 짐을 지고 주님을 섬깁니다.
때로 저렇게 까지 안 해도 될 텐데 너무 과하다는 오해도 받습니다.
40억 기부천사로 알려진 가수 션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대표적인 기독 연예인이죠.
돈을 좀 모아두면 도움이 필요한 절박한 사람들을 위해 다 주다 보니 그렇게 많은 기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션과 정혜영씨가 아직까지 자가 주택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지인들이 걱정하며 대체 집은 언제 살거냐고 묻자 션은 내 집은 하늘나라에 짓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남을 위해, 또 하나님나라를 위해 남들이 보기에 과도하게 큰 희생과 헌신을 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럴 때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그 희생을 폄하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께 부었을 때 바로 제자들이 비난하고 야단을 치잖아요?
우리는 모든 판단의 기준을 내게 두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에겐 더 많은 부담과 희생을 질만한 믿음이 있다는 걸 알고 인정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복음전파의 막중한 짐을 지고 늙어가는 바울 곁에서 자신의 자유를 버리면서 까지 바울을 섬긴 아리스다고와 같이 우리도 때로는 주님을 위해, 때로는 믿음의 동료들을 위해 힘에 좀 과하도록 충성하는 든든한 일군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 마지막으로 주의 깊게 살펴 볼 인물은 데마입니다.
14절,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데마는 바울사도의 편지에 여러 번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빌레몬서 1장24절에도 데마가 나옵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아리스다고,데마,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바울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으로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데마가 들어있죠.
그러나 데마는 끝이 좋지 않은 인물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년 여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4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기독교인들이 심한 박해를 받던 네로황제 시절 바울사도는 다시 체포되어 옥에 갇힙니다.
그때의 형편은 지금과 달리 녹록치가 않았습니다.
습하고 어두운 지하감옥에 갇힌 바울은 그의 생애 마지막 편지를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보내죠.
디모데 후서입니다.
거기 보면 이렇게 말하는 걸 보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 데마는 바울이 가장 힘든 때 그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 보겠다고 교회에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사람을 찾아보면 보이지를 않습니다.
결국 사람은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걸 좇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데마가 사랑했던 것은 수많은 교회를 세운 바울사도의 명성과 그의 주변에 몰려드는 많은 사람 속에서 뭔가를 채우는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데마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바울을 따랐던 것이죠.
더 이상 아무도 바울 곁에 남지 않고 백발의 바울이 힘없이 지하감옥에 갇혔을 때 데마는 다시 사랑할 세상을 향해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초점을 맞춰 따른다면 우리도 회의와 실망에 빠져 믿음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사람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내가 좋아하고 믿는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면 언젠가 그가 아니면 내가 실망의 원인이 되고 갈라서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게 사람이잖아요?
오직 우리가 예수님 곁에 서 있을 때 만이 사람 곁에도 끝까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데마의 변절을 이 골로새서를 쓰던 당시 바울사도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데마가 다른 동역자들처럼 신실하게 주님을 따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을 떠난 데마는 우리 신앙여정에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경종입니다.
바울도, 데마 자신도 성경에 그 결말이 이렇게 기록될지는 몰랐습니다.
데마를 통해 우리는 사람을 따르는 믿음의 위험성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늘 점검하고 오직 예수님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믿음의 여정을 이탈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난 주일에 예배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신미숙집사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손에 든 마트바구니 안에는 막 텃밭에서 따온 상추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마치 든든한 여전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오진경집사님이 살그머니 들어와서 교제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친척 행사로 본가에 내려가면서 성도님들 식탁에 올릴 토마토와 채소를 놓고 가셨더군요.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각자의 은사에 따라 점점 교회의 든든한 일군이 되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바울사도와 함께 유럽과 소아시아 전체 교회를 섬겼던 큰 믿음의 역군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모으신 이 작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확신 있게 서가고 서로를 위하고 섬기는 이대로가 우리 주님께는 흐뭇한 기쁨을 드리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성경이 바울의 동역자들의 노고를 기록하여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듯이 우리의 작은 수고도 하늘나라에 분명히 기록되리라 믿습니다.
각자가 주신 사명대로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사회를 위해 힘써 섬김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영광 된 명성을 얻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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