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 (신명기1장29절-39절)

남수연 2013. 10. 16. 14:05

지난 한 주간 고민도 갈등도 없이 풍족하고 평안히 지나셨는지요.

그럴 리가 있냐는 눈빛이시네요.

인생이 오죽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건너온 광야생활과 같다고들 말합니다.

광야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게 한 가지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광야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죠.

비가 없으니 농사도 못짓고 풀이 없으니 목축도 안됩니다.

사냥할 짐승은 커녕 불뱀과 전갈이 득실 되는 곳입니다.

태양아래 몇 시간만 있어도 생명이 위태해집니다.

그래서 광야 앞에 항상 ‘두려운’ 광야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 생존불가능의 광야에서 2백만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을 우글우글 살았던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이런 서바이벌 대하드라마가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시고 40년간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리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십니까?

구원받기를 그만큼 거부하는 죄인들과 끝까지 구원해내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승부욕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나님도 대단하시고 그렇게 되기까지 간 이스라엘도 참 질깁니다.

광야 생활을 그렇게 오래할 줄 알았으면 이스라엘은 절대 모세를 따라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 날을 다 보여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다 알면 우리가 시도했을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은 불편한 일만 있으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계산할 수 없는 축복이지만 믿음의 길엔 때로 광야도 만나게 됩니다.

애굽과 축복의 땅 사이엔 삭막하고 메마른 모래바람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두려운 광야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야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입구가 보이는 것이죠.

그러나 성도의 가는 길엔 항상 하나님이 먼저 가시며 길을 여시고 장막 칠 곳을 준비하십니다.

두려운 광야의 위험에서 우리를 안고 그 길을 건네주신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드디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땅 입국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모세만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없습니다.

시내산에서 40일간 하나님과 독대를 했고 성막에서 매일 하나님과 대면했던 사람입니다.

또 모세만큼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의 죄질을 속속들이 알았던 사람도 없습니다.

2백만명의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백성을 재판하고 중재하며 40년을 이끌지 않았습니까?

여행만 며칠 같이 가도 웬만큼 그 사람에 대해서 안다고 하잖아요.

검사나 형사 같은 사람들 매일 죄인들 뒤를 캐다 보니 인간을 인간 같이 잘 안보잖습니까?

인간 속이 다 들여다보여 지겨운 겁니다.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끔찍이 아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알았고 불순종한 강팍한 죄인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 두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40년을 중재자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오늘 하는 설교는 가나안에서도 여전히 계속 될 그 갈등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불신하고 원망하다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1세대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왜 자식들 앞에서 지금 부모의 허물을 들추고 있겠습니까?

제 교직 경험으로는 아무리 망나니 같이 구는 남자애들도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냐 이런 소리했다가는 봉변당합니다.

부모 욕했다고 난리 납니다.

모세가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민수기32장4절을 보면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인간의 죄질이 광야40년을 지나도 본질상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할 짓을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본문은 2세대에 하는 설교이면서도 마치 그들을 1세대로 보고 하는 설교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언제고 하나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 축복의 땅을 향해 가는 우리 여정에도 오늘 주시는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을 부어주시고 심령을 새롭게 해주시는 축복의 시간이 되게 해주시길 소망합니다.

 

본문은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출애굽2세대들과 이쪽에서 죽음을 맞을 모세와의 고별장면입니다.

고별설교인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고 본문을 보면 과거를 회상하는 120세 백발노인의 감회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모세는 아직도 회한이 남는 한 사건으로 고별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때를 회고하는 모세의 눈에 안타까움이 묻어났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안타까운 실패의 순간이나 아쉬움이 남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설문조사 결과를 예측하는 퀴즈 문제가 나왔습니다.

각 세대별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지 순위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10대부터 50대까지 남자들의 1위 답변이 똑같았습니다.

정답은 공부 좀 할 걸, 공부 좀 할걸, 공부 좀 할 걸, 공부 좀 할 걸.

그리고 60대에서 70대의 1위는 돈 좀 모을 걸, 돈 좀 모을 걸.

2위는 엄마 말 좀 잘 들을 걸. 그 회사 그냥 다닐 걸. 아내한테 잘 할 걸.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지난번 힐링캠프에서 13년전 교통사고로 심한 화상 상처를 가진 이지0 씨가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호대기에 서있던 그 밤을 생각할 때 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악몽이길 바랬겠습니까?

