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광야를 기억하라 (신명기8장1절-10절)

남수연 2012. 5. 23. 13:55

오늘 본문은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 진입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백성을 향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출애굽1세대가 이미 광야에서 다 죽었고 모세 자신도 이 당부를 마치면 느보산에서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2백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통솔해서 40년간 광야를 떠돌았던 그의 삶에 어찌 회포가 없겠습니까?

황량한 광야에서 텐트를 치고 40년을 보냈다니 참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제가 계산해보니 하루에 성인 40여명씩 순서대로 죽어나갔더군요.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을 꿈꾸며 비록 종살이였지만 4백년 삶의 터전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전갈과 불뱀이 있는 두려운 광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야를 만났을 때 그들은 새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눈 앞에 위기가 닥칠 때 그들이 겪은 열재앙의 기적도 홍해의 기적도 아무 힘이 되지 못한 걸 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에서 광야를 만날 때 세상의 삶을 돌아다 봅니다.

결국 우리가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건 기적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이 없었던 것이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의심 가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한다고 처음부터 말했다면 그들은 아마 모세를 따라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빌리그래이엄 목사의 손자인 튤리안 챠비진목사가 쓴 ‘나는 하나님이 정말 싫습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싫어 도망친 요나선지자와 끝까지 추격전을 벌이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보면 억지로 따라 나온 그들이 매일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고함치는 게 느껴집니다.

얼떨결에 따라 나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거룩한 서약을 했지만 도저히 하나님과는 같이 갈 수가 없다고 매번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하나님이 정말 싫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이 오히려 모세와 머리를 맞대고 쩔쩔매시는 것 처럼 보입니다.

마치 칼자루를 못 된 이스라엘이 잡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이기 때문이죠.

시편 95장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나 열 번이나 하나님을 배역하고 가나안 땅 정복을 거부한 그들은 결국 징계를 받아 광야40년을 떠돌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죽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2세대를 이끌고 드디어 하나님은 약속의 땅 앞까지 오신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고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이 연약한 우리들도 이끌고 반드시 축복의 땅에 이르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우리 믿음의 여정을 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고된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교훈하시며 믿음을 더 견고하게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먼저 본문1절에서 모세의 첫 번째 당부는 가나안 땅에서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법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로 살아가려면 우리의 죄성과 사탄의 사상이 혼합 된 이 세상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애굽의 노예로 4백년을 살아 온 이스라엘의 생각과 생활방식은 철저히 애굽화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36년 강점기의 잔재가 60여년이 지난 아직도 남아있지 않습니까?

일제가 의도적으로 바꾼 지명도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청와대 뒤 인왕산의 경우도 본래 임금왕자이던 한자를 성할 왕자로 바꾼 것인 데 여전히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수서동도 본래는 궁이 있던 곳을 일컫는 궁촌이었다는 데 서쪽 강이라고 바꿨습니다.

왕과 관련 된 지명들을 다 바꾼 것이죠.

한반도라는 말도 반쪽 섬이란 뜻으로 일본열도만 온전한 섬이란 뜻으로 만든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4백년 동안 애굽의 우상문화가 이스라엘 전통문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죠.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대뜸 그들이 만든 게 애굽의 금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광야생활 중에도 그들이 우상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숭배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랄 일입니다.

사도행전7장42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하나님 면전에서 몰록 신과 토성을 숭배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십계명을 노골적으로 위반하고 애굽에서 섬기던 형상을 은밀히 만들어 장막에서 숭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싫었던 것일까요?

하나님도 결국 그들을 싫어 버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결단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이 애굽의 풍습을 연모하듯 불경건한 세속을 못 떠나는 성도들이 두려워해야 할 말씀입니다.

은혜를 체험하고도 세상이 너무 내 몸에 잘 맞는 옷 같아 결국 돌아가고 마는 사람들을 볼 때 참 안타깝죠.

그래서 우리 1세대들은 참 세상 때를 벗기가 힘든 걸 봅니다.

우리 2세대에게 더욱 하나님나라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남겨진 그들의 2세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오직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섬겨야 합니다.

명령에 대한 반응을 보면 상대방에 대한 순종과 신뢰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에 대한 순종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여전히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름 만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성도에게 능력이 있고 그런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요한일서 3장 22절은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기도하고 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근거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무조건 기도만 한다고 되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때를 기다리게도 하시지만 말씀대로 행함이 없는 기도라면 응답될 확률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이 아무렴 세상 윤리와 정의에도 못 미치겠습니까?

이 땅에서도 노력한 만큼 거두고 불의한 일에는 처벌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도들의 거룩하고 온전한 삶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십니까?

정말 복 된 삶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우리의 공로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정말 체험적으로 만났다면 우리가 예배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드려야 맞는 것입니다.

야고보서2장19절을 주목하십시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믿음이 연약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대로 지키려는 선한 의지가 아예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는 것이죠.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진짜 있는 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그 태도로 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죠.

오늘 모세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거룩한 면전에서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멸망한 그들의 자식들을 향해 다시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알고 예배하러 나오셨나요?

