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13장1절-8절
히브리서는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라면 바울사도나 혹은 다른 신뢰할 만한 제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완비되지 못한 당시엔 사도들의 편지글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원리와 삶의 방식을 교회에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지시하는 내용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읽으시며 어떻게 살란 말씀인지 다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그 대신 말씀대로 살아 내는 것이 어렵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세상과 교회에서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이 현대 교회의 문제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치관이 다른 시대를 살다보니 성도들의 고충도 점점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계속 추구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신앙의 실천적인 부분을 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 배우고 섬기는 한편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신앙을 예수님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모든 영육간의 이익들은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절대 오지 않습니다.
운동하는 방법에 대해 매일 보고 듣는다고 건강해집니까?
나가서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해야죠.
매일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깨닫는 것들을 하나씩 지키려고 노력할 때 풍성한 은혜도 누리고 믿음은 성장하고 약속하신 축복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는 실천에 따른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든 것만이 아니라 나를 축복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지킬 때 엄청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28장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어서 계속 더 많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을 경우엔 그 반대로 그 모든 것에 저주가 내릴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이 좋은 선지자나 왕을 만나 하나님을 경외하던 때는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거룩한 백성의 법도를 버릴 땐 내부의 환난과 자연재해와 외세의 침략으로 큰 고통을 겪습니다.
복과 재앙의 이유를 확실히 체감하도록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너무나 그게 명확히 보이는 데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그게 안보였나 봅니다.
실패와 성공의 요인이 무엇인지 임상실험을 통해 완벽하게 증명 된 성경을 갖고 믿는 우리는 얼마나 유리합니까?
이 사실을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좀 힘들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다음 복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신 것은 똑같습니다.
누가복음11장28절에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신명기에서 약속하신 복과 똑같은 물질적인 축복이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신약시대의 복은 더 다양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도록 인도하시기에 꼭 물질의 축복으로 가르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나이들어 손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할 수 있다면 자식에게 더 주고 싶습니다.
단 부모가 주는 것이 아이의 나이에 따라 다르잖습니까?
어렸을 땐 사탕을 주고 장난감을 사주지만 커 가면 다른 것을 줍니다.
신약시대의 가장 큰 복은 우리 영이 거듭나 살아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삶을 선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나를 위해 중보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을 알 때 든든함과 평안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만이 아니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복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이런 축복들이 막힘없이 우리 삶에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잘 깨닫고 실천하며 따르는 복된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시는 권면은 크게 두 가지 주제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다 만만치 않은 명령이십니다.
반대로 하라면 저절로 되었을 것 같죠?
돈을 사랑하고 형제는 사랑하지 말고.
먼저 사랑의 책임에 대해 1절부터 4절까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절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사랑이 부족함을 알기에 이런 말씀은 피하고 싶죠.
특히 형제를 떠올리면 왠지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이 먼저 생각납니다.
고통은 가까운 사람이 더 많이 줍니다.
차라리 2절, 3절 말씀대로 나랑 큰 관련 없는 가련한 나그네를 한번 접대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사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죄의 본성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한 최초의 죄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자신을 그렇게 완벽한 지적 존재로 창조하고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환경을 주신 하나님을 왜 배신했습니까?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죠.
자기보다 더 높은 존재로부터 벗어나 스스로가 왕이 되기 위해 면전에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자식들이 내 눈 앞에서 대들며 간섭을 거절하는 그 모습이 에덴동산의 축소판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꽉 들어찬 것은 오직 하나, 자기사랑입니다.
모든 행동의 동기는 자기사랑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람이 만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 역시 자기사랑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부모의 자식사랑도 자기 일부이기 때문이니 역시 자기사랑의 한 종류입니다.
일본의 인기 코미디언이라는 기타노 다케시가 자신의 책에서 가족을 이렇게 말했다죠.
'보는 사람만 없다면 슬쩍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
자기의 존립에 짐이 되고 위협이 되면 자기분신도 귀찮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속에 나 이외에 타인이나 하나님의 대한 순진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로마서에서는 다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정확하게 집어서 지적합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어디 사랑이 있을 구석이 있습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사랑하라는 명령을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1절은 형제를 사랑해야 하고 2절은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사랑해야 하고 3절은 억압당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4절은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박약한가를 더욱 여실히 보여줍니다.
배우자를 끝까지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좋아서, 사랑해서 결혼을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나중엔 그것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노력해서 지켜야 할 계명이 되고야 만 것이죠.
얼마 전 인구보건복지협회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성이 19%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결혼생활에 불만족스러우면 그렇겠습니까?
죄의 본성에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완전한 사랑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냥 모조품 사랑만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모두가 서로 사랑한다면 사실 천국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생각만 해도 놀랍지 않습니까?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성령충만을 받은 성도들이 사랑이 충만해지니 하나님을 사랑해서 매일 예배하러 모였습니다.
형제 사랑이 넘쳐나니까 고생하는 꼴을 못 보게 됩니다.
