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모세가 40년 광야생활을 끝낸 이스라엘을 가나안땅에 들여보내기 전,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입니다.
2백만 민족을 40년 간 광야에서 이끌었던 모세가 이들만 가나안에 들여보내야 하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런데 은퇴식의 분위기는 그리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9장24절에서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또 31장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의 반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앞으로 이 백성이 어떻게 할지가 뻔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해야하는 모세나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나 피차 마음이 착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가나안땅에서 성행되는 종교에 대한 경계로서 아주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셨고, 모세가 염려했던 이 가나안의 종교행태는 단순히 부족들의 문화와 풍속의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이들의 이런 불결한 귀신과의 교류로 인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에서 쫒아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이 저들의 종교를 본땄다가 역시 가나안땅에서 쫒겨나 바벨론의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현대 성도들과는 무관한 고대 국가의 종교 이야기일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다 입니다.
본장의 20절에 보면 장차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이런 가나안 종교를 따르도록 백성을 선동하고 미혹할 것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시대에도 이와 똑같이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할 거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24장11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다른 종교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내에 거짓 지도자들이 진리를 묵살하고 큰 표적과 기적을 보이며 택하신 자들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묘한 일들이 다 성령의 역사라면 이런 주님의 예언이 다 틀렸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거듭해서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미혹을 받는 것은 그럴듯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도 디모데전서 4장1절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교회사엔 항상 이런 사탄의 역사가 있어왔습니다.
한국교회 내에도 이런 미혹하는 귀신들의 역사가 성령을 가장하여 성행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여러 신앙운동들이 한국교회에 들어올 때는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 악령들의 활동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다행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면 괜찮은 데, 못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작년 12월에 북한이 남침한다는 직통계시를 받았다는 한 전도사의 말을 듣고 동남아로 피신했던 사람들이 예언이 불발이었는데도 아직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한번 거기 빠지고 나니까 언제 전쟁이 날지 몰라 자꾸 겁이 나고 불안해서 한국에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악령에 영향을 받고 정상적인 사고체계가 무너지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 가나안인 세속 세상에 가득 찬 악한 영성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분별력 있는 믿음을 갖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10절과 11절에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우상숭배와 무속과 귀신과 교류하는 행위들이 나옵니다.
자식을 인신제물로 바치는 것, 점을 치고 길흉을 말하는 것, 요술, 무당, 주술로 악령을 몰아내는 것, 혼령을 불러내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니 이런 것과는 상관없다고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런 행위들은 다 사람들의 강력한 욕구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현대라고 사람의 본질이 다르지 않을 뿐아니라 성도들도 신분은 바뀌었지만 본성은 똑같습니다.
다만 신자들은 죄에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지 않도록 성령께서 본성을 다스리게 도와주신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죄의 본성이 여전히 이런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조차 이런 행위들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필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악한 영성이 어떻게 그런 흡인력을 갖고 사람을 미혹하는 지 몇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가나안의 종교는 인간내면에 있는 기복주의와의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다는 것은 가나안 부족들이 몰렉이라는 신에게 자식을 바치던 의식을 말합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 중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에 포위당하자 자기 왕위를 이을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로 드립니다.
그걸 보고 말문이 막히고 통분한 이스라엘군이 전쟁을 포기하고 나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위기를 면하거나 복을 구하기 위해 자식을 재물로 바치기 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식을 버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소식은 최근에 그리 새로울게 없는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주인을 버리고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삽니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솟구치는 죄 때문에 결코 원하는 행복을 얻어낼 수가 없습니다.
마귀와 악한 세상도 절대 인간의 행복을 위해 협조하지 않습니다.
성공과 행복과 권력은 갖고 싶은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안되니 누군가를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상대의 이용가치를 계산합니다.
대개 자기보다 못나면 무시하고, 잘나면 시기하거나 아니면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이용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쓰고도 안되는 건 초자연적인 영의 힘을 빌려 원하는 걸 갖겠다는 것이 바로 가나안의 종교들입니다.
기독교는 복을 구하고 문제해결만을 구하는 가나안 종교와 다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되면 알맞은 복은 당연히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들은 자연히 제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성도들은 복을 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구함으로 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 이 복을 누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복을 빌어주고 그들에게도 복된 진리를 전파합니다.
운수, 철학관이 번성하고 잘되는 것 본 적 있으십니까?