하늘에 끌어올려가 천국을 보고 온 바울사도가 말씀합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도를 사랑하고 힘써 지키시길 당부드립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실 주권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켜 축복의 땅에 거하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리고 2절에 보면 모세는 이들에게 광야를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광야는 우리 신앙 여정에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도성을 탈출 해 광야의 길을 걸어 천국의 도성을 향해 걸어갑니다.

천국을 향한 여정엔 반드시 광야를 거쳐야 한다는 게 출애굽의 교훈입니다.

애굽을 탈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광야도 없을지 모릅니다.

악인이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을 보고 시험에 들 뻔한 선지자들도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애굽을 벗어나 천국을 향해 방향을 돌린 사람들에게 광야가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된다고 들었는 데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냐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곳이 아직 축복의 땅이 아닌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곳이라 우리로 그곳을 지나게 하십니다.

다만 40년이란 이렇게 긴 광야생활은 본래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의 1장 서두에서 모세는 애굽을 탈출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입구인 가데스바네아 까지 가는 데 꼭 열하루가 걸렸다고 상기시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까지 반드시 지나서 통과해야 할 광야 길은 본래 열하루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열 하룻 길인 그 짧은 광야길에서 보인 그들의 불순종과 원망이 40년 광야기간을 확정했다는 것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죠.

우리도 열 하루에서 40년 사이의 광야 기간을 배정 받았는 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서 구원받은 자녀들을 훈련하고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광야를 통과한 사람들은 저주받을 광야라 하지 않고 광야 학교라고 부릅니다.

광야학교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펴봅니다.

첫째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는 곳입니다.

광야는 물이 없어 파종하고 농사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어디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가져간 음식이 바닥나면 굶주려 죽을 수 밖에 없는 곳이죠.

3절에 보면 너를 낮추기 위해 주리게 하시고 만나를 먹이셨다고 말씀합니다.

만나는 기적의 음식입니다.

그러나 단 하루 분씩 공급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더 거둘 수도 없었고 오늘 아껴먹고 내일을 위해 비축해 두었다간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단 하루 분량의 양식만을 내려주는 게 광야의 삶입니다.

왜요?

우리의 교만한 본성을 다스리고 낮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비축해 둔 양식과 돈이 없으면 맥을 못추게 되어 있습니다.

콧대가 높은 인간이 무엇 때문입니까?

지식 때문도 건강 때문도 자녀 때문도 이유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먹고 살만한 돈이 있다 이겁니다.

잠언 18장 11절을 보면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

그러니 돈이 없어야 인간이 낮아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도록 양식을 다 털어내시고 광야의 만나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셔서 죽어도 만나를 먹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 어릴 적에 쓴 약 않 먹으려면 막 입을 벌리고 강제로 먹였죠.

만나는 우리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하나님의 양식이며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적의 식량이라 할지라도 광야가 아니면 인간은 절대 만나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만나 항아리를 앞에 놓고 고기 가마 옆에서 국물이라도 얻어먹으며 종으로 살 때가 나았다고 서글프게 울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양식이 풍족한 한 절대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만나이신 자신을 주기 위해 예수님은 모든 것이 털리고 우리 마음이 낮아지고 상해있는 광야로 찾아오십니다.

쇼핑센터로 휘트니스로 오락장으로 찾아가지 않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생명의 양식되신 주님을 만났다고 간증합니다.

40년 광야 훈련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안착한 그들은 단 1세대 만에 믿음을 버리고 타락합니다.

우리에게 왜 광야가 필요하고 하루 하루 먹을 만나만을 공급하시는 지 알 수 있죠?

물질이 풍족해 발에 채이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믿음을 지키고 살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광야학교는 또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곳입니다.

극한 상황에 몰릴 때 하나님을 따라 나선 이유가 밝혀집니다.

이스라엘에게 준비한 음식이 다 떨어졌을 때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의존한 것도 양식이었고 원했던 것도 하나님이 아닌 오직 가나안의 풍족한 양식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양식이 떨어지자 그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변해 모세를 추궁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바닥나고 갑작스런 우환이 닥치고 성가신 일들이 발생할 때 하나님께 대한 우리 생각이 드러납니다.

아주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 반응을 잘 살펴 보십시오.

일이 원하는 대로 잘 안되면 아직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우리를 봅니다.

잠언 19장 3절에 말씀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스스로 선악과를 먹고 뭐 하러 저런 여자를 내게 줬냐는 아담의 책임전가가 바로 인간 속에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끝날 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어떤 곤궁 속에 빠져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미처 기도하지 못은 큰일들도 하나님께서 먼저 아시고 피하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사고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아서 다 막아주신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고 유약하게 키우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32장 11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마치 독수리 새끼를 키우시듯 너희를 키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광야에 있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 마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을 지켜보십니다.

원망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때 입을 틀어 막아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원망과 섭섭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나를 더 사랑하시는 정말 좋으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원망하면 그때부터 다시 40년이 시작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훈련시키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낮추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함이라.

복을 받아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유익한 복을 오래 오래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다듬으신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빠듯한 물질로 훈련하고 계십니까?

