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저 안식에 들어가길 힘쓰라 (히브리서4장1절-16절)

남수연 2014. 6. 18. 00:02

지금 제가 묻는 질문에 마음 속으로 한번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으니 우리는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까?

이 대답에 가장 자신있게 예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세월호사건의 배후에 있는 구원파 이단입니다.

한번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죄를 짓고 죄책감을 갖는다면 예수님의 속죄를 의심하는 것이니 구원을 받지 못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부도덕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예수님의 속죄를 믿으니 회개하지 않는 게 구원파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지금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구원을 잃을 수도 있습니까?

본문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또 1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뜻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세대가 구원의 약속을 받고 애굽은 떠났지만 도중에 불순종해서 가나안 땅에는 못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에게 하는 말씀이냐 하면 3장 서두를 보면 분명히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라고 부른 성도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는다면 선조들처럼 탈락 될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이르기 까지 힘쓰지 않으면 과거의 이스라엘처럼 도중에서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값싼 복음’이란 말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속죄하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하면 과연 구원을 받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접기도를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낸 기도’라고도 합니다.

그 기도를 따라 했다고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았냐는 것이죠.

여기에 장로교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또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견인이라는 교리는 한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리는 칼빈주의인 우리 장로교에만 있는 교리입니다.

감리교 교회에서는 그렇게 설교하지 않습니다.

현재 구원을 받은 신자라 해도 구원받은 자의 자격과 조건을 신중하게 유지해가지 않으면 나중에 구원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입니까?

왜 이런 상반된 교리가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안에 이 두 가지를 주장할만한 말씀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두 말씀 사이에서 긴장관계를 갖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구원을 이미 받았다는 것이고, 그 구원을 놓치지 않게 조심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구원을 견인해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정말 구원받은 믿음이라면 반드시 성령님이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거룩한 의지가 생긴다고 봅니다.

하나님도 붙들어 주시고 우리 자신도 아름다운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 전념한다는 것이죠.

지난 2007년 성령강림 백주년 집회에서 10만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 때 고 옥한0 목사님이 기도를 인도하실 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나는 교회의 양적 성장에 눈이 멀어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설교해왔습니다. 행위가 있는 믿음이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그런데 옥한0 목사님은 그 후 한 기독교 모임에서 여러 목사들로부터 “좋은 날 왜 그런 설교를 했느냐”고 핀잔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설교하면 교회 의자가 채워지는 게 아니라 점점 비어가는 게 정상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무작정 목사들의 말을 믿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도가 지금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시련과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다 잘 될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힘든 상황을 출애굽 광야세대와 비교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생활을 하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형편을 합리화하고 환경에 주저앉아 제대로 믿음생활을 하지 않으면 약속하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거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믿음을 향해 출발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해있다고 다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고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배우고 성경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성경대로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 믿음생활의 끝이 무엇일지 보장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고 타협의 여지가 없이 마태복음7장21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분명히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출애굽한 광야세대는 왜 구원받지 못했을까요?

그들이 왜 구원의 초청을 받고 그 안식의 땅을 향해 출발했음에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오늘 본문2절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은 자이나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다.

또3장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광야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안식을 얻기 위해 현재 세속에서 출애굽한 현대판 성도들이 구름떼 같이 축복의 땅을 향해 밀려가고 있습니다.

출애굽세대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분명히 현재의 성도들 중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해야 합니다.

출애굽세대가 실패한 역사를 살펴보고 우리 믿음의 여정을 점검해 볼 것을 오늘 본문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했다고 말씀합니다.

열 번은 숫자적으로 딱 열 번은 아닐 것입니다.

번번이 모든 일에 불순종했다는 뜻입니다.

단지 가데스바네아 정탐사건 하나 때문에 가나안을 놓친 게 아닙니다.

이들의 불순종 사건을 몇 가지를 우리 믿음의 삶에 맞춰 살펴보며 현재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올바른지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게 우리 믿음의 길을 판단하라는 말씀이겠죠.

광야세대의 실패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가나안을 향한 여정의 불편한 환경 때마다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그들이 험악한 광야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때로 당장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진행하는 여정인 데 마음이 상할 정도로 힘겨운 코스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힘들긴 해도 반드시 통과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오아시스만 지난다면 왜 광야라고 하겠습니까?

