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신명기24장10절-13절 (너의 공의로움)

남수연 2018. 6. 6. 01:44

지난 주엔 은혜로운 초청설교로 특식을 드셨고, 오늘은 다시 집밥입니다.

집밥은 좀 밍밍하죠.

경주 최부자집이라는 유명한 가문에 대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부자가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지만 최부자집은 사백년간 부자의 대를 이어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문 부잣집입니다.

이 가문엔 대대로 이어오는 놀라운 생활의 철칙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흉년에는 절대로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엔 흉년에 쌀이 떨어지면 전답을 팔아서 식구들이 연명했습니다.

오죽하면 흉년에 흰 죽 한 그릇에도 논을 팔았다고 해서 흰죽논이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서민 경제가 어려울 때 오히려 부자들에겐 재산을 불릴 기회가 되죠.

이렇게 남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해 돈 벌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파장에 물건을 사지 말라는 철칙이 있습니다.

파장에는 상인들이 손해를 감수하고 떨이로 물건을 팔잖아요?아침에 나가서 제 값 다 주고 물건을 팔아 주라는 것입니다.

재산도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고 아예 정해 놓았습니다.

재산이 만석을 넘어가면 무조건 빈민에게 풀어 구제하라는 것이죠.

또 사방 백리엔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했습니다.

백리면 40킬로미터입니다.

사방 사십킬로의 빈민을 책임지겠다니 정말 대단한 배포죠.

그런 부잣집임에도 불구하고 며느리가 들어오면 삼년동안은 무명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검소한 생활을 먼저 몸에 익히게 했던 것이죠.

해방 뒤에 우리나라가 어려웠잖아요?

나라를 살리려면 인재를 키워야한다는 신념으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선생이 모든 재산을 팔아 영남대학교를 세우고 만석꾼 부자집의 명맥은 끝이 났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정말 대단한 가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한 가정의 가훈만 봐도 그 집안 어른들이 어떤 인격과 가치관을 가졌는지를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신명기서는 모세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죽음을 앞둔 백이십세의 모세가 광야생활을 끝내고 이제 곧 가나안땅으로 입국하게 될 백성들 앞에서 설교한 내용이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나라를 세우게 되는 데 법이 필요하겠죠.

하나님이 주신 국가의 법령 12장부터 26장에 거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율법이라고 하죠.

오늘 말씀이 법령입니다.

이 법령에는 아주 세세한 생활의 법까지 지정해 놓았습니다.

오늘 말씀도 전당 잡은 물품의 취급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하잖아요?물론 이 율법들은 삼천년이 지난 우리 사회와는 많이 다릅니다.

신명기 율법을 대하는 관점은 먼저 이런 법을 제정하신 분의 마음과 인격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최부자집의 철칙에서 그 집 어른들의 인품과 가치관이 드러나듯이 율법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봐도 이런 법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 느껴지는 게 있잖아요?그리고 그 안에 있는 법정신을 배워 현실에 적용해서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면에서 본문 말씀을 살펴볼 때 오늘도 모두에게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오늘 법조항에서 어떤 하나님을 보여주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율법은 담보물을 잡고 돈을 꾸어 주는 경우입니다.

지금은 물건을 담보로 돈을 꾸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우리 젊을 때만 해도 전당포가 많았습니다.

데이트하다 돈이 떨어지면 남자들이 슬쩍 나가 손목시계를 전당포에 맞기고 데이트 비용을 급조하기도 했었죠.

어머니들 금반지는 급전이 필요할 때 제일 먼저 전당포 행이었습니다.

오늘 법령은 돈을 빌려 줄 사람은 돈 빌리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전당물을 갖고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빌릴 사람이 자기 집에서 물건을 가져 나오면 밖에서 받으라는 것이죠.

또 돈 빌린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단벌 겉옷을 담보물로 잡혔다면 그것은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합니다.

당시 서민들의 겉옷은 잘 때 덥고 자는 담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해지면 돌려 줬다 해 뜨면 다시 받았다 그런 것을 반복해야 되는 이상한 법을 만들어 놓은 셈이죠.

아마도 몇 번 이러다 보면 귀찮아서라도 담보 잡은 옷을 그냥 돌려 줬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궁핍하다면 좀 봐줘도 되지 않겠냐는 속내가 담긴 조항 같죠.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 국민들이 실제적으로 지켜야 할 법이었습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법개념과 많이 다르죠.

일반법이 남에게 손해가 되는 행동만을 규제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거기에다 선을 행할 것 까지 요구합니다.

기독교는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나만 잘 살면 되는게 절대 아닙니다.

돈을 돌려받을 때까지 담보를 갖고 있는 것이 세상법인데 율법은 반드시 해지기 전에 가난한 채무자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채권자 쪽에서는 오히려 불공정한 법처럼 보이죠.

사실은 불공정이 아니라 그게 공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뒷 부분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본문 다음에도 보면 추수할 때 곡식단을 나르다 좀 떨어진게 있다면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라고 합니다.