자기 재산을 다 팔아 나눠서 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니 그 피 같은 재산도 아깝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정확하게 모형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끝나고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런 삶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 안에서는 지금도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안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 회복되었고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내 제자인 것을 세상이 알 것이다.
세상사람과 섞여 사는 하늘나라 시민을 골라낼 특징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타인에 대한 사랑에 절대 무능입니다.
우리에게 왜 사랑이 부족한 지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다만 구원 받은 우리는 이 끈질긴 이기적인 본성과 성령님의 내밀한 사랑의 격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사랑하기로 작정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우리가 의지를 다해 형제를 사랑하기를 결정하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해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을지 모릅니다.
죄인이라 그렇습니다.
그런 우리를 바보 취급할지 모릅니다.
죄인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세상 속에서 우리가 저들과 다른 아버지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길 원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통한 예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 죄인들의 양심을 일깨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기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명령을 하시는 것이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냉담하고 차가울 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사랑의 의무에 불순종할 때 우리 자신도 절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직 우리는 사랑이 저절로 되진 않습니다.
그래도 말씀에 순종해서, 성령님을 의지해서, 또 적어도 나 자신과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를 위해서라도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너그럽게 쓰고 손해 보는 사랑을 하는 것 같아도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누리게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 2절을 보면 예수님 안에서 낯선 형제인 손님에게도 친절하게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유대공동체와 가족들에게서 영원히 격리된다는 뜻입니다.
고향을 떠나 복음을 전하며 다니는 이들을 환대하고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또 3절에 보면 감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가서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만 막연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실제 몸과 물질과 시간을 들여 도우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역에 따라 큰 박해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도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는 게 바쁘고 빠듯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선한 일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행과 구제와 기부에 대해 우리는 항상 마음을 준비해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선이라도 행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 그런 사랑에 힘써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사람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잊지 말고 선행에 더욱 힘쓰는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다음 4절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당부합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결혼생활을 귀하고 영예롭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결합이고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부부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결혼생활이 권태로울 수도 있고 배우자에 대해 서로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상대방을 존대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자기 자신의 면류관입니다.
상대를 불행하고 괴롭게 하고 절대 한 쪽만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5세 때는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했지만 40대가 된 지금 나는 내 아내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목사님도 못 바꾸니 우리가 배우자를 뜯어 고칠 생각해야 소용없습니다.
그냥 내 남편, 내 아내이고 내 아이의 아빠고 엄마니 같은 편인 것입니다.
내가 곤경을 당했을 때 숨겨줄 수 있는 곳이 가정이고 배우자입니다.
나치의 홀러코스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 유대인 여인은 당시 트라우마로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숨겨줄까?’
우리가 위태할 때 위험을 무릎쓰고 숨겨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이 여인의 친구인 워렌 버핏은 말했더군요.
적어도, 우리 가족, 내 배우자만은 위험을 무릎쓰고 우리를 숨겨주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최소 그런 사람이 1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쓸쓸하고 허망합니다.
가정이 불행한 데 사회적인 성공이 무슨 영광이 되겠습니까?
최근 김주0 아나운서와 남편 사이에 맞고소 사건을 보면 두 사람 모두에게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속내야 다 알 수 없지만 차라리 평범한 가정이라도 오순도순 잘 꾸려가는 게 영예이고 축복이란 생각이 듭니다.
돈을 많이 벌어 큰 침대를 사면 뭐하겠습니까?
부부가 돌아눕는 집에서 무슨 힘을 얻고 행복을 누리겠습니까?
부부의 사랑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 자녀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 두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이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외도로 인해 가정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깊이 맹세하십시오.
세상은 점점 외도하는 사회로 변해갑니다.
얼마 전 시끄럽던 전 검찰총장의 친자냐 아니냐 사건이 진실이 무엇이든 얼마나 배우자와 자식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일입니까?
아직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우리 청년들도 정말 하나님이 나의 반쪽으로 예정해놓으신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 때 결혼하십시오.
그리고 결혼한 이상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꼭 가정을 우선시하고 정성들여 세워 가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음 5절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어떻게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돈이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고 더 가지려 하지 말라는 말씀만큼 우리를 실망시키는 말씀이 또 있을까요.
돈이 있으면 마음에 고민과 근심이 얼마나 가벼워지겠습니까?
그러나 세상과 마귀는 돈에 대한 가치를 무한정 부풀려 놓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돈으로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과연 그렇습니까?사랑, 건강, 목숨, 자녀, 명예, 타인의 인정, 따스한 가정, 젊음, 믿음. 영생.
이런 가치 있는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나요?
돈이 물론 많은 것을 우리에게 줍니다.
화려한 의식주와 안정감을 주지만 반면 우월감과 교만함, 또 오만과 허영과 쾌락과 방탕과 해이를 주기도 하죠.
돈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23년 시카고에 있는 한 호텔에서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 일곱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의 부를 다 합치면 미국 전체의 국고보다 많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기자가 그 날로부터 정확히 25년이 지난 뒤 그들의 모습을 추적해서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강철회사 사장은 무일푼 거지가 되어 이미 죽었습니다.
