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이 교회에 써 보낸 편지인 서신서들을 읽다보면 그때 성도들에게도 문제가 많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신앙의 의혹과 인간관계, 여전히 짓는 죄, 가난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입니다.
현재 우리의 문제들을 그때도 고스란히 안고 있었던 것이죠.
교회에 써 보낸 서신서들은 대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교인들에게 있는 문제들과 바울사도의 해법은 우리의 신앙의 삶에도 분명한 해답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히브리서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로마서나 에베소나 고린도서 같은 성경은 유대인이 아닌 타문화권에 있는 외국인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히브리서는 외국인이 아닌 유대인 신자들에게 보내졌기에 그들이 잘 아는 구약성경이 실컷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중에서 좀 어렵게 느껴집니다.
특히 1장부터9장까지 구원의 핵심 원리인 유일한 대속자이신 예수님에 대해 구약성경을 총망라해서 꿰뚫어 논증해 놓은 놀라운 성경입니다.
10장부터는 성도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지도하는 내용입니다.
다른 서신서들도 대개 앞부분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논리적인 입증으로 확신을 먼저 주고 뒷부분은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라라는 삶을 다룬다고 보면 됩니다.
왜 그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에는 항상 참 신앙을 위협하고 혼잡케 해서 성도들을 믿음에서 끌어 내려는사탄의 조직적인 활동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의아하게도 대개는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이 세대가 갈수록 점점 잘못 되어 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히브리교회도 그렇고 다른 교회들도 그랬기 때문에 많은 서신서들이 교회로 보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들이 바로 잡아 준 믿음의 원리들을 항상 배워서 확신을 갖고, 또 가르쳐준 삶의 방식대로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있게 되어야 올바르고 굳건한 믿음이 됩니다.
실생활에 관련 된 설교만 듣다보면 하나님의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믿음의 뿌리가 아주 약해집니다.
그래서 좀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도 제가 영적인 원리들을 균형 있게 나누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막상 어려움을 만날 때는 은혜로운 간증이나 위로의 말씀들이 생각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 때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은 성경을 통해 얕게나마 뿌리를 내린 우리가 믿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가 알 것은 한결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입니다.
본문을 봐도 왜 바울사도가 히브리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써서 보냈는지 대강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예수님에 대한 긴 논증을 한 것을 보면, 신앙적인 면에서 그만큼 위기 속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말이 길어지면 그만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죠.
과거 이들은 대단한 믿음으로 큰 고난을 이겼던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본문을 보면 ‘담대하라, 인내하라, 잠깐 후면 주님이 오실 것이다.’
‘너희가 뒤로 물러나 멸망당하지 않을 것을 내가 믿는다.’
이런 말투를 보면 지금은 성도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죠.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 보면 그들의 신앙은 퇴보했습니다.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경력임에도 젖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 안전하게 살려는 유혹에 빠졌고, 교회에서 점점 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에 우리가 잘 아는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이 나오고, 경기하는 자들이 ‘끝까지 달려야 상을 받는다’는 그런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이런 히브리교인들의 문제들은 우리의 믿음생활에서의 문제나 같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들의 문제를 어떻게 지도하는지 함께 살펴보며 각자에게 잘 적용시키게 되길 바랍니다.
본문32절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한 줄로 요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이 구절에서 의외로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은혜와 고난과 인내의 관계가 서로 엮여 있습니다.
이 관계를 잘 이해하고 풀어 나가야 끝까지 행복한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은혜와 고난과 인내는 신앙의 삶을 이끄는 삼두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영혼의 구원이고 더 나은 영구한 소유를 차지하는 것임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32절을 중심으로 해서 소중한 지혜를 얻기 원합니다.
이 말씀은 먼저 성도들의 삶은 빛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과거에 큰 환난을 믿음으로 잘 이겨냈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정도의 환난인지 그 다음에 문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어 비방을 받고 멸시를 당했을 뿐 아니라 재산도 몰수당했다고 합니다.