추수할 게 없는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이 갖다 먹게 하라는 것이죠.

감람나무, 포도나무 과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은 정의만 구현하는 게 아니라 긍휼과 사랑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자연히 약자를 배려하는 율법이 되는 것이죠.

우리도 살다보면 때로 채무자가 되기도 하고 채권자가 되기도 합니다.

누구나 약자의 입장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평생 빚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가계 빚, 사업자금, 주택자금, 학자금 대출, 자동차 할부금, 작게는 스마트폰 할부금까지 일반 서민들은 빚내서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난 때문에 돈을 꾸어본 사람은 하나님이 돈 빌리는 사람 마음을 어쩜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은행에 대출만 받으러 가도 왠지 위축되고 좀 창피한 느낌이 들잖아요?

창구 직원이 자기 돈 주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런 마음이 듭니다.생활비가 떨어져 가재도구를 담보 잡혀야 되는 사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집에는 애들도 있고 아내도 있는데, 채권자가 들어와 가난한 살림을 이것저것 들춰보는 것이 얼마나 곤욕이겠습니까?

그렇잖아도 참담한 마음에 더 이상 굴욕감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 높으신 하나님이 최저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하시고 자존심을 걱정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빈민을 동정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 입장에서 공감하지는 못합니다.

저들은 본래 저렇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고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죠.

우리도 남의 곤경을 내 일처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자식일지라도 커 가면 우리가 그 마음 다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고통을 그대로 느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르실래야 모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학정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잖아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 근심을 알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죠.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하나님이 저 멀리 어느 곳에서 내 사정도 모르고 초월해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실뿐 아니라 지금 내가 겪는 고통과 아픔도 그대로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그걸 당연히 해결해 주고 싶으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우리의 죄와 사망의 고통을 통감하시고 구원하실 예수님을 보내주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약자의 슬픔을 깊이 동정하시는 하나님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을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알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실제 하나님의 만분의 일 정도나 될까요?

조만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진짜 하나님을 뵈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정말 놀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자하신 하나님보다 더 인자하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권능의 하나님보다 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룩하셔서 경외심에 떨면서도 섬기고 싶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우리를 완전하게 아시고 더 깊고, 더 진실 되게 우리를 쭉 사랑해 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길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모든 게 형통하고 부요할 때도 있지만 하나뿐인 겉옷을 담보 잡힐 만큼 곤궁한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넉넉하다면 도움이 필요한 자를 우리에게 맡기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시길 바랍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면 모든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어떤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음은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율법 조항에 심오한 해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법률은 그냥 지키면 되는 것이죠.

이런 법령들은 그냥 알고만 있으라는 게 아니라 지키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목적이 무엇입니까?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을 요구하시는지 알고 지키기 위해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생각으로 판단하라는 게 아닙니다.

성경말씀이 나를 판단하게 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말씀에 나를 바꿔가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초기역사엔 목사가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생활 속의 사례를 들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질문하면 목사는 성경을 찾아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알려 주는 것이죠.

질문을 하고 성경에서 답을 찾고 그렇게 살아보자고 서로 격려하는 것이 설교였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어려운 이웃이 돈을 빌려 달라는데 어떻게 하냐고 물어 오는성도가 있다면 그 답을 신명기 15장에서 찾아 주는 것이죠.

,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군요.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리고 오늘 말씀을 들어서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공의로움이 된다고 알려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 역시 들은 말씀대로 내게 도움을 구하는 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착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꾸준히 훈련해야 하듯이 남에게 베풀고 도와주는 것도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하지 않은 것은 결국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 걷기입니다.

그나마 처음엔 너무 못 걸어서 집에서 삼백 미터 남짓한 장미공원 까지 가는 것도 큰맘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더 안쪽 잔디광장까지 걸어가고, 그 다음은 그 잔디광장을 두어 바퀴 더 돌다가, 지금은 넓은 산책코스를 다 돌아서 옵니다.

계속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지 않았다면 지금도 잔디광장만 겨우 돌고 있을 것입니다.

다음 목표는 토성에 올라가서 도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의 원리도 똑같습니다.

깨달은 것을 자꾸 생각하고 지키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믿음의 수준과 인격은 항상 제자리인 것입니다.

구두쇠 스쿠루지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이 최부자집도 하루 아침에 된 것은 아니잖아요?

지난 주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모두가 성령을 받길 사모했을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는다고 뭐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골수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죠.

성령 받았다고 현실적인 두려움과 망설임이 다 없어졌겠습니까?성령 받는다고 완전히 딴 사람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여전히 나일뿐이고 신비한 힘이 나를 부추겨서 자동으로 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문제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시키시고, 우리 스스로 결단하도록 거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행동은 항상 우리 자신의 의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저절로 남에게 호의가 베풀어지는 게 아닙니다.

