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길 (히브리서10장19절-22절)

남수연 2016. 2. 3. 12:44

  

어렸을 때 장독이 깨지던 그런 맹추위를 정말 오랜만에 만난 것 같습니다.

따뜻한 집을 나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참 잘 오셨습니다.

장독이 깨져도, 한강이 얼어붙어도, 태산같이 무거운 근심이 짓눌러도, 우리가 그 상황에서 최상의 상태로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훈훈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어붙은 모든 문제들까지 녹여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구약성경의 성전제사와 관련시켜 설명한 아주 중요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이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믿기 위해서는 성경 속에 있는 예표와 증거들을 많이 알수록 유리합니다.

세상에서도 지식이 힘이듯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지식이 힘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만 알아도 된다면 뭐하러 이렇게 두껍게 성경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넘겨주셨겠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쉽게 믿지 못합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권리들을 포기해야 하고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힘든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못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을만하다는 신뢰가 생겨야 움켜쥐었던 세상을 놓고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많은 증거들을 기록해서 이렇게도 말씀하시고, 이렇게도 설득하시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작성하신 성경 말씀이 설교를 통해 전해지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감각이 죽은 영을 일깨우고 감화하시는 작업은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럽고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믿을 듯 말 듯, 결단할 듯 말 듯,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우리에게 인내심을 갖고 일하십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인내심을 갖고 양육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께 설득당하는 큰 은혜가 임하시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속죄해 주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길을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랜 역사를 두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셨는지를 이 말씀 속에서 더 깊고 완전하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갑작스럽게 이뤄진, 뜬금없는 일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되며 하나님이 신실하게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겐 알듯말듯한 이 편지의 내용들은 당시 편지를 받은 히브리성도들에겐 단번에 척 알아들을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난해하게 이 편지를 썼다면 그건 오버하는 것이죠.

당연히 당시 성도들에겐 읽어만 줘도 고개가 끄덕이고 아멘이 나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왜 해석과 배경설명이 필요하냐면 시대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없는 성소’, ‘휘장’, ‘제사장이런 용어들은 유대인들에겐 아주 일상적인 단어들이고 그 의미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우리가 히브리성도들처럼 은혜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구약성경을 빌려와야 합니다.

가장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 앞으로 나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 예배의 의미가 뭐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었던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막연하게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이고 그닥 우리 삶에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정도의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주고 악하게 살면 벌을 줄 수도 있다는 정도의 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민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그들의 역사 속에 실제 나타나서 존재를 보여주셨고, 권능을 나타내셨고, 선하신 인격을 알릴만큼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신론자들이나 우리 민족 같이 하나님 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세와 구원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약 이천년 역사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알아왔듯이 그런 마음으로 우리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성도들에겐 새삼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복된 하나님 앞으로 우리가 나갈 수 있는지만 다루면 되는 것이죠.

그러나 바울의 편지 중에서도 로마서 같은 경우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이 아닌 우리처럼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통치하고 계신 만유의 주시라는 것은 다 믿으시죠?

이걸 못 믿으면 다음 진도는 사실 나가나 마나입니다.

창세기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다른 말씀도 사실 믿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괴로움은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끊겨져서 그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끊겨진 줄 모르고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혹시 더듬어 하나님을 찾아간다 해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알라도 되고, 제우스도 되고, 천지신명도 되는 의심스러운 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셔도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끈기 있게 믿지 못하고 등을 돌리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살 길은 생명과 복의 원천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다시 하나님께 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단절된 인간의 상태를 다시 이어 줄 유일한 구원의 길을 오늘 본문에서 확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이 말씀은 이제 예수님의 속죄피로 심판의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 말씀은 히브리성도들에겐 담박에 이해가 되고, 귀에 쏙 들어오는 표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물의 피를 들고 성소로 갔기 때문입니다.

