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영혼의 닻(히브리서6장9절-20절)

남수연 2014. 9. 25. 16:30

우리 생애를 항해에 많이 비유합니다.

항해라는 말 자체에서 벌써 수많은 어려움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팔십 평생을 살아갈 때 얼마나 많은 항해의 위험에 직면하겠습니까?

잔잔한 물 위를 달릴 때도 있지만 성난 파도가 위협하는 풍랑을 만날 때도 있겠죠.

모든 것이 감사하고 만사가 평온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가장 편해야 할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다 만나며 살아가지만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처없이 망망대해를 배회하고 떠다니는 배를 생각하면 아찔하지 않습니까?

또 항해에는 반드시 닻이 있어야 합니다.

‘닻’은 배를 멈추게 하기 위해 바다 속에 떨어뜨리는 무거운 쇠갈고리를 말합니다.

뉴스진행자를 뜻하는 앵커와 배의 ‘닻’은 같은 단어입니다.

미국의 달착륙을 보도했고, 닉슨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해서 사임하게 만들었던 미국 CBS의 월터 크롱가이트라는 언론인이 있는 데 이 사람에게 처음으로 뉴스의 닻이라는 앵커맨이란 말이 붙게 되었습니다.

요동치는 언론과 난무하는 루머 속에서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것이 언론인의 역할이라는 것이죠.

거기서부터 앵커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환경이 요동치고 마음이 격동할 때 우리를 잡아 줄 닻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긴 항해에서 큰 태풍의 위기를 만날 때면 바다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버텨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의 목적지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영혼의 닻은 바로 천국을 향한 소망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힘든 환경과 낙망이 우리 영혼을 엄습할 때 영원한 천국의 소망인 닻을 얼른 풀어서 배를 고정시켜야 하는 것이죠.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나 우리들이나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소망하는 나라에 대해 더욱 확신하는 은혜가 임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본문을 함께 읽었는데 내용이 그렇게 쉽게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다른 성경과 문체가 좀 다릅니다.

논리적인 전개와 수사학적인 문체로 씌여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급문체이고 가방 끈이 긴 사람이 썼다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서를 전통적으로는 바울사도가 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신서 뒤에는 디모데에 대한 언급도 있고 바울서신의 말미와 흡사합니다.

히브리서의 내용이 쉽지 않은데다 어려운 문체를 번역하다보니 눈에 쏙 들어오지 않는 감이 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십자가 구속의 역사성과 원리를 선명하게 정리해주는 심오하고 은혜로운 성경인 데 접근이 어려워 성도들이 많이 선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유용한 정보라도 머리 쓰는 것 좀 싫어하죠.

우리와 관련이 많은 시사토론 이런 것 보다 출생의 비밀로 질질 끄는 뻔한 드라마가 아무래도 더 편하지 않습니까?문체가 어렵다고 건너뛰고, 내용이 심각하다고 건너뛰고, 이렇게 띄엄띄엄 성경말씀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젖을 먹을 때가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을 때도 되었다고.

오늘 말씀은 푹 삶은 수육이 아니라 꼭꼭 씹어 먹어야 되는 갈비에 붙어 있는 살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편의상 히브리서 수신자들을 히브리교회라고 하고 저자를 바울사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교인들이 상당한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로마제국의 박해가 있었고, 유대인들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적인 예배도 소홀히 되고 신앙교육도 부실해지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배교자까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패턴이 우리 믿음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여러가지 시험이 오면 와중에 예배가 소홀히 되고 말씀을 배우는 일도 부실해지니 믿음이 약화되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이런 히브리교인들에게 믿음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영적인 경각심을 갖도록 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편지에서 가장 집중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대해 구약성경을 통해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확증을 해주는 것입니다.

역시 모든 시험을 이길 최상의 방책은 예수님과 십자가의 구원사역에 대해 이해하고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뜨면 보이는 게 세속이고 자연세계입니다.

그 강력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영혼의 닻을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천국의 소망에 깊이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소망만큼 우리를 버티게 하는 강력한 무기는 없습니다.

영국에는 커카사단이라는 특수부대가 있다고 합니다.

이 커카사단이 2차세계대전 당시 미얀마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전열에서 낙오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병사가 4개월 동안 무려 2천킬로 이상을 걸어서 아군 진지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병사가 돌아온 것을 보고 진지가 발칵 뒤집혔겠죠.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냐는 질문에 병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정글을 헤매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러나 이 지도가 나를 살렸습니다.”그리고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도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는 정글의 지도가 아니라 런던시내 관광지도였습니다.