출애굽의 광야는 우리의 믿음의 여정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도 메마른 열풍에 갈증과 피로를 느끼는 극도의 난코스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심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환경이 우리를 가시처럼 찌르고 정신없이 삶을 흐트려 놓을 때 우리의 마음이 상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게 맞기나 한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게 하시나?

하나님은 더 이상 나를 인도하지 않으시는걸까?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에 대해 믿음이 흔들리며 불신이 그 때 슬그머니 고개를 내밉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듯이 점점 노골적으로 신세를 한탄하고 환경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불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굴곡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으로 그 분의 완전하신 사랑과 약속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깎아 내리는 질이 나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에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밝힙니다.

우리가 형통하게 일이 풀릴 때나 앞이 꽉 막힌 절벽처럼 느껴질 때나 선하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견고히 믿음을 구원에 다 이르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음은 결정적인 가데스바네아 사건입니다.

약속받은 가나안 땅에 감당치 못할 적이 버티고 있을 때 믿음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이스라엘이 절망하고 주저앉은 데는 결정적인 두 가지 죄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 좋고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는 태도입니다.

장애물이 막히니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구원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을 간절히 열망하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강한 불신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들여보내십니다.

가나안의 강적들이 아무려면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앞을 막아선 문제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하나님께도 해결 못할 고민거리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능을 확신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확신하는 것을 하나님은 불신앙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현재 내 처지에 알맞게 실망하고 싶어 합니다.

내일의 원대한 비전이 내게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지 못한 옛 죄인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꾸려나갈 수 있는 정도만 믿는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시고 더 보람된 인생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거부하는 명백한 불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축복을 눈 앞에 두고도 아낙자손을 두려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결국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장래를 허탈하게 생각하고 현실만이 전부라고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며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 역군들이 되기를 강하게 소망하십니다.

우리를 천국백성으로 부르신 것은 이런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과거와 똑같은 삶에 안주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천국에 대한 확고한 열정을 갖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가길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한가지만 더 살펴본다면 이스라엘이 매일 먹는 만나로 인해 하나님께 불평했던 사건입니다.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메마른 광야에서 이리 저리 유랑하는 장막생활 중에 어디서 음식을 얻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새벽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 주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가 아니면 2백만명의 생존은 불가능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농사지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매일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지겨워 죽겠다고 그들이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고 보장해주시는 일상이 지루하고 그날이 그날 같아 염증을 느끼는 삶을 말합니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나와 가족들이 무탈하게 나날을 보내는 것이 예사로운 일입니까?

순식간에 생명과 건강과 일상의 행복을 탈취당할 조건이 충만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소박한 행복을 감사하지 못한다면 광야세대의 불행이 우리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번번히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했던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결국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우리 삶이 광야세대의 삶과 얼마나 비슷합니까?

이런 일들을 만날 때 마다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자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천국의 안식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노정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삶에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반응이 여전히 내 죄의 본성에서 나오고 내 머리로만 판단하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고 있다면 그게 바로 광야세대의 삶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들도 불평할만해서 불평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세상적 가치로 봐서는 문제될 게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멸망당할 세상적 가치와 죄악에서 우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말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거룩한 책임과 임무도 따라옵니다.

불평하고, 범죄하고, 영적으로 태만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며 독단적으로 광야를 걸어가도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오늘 사도는 경고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서신중에서 밝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견해로는 바울사도일 것이라고 봅니다.

바울은 그의 선교와 목회 활동 중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다 배교하고 믿음에서 파산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 1장 2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 안하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중에 데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바울사도가 동역자로 인정할 만한 사람이었고 바울조차도 그가 믿음을 저버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분명 믿음의 배를 탔었지만 많은 성도들이 파선하는 것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노사도가 노심초사하는 것은 그의 성도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교회에 잘 다니다가 변심해서 믿음을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하루 세속과 나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목적지 축복의 땅에서 저만치 멀어지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을 제어하며 살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히브리서 2장 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자들이 죄를 지었다고 천국에서 끌어내릴 수 없다.

그러나 신자들의 마음에서 천국을 끌어내릴 수는 있다.