정함이 없는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란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루 하루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얼마나 지치고 힘든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인내심이 없는 걸로 치자면 등수 매기기가 어려울 사람들입니다.

정말 못할 것 같고 더 이상 못 견딜 것 같은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성질대로 한다면 여기 앉아있을 사람들 몇이나 될까요?

그런데 이젠 정말 내 믿음이 다 날라 가 버린 것 같은 낙심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내 자신이 바로 기적인 줄 믿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믿음의 자리에 두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이 광야에서 우리를 낮추시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셔서 마침내 축복의 땅을 유업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둘 째는 광야학교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웁니다.

광야는 절대 우리 힘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 중 광야를 만날 때 비로서 내 힘으로 안되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루 하루의 만나는 신실하게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현실로 체험하게 합니다.

하루의 만나를 거두어 돌아올 때 그들은 염려합니다.

내일 만나가 없으면 어쩌지?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무얼 먹고 살지?

그들이 얼마나 내일 먹을 것을 비축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단 하루 분의 만나를 주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도 내일 반드시 만나를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하게 합니까?

지진이 일어나 범죄한 자를 삼키기도 하고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진영의 일부를 불사르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들이 만나를 거두러 나갈 때 과연 하나님이 범죄한 우리에게 오늘도 만나를 내려주셨을까 걱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만나를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배워가는 것입니다.

광야학교에서 우리는 나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훈련을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신실과 기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4절에 보면 사십년 광야생활에서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광야 같은 삶에서 그런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매일 매일 우리 옷이 닳지 않는 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자리에서 보니 여전히 내 옷이 낡아지지 않았고 내 발의 신이 해어져있지 않은 걸 발견하는 것이죠.

이런 광야 가운데 기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날마다 담대합니다.

세상이 감당 못할 믿음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영화배우 차인0씨가 자신의 신앙의 멘토라고 소개한 김정0목사님이 있습니다.

IMF 때 실직을 하고 살 곳이 없어 산속에 오두막을 짓고 50마리의 개 사육을 하며 두 아이를 키웠습니다.

군대 짬밥을 가져와 개를 먹이는 데 정작 가족이 먹을 음식이 없는겁니다.

어느 날은 짬밥 통에 생선이 통째로 섞여 있어 씻어서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쌀이며 비누며 애들 간식까지 기가 막히게 군부대를 통해 매일 공급해주시는 거예요.

광야를 사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매일 먹을 만나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산불이 났을 때도 홍수가 났을 때도 간절히 기도하는 아이들의 기도대로 다 쓸려가도 이 오두막집만은 보호해 주셨습니다.

김목사님이 신학을 공부하고 성남으로 와 작은 교회를 개척합니다.

어느 날 기아 어린이를 돕는 컴패션 행사에 참석했는 데 천장에서 무수한 풍선들이 쏟아져 내리는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선물이 들어있는 줄 알고 풍선을 한 아름 받고 열어 보니 그 속에는 도움이 필요한 굶주린 아이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그 이름 적힌 쪽지를 버리자니 아이를 죽게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앞에 구두통을 놓고 구두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다섯명의 아이들을 그렇게 후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삼 년 전 그에게 루게릭병이 발병했습니다.

그는 루게릭병명이 밝혀졌을 때 할렐루야라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자신의 병으로 많은 루게릭환자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고 이 분의 삶이 보도되며 많은 사람들이 컴패션에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아무 말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그는 지금도 휠체어를 타고 전도지를 돌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지를 버리지만 남한산성에서 자살을 하려다 전도지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대형교회의 세습과 비리로 기독교 전체가 지탄을 받고 있는 이 때 그의 신앙이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얼마 전 60년대 우리나라에서 청계천 빈민목회를 했던 노무라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묻히고 싶다는 이야기가 국민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김목사의 아내 최사모님이 일본에 전화를 걸어 삼척에 작은 임야를 노무라 목사님을 위해 기증하겠다고 했습니다.

임야가 값으로 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앞으로 남편도 죽을 것이고 그의 유일한 재산이 될 임야로 기꺼이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절대 죽지 않습니다.

광야는 그들을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연단시킵니다.

5절에서 광야의 고통이 때로 우리의 죄로 인한 징계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자식을 징계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 된 삶의 모습을 신실하게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망하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상당부분은 우리 죄 문제에 대한 징계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징계보다 크십니다.

우리의 모난 곳을 고쳐 가시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시키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시고 말씀을 따라 자신을 살피고 죄에서 돌이키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약속의 땅에선 밀과 보리와 포도와 무화과와 꿀로 꿈같은 식탁이 차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축복의 땅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 광야의 노정에 있습니다.

평탄하지만 아무 감동도 없는 메마른 곳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울퉁불퉁한 돌 산을 넘어가며 목이 마르고 신경이 예민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험을 이기고 통과하십시오.

옳다 인정함을 받은 뒤에는 안식과 축복과 평강의 시간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생각하기 전 말하기 전 행동하기 전 수시로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지 비추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계명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축원드립니다.

광야는 우리를 낮추시고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기억하시고 하루 하루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천국에 이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