병사를 구한 것은 정글에서 구조되면 돌아가 누리게 될 일상의 행복을 소망하게 해준 런던지도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시련을 이겨낼 더 강력한 힘은 세상에서 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댓가로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의 소망입니다.

바울사도가 박해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는 최고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구속을 확신하고 천국을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믿음의 성장과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 히브리서의 큰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사랑과 주님이 계신 천국이 모든 삶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해주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본문으로 들어가서 9절을 보면 바울사도가 이런 박해 속에 있는 히브리교인들의 구원을 확신하며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확신을 갖게 된 이유를 1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해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긴 것을 불의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의 사랑의 행위를 보니 정말 구원받은 자들이 맞구나 하나님이 그 믿음을 기억하시겠구나’ 그래서 안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내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달라지는 게 있습니다.

내가 이대로 살면 안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삶이 바뀌는 것이죠.

주일에 교회를 나오는 성도들이 평일에는 옆 친구와 똑같은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똑같은 세속 문화를 쫒아가고, 똑같이 낮은 도덕기준을 갖고 행동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증거가 예수님의 계명대로 따르는 올바른 행위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리라.

저희 어머니가 병으로 입맛을 잃으셔서 가끔 옛날 드시던 반찬을 찾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메밀나물입니다.

메밀나물을 삶아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 드시던 옛날 생각이 나시나봅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메밀나물을 찾다가 어느 블로그에 메밀나물 무쳐놓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댓글로 어디서 메밀나물을 구했냐고 물었더니, 블로그주인장이 자기도 지인이 한박스 보내준 것인데, 남아서 신문지에 싸둔 게 좀 있으니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생판 모르는 남인데, 병든 어머니 때문에 찾는다니까 선의를 베풀려는 그 마음이 참 고맙고 따뜻하더군요.

신자들이야말로 착한 행실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면부지 남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하는 데 어쩌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 깍쟁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참 부끄럽습니다.

오늘 말씀은 타협할 여지없이 우리에게 선한 행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행위와 사랑의 섬김을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또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가 오늘 인정하는 히브리교인들의 사랑의 섬김은 어느 정도일까요?

히브리서10장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믿음으로 인해 감옥에 들어간 성도들을 돌보다 재산까지 몰수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사랑으로 결속된 교회는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강한 공동체에 소속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나고 험악한 시기를 지날 때 내게 애정을 갖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곁에서 도와주는 성도들이 많아야 내게 강한교회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환우들을 걱정해주고, 원기를 회복할 음식을 만들어 주고 하는 모습들이 바로 강한 교회로 우리가 세워지고 있다는 증거인줄 믿습니다.

강한 결속력을 가진 교회에서 우리 믿음도 강하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지체인 성도들이 이렇게 박해시대를 살아가며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며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혼자 악의 세력이 창궐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이런 소중한 믿음의 형제요 동역자가 되주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11절에서 이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라고 권면합니다.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

이 말씀 안에는 같이 믿음을 시작하고 은혜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배교한 것 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상대의 구원을 보장해줄 수가 없다는 것을 바울사도가 선교와 목회 생애에서 얼마나 절실히 깨달았겠습니까?

그러니 끝까지 구원에 이르기 까지 열심히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 안에는 앞으로도 이런 고난과 박해가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역사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역시 박해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드러내고 믿음을 표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회가 유독 우리 신앙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종교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박해가 신자들에게 가해질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종교에 대한 생각도 점점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영혼불멸을 믿었고 신의 심판에 대해 그래도 뭔가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우는 현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불멸이라는 생각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우연히 생긴 진화론적 사고로 보면 우연히 생긴 생명체니 죽으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세를 위해 무언가 준비하고 단련할 것 없이 현세에서 최고로 행복한 삶을 살면 끝이라는 것이죠.

몇 년 전 미국 BBC방송에서 ‘모든 악의 근원은?’ 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홍보 화면이 아주 교묘했습니다.

미국 쌍둥이 빌딩이 파괴되기 전의 모습이 있는 맨하탄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의 사진이 나오고 그 위에 이런 내용의 자막이 떴습니다.

‘종교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이게 무엇을 의도하는 것입니까?

모든 악의 근원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세상을 망친다는 것이죠.

진행을 맡은 도킨슨이란 사람은 단 하나 기독교를 공격하는 데 주목적을 두고 이 프로그램을 이용했습니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세를 탄 사람이죠.