말씀들을 때 감동을 받았어도 시간이 좀 지나면 점점 현실적으로 계산하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랬잖아요?

처음엔 감동 받아서 밭을 팔았는데 구제하려다 보니 왠지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는 숨겨두고 일부만 가져가잖아요?

경건생활도 훈련이고 이웃사랑과 섬김도 훈련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말씀을 많이 듣다보면 알고 있는 것만큼 된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도 듣고나서 그만이면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예수님은 오히려 알기만 많이 알아 남을 비판하기만 했던 종교인들을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들을지라도 아무 것도 지키지 않는 그들의 행위는 절대로 본받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나와 가족들이 살아가기도 팍팍하고 버거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베푼 냉수 한그릇을 기억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꼭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율법은 그 안에 담긴 정신이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꼭 물질이 아니라도 내게 있고 남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이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가장 위대한 것, 남들에겐 없는 예수님의 복음과 믿음이 있잖아요?

비신자들은 영적 기근으로 숨이 끊어질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도와줘야 맞는 것입니다.요즘은 전도지 나눠주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믿자고 해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밖으로 나가서 교회주변 청소봉사하며 나름 전도했잖아요?

정말 수고들 많으셨습니다.그날도 한 분이 차를 타고 지나가시며 인사를 하시더군요.

우리가 교회이름 쓴 어깨 띠 차고 나가 청소하면 말 안 해도 사람들이 왜 봉사하고 있는지 다 압니다.

청소한다고 교회를 찾아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귀찮게 전도지 준다고 욕하지는 않습니다.

화요일에도 저하고 한 권사님하고 청소하며 동네를 돌았습니다.

청소를 하다 보니 왠지 이 지역을 제가 접수한 것 같아 뿌듯하더군요.

그런데 유심히 보니까 우리가 청소하는 곁을 지나는 차들이 하나같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지나가는 겁니다.

안에서 지켜 보고 고마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것이죠.

작은 교회에서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도와주면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무엇이든 어려운 이웃에 우리 가진 것을 베풀 수 있습니다.

청소년부는 공부 잘해서 옆에 친구 좀 도와줄 수 있잖아요?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도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족들도 각자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지치고 힘겹게 살아가잖아요?

그러나 현대의 가정은 다 갈등이 있고 화목한 가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족이라도 이미 서로 간에 상처를 주고받았고 서로 간에 실망한 일들이 있어서 늘 좋은 마음으로 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 그런 상처들이 되살아나거든요.

그렇기에 가정에서 오히려 더 냉냉함과 불행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 스스로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있잖아요?

지쳐 들어온 식구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친절하게 말하고 서로를 도닥거려 주면 그게 바로 오늘 율법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청소년부, 부모님이 일 마치고 들어오시면 수고많으셨다고 꼭 인사하세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천성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한 우리 자신과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맞춰 스스로를 바꾸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설교말씀과 성도간의 교제와 성령님의 은혜는 그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큰 구제나 봉사는 아니더라도, 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남을 위해 조금씩이라도 베풀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매일 연습해 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약자의 입장에 공감하고 선을 베풀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너의 공의로움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착한 일이라고 하지 않고 왜 공의로운 일이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공평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처음 가나안 땅을 소유할 때 모든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모두가 다 똑같이 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균등한 복을 누리는 것이라는 상징입니다.

그러니 어쩌다 남보다 더 가진 내 것이 마땅히 저들이 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선행이기보다 공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는 선심써서 남을 돕는 게 아니라 마땅히 도와야 한다고 18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본래 우리가 영적으로 거지였고 사탄의 종이였다는 말씀입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는지를 돌이켜 보면 가장 힘들고 곤고하고 의지할 곳 없어 허덕일 때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건져내서 이런 축복을 주셨으니 그것을 잊지 말고 그런 처지에 있는 타인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어느 누구도 멸시받고 무시당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시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다못해 텔레마케팅하는 분들의 전화에 얼마나 불친절했습니까?

전단지 나눠주는 분들의 손을 야박하게 지나치지는 않았나요?나보다 배운 게 좀 부족하다고, 나보다 가난하다고, 나보다 덜 똑똑하다고, 성격이 이상하다고, 믿음이 없다고, 무시했던 마음을 오늘 바꾸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악이 고쳐질 때까지 침묵하실 것입니다.

내가 돕지 않는데, 우리를 도우라고 누구를 보내주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땅한 순종에도 꼭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인정을 베풀 때 너희 중에 가난한 자들이 없을거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가난한 자만 도움을 받는 게 아닙니다.

최부자집처럼 두루 베풀어도 절대 가난해지지 않을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것으로 섬기고 봉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눌수록 그것이 더 풍성해 질 것입니다.

내겐 아무 것도 없다, 도와줄 사람도 없다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릴 그렇게 불행하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고 먼저 마음을 넓게 연다면 우리의 공의로움을 세우도록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크게 복을 주시고 더 많은 일로 하나님과 세상에 기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2018년6월3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