그 중의 어떤 이는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남은 성도들도 같은 처지가 되어 끝까지 이들을 돌보았던, 믿음이 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였다는거예요.
히브리교회가 어떻게 그런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먼저 이들이 빛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냈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고난과 세속적인 삶의 유혹과 악을 이기며 견딜 수 있는 것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피곤을 이기고 나와 예배로 신앙을 지키는 것도 그만한 은혜들을 받았기 때문이지, 우리의 의지로만 나온 게 아닙니다.
이들이 재산을 잃어버리고, 감옥에 갇히면서 까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우리 신앙과 비교해 본다면 물론 급이 다른 것이죠.
만일 오늘 교회 와서 예배드리면 집과 자동차와 통장을 다 몰수당한다면 오늘 주일에 전국 교회에 몇 명이나 나와서 예배를 드릴까요?
큰 환난을 견뎌내려면 큰 은혜와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히브리교회는 초창기에 큰 은혜를 받았고 그 결과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모든 소유를 기쁘게 뺏긴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다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34절에서 밝힙니다.
확신하는 만큼 포기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들은 착각을 한 게 아니고 제대로 계산했고 더 나은 것에 투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빛을 받은 사람들이고 더 낫고 영구한 재산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끝까지 견지하고 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은혜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고 신앙을 지켰던 히브리교인들이 지금 그 믿음을 다 잃어버린 것이 우리가 긴장해야 할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더 확신하며 산다는 것은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누구도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가 없고 특히 믿음으로 인해 오는 시험과 시련을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히브리교회 성도들이 총체적인 어려움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은혜 안에 살기 위한 방편들인 말씀과 기도를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다 바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성경을 못 읽고 기도를 못하는 삶이 제일 염려되고 안타깝습니다.
히브리성도들이 영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란 것에 경각심을 갖고 말씀과 기도로 매일 자신을 단련하도록 노력하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2. 다음에 알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의 삶에 있는 고난입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가 빛을 받았는데, 그 다음에 고난의 큰 싸움이 왔다는 것입니다.
빛을 받았다는 것은 은혜를 받고 성령의 비추임을 통해 영적인 눈이 떠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 인줄 알았는데, 은혜를 받고 나면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성경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내게 현실이 되고, 내 죄가 훤히 보일 때, 빛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고 믿음이 좋아졌다면 축복이 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 다음에 고난의 큰 싸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장0 감독을 아시죠?
이분은 한국영상자료원이 뽑은 역대 한국영화 톱10중에 이감독님의 영화가 세편이나 들어 있습니다.
‘별들의 고향’, ‘바람 불어 좋은날’, ‘바보선언’입니다.
그런데 이감독님이 후반기에는 만든 영화는 전부 흥행에 실패하며 내리막길로 치닫게 됩니다.
결국 대마초 까지 손을 대 영화제작 금지조치로 감독 인생이 쫄딱 망해 버립니다.
한참 어려울 때는 천호동의 월세방으로 옮겨 앉을 정도로 바닥까지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의지할 게 없으니 새벽기도를 나가고 성경 공부를 하던 중 점점 진실 된 믿음을 갖게 되어 4년 전에 드디어 장로가 되셨습니다.
이감독은 남은 여생은 하나님을 위한 영화만 만들기로 작정을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17년만에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게 작년에 나온 ‘시선’이라는 영화입니다.
잘 모르시죠? 흥행이 실패했단 뜻이겠네요.
영화 전체를 캄보디아 현지에서 촬영했는 데, 독충과 벼락과 살인적 기후 속에서 정말 목숨을 걸고 찍었다고 합니다.
가상의 이슬람 국가로 선교여행을 간 성도들이 테러조직에 인질로 붙잡혀 배교와 순교를 경험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아프칸에서 인질이 되었던 샘0교회 단기선교팀이 모티브입니다.
‘별들의 고향’의 감독이 선교지에서의 순교를 다룬 원색적인 기독교영화를 만들었으니 이 분의 새 영화를 기대했던 영화마니아들은 완전 경악을 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선교팀 장로역을 맡았던 박용0씨가 캄보디아에서 희귀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귀국하자마자 패혈증으로 사망하신거예요.