이 복된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시대의 성소와 제사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영적 지식이 없는 막연한 믿음은 잘 믿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이게 다 뭐지?’ 하는 혼란에 빠지고 믿음이 뿌리채 흔들립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은 국조인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길러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은 구별되었지만 죄의 본성은 그대로 갖고 있는 위태로운 동거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면서도 그들의 죄로 인해 자꾸 자신을 격리시키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추악한 죄에게는 치명적인 심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자체가 죄에는 심판입니다.

법궤를 열어 본 사람들이 즉사한 사건이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백성들 가운데 구별된 거룩한 성소를 짓게 하시고 그 안에 다시 지성소를 구분해서 머무셨습니다.

그것이 광야시대의 성막이고 가나안땅에 정착한 뒤 성전입니다.

이 성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자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는 곳입니다.

제사장은 평소에 백성들을 대표해서 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하며 하나님을 섬겼고 죄를 지은 백성들은 여러 가지 제사법에 따라 제물을 가져와 피를 흘려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는 절대로 하나님나라에 속할 수가 없거든요.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반드시 죄를 처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이 성소 안에서 제사장도 들어갈 수 없게 가림막으로 구별 된 곳이 지성소입니다.

그 안에 법궤를 모셨고, 그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 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두렵고 신비로운 지성소에 대제사장은 일년에 단 한번 제물의 피를 들고 두려움 가운데 떨며 들어가 속죄소에 붓고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양심에서 죄의식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피가 무슨 인간의 악독한 죄를 씻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사는 드리지만, 죄가 씻어졌다는 확신이 없기에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여전히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이 불완전한 제사는 장차 죄없는 동물이 아닌, 죄없는 성육신하신 성자하나님이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실 제물이 되실 것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진짜가 오기까지 임시 방편이고, 진짜가 왔을 때 그 의미를 깨닫도록 만들어 놓은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피흘려서 제물이 되신 참제사는 우리를 완전하게 속죄하셨기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담력을 갖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성령님의 역사로 완전히 이해하고 믿게 되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지만 한편 내 죄가 완전히 사해졌다는 것도 믿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사라지고 언제고 하나님께 내가 용납되고 사랑받는 복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확신이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16절에서 자신있게 이렇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확신이 되십니까?

이 말씀대로 믿고 구하고 풍성한 은혜를 얻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다음 말씀은 성소에서 일어났던 또 다른 신비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이 되시는지를 확신 있게 알려주십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제사장이 드나들 수 있던 성소와 출입이 금지 된 지성소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가림막이 바로 휘장입니다.

제사장이라 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의 앞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휘장은 두께가 2.5센티나 되고 높이가 건물의 7층 높이나 되는 두텁고 웅장한 카페트 같은 직조물이었다고 합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죄를 격돌하지 않으시도록 그 영광의 빛을 차단해서 죄인을 막아주는 보호막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성막의 설계를 일일이 지시하신 내용이 나오고 휘장을 만들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이 휘장은 너희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휘장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부터 죄인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섬겨야 하지만 죄로 인해 진노하심에 노출 되어 있는 진퇴양난의 죄인의 생명을 보존할 유일한 방편은 이 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휘장은 곧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말씀합니다.

성소 휘장이 했던 그 역할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우리를 막아주시고 가려주신 중재자 예수님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열려 버렸다는 것이죠.

그 휘장이 쫙 갈라지고 지성소가 공개 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예루살렘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완전히 지성소가 열린 사실을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바로 이 사실을 바울사도가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없던 죄인들을 그 몸으로 막아주셨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휘장 되었던 그 몸을 찢으시고 모든 죄인들이 지성소에 들어갈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찢겨지신 그 육체에서 흘리신 피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속죄하셨기에 그 피를 믿는 자들은 아버지께 나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을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천년 동안 끊임없이 제사를 반복시키며 가르치신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다시 힘주어 이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 일부 히브리성도들이 뼛속 까지 자리 잡은 성전문화와 속죄 제사에 자꾸 눈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꾸 눈에 보이는 걸 믿고 싶어 하잖습니까?

