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12장1절-13절)

남수연 2014. 12. 29. 18:50

2014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 앞에는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남아있고, 새해가 다가 온다는게 왠지 실감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지난 일년 우리에게 모든 위기를 넘길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셔서 여기까지 잘 달려왔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본문은 히브리인 기독교신자들에게 보내진 사도의 편지입니다.

당시 편지를 받는 교회 성도들이 꽤 낙심하고 지친 상태라고 느껴집니다.

편지의 기록연대를 여러가지 내적 증거들에 의해 볼 때 네로황제 박해 당시나 그 직후로 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당하고 목숨을 잃던 때입니다.

앞 10장33절에 보면 당시 성도들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기독교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봉변과 살해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1억명으로 추정된다고 몇 년전 한 선교단체에서 발표했습니다.

최근에도 파키스탄의 기독교인 부부가 코란을 태웠다는 누명을 쓰고 가마에서 불에 타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얼마 전 2백명 이상의 기독교 여학생들이 납치되었습니다.

기독교박해국가 1위인 우리 땅 북쪽에서는 성경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총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평화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송구스러운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년도 돌아보면 크고 작은 문제들로 삶이 전쟁터였던 것 같습니다.

박해받는 신자들에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도 만만찮은 삶의 고충 속에 문제들을 수습하며 세밑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다들 일년 동안 믿음의 경주를 다 잘 달려오셨습니다.

힘든 경기 중에 힘이 풀어진 무릎과 피곤해진 손에 힘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충만케 해주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히브리교회에 편지를 보낸 사도는 우리의 신앙여정을 믿음의 경주라고 합니다.

우리 믿음은 경기에 결승선이 있는 것 처럼 끝이 있습니다.

또 경주를 잘 해낸 사람에게 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기에 있는 훈련과 위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경기 종목은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는 것, 또 우리 생애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일치되게 잘 살아내는 것이 우리 경기 종목입니다.

이 경기를 잘 감당하기 위해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로 이 믿음의 경주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이 경주의 결과를 인증해 준 증인들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저들은 우리보다 앞서 이 경주를 마치고 영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이 편지가 네로 황제 당시라면 성도들은 이 부분을 읽으며 원형경기장에서 로마군중들에 둘러싸여 오락거리가 되다 죽은 성도들을 떠올리고 흠칫 놀랄수 있는 장면묘사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 이상의 사실이 있다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악한 자들, 나쁜 환경 속에서 핍박받고 조롱당하며 고군분투하는 상황인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을 둘러싸고 관전하는 구름 같은 또 다른 관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믿음으로 싸워 약속을 성취 받은 역사의 증인들입니다.

경기장엔 우리가 넘어지는 걸 즐기는 악한 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 이미 구름같이 허다한 우리 편이 더 많이 우리를 응원하며 증인이 되어 줍니다.

이 경기는 믿음으로 나가면 승리가 보장된 해 볼만한 경기라는 것입니다.

앞11장과 12장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고 믿음으로 인내하여 영광을 받은 믿음의 조상들이 등재 된 믿음장입니다.

사도는 그들의 생애를 통해 분명하게 이뤄졌던 약속을 주목하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자식이 단 한명도 없었던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네 씨를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이 증인으로 서있습니다.

또 거기에는 믿음으로 자식을 얻기도 하고, 나라를 얻기도 하고, 고난 뒤에 두 배의 축복을 얻기도 하고, 영광스런 하늘의 기업을 얻은 증인들이 가득합니다.

성경 두 장에 거처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 외에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다 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허약한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룬 역사적인 인물들을 증인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히브리교회의 약점은 아직도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런 믿음의 명확한 근거와 증인들을 보면 분명히 우리 믿음의 경주에 흔들리지 않고 결승점을 향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증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을 위해 구약의 선조들이 증인이 되었듯이 우리를 위해서는 신약의 증인들까지 더 확실하게 우리 앞에 증인으로 서있습니다.

이 편지의 기록당시 신자들을 박해하던 로마제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는 교회에 두 손을 들고 복음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에게 양처럼 찢기고 죽어가던 신자들이 결국 로마를 전복시킨 역사적 증인으로 또 우리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구름 같은 허다한 이 역사의 증인들을 확실하게 바라보며 우리의 경주 끝에 있는 영광스런 나라를 더욱 소망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어디에 주목해야 할지를 2절에서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는 것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이고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확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히사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낙담시키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주님도 증인으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의치 않았다는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아무렴 십자가의 수치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십자가는 분명히 부끄러움이라고 여기서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죄수처럼 질질 끌려가셨습니다.

마구 구타를 당하셨고, 벗겨진 채 모두가 보게 매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니더니 사기꾼이었다는 조롱을 당하셨습니다.이것 이상의 십자가의 고통을 예수님께서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악물고 참으신 게 아니라 그 앞에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 아셨기에 이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참으셨다고 합니다.