하나같이 허름하고 궁상맞고 괴괴합니다.
거기서 고민과 문제가 해결되고 복받는 비결을 알았다면 거기가 제일 먼저 잘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상에게 복을 비는 나라들 보면 다 가난할 뿐이고 사회가 올바르고 인격이 꽃핀 나라가 없습니다.
기복주의에는 결코 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나라로 만들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선지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26장18절에서 망하는 나라를 바라보며 이렇게 한탄하죠.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이 기복주의가 되었지 복의 근원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모세가 거듭해서 말하는 요점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성실히 행하면 너희가 사는 땅에서 충분한 복이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면 가나안의 기복주의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경외할 때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필요에 따라 채워질 뿐 아니라 우리도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가나안의 종교는 사람들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합니다.
사람들은 살아온 경험상 인생이 예측했던 대로 않되고, 원치 않는 일들이 생긴다는 것을 압니다.
미래를 내다봐서 재앙을 미리 알아내고, 어떤 힘이든 빌려서 막아보려는 욕구가 있는 것이죠.
지금 별 문제가 없고 모든 게 형통하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게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더 생깁니다.
그 잘나가던 욥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악창이 난 피부를 긁으며 말하죠.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 내게 임하였구나.’
이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욕구들이 교회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가끔 ‘목사님, 이 문제로 기도 좀 해보세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도해서 좀 알아내라는 것입니다.
전 그런 것 모릅니다.
내일의 길흉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금지된 것입니다.
전도서 7장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장래 일을 감추신 것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곤고한 날을 피하려고 미래를 점치려하지만 하나님께서 일부러 곤고한 날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장래의 문제들을 미리 알아 막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심할 것은, 하나님은 형통한 날에만 우리를 돌보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와 곤고한 날이야 말로 우리의 본심과 믿음이 드러나게 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이킬 기회로 만드시는 놀라운 은총의 때입니다.
실패를 모른다면 어느 죄인도 하나님께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한센인들을 돌보는 의료선교사인 폴 그랜드박사는 고통을 모르는 나병환자들을 보며 한없는 절망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물이 펄펄 끓고 있는 무쇠솥 안에 손을 넣어 감자를 집어내면서도 뜨거움을모르는 나병의 무감각이 그렇게 두렵더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 속에서 일할 때, 밤에 자는 동안 쥐가 손을 다 갉아 먹어도 모르는 그 처참함을 보며 이 분이 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한센인들에게 정말 선사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다.’
삶에서 고통을 느끼고 위기감에 두려워하고 실패의 아픔을 아는 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고통과 실패와 궁지에 몰리는 것이야 말로 자기 영혼의 병을 깨닫게 해서 인간을 하나님께로 진지하게 돌이키게 하는 유일한 방도인지 모릅니다.
내일의 성공만을 지향한다면 우리는 항상 불안과 불만족 속에서 살얼음판 같은 매일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기쁨과 눈물, 성공과 실패를 통해 우리를 인간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사람과 다른 것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믿음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내일도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뜻인 줄 믿으시고 다만 오늘에 충실한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3. 가나안의 종교는 물질세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영과 교류할 수 있게 창조 된 영적인 존재입니다.
죄로 인해 영의 감각을 잃은 사람들은 그래도 본성적으로 영적인 세계를 갈망합니다.
영적인 세계가 뚫리지 않은 것에 대한 답답함과 불만족이 무의식 속에 깊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귀신영화, 사령카페, 주술, 이런 영의 세계에 사람들은 은근히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돼지머리를 놓고 반신반의 지내는 고사라고 해도 고사상에 절하는 순간은 사뭇 진지합니다.
사람에겐 영적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그 세계를 맛보고 싶어 하고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영적 탐구심이 있습니다.
신명기12장30절에서 그런 본성에 대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지나치게 영에 속한 일, 신비한 일을 탐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라고 하며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적인 현상들을 느끼고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은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신 세상에 없는 기적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기는 커녕 예수님과 나사로를 같이 죽이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기적과 체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진지한 신뢰와 존경에 의해 생깁니다.
천 번의 기적을 본다 해도 그걸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바닷물처럼 출렁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사랑과 인자하심은 결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의 인격과 사상과 나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양심적으로 볼 때 의구심이 드는 이상한 기적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의 인격을 믿겠습니까?