지선씨 오빠가 불타고 있는 동생을 차에서 끄집어냈다고 하죠.

그러나 흉측한 화상의 상처와 치료의 고통을 볼 때 차라리 죽게 버려둘 걸 하고 그날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가데스바네아의 그 날은 모세에게도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아프고 회한이 남는 날이었습니다.

오늘 고별설교를 그는 주저 없이 가데스바네아의 사건에서 시작합니다.

그 날 가데스바네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가데스바네아는 가나안의 입구입니다.

그곳이 바로 광야 40년 징계의 진앙지입니다.

본장의 2절에서 모세는 분명한 사실하나를 짚고 넘어갑니다.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호렙산에서 열하루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가나안땅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광야 40년은 애초에 하나님 계획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 뒤 이스라엘백성들은 시내산에 머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국가 발대식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걸맞는 십계명과 세부적인 법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막을 짓게 하시고 제사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는 사이 그럭저럭 1년여가 지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산에 머문지가 오래 되었으니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호렙산 야영지를 출발해 열하루 만에 가데스바네아까지 진군한 것입니다.

가나안이 코 앞입니다.

그 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12지파의 대표들을 뽑아 가나안을 정탐하게 합니다.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이니 사전지식을 좀 알아두자는 것이죠.

그런데 정탐군들의 보고서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너무 좋다, 우리가 포도를 한 송이 따왔는데 둘이 메고 올 정도로 실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그 땅은 강하고 용맹한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다.

성벽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거기 거하는 아낙자손은 거인족이라 거기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만하다.

땅은 기가 막히게 좋지만 그림의 떡이다.

열 명이 이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보고서에 문제점은 없습니다.

전략적으로 볼 때 그 싸움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싸움인 것이죠.

맞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절대 안되는 싸움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을 믿고 올라가 차지하자며 설득하지만 이미 백성들의 마음은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보고서를 채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각기 텐트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밤새 원망하며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이 날 하나님도 중대 결정을 내리십니다.

거기까지 오는 데도 하나님의 심정은 정말 말이 아니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결국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우회시키시고 이스라엘은 비참하게 약속의 땅을 놓치게 된 것입니다.

 

가데스바네아의 실패의 요인은 무엇보다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항상 믿음이 부족하다 느끼는 우리들도 믿음을 조금씩 더 증진시켜야 하리라 믿습니다.

그래야 산같은 장애물 앞에서도 믿음으로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들이 약속을 받았지만 믿지 않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왜 이스라엘은 그렇게 기적을 목격하고도 끝가지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열가지 재앙을 보았고 갈라진 홍해바다 사이를 갯벌이 아닌 마른 땅을 밟고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1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양식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한 나절도 살 수 없는 두려운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를 지금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시내산 위에 현현하신 하나님의 위엄있고 두려운 임재도 목격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이스라엘은 기적을 목격하고 기적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체험이 부족했었습니다.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앙하는 대상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저 분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니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집회 가운데 아무리 큰 기적이 눈앞에 일어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의 현장에는 항상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체포할 빌미를 잡으려고 쫒아 다녔습니다.

기적을 보고 믿음이 생긴다면 기적을 제일 많이 관찰한 그들이야말로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엄청난 기적도 보고 종교적인 신으로 하나님을 인정했지만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체험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보다 자기의 경험과 현실적인 판단을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이는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은 예수님에게서부터 시작해야 맞습니다.

예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실상을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다 가신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흔적이 있으십니다.

주님의 인격과 죄인에 대한 사랑과 천국에 대한 말씀이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분명한 진실이라며 목숨을 내놓고 확증한 제자들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들의 순교를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의 전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기적을 보고 기도응답을 받고 병이 나아도 다음 문제가 생기면 또 의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열가지 재앙의 기적을 보고도 홍해가 앞을 막으면 이스라엘은 즉시 의심하고 원망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광야로 갔는 데 먹을 물이 없다고 또 즉시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이스라엘 같이 하나님의 인격을 모르는 종교적인 믿음은 언제고 하나님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알아가고 신뢰감이 있어야 믿기로 결단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아는 영적인 삶은 강하고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그 사실이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충분히 계시해주셨습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수많은 작은 체험들이 믿음을 만들어 내고 또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우는 말씀의 명령을 지킬 때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말씀의 비밀입니다.