주님 앞에 있는 즐거움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는 본래 예수님의 자리이였습니다.

주님의 즐거움은 백성을 구원할 구속의 사명을 다 하시고 다시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그 보좌에서 주님의 자녀들이 돌아오고, 악을 이기고, 복을 누리는 것을 즐겁게 보시며 자신의 수고에 만족하시는 것입니다.

또 악의 세력을 완전히 밟고 승리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걸 위해 십자가를 대수롭지 않게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을 분명한 믿음의 눈으로 주목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에서 예수님 바라보기를 놓치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쁜 일과 속에서 주님과의 관계가 좀 소원해지다보면 점점 주님을 향해 교통하는 감각이 미약해지고 주님을 주목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또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을 때 스스로가 주님 앞에서 숨습니다.

우리 처지가 한탄스럽고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또 병이 낫지 않을 때 섭섭한 마음으로 주님께로 부터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또 믿음의 긴장을 좀 풀고 세속에 좀 편하게 묻어가고 싶은 마음일 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확 열고 항상 예수님과 교통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목하지 않고 달리는 믿음의 경주는 방향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날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생을 정리할 때가 가까이 왔을 때 노인들이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이생에서의 삶이 한바탕 꿈을 꾼 것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짦은 날 동안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잘 달려 천국의 결승점을 통과하려면 예수님을 사랑하며 주목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엔 십자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며 인도하고 계신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장 우리를 억압하는 일들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우리 시선을 영원한 하늘나라와 주 예수께 고정시키면 믿음의 담대함과 넓은 안목이 생깁니다.

우리 코앞만 보는 근시안에서 어느새 영생까지 보는 원대한 눈을 갖게 됩니다.

감리교창시자인 웨슬리목사에게 어느날 한 신자가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전 도대체 지금의 어려움과 문제로 인해 두렵고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습니다. 해결책은 없는 것입니까?’

그러자 웨슬리목사는 창밖으로 다가가 밖에서 담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소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소들이 왜 담너머를 바라보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담을 뚫고 밖을 볼 수 없으니 고개를 들고 담너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현재 막힌 담을 우리가 뚫고 그 너머를 볼 수 없지만 고개를 들고 그 너머에 축복을 예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처량하고 슬픈 사람들이 아닙니다.

며칠 전 무슨 드라마인지 보니까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지 않으려고 허랑방탕하게 사는 걸 보고 엄마가 모든 카드를 다 정지시켜 버렸더군요.

놀고 나서 카드를 긁으려니 한 장도 사용할 수가 없어 창피를 당합니다.

카드가 정지 되고 돈이 한 푼도 없는 이 청년이 불쌍합니까?

전혀 불쌍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재벌이잖아요.

우리의 경주의 결승선 예수님을 보면 지금 우리가 꿈도 꾸지 못한 영화와 부요와 행복을 이미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일에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삶에 걸맞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 경주를 위해 벗어버리고 가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 경주에서 증인들과 같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입니다.

경주하는 우리에게 얹혀진 무거운 것과 발목을 잡는 죄를 벗어버리고 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힘들게 하는 무거운 것과 죄는 벗어버릴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은 남이 지워준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짊어지고 얽어 매는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환경의 압박이나 외부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근원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들입니다.

어떤 죄에 얽어 매여 축복의 앞을 향해 발을 떼기가 그렇게 힘이 들까요?

이것은 개인적인 성향과 죄의 기질과 관련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좋아하고 더 움켜쥐려는 욕심이 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쾌락에 쉽게 빠지는 성향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게으름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고,

사람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성격일 수도 있고,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일 수도 있겠죠.

사람마다 믿음의 길로 곧게 달려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취약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대개는 타고난 성향에 성장하는 과정에서 바른 교정을 받지 못해서 더욱 고착화된 것들 입니다.

그러니 대개 넘어졌다 하면 또 바로 그 약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오늘 말씀은 이것들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벗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곧게 나가는 걸 방해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의지를 다해서 그것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벗어놓을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4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않았다.

이것은 벗어 버려야 할 개인적인 죄에 대해 우리가 단호함을 갖고 투철하게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한편 우리의 경주를 가로막고 경로에서 끌어내려는 죄의 세력, 사탄의 세력과 굳세게 대항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편지가 보내진 당시 신자들을 모질게 박해하는 로마제국과 유대교인들에게 대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안팎에 있습니다.

본성적인 죄의 기질과 우리를 미혹하고, 낙담시키고, 넘어뜨리려는 어둠의 세력을 상대로 단호함을 보여주고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와 가족과 환경을 밀까부르듯 하려는 마귀의 세력은 떠납니다.