우리가 어느 상대를 믿으려면 상대가 바른지를 알아야 하고,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지 알아야 하고, 진짜 내 편이 되 줄지를 알아야 하고, 믿게 되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기적 한 번 보고 기도 응답 한번 받았다고 우리가 하나님께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확인하고, 삶을 통해 경험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가며 점점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인근에 이단성 있는 모교회가 들어오려고 리모델링 중입니다.
사람을 쓰러트려서 뭘하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쓰러지고, 금니가 나오고, 아픈 곳이 낫는 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굉장하게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그래봤자 쓰러진 사람은 다시 일어나고, 나았다던 곳은 며칠 지나면 다시 아픕니다.
요즘은 목사들이 교회부흥을 위해 앞을 다투어 이런 기술들을 배우려고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복을 빌고, 장래의 흉한 일을 막아보려고, 혹은 영적 호기심으로 사탄이 짜놓은 판을 기웃거리지만 성령께서 주신 미각을 가진 우리는 그런 곳에 가면 맛이 다르다는 것을 금새 느끼게 됩니다.
어금니가 금니로 변하고, 짧았던 한 쪽 다리가 길어져서 맞춰지고, 사람들이 벌러덩 쓰러져서 인사불성이 되게 하는 그런 집회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역자는 사람들을 강단 여기저기를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하며 우월감에 가득 찬 사악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그렇게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집회에 선하고, 아름답고, 평안하고, 주님의 법도를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열광하고 군침을 삼킬 뿐이지 돌이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무질서하고 이상한 현상들이 난무하는 집회에 빠지는 사람들은 점점 현실에 조화를 잃어갑니다.
영적인 것만 대단하게 보고 사소한 현실에 대해 비상식적으로 행동합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일만 대단하게 아니고 일상적인 일들도 소중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목수로서의 평범한 일상을 30년이나 사셨습니다.
기적과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 곳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성령의 아름다운 성품이 아니라 점점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런 악한 영들의 혼잡함에 대해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세상은 본성을 좇아 길흉을 말하는 자와 점쟁이들의 말을 구하며 자신을 더럽히지만 너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본성을 따라 이렇게 우리를 미혹하는 가나안의 종교성을 떠나 어떻게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15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답을 주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 배경은 40년 전, 출애굽한 부모세대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뵙고 율법을 받을 때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시내산)에서 불과 뇌성 가운데 강림하셔서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법을 일러주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지만 법을 반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신명기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눈 앞에 펼쳐지는 불타는 산과 뇌성과 번개와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때 인간이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한 심판을 직감하고 깨닫는 두려움이죠.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않도록 당신이 말씀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달라고 요청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그 일을 하라는 허락과 함께 장래의 일어날 일을 하나 덧붙이신 것입니다.
‘내가 장차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내가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겠으니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지키라’
도대체 장차 보내주실 모세와 같은 이 선지자가 누구겠습니까?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고 나왔고, 시내산에서 두려워하는 백성들과 엄위하신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로 섰던 그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누굴 말씀하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를 죄의 종에서 건져 구원해주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하신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6장14절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우리에게 말씀하실 ‘그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오신 목적에 대해 요한복음6장38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죄의 본성에 따라 조작 된 가나안의 영성을 버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 선지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가나안의 종교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마귀가 제공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호하는 그것들이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교회 안팎에서 성도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지금도 미끼로 던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나안사람들이 쫒던 거와 같다면 그들과 같이 실패할 것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시고 경고합니다.
휘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우리의 자유를 찾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주인을 찾는 데 있다
인간이 풀고 싶어 하는 모든 고통과 문제의 해법은 단 한가지입니다.
본래 창조의 목적대로 주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을 섬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바로 ‘그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을 알고, 말씀대로 행하는 삶이 가짜 금가루가 휘날리는 집회보다 감동이 없고 밋밋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적이 사람을 뒤집는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틴도, 루터도, 웨슬리도 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 그 앞에 감격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기록된 문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말씀이 우리 마음을 뛰게 하시고, 눈물이 나게 하시고, 주님처럼 거룩해지고 싶은 신앙감정이 뜨겁게 솟구치게 하셔서 역동적인 삶을 저력 있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런 말씀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길 기도하며 영적 분별력을 갖고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 바른 믿음에 서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5년7월5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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