유대인들이 집착하는 그 속죄제사와 성전들은 다 참된 것이 오기까지 그것을 가르치는 그림자이고 그런 시연은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몸을 찢으시고 열어 놓은 길로 당당하게 아버지 앞에 나가 복을 받으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제사가 완전하게 종결되었고 더 이상 유대인들의 제사는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실제로 이 성전제사는 끝났습니다.

이것이 참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국민들 중 10% 정도는 선조들에게 전수 받은 유대교 신앙을 따라 철저하게 율법대로 사는 전문 종교인들입니다.

어려서부터 랍비학교에서 배우고, 군대도 안가고,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먹고 삽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검은 복장에 검은 모자를 쓰고 옆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오직 종교생활만 합니다.

그렇게 전통을 죽어라고 따르는 그들이지만 한 가지 재현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의 제사입니다.

유대교의 핵심인 속죄의 제사를 못 드리는 어정쩡한 유대교인들인 셈이죠.

왜 이들이 그렇게 열망하는 속죄의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인정된 곳은 유일하게 예루살렘성전 단 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시하는 한 곳에서만 제물을 받겠다고 하셨거든요.

그것도 성전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죠.

예수님 안에서만 제사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이슬람 황금돔 사원이 버티고 있습니다.

제사드릴 장소가 일단 없어졌습니다.

지금 종교인들이 제3성전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혹시라도 황금돔 사원을 접수하고 거기에 성전을 짓는다 해도 제사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후 이천년동안 나라가 없어지고 전 세계를 떠돌다 보니 제사장의 자손이 누군지 알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직까지 단 한명의 검증 된 제사장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코헨이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제사장의 후손이라는 추측을 한다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없으니 제사장으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유대교적인 제사를 영원히 드릴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절묘한 상황이 무엇을 말하는 지 아시겠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한 완전한 제사를 받으시고 구약제사의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신 것입니다.

동물제사 그만 드리고 예수님의 속죄의 제사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죠.

이 십자가의 속죄의 길만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갈 유일한 길이고 새로운 살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한 길,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로 하나님 앞에 나온 자녀들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감정이나 느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계시해주신 말씀대로 믿는 것입니다.

이젠 아버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영의 아버지께로 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축복이 부어집니다.

기도하고 예배할 때, 하나님의 신비로운 존재감과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엄연한 사실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영적으로 작용하시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연세계에서 사는 동안은 자연상태에 맞는 오감을 통해 살도록 하셨습니다.

육감으로 영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악한 영들의 불법활동이지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천박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령충만할 때 육감이 발달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허락하신 오감과 지정의가 최상의 상태가 되어 명철하게 사리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조화롭고 완벽하게 만드신 자연세계에서 성도들이 거기에 맞게 가장 건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신비한 영의 세계가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현실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진짜 현실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현실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묘한 영의 세계가 막 느껴지고 보여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사도들을 통해 전해주신 십자가의 복음을 사실로 믿을 때 그것을 우리의 의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살 길임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복된 자녀로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며칠전 저녁 뉴스를 보고 있자니 불안감과 걱정이 몰려들었습니다.

공포지수라고 하죠?

국제유가급락과 중국경제 둔화 가능성으로 세계 금융시장이 파랗게 질리고 있다고 합니다.

또 북한정권이 일시에 몰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보고서가 나왔다는 데, 그 또한 마냥 좋다고 할 수만도 없는 것이죠.

우리는 어쨌거나 앞으로 점점 더 혼란스럽고, 살아가기 힘든 환경 속에서 남은 시간들을 보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기업도 힘들고, 자영업도 고전하고, 주택시장도 불투명하고, 앞으로 우리 장래에 어떤 일들이 생길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공무원연금으로 먹고 사는데, 며칠 전 기분 나쁜 통지를 받았습니다.

올해부터 5년간 물가연동으로 조금씩 오르던 연금인상이 정지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만큼 모든 상황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인류 마지막 격변의 시기를 통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힘든 시점들도 영원한 내세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여정에 잠깐 거쳐 가는 일입니다.

정말 믿음만 온전하면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얼마든지 모든 것을 이기고 끝까지 능력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무기력한 삶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시는 창조주하나님을 믿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가 복을 받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