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골로새서3장18절-21절 (다시 세워지는 가정)

남수연 2019. 5. 6. 00:13

https://www.youtube.com/watch?v=puQIpT7OciQ&feature=youtu.be

<가정의 달 설교 영상>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최근엔 유독 가족 간의 살인과 범죄 사건들이 많이 보도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부산에선 조현병을 가진 동생이 지극 정성으로 자기를 돌보던 누나를 살해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죠.

지난 주엔 더 경악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의붓아버지 손에 자기 딸이 살해되는 순간에 친모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가정, 가족, 부모, 이런 다정하고 따뜻했던 단어들이 최근엔 오히려 고통과 범죄에 더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의 가정들이 다 복되길 소망해 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완전했던 가정과 타락한 가정과 다시 세워진 가정에 대해 구별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우리 가정들을 다시 복되게 세우기 위해서 알아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축복의 말씀으로 우리 가정들이 더 행복해지고 세속과 악으로부터 굳건히 지켜지길 축원드립니다.

 

사람은 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가정과 가족을 천국의 모형으로 삼으시고 천국을 가르치시려 하신 것이죠.

부부 관계는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교회의 관계라고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인 것이죠.

천국과 가정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가정에도 천국을 심으시려고 가정이란 소중한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천국처럼 행복해야 합니다.

1. 최초의 가정은 그렇게 행복했고 완벽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죠.

그 때 에덴동산에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부족한 게 없었잖아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았고 위험도 갈등도 고통도 없었습니다.

부부의 사랑은 깊고도 완벽했습니다.

하와를 향한 아담의 고백이 그 관계가 어땠는지를 말해줍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아내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니 완벽한 것이죠.

우리들 가정이 이렇다면 천국가정입니다.

2. 그런데 이제 세상엔 이런 가정이 없습니다.

죄가 들어와 제일 먼저 가정을 파괴시켰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의 신뢰와 사랑은 깨졌고 낙원은 잃어버렸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배신으로 단절됩니다.

이것이 곧 세상 가정의 모습이 된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가정을 끝까지 붙드시려고 깨진 가정에도 특별한 조치를 해 놓으십니다.

놀랍게도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부여한 형벌 안에다 장치하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엄격한 형벌을 주시잖아요?

창세기3장은 많은 영적의미들을 계시하시지만 가정에 대한 의미도 큽니다.
얼핏 보면 이 형벌 때문에 가정에 큰 고통이 온 것 같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어차피 인생엔 죄를 지음으로 갖게 된 죄성 때문에 겉잡을 수 없는 고통이 덮쳐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징벌은 오히려 이렇게 파괴 될 가정에 주신 최선의 안전장치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영적 죽음과 육적 죽음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형벌을 더 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사형선고는 최고형이기에 다른 형이 추가되는 게 의미가 없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벌이 유독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가정에 대한 항목이라는 것에서 벌을 내리신 이유를 가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더 망하라고 그러셨겠어요?

그게 아니라면 이 형벌들이 가정을 살리기 위한 필연적인 장치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을 알면 가정에 심어놓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보입니다.

1) 먼저 남자들은 하나님께 무슨 벌을 받죠?
이마에 땀이 날 정도로 힘들게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게 하셨습니다.

그 징벌 때문에 남편들, 아버지들이 왜 그런지도 모르고 저렇게 평생 남의 밑에서 눈치 보며 일하고 돈 벌어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벌을 주셨기 때문에 벗어 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2) 아내들에게 주신 벌이 무엇입니까?
해산의 고통을 주신 것이죠.

여자들이 출산을 거부했다면 인류는 멸종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산의 고통은 필연적으로 여자에게 주어진 형벌이기에 피하지 못하고 아기들을 낳아야 합니다.

다행히 그 형벌 안에는 모성애를 넣어주신 것이 신의 한 수이신 것이죠.