두 번 째, 밀농사로 거부인 사업가 카튼은 파산하여 고독하게 임종을 맞았습니다.
세 번째, 뉴욕은행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여러 상황에 뒤얽혀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재무장관을 지낸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막 풀려나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웨스트트의 회장이었던 리버모아는 자살로 이미 생을 마쳤습니다.
여섯 번 째 국제은행 총재였던 이론 프레이져는 역시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일곱 번째 부동산 거부였던 이반 크루컬은 자살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돈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이 보도에 경악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상이 과대평가해 놓은 돈의 가치에 속아서 무조건 그것만 쫓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현재에 만족하고 풍요로운 삶을 거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면 그 굴레를 벗어나기가 참 힘듭니다.
지난해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부모의 계층에서 자녀가 이동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42%가 가능성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절반 정도가 부모의 소득수준에 따른 계층이 자녀들에게 대물림된다고 생각하고 이미 계층간 이동이 어렵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때 이 보고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내게 어떤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과 영향력을 주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갖고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답답한 현실에 지쳐 하나님이 계획하신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실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하며 기도하며 스스로도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 33장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 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러니 지금 당장도 족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끝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도중에 우리는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부여하신 것들에 대해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알맞은 것들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키와 외모와 재능과 지능과 성격과 태어난 환경과 부모를 지정해 주셨듯이 우리가 누릴 물질도 계획하셨습니다.
왜 누군 더 많이 주고 덜 주냐고 투덜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내겐 다른 것을 주셨습니다.
병실에 누운 사람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건강이 있지 않습니까?
불임클리닉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토록 열망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일궈나갈 재능과 지능도 있습니다.
북한에 태어나지 않고 남한에 태어난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에게 부의 양을 정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내 조건과 능력에 내가 적응하고 만족하듯 주어진 소유에 있어서도 족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과 비교하며 평생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있는 것이 주는 작은 행복도 놓치게 되는 것이죠.
화려한 외식은 못해도 가족들이 단란하게 삼겹살을 구워먹는 것도 행복입니다.
큰 것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행복들이야 말로 우리 인생을 따뜻하게 하고 매일의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무조건 내 힘으로 돈을 더 벌어 안정을 찾으려고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 구조는 먼저 가진 자들이 부를 틀어쥐고 놓질 않습니다.
월급을 조금씩 주지 않습니까?
근실하게 일해야 겨우 자식 키우며 먹고 살 정도 되는 것입니다.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와 직업과 가정까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줄 믿으시고 항상 현실에서도 족한 마음을 가지시길 축복드립니다.
5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않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어떤 경우에든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를 책임지고 돌보고 기르십니다.
지금 우리가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배후에는 모든 위험과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으십니다.
끔찍한 참사를 면하게 하시고, 섬세하게 내 감정까지 만져주시고, 간절히 기도하는 문제들을 위해 일하십니다.
어떻게 나 같은 작은 존재의 마음을 아시고 별볼일 없는 내 삶에 관여하고 인도하시냐고 생각하십니까?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는 우주의 광대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산중의 짐승 하나 하나를 아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유도 상징도 아니고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각각의 인생을 맡으시고 인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척스미스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두 번의 목회를 실패하고 생계를 위해 안해 본 일이 없지만 수십장의 청구서가 쌓여가고 빚을 갚을 대책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참담한 심정으로 청구서를 바닥에 쫙 깔아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하나 짚어가며 사정을 말씀드리며 울먹이며 기도했습니다.
진짜 그 중엔 당장 갚지 않으면 달려와 모욕을 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때 외상빚이 당시 액수로 4천불이 넘었는 데 지금 돈으로 하면 꽤 많은 돈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하고 난 다음 날 오래 전 알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에게 돈이 좀 생겼는 데 기도할 때 이상하게 척스미스목사 생각이 자꾸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이 돈을 네게 보내라는 것 같다며 4천5백불을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인도하심을 삶에서 깨달을수록 인생에 대한 담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이 돈에 집착하는 이유가 두려움, 무서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은 결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지 못합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돈으로 어떻게 못합니다.
수많은 재벌들이 우울증과 정신쇠약에 걸리는 것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돈도, 사람도 다 주관하시는 창조주하나님, 구주 예수님만 믿고 의지할 때 우리의 평생을 안전하게 이끌어 주실 것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7절에 결론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몸으로 실천했던 교회의 지도자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진실이기에 그것을 가르쳤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 진실이 위협당할 때 목숨을 버려 진실을 증명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음으로 진실을 증명했던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그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랑의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죄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보호자이십니다.
그들을 아시듯이 나를 아시고 나의 모든 고통과 근심을 헤아리고 인도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죽음으로 증언한 이런 변치 않는 주님을 믿으시고 평안가운데 굳세게 서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오늘 주신 말씀대로 형제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길 원합니다.
우리가 돈을 벌 때도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항상 자족한 마음을 가지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심을 믿고 평안과 만족가운데 담대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3년10월27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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