박용0 씨는 출연료가 형편없이 적은데도 믿음으로 영화에 참여했었습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입니까?
게다가 이 충격을 견디고 개봉한 바로 그 날, 세월호사건이 터졌습니다.
신앙에 이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불쑥 끼어들고 그 고통이 오래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다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때는 이상하게 주변에 힘든 일이 더 많아지고, 일이 더 안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된다고 했는데 그렇지가 않을 때 마음이 힘들어지고 시험에 들려고 합니다.
내가 그래도 이만큼 믿으려고 애를 쓰는 데, 내 처지를 몰라라 하시는 하나님께 삐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교인들의 경우도 끝이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시련을 당하며 하나님께 삐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다음 장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징계해도 공경해야 하거늘 하물며 영의 아버지가 너희의 유익을 위해 징계하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느냐, 그러지 말아라.’
하나님은 왜 오해를 받으면서도 성도들에게 이런 고난의 큰 싸움을 허락하실까요?
당연히 우리의 죄악 된 근성 때문입니다.
고난과 근심거리를 통한 제약이 없으면 우리 육체는 금세 방탕에 빠집니다.
도를 넘어 자기를 과신하게 되고, 금방 신앙에 해이해 집니다.
만사가 형통한 가운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을 다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잠시라도 걱정거리가 없으면 우리가 영적으로 드러 눕습니다.
우리 주제를 너무나 잘 아시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는 이런 시련과 함께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은 한 인간에게 참된 행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련들을 통해서만이 고집 세고 목이 뻣뻣한 인간들이 그나마 하나님을 의지하고 손을 내밀어 주님을 붙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삶에는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애초에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다만 성도들의 고난은 한없이 내려가 망하는 고난이 아니라 굴곡진 고난이고 점점 이기며 믿음을 인정받는 고난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 다음엔 기분 잡치는 일이 꼭 따라오지 않습니까?
창피하고 분하고 괴로운 일을 견디면 그 다음엔 하나님께서 마음을 기쁘게 할 좋은 일을 또 주시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제 모토가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좋아하지 말자, 그게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이 좋은 일과 함께 다음에 묶여져 딸려 나올 골치 아픈 일에도 기도로 대비를 하는 것이죠.
세상에서도 좋은 일엔 마가 낀다고 하잖아요.
원하는 좋은 것을 받았어도 죄가 끼어들고 악의 세력들이 달려들어 결국 완전하게 좋은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좋은 일, 마음에 드는 환경만 구한다면 남는 것은 좌절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고난과 성가신 일이 와도 당황하지 말고 견뎌야 합니다.
신앙의 삶에는 고난이 오고, 그것을 인내하는 것이 정통 코스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난다고 무조건 뭐가 잘못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난 일년도 생각해 보면 굽이굽이 힘겨운 길을 넘어 왔습니다.
가슴이 철렁할 일도 있었고,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이 두려운 순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성도들이 큰 고난의 싸움을 견딘 것처럼 우리도 크고 작은 싸움을 잘 견디어 내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건재하게 믿음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모릅니다.
한편 인생의 한고비를 넘었지만 다음 파도가 다가와 생활과 믿음을 사정없이 뒤흔들 것을 우리는 압니다.
3. 그러나 인내로 이 고난을 견디면 반드시 큰 상이 있다고 오늘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싸움을 견디고 인내하며 받을 것은 큰 상이라고 35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우리의 믿음의 인내 뒤에는 반드시 큰 상이 있습니다.
지금 소망하는 일들도, 장래의 문제들도 인내하며 믿음으로 버텨야 좋은 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길고 지치게 하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싸움에서도, 수시로 앞 길을 가로막는 문제와의 싸움에도, 좀 더 참고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참고 여기까지 오게 도와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우리가 배우고 나면 정확한 시간에 오셔서 상을 주십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반드시 지체하지 않고 다시 오셔서 상과 벌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지체되어 보이는 것이지, 만일 초대교회성도들이 원하던 그 때 예수님이 오셨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시간에 결코 지체하지 않고 행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상주시기 위해 우리의 인내를 지켜보고 계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이 계십니다.