또 하와에게 선고 된 벌이 있습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모든 여성을 불행하게 만든 남성우월주의의 법령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형벌이 아담과 논의 없이 독단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은 하와에게 주신 형벌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아담의 돕는 배필, 조력자로서 한 몸이 되어야 할 하와가 독단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반역을 하와가 아담을 무시하고 혼자 해치웠습니다.

이제 그 범죄가 본성을 바꿔 놓았으니 앞으로 누가 이 하와들을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들은 지금도 남편의 조언 따윈 필요치 않습니다.

여자들의 판단과 결정이 남자보다 더 옳은 경우가 훨씬 많잖아요?

하나님이 아내들에게 남편을 원하고 그에 예속되어 살게 하지 않으셨다면 과거 우리 어머니들 다 보따리 싸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어요?
하나님은 범죄 한 인간사회에 가정은 최소한의 안전지대가 되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음란한 죄성에도 불구하고 가정이 존속되고,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위한 희생으로 가정이 존속되는 것은 그나마 하나님께서 이런 장치로 가정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양심에 새겨 주신 이 시스템만 유지해도 최소한 가정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도 거부하기에 가정들이 깨지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명령 안에서는 남편도 아내도 온전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남편에게 종속된 아내들의 삶은 결코 온전한 행복이 아니잖아요?

조선시대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아낙네의 삶 같은 것이죠.

의무적으로 가족을 돌보는 남편들에게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얼굴에 기름끼가 다 빠진 얼굴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표정으로 일하는 가장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창세기의 계명은 그나마 최소한의 가정유지를 위한 것이지만 완전한 가정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가정은 이 테두리 안에서 잠시의 즐거움을 누리다가 호된 폭풍도 만났다가 사랑했다 미워했다하며 두서없이 살아가는 것이죠.

 

3.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회복되었으니 가정도 다시 복되게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들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반드시 그 가정은 다시 세워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다시 명령하십니다.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얼핏 보면 창세기 명령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뒤 이어 나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그러니까 이 계명은 옛 계명이 아니라 예수님 안의 새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사도가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한 말씀과 같은 원리입니다.

겉은 같지만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부부관계에 기초가 되니 내용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죠.

당연히 부부간에는 다스리고 속박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일까요?
현대의 인간관계에선서 복종이라는 말 자체가 거부감이 듭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도 여전히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했다면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여전히 하와의 죄성이 아내들에게 내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엔 한 조직에 두 머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베네수엘라에 마두로와 과이도가 서로 대통령이라고 하잖아요?

한 나라에 두 대통령이니 제대로 된 나라겠습니까?
복수 수뇌부가 가장 완벽하게 가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밖에 없습니다.

완전하고 죄 없는 사랑 안에서만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그게 안 돼요.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로서 동등한 권한이 있었지만 아담을 하와의 머리로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열을 두신 것이 아니라 가정의 건전한 유지를 위해 기능적인 지위를 주신 것입니다.

여전히 죄성을 가진 두 죄인이 만나 이룬 가정에서는 반드시 죄끼리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조정을 위해서는 남편이 기능적으로 우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나이가 먹어갈수록 발언권이 더 쎄집니다.

반대로 경제력과 힘을 잃은 남편들은 주눅 들어 살기가 쉽죠.

이런 가정의 모습은 가부장적인 남편이 주도한 가정과 마찬가지로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어떤 남편들은 존경받을만한 인격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존경할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건 정말 힘들죠.

그렇다 할지라도 인격에 복종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역할에라도 복종해야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복종하고 싶을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인격도 문제지만 인간 자체가 남에게 복종하길 싫어합니다.

또 우리가 솔직할 건 솔직해야 합니다.

아내들이 복종하고 싶지 않은 남편이라도 나보다 나은 점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걸 넘어서 예수님 안에서 단지 인간으로서도 남편들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번번이 복종해야 할 일도 사실은 별로 없습니다.

요즘 사회엔 이미 중요한 일들은 다 아내들에게 넘어왔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것들은 대개 아주 작고 시시한 것들입니다.