야고보서 4장7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그리고 인내로써 경주하라고 합니다.

경주에서 인내는 필연입니다.

열매를 결실하려면 씨를 뿌리고 농부는 뜨거운 태양 아래 일해야 합니다.

가뭄과 홍수를 겪어내야 합니다.

인내 없이 좋은 것이 저절로 생길리는 없습니다.

잠언 28장 20절에서 지혜자가 말씀합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언 20장 21절입니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인내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낳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기다리고 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내가 부족해서 시작하고 끝을 잘 못 보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시작은 잘하고 끝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어서 항상 신경을 씁니다.

운동도 좀 시작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포기하고, 규칙적인 생활도 좀 하다가 말고, 심지어 몸에 좋은 약도 끝까지 다 먹질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내고 반드시 끝을 봐야 하는 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 모든 믿음의 삶에서 포기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우리를 둘러싼 증인들을 보며 인내로 잘 감당하고 약속의 기업을 풍성하게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경기 중에 있는 모든 고난의 의미를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5절부터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똑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항상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생자이고 참 아들일리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지금 이 편지를 받는 히브리교회와 사도는 현재 당하고 있는 외부의 박해와 시련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의를 위해 무고하게 박해를 받는 것 같은 데 당시의 신자들은 이런 박해도 다 하나님의 징계라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하고 수준이 많이 다르죠.

우리는 내가 잘못 판단하고, 내가 하나님을 배제시키고 일을 저지르고 나서, 마치 하나님이 일을 잘못하신 양 원망하기가 십상인데 이들은 정작 믿음 때문에 오는 박해조차도 자기의 연단을 위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봅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세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죄인입니다.

박해시대 순교자라 해도 그들 속에 죄의 근성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외부로 부터의 여러가지 시련들은 다 성도들의 죄를 드러내고 깨닫게 하고 연달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련이 없이 자기 죄를 깨달을 인간은 없습니다.

잘나갈 때 스스로 앉아 회개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믿음의 경주를 제법 잘 해가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하고 고뇌가 없는 날들이 지속되면 신앙의 긴장감이 바로 떨어지며 믿음이 아닌 본능대로 세상을 살려는 경향이 점점 드러납니다.

본성이 악한 우리들에게는 이래저래 다가오는 주변의 문제와 환경의 버거운 짐들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가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이걸 하나님의 채찍질이라고 합니다.

몹시 아프다는 것입니다.

잠언 29장15절에서 이미 인간에게 채찍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혜자가 깨닫지 않습니까?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그러니 매서운 하나님의 징계의 매를 맞을 때 슬퍼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좋은 직장에 가고 원하는 진로가 활짝 열리고, 건강해서 병원 근처도 안가고, 가산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중 뭐 하나라도 삐끗하면 마치 하나님께 미움을 받고 저주를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바라볼 때, 저 사람 분명히 죄 지은 게 있고, 요즘 신앙생활 제대로 안해서 저렇게 곤란을 당하고 있구먼. 이렇게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대부분 우리 상태는 온전한 믿음 안에 있기가 어려우니 다 징계라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친아들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친자식들에게 징계를 하시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울리 없고 나 자신이 처량하고 불쌍하고 슬퍼 보이지만 이후에 이것으로 인해 반드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맞지 않는 것보다는 아파서 그렇지, 맞을수록 우리에게는 유익입니다.

고난에는 분명히 유익이 있습니다.

시련이 있고 물질이 궁핍하고 일은 잘 풀리지 않는 게 늑대같이 위태한 우리 죄의 본성을 안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데 더 유리합니다.

심판의 날에 모래 위에 지은 궁전보다 반석 위에 지은 초가집이 낫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 있는 우리에게 무의미한 고난은 한개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불필요한 고난은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우리의 실수와 불순종의 결과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최상의 연단을 만들어내십니다.

오히려 실패하지 않을 때 보다 더 유익을 만들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고생했으니까요.

어떤 방식이든 잃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러니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스스로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고난으로 인해 의기소침해진 태도를 우리를 둘러싼 증인들과 예수님을 보며 힘을 내야 합니다.

다들 힘들고 어려운 한 해를 보내셨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영원한 유익과 앞으로 살아갈 강점과 무기가 생겼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되 마음을 확 열고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주님과 뭔가 막혀있으면 세상도 다 우리에게 막힌 것 같고 답답해집니다.

성경을 읽으며 고난을 통과한 인물들이 받은 영광과 축복을 자꾸 증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얽어매기 쉬운 사소한 죄로 인해 계속 머뭇거리지 말고 벗을 것을 벗어버리고 가볍게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있는 내일엔 오늘보다 더 좋은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시고 용기있게 매일의 삶을 대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014.12.28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