인간세상이 과연 종교가 없고 하나님이 없으면 유토피아가 되겠습니까?

종교마저도 자기를 위해 테러로 악용하는 것이 인간의 악독한 죄성이라는 것은 생각 않고 신을 몰아내자고 하는 새로운 물결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점점 낭떠러지로 내 몰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교회가 당하는 로마제국과 유대교의 박해처럼 우리도 점점 이런 사상과 무신론자들에 의해 포위되고 우겨 쌓이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배교자들이 말세에 나올 것을 예수님께서 예언하셨잖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우리의 구원을 붙잡기 위해 아직 안전한 이때 더욱 말씀을 배우고 견고한 믿음으로 세워져야 할 줄 믿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삶에 불이익이 있을 때 믿음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이루기까지 굳게 인내하라고 모델로 아브라함을 소개합니다.

그들이 다 알고 있는 선조의 이야기입니다.

갈대아 땅에서 우상제조업을 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아브라함의 모델에서 우리는 구원을 확신하며 인내해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맹세까지 하며 천국의 기업을 보장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사람을 상대로 맹세까지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17절에 보면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안심시키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우리가 불안해 할까봐 맹세로 보장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천국을 약속해주시고 맹세까지 하시며 우리가 불안하지 않게 보장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아브라함이 오래 참고 인내하여 그 약속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서 수많은 자손들이 번성하고 가나안 땅의 축복으로 누리게 된 것은 오래 참고 인내한 다음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천국의 기업을 약속으로 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더니 이미 너무나 많은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지난 추석에 저희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보니 집안이 그득하더군요.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때와 비교해 보니 어느 형제든 다 복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보증까지 하고 약속하신 것이 사실로 이뤄졌다는 것이 눈앞에서 증명이 되더군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이 얼마나 복스러운 선택이었습니까?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주시고 번성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번성하는 지 역사가 증명해 주지 않습니까?

왜 쇠퇴하고 패망합니까?

복을 받고 나서 타락해서 그런 거예요.

꾸준히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 우리의 영과 육이 번성하고 또 번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완전한 축복인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확고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사도는 우리의 천국에 대한 견고한 소망으로 마침내 우리가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영광스런 모습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휘장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해 놓은 막을 말합니다.

이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모셔있고,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국민 모두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동물의 피를 갖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순간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다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혔던 하나님과 죄인들과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열어놓은 휘장 안으로 먼저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천국으로 들어가게 될거라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란 것은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레위지파 아론의 자손에서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다지파인 데 어떻게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냐는 유대파성도들의 의구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어떻게 죄인의 한계를 가진 아론의 반열에서 나오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아론의 자손들을 통한 대제사장의 직분은 장차 오실 대제사장에 대한 상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한계를 가진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세기14장에 등장하는 신비한 인물인 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구별된 제사장이라는 것이죠.

멜기세댁은 창세기14장 아브라함 생애 중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족왕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이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들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떡과 포도주, 벌써 의미심장하죠.

이 멜기세덱에 대해 히브리서 10장에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신비한 멜기세덱의 반열로 오실 메시야에 대해 다윗이 시편에 기록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시편 시편 110장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아론의 반열 제사장을 세우셨지만 그들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중보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중보의 역할을 맡은 제사장들의 타락을 얼마나 책망하셨습니까?

처음부터 하나님은 불완전한 아론의 계열이 아닌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를 대제사장을 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 사실이 아론의 반열이었던 엘리제사장에 대한 예언에서도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타락한 엘리가문의 대제사장직을 파문하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장30절입니다.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35절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 예언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제사장이 성경에 그 이후로 등장하질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우리 죄를 중보하여 영원히 속죄할 것이 창세기부터 치밀하게 계획되고 착착 진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좀 어려우신가요?

그래서 저자가 앞 장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우리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그 몸을 찢으셔서 우리와 하나님과 막혀있던 그 휘장을 찢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다들 확신이 드십니까?

오늘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말씀을 따라 행하되 사랑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 몸을 찢으셔서 하나님아버지 앞으로 갈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면 반드시 복을 주시고 번성케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큰 시련이든 작은 시험이든 구원의 소망으로 닻을 내리고 있지 않으면 배가 뒤집힐 것 같이 삶이 요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구주되신 예수님을 굳세게 의지하며 매일 평안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해나가길 원합니다.

2014년9월2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