눈에 거슬리는 남편의 버릇 그런 것을 참아주는 것이죠.

두 사람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에 끝까지 내 주장을 하지 않고 남편 의견을 인정해 주는 그런 정도 아니겠습니까?
아내들이 남편의 인격을 존중해 주고 사소한 의견만이라도 잘 따라준다면

남편들은 행복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장하신 더 화목하고 복된 가정이 이뤄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영적 이유를 밝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 같이 아내들은 남편을 섬길지니라.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을 통해 나는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섬긴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것이죠.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게 아닌 것이 되잖아요?

정말 강력하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명령을 아내들에게만 주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명령을 남편에게도 주셨습니다.

가정은 한 사람만 노력한다고 에덴처럼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청년들이 믿음이 없는 배우자와 결혼해서 함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야 합니다.

19절에서 남편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것이 상호간에 지켜져야 가정은 행복하고 온전해 집니다.

남편들에겐 부부관계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에 대한 짐은 지지만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한다 해도 태생적으로 좀 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아내들은 사랑을 안 하면 안했지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랑하지 않죠.

그래서 남편들은 평생 예수님의 사랑을 본 따서 아내를 사랑할 것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말씀해 주셨잖아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

정말 태생적으로 잘 되지 않는 사랑을 하나님이 남편들에게 요청하시죠?
그게 아니면 절대로 아내들이 행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은 젊을 때 남편분이 바람을 피운 게 아직도 심한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힘들게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보면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게 느껴집니다.

많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불행하게 삽니다.

돈은 벌어다 주고, 집에는 들어오는 데 사랑은 주지 않습니다.

태생적으로 잘 안되는 헌신적인 사랑이기에 하나님은 남편들의 노력을 보십니다.

기도하며 노력하는 남편에게 하나님은 점점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감정보다는 의지에 더 가깝습니다.

죄인들 속에서 애정하는 감정이 저절로 드는 걸 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남편들은 말과 행동으로 아내를 무시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때로 남편들은 아내를 괴롭히려고 결혼한 것 같이 보이죠.

아내들은 사실 집에서 남편을 그렇게 괴롭히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남편들은 퇴근하고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아내를 괴롭게 합니다.

요즘 같이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시대엔 과거 아버지들처럼 물 떠와라, 밥상 내오라 그러면 안됩니다.

육아도 둘이 같이 하지 않으면 아내의 삶이 정말 고단해집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고 사랑하고 돌볼 때 남편들에게 무슨 복이 임할까요?

오늘 명령대로 남편이 순종할 때 아내도 행복하고 자신에게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고 베드로사도가 경고했죠?
하나님이 남편의 일을 돌봐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내들, 든든하죠?

우리 형제 된 성도님들, 특히 청년들과 자라나는 세대들은 오늘 말씀을 잘 새겨두고 평생 순종하며 지킴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4. 다음 복되게 세워지는 가정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바로 세워집니다.

21,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부모자식간이 천륜이라고 저절로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게 아닙니다.

자식에게 주신 명령은 모든 일에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십계명에서부터 명령하신 것이잖아요?
왜 하나님은 꼭 짚어서 자식들에게 부모 공경의 의무를 지워주셨을까요?
우선 사람은 권위에 복종하는 걸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부모님께 순종하는 데서 배워야 하고,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으로 확대됩니다.

자녀들이 어려서 교회에 잘 다니던 교회를 크면서 안다니는 경우가 많죠.

부모들이 다시 데려오려 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것이죠.

부모 말을 듣고 순종하도록 자식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고집피우는 아이들 성격 꺾으려고 아이들과 다 실랑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자식들은 이것이 자기에게 복됨을 알고 자발적으로 부모의 의견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만큼 자식의 문제점을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책망과 꾸지람을 달게 듣고 공손하게 공경해야 할 때 좋은 인격과 올바른 신앙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모공경을 명령하신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약자가 되잖아요?
인간은 자신에게 약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무시합니다.