아는 것 만큼, 지키는 것 만큼 우리 믿음이 성장하고 강해집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3장18절에서 명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해 성경을 펴고 읽으십시오.

주일 설교만으로는 어림없이 부족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수록 우리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점점 깨닫고 흔들리지 않고 장애를 넘어 축복의 땅을 향해 나가게 되리라 믿습니다.

 

다음, 가데스바네아의 실패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믿음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영적싸움에서 축복과 징계, 승리와 패배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은 현실만 보았지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들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롱하는 원망과 불신의 말을 쏟아내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파괴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을 잘 통제하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우리 믿음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듣고 보는 대로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우리 신체기관들이 다 신묘막측한 것입니다.

귀로 소음을 많이 들으면 그게 심장박동과 혈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실제 듣는 것이 신체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온갖 나쁜 사상이 들어간 영화나 음악, 게임같은 것을 실컷 즐기고 나서 왜 내가 이렇게 속이 헛헛해지는지 의아해하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 영이 영향을 받습니다.

세속적인 문화를 자주 즐기면 영적인 삶이 재미없고 딱딱하게 느껴져서 점점 더 회피하게 됩니다.

가요는 우리의 죄성을 깊이 파고들지만 찬송은 우리 심령을 밝고 새롭게 합니다.

우리 영혼에 도움이 안되는 것들을 적당히 조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미국의 대형마트 앞에서 한 노숙자를 보았는 데 재산이 얼마나 많은 지 마트용 카트 두 개에 살림살이가 산처럼 쌓여 있더랍니다.

노숙자 살림살이가 다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쓰레기 같겠습니까?

그런데 두 개의 카트를 밀고 어디로 가려는 데 그게 잘 됩니까?

카트 두 개 끌어보셨나요?

노숙자가 두 개를 동시에 밀어보다 한 개 먼저 저기 같다 놓고 다시 와서 또 한 개 끌고 가고, 그러면서 쩔쩔 매며 어딘가로 가더랍니다.

우리가 어찌보면 그런 쓸모없는 노숙자 짐 같은 것들을 너무 무겁게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 앞에서 잘 정리하고 너절한 것들은 좀 버리고 우리 삶을 좀 단순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도 서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긍정보다 부정적인 말을 쓰길 좋아합니다.

가까운 가족일수록 부정적인 언어를 쓰기가 쉽습니다.

말은 정말 비수같이 예리하게 상처를 줍니다.

좋은 말을 하도록 우리 혀를 잘 훈련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런 연구가 있습니다.

부부애가 좋으면 딸이 예쁘게 크지만 불화가 잦은 부부의 딸 얼굴은 그렇지가 않다고 합니다.

세인트루이스대학 박사에 의해 발표된 연구결과입니다.

딸 낳으셨으면 예쁜 딸 되게 책임지셔야 합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이 있어 부정적인 사람과 있으면 결국 부정적이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믿음과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결과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우린 광야에서 다 죽게 되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도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그대로 행하리라.

복되고 온전한 믿음을 위해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과 쓸데없이 산만한 삶을 잘 정리하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끝으로 가데스바네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앞서 행하시며 여전히 그들을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장애든 무서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앞서 그곳에 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30절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현재 닥친 문제와 앞길에 장애가 가로막을 때 고개를 살짝 돌려 인생의 자취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사백년 노예의 멍에를 풀어주기 위해 애굽과 싸운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 혼자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이제도 우리를 위해서 싸우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완전 망가뜨릴 위력으로 덮쳐 왔던 큰 시련을 내 힘으로 막아낸 것이 아닙니다.

또 31절에서 말씀하죠.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 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모세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듯 사랑하신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모세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니까요.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내가 내 백성의 부르짖음으로 근심한다.’ ‘내가 그들과 함께 올라가겠다.’

하나님은 매일 모세와 작전을 짜셨습니다.

‘이 백성이 전쟁 해 본적이 없으니 적군을 만나면 무서워 돌아갈 테니 홍해길로 우회해서 인도해야겠다.’

그리고 실제 그 두려운 광야에서 놀라운 신실함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을 모세는 목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고뇌의 가시밭을 나 혼자 힘으로 걸어온 것 같지만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안고 업고 오신 것입니다.