며칠 전 우연하게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는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저는 아빠라고 부르던 시대 사람이 아니라 아부지라고 부르던 사람입니다.
어려서 부터 한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는 아빠라는 말로 하나님을 부른 것도 참 이상한 일인데, 더 이상한 것은 그 아빠라는 말이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라는 확신을 그렇게 강하게 주는 거예요.
다 함께 한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보시겠습니까?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고 안심이 되지 않습니까?
때로는 답이 안보이는 문제 앞에 마음이 짓눌려 기도조차 안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모든 세대가 전부 ‘없는 세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20대는 답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내가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70대를 만들었습니다.
70대는 약이 없다. 80대는 뭐라면 좋을까요?
이런 사회 속에서 어느 것 한가지라도 걸릴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답이 없을 것 같은 상황에 빠져있을 때도, 굳게 믿음으로 인내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자식들이 뭐가 필요하다고 꼭 말해야 압니까?
안 보려 해도 애들 필요한 게 저절로 눈에 보이잖아요.
최근에 제가 목돈이 좀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담보도 없고, 은행에서 돈을 좀 빌리려 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테넷 뱅킹을 하는 데, 뜬금없이 제가 신용이 좋아서 신용대출 대상자가 된다는 메시지가 떠 있는 것입니다.
은행 대출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아시죠?
그냥 돈을 빌려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론은 딱 필요한 만큼, 괜찮은 조건으로 대출을 받아서 일을 잘 해결했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필요한 만큼 돈을 갖다 준다면야 더 좋겠지만, 그렇게 인과관계가 없는 일은 잘 안 일어납니다.
저는 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내 형편을 이렇게 다 아시고 딱 필요한 시점에 일을 처리해 주시는지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은 애들이 아직 공부도 마치지 못했고, 결혼도 못했는데 올해가 남편 정년퇴직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남편 정년이 좀 연장되길 기도하다 될 것 같지 않아서 포기했는데, 지난달에 회사에서 정년을 2년 연장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가만히 보면 우리가 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났을 때도 하나님이 슬며시 작으나마 위로와 보상을 해주신다는 것을 제가 알아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작아도 신기하게 마음이 확 풀리고 기쁨이 엄청 크다는 게 신비합니다.
하나님은 무작정 기다리게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이 유익한 점은 괴로움이 올 때 거기에 진을 빼고 감정적으로 지옥을 넘나드는 게 아니라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이겨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사도는 11장에 가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십니다.
우리가 자식들을 돌보는 거나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거나 똑같습니다.
가끔 문제는 태산 같고, 하나님은 멀게만 느껴진다면 아빠라고 한번씩 부르고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히브리성도들은 순교와 재산 몰수를 각오한 믿음을 지켰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거야 그렇게 대단하지는 못합니다.
그냥 자식 키우며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리고 장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그런 일들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과거 성도들을 낚아 채려던 그 마귀의 세력들은 결코 공격의 수위를 낮춘게 아닙니다.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지역에선 목숨으로 협박하고, 아무의 도움 없이도 잘먹고 살만한 환경에서는 안일과 방종과 무신론으로 덫을 놓습니다.
우리 개인마다 취약한 삶의 여건들과 성격적인 약점들을 교묘하게 이용해 우리의 믿음을 뒤로 물리게 하려는 마귀의 공략은 절대로 약화된 적이 없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생활 속에서도 히브리성도들 같은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신앙의 여정에 하나님이 깊이 관여하시고 하나님과 우리가 보이지 않는 줄로 묶여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가장 적당한 은혜를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각자가 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좋은 걸 맡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제게 있는 성가시고 까칠한 짐들을 맡지 않았다면 더 큰 짐이 얹혀졌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시련을 골라서 우리 각자에게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래도 삶에 시련이 올 때 더 잘 이겨내려면 항상 빛 가운데 살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인내하며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5년12월13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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