자식들은 죄인이라 자라면서 점점 약자인 부모를 무시합니다.

부모들은 무시당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호적에서 파버릴 수 있겠어요?

평생 부모 마음에 피멍이 맺히지 않게 하나님은 자식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부모들의 노후는 생각보다 깁니다.

힘든 시대를 살아온 부모들은 충분한 노후준비를 해 놓지 못했습니다.

또 재정적으로 노후 준비를 다 해놨다고 해서 자식의 관심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 부모들이 나보다 어리석고, 내 뒷배가 되 줄만한 능력도 없고, 남들 앞에 내세울만한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존재하게 하신 분은 육신의 부모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제일 먼저 나를 감격으로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마음으로 안고 계시고 죽을 때 까지도 나를 마음에서 놓치 못하고 나로 인해 울고 웃을 분이십니다.

조수미씨가 치매로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마더라는 새 음반을 냈다고 하더군요.

어릴 때는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하는 어머니를 미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얼굴도 못 알아보시는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바람이 머무는 날이란 노래를 들으며 저도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언젠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가실 우리 부모님들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오늘 말씀대로 잘 순종하며 섬기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부모들에겐 어떤 명령을 주십니까?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부모가 자식을 위해 지켜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한마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죠.

왜 그랬을까요?

자식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은 부모가 노엽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식들은 부모들의 왠만한 꾸지람과 훈계를 싫어하면서도 받아 들입니다.

그게 자신을 위해서 하는 잔소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그런데 부모들의 어떤 언행은 자식을 노엽게 한다는 것입니다.

대박이 아버지 이동국선수가 대박이를 얼마나 놀려 먹는지 모릅니다.

나중엔 순한 대박이도 눈을 치켜뜨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버지를 원망하잖아요?
자녀들을 노엽게 한다는 것은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 대 인격으로 자식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한심하게 보는 때입니다.

어머니들보다는 아버지들이 대개 이런 면에서 자식들을 노엽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식이 노여워 할 때는 자기를 몰아세우는 부모의 언행 안에 사랑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부모도 때로는 자식에게까지 이기적이잖아요?

자식들이 실패하고 원하는 대로 잘 해나가지 못할 때 부모는 속상해 합니다.

그게 자식을 위해서이지만 남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과연 하나도 섞여있지 않았을까요?

부모의 책망 속에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많은지, 부모의 이기심이 더 많은지 자식들은 압니다.

이런 것을 부모에게 반복적으로 당하다 보면 자식들의 마음은 분노하고 낙담하다 무능하게 되는 것이죠.

부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들이 무슨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살아 내겠습니까?

우리 부모들은 항상 자식들이 우리말에 상처받고 노여워하고 점점 자신감을 잃고 낙담하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 냉혹한 세상에서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하고 내 편이 되 줄 사람, 적어도 그런 부모가 있어야 자식들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행복한 가정은 가족 모두에게 가장 크고 위대한 선물입니다.

단란하게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며 노년을 맞는 부부만큼 인생에 대한 큰 상이 있겠습니까?

손과 발에 힘이 다 빠지고 과거의 기억도 점점 잃어가는 부모들 곁을 든든히 지키는 자녀들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의 개선문입니다.

이 복된 가정은 예수님 안에서 다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대로 가족 간에 순종하고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가정들이 다시 세워집니다.

연약한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반드시 우리 가정을 새롭게 세워 주실 것입니다.

모든 가정들이 복되다면 좋겠지만 가족들의 불완전함으로 아픔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 고난과 고통이 있다면 그걸 통해 더욱 강인하게 천국가정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성장될 것입니다.

어차피 이 땅의 가정도 우리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가장 완벽하고 복된 가족과 함께 기쁨과 만족을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것을 소망하며 늘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달, 우리에게 주신 오늘 말씀을 잘 순종해서 모든 가정이 예수님 안에서 다시 복되게 세워지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