새롭게하소서에서 찬양사역자인 이00사모가 이런 간증을 하더군요.

미국에 거주할 때 한국의 찬양집회 일정이 있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너무 바쁘고 고된 일들이 겹쳐 심신이 다 쇠약해진 상태라 도저히 장시간 비행기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밤잠 잘 시간도 없어 겨우 짐을 꾸리고 공항에 도착해 좌석표를 받으려 하는 데 직원 둘이 뭔가를 의논하더니 좌석을 좀 바꿔도 되냐고 묻는 것입니다.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 이사모의 좌석을 비즈니스석으로 바꿔준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생전 처음 앉아보는 그 편안한 비즈니스석에서 눈을 좀 붙이려고 의자를 젖히고 누웠는 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더랍니다.

사는 데 지치고 의욕도 다 사라져 추스릴 힘조차 없을 때면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 마음을 다독이며 여기까지 데려오신 줄 믿습니다.

정말 힘들 땐 신기하게 부담될 일도 조정해 주시지 않습니까?

돕는 손길도 보내주시고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홀가분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맥이 빠질 때 우리를 안고 건너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33절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니라.

광야에서 이리저리 그 백성을 쉬게 할 자리를 먼저 잡으시는 하나님을 모세는 목도했습니다.

실제 민수기를 보면 광야생활의 숙영지 40곳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진중에 머물던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백성들은 구름을 따라가야 합니다.

몇 개월 살던 장막터를 치우고 가재도구들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당장 해야 합니다.

구름은 예고도 없이 떠오릅니다.

머물고 싶어도 구름이 떠오르면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안 따라갔다간 광야에서 그냥 타 죽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그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광야에 머무시며 인도하신 것일까요?

그들의 조상들에게 가나안을 주시기로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슨 하나님의 맹세까지 받을 존재입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하시고 끝까지 구원하시겠다는 결심입니다.

독생자를 속죄 제물로 써서라도 반드시 구원해 내시겠다는 그 마음이 혹시라도 바뀔까봐 하나님 스스로가 하신 맹세인 것입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저주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버림을 당한 게 아니라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세포 속까지 침투한 애굽의 잔재들을 씻어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법도를 배우며 강한 민족으로 세워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훈련하시는 줄 믿습니다.

또 우리가 쉴만한 장막 칠 곳도 미리 찾아 놓으시는 줄 믿습니다.

이사할 집도 준비해 두시고, 입학할 학교도 준비해 두시고, 직장도 준비해 두시고, 배우자도 준비해 두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공교하게 우리 인생을 준비하시고 이끌어가시는 지 다 간증하실 게 많으시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도 여기 장소를 하나님께서 7년 전에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오금중학교에 부임했을 때 우렁쌈밥집에서 회식을 하고 차를 타고 이 아래로 내려오는 데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앞 거리와 주변이 너무 신비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난데없이 여기다 교회를 개척하면 정말 좋겠다. 이런 생각이 딱 들었습니다.

그때 무슨 교회개척은 꿈도 꾸지 않던 때였거든요.

장소를 계약할 때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때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놀랍던지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막을 베푸실 곳을 미리 준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내가 그 직장에 들어간 것도, 내 진로가 이렇게 바뀐 것도,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우리를 모태에서 작정하시고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의 장막터를 옮겨가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름이 떠오르는 징조가 보이면 장막터를 옮기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텐트 거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찍고 가는 지점들, 일어나는 사건들이 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훈련하고 연단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강하고 담대하게 이 땅을 살며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야 같이 거칠고 악조건 속에 살아갈 때가 때로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나 무서워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고 광야를 가시며 안전히 거할 장막터를 준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하나님의 본체시며 그 영광과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알기 위해 더욱 마음을 기울이길 바랍니다.

우리 앞에 두려운 장애물과 광야 같이 메마른 상황이 온다 해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시고 안전한 환경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음 주 새생명전도축제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을 아직 보호자로 만나지 못하고 거친 광야를 유리하고 있는 그 분들을 아버지께로 데려 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이 우리처럼 살고 영생을 얻습니다.

한 주간 태신자를 위해 더 간절히 기도하며 초청할 때 천하보다 더 중하고 귀한 한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우리를 통해 일어나게 되리라 믿습니다.

 2031년10월13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