본성대로 사는 삶은 적어도 우리를 일상에서 천국의 안식을 뺏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죄가 일상이 될 때 결국 우리에게서 천국 자체를 뺏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으로 채워진 인생의 끝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칼빈의 견인의 교리,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한번 구원받으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은 당시 카톨릭의 지나친 행위구원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도 영향을 준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행위구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이 견인교리로 인해 순식간에 사람들은 도덕적, 윤리적 책임에서 방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이 3년 동안의 철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개신교 신자들이 신봉해야 할 교리를 제정하게 되는 데 이것이 웨스터민스터 신조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렇게 확정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데에 진력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어서 영생을 얻게 된다”

아무렇게나 살면서 예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을 연구한 결과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배교를 목격한 바울사도가 이렇게 목이 타게 말하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의로운 삶이 없는 한국교회엔 값싼 복음, 구원파적인 복음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김00박사가 이런 한국교회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한번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면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배운 사람들에겐 단 몇가지만 하고, 몇가지만 안하면 된다는 기독교 윤리밖에 없다는 것이죠.

주일성수·헌금·전도 세 가지만 하면 되고, 술·담배·제사 세 가지만 하지 않으면 훌륭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술 담배 문제 같이 음식을 가리는 문제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가장 많이 논쟁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터부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교만, 음란, 거짓말, 탐욕, 방탕 기타 등등 이런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눈에 보이는 단순한 문제에만 집착한다는 것이죠.

성도들의 이런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 성경은 간단히 두 가지로 요약해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술마시고 담배피우는 게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사랑의 관점에서 누구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술마시고 담배피우고 주일성수 문제에 자유한 것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실족하게 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런 류의 것만을 우리가 지키고 행하는 것이 믿음의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바쳐진 백성은 더 적극적으로 세상의 오염을 계속해서 피하고 거룩하게 사는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의 본성이 우리를 휘두르지 않고 계속해서 성도의 거룩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루 하루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부터 그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우선 하나님의 말씀만이 제각각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우리에게 기준을 제시해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인격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표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에서 나온 말씀이야말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복된 법도가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건 우주적으로 절대적인 법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따르고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그렇게 이루어가는 생명력과 활동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질적인 죄 문제도 하나님의 말씀이 깊고 예리하게 우리 영혼을 휘저으면 죄를 떨쳐버릴 믿음과 의지가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죄인지도 모르던 것들이 양날 선 검과 같은 말씀이 비취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죄인지가 훤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면 죄와 뒹굴며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점을 치는 것이 멸망당할 죄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말씀을 모르는 게 재앙입니다.

나태하고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믿음을 가진 채 세속의 쓰나미에 쓰레기들과 뒤엉켜 이리저리 밀리며 살면서 구원을 받을 거라고 맹신하는 것이죠.

하나님 말씀 앞에 내 생각대로 죄가 아니라고 우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벌거벗은 듯이 말씀 앞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스가랴5장1절을 보면 스가랴가 본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스가랴선지자의 환상 중에 말하자면 날아가는 성경책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죄라고 지정하신 그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지 않고, 어떻게 말씀에 적힌대로 살지 않지 않아도 될 담대한 자들이겠습니까?

내 모든 삶이 장차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 드러나고 심판을 받을 것이니 지금 말씀을 알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사도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 이렇게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그래도 여전히 범죄할 수 밖에 없을 때 우리에게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백성이 제사장을 통해 번제를 드려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듯이 자신을 제물로 삼고 그 피를 들고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가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중보해주시는 대 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붉은 피를 의지해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하고 축복받는 관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 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면 우리가 빛가운데서 행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 1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혈과 육을 갖고 이 땅에서 살아보셨습니다.

혈과 육을 가진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이해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마디 말에 나락으로 떨어질 만큼 연약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한번의 실수와 실패에도 은둔자가 되고 싶을 만큼 자신감이 없어진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진심으로 동정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동정은 커녕 약점을 들추고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이 죄인들끼리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인한 모든 부끄러운 행동을 예수님만이 진심으로 동정해 주십니다.

젊을 땐 남의 동정 따윈 필요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진심어린 동정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해야만 이런 우리의 약점을 해결받고 힘을 얻고 믿음의 경주를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이 땅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매일 우리의 중재자가 되시는 예수님 앞,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구원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죄와 나자신을 부인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 만들어낸 구원입니다.

죄와 짝한 우리의 과거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그리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님과 연합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스럽고 영광된 성도의 삶인 줄 믿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날마다 말씀에 내 자신을 비추어 죄에서 구별되고 실패하고 실수할 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 힘을 얻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2014.6.15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