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히브리서12장1절-3절 (예수를 바라보자)

남수연 2019. 7. 11. 22:10

https://youtu.be/iKrz3GfTvVk

<2019년7월7일 설교영상>

 

제가 지난 주에 근 십년 만에 대학 동창생을 한 명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다 보니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그 친구 딸이 서원이와 동갑이었는데 취업은 했나도 물어봤습니다.

딸이 그림을 아주 잘 그려서 미술을 전공했거든요.

그런데 친구가 하는 말이 취직은 잘 하는데 일 년을 못 다닌다는 거예요.

한국고용정보원의 분석에 따르면 대졸자의 첫 직장 근속 기간이 일 년 정도라고 합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도 이직을 생각한다는 직장인이 54퍼센트나 됐습니다.

직장 분위기나 월급이나 적성 등의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요즘 세대들은 한 길을 우직하게 간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무슨 일에 쉽게 권태를 느끼잖아요?

성도들이 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성경은 한번도 이 믿음을 지키는 게 쉽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게 인내가 필요한 경주라고 합니다.

평생을 믿다 보니 때로 피로감을 느끼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신을 받을 성도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이 피곤하고 낙심해 있는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히브리교인들을 격려하고 힘을 주신 오늘 말씀이 종종 믿음의 삶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힘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우리 믿음의 경주에는 증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의 삶을 인내로 감당하고 저 끝에 도달했을 때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정말 우리가 듣고 믿어 온 영원한 세상이 있을까요?

우리가 구주로 믿은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가 우리를 알고 따뜻하게 영접해 주실까요?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며 오늘 성경은 증인들을 불러 세웁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이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들의 명단이 바로 앞 11장에 나옵니다.

성시교독에서 읽은 부분이죠.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믿음을 본받아 열심히 달려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피곤하고 낙심한 성도들에겐 열정적인 신앙으로 앞서가는 사람들을 봐도 반응할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 겨우 믿음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데 오히려 부담스러움을 느낍니다.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증인들이 무엇을 증거하며 살다 죽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증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죠.

증인이 나오면 범인이 누군지를 알 수 있잖아요?사람들은 증인의 말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즘 가장 확실한 증인은 뭐니뭐니 해도 CCTV.

우리 믿음의 여정에서 낙담될 때 이미 이 경주를 다 마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또 잘 달려가는 믿음의 길을 계속 가는데도 증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증인들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영원한 도성을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들은 그것을 위해 실제로 바뀐 인생을 살았습니다.

도시개발 문건을 훔쳐 본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는 시골에 무조건 투자하잖아요?돈이 없으면 꿔서라도 더 많이 땅을 사고 집을 사놓습니다.

사람은 사실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 사실인지는 주변 사람들이 압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것을 진짜 믿는지는 실제 생활이 증거하는 것이죠.

11장의 증인들은 우리에게 그걸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 중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땅에서 부르셔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며 그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집 지을 땅 한 평을 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땅 부자가 될 수 있을 만큼 거부였잖아요?

그런데 혹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씨, 예수님을 통해 주신다는 축복의 땅이 지구상의 한 구역이라고 오해할까봐 평생 땅을 안 사고 남의 땅에서 장막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약속받은 것은 더 나은 본향,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복된 천국임을 증언하기 위해서인 것이죠.

심지어 에녹 같은 사람은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지 않고 천국으로 올려졌습니다.

성경은 그가 이 땅에서 없어졌다고 하죠.

분명히 간절히 사모하던 본향이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박해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목적지를 잃지 않으려면 이렇게 성경을 펴고 곳곳에서 외치는 증인들의 말을 매일 들어야 합니다.

1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사람이 무언가 믿어진다면 그것이 실제로 있다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믿어질 수 없다는 것이죠.

증인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 신앙의 종착지에서 만날 영원한 본향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미 바라는 것이 진짜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피곤한 몸을 이끌고 먼 길을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없는 것을 있다 치고 현실을 희생을 할 만큼 아둔한 사람들입니까?

아니잖아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과 천국이 실제하기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의 경주가 확실한 천국을 향한 것임을 항상 기억하고 끝까지 경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모든 경기에는 낙오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경고합니다.

조상들 때 애굽을 빠져 나왔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경주를 감당하고 증인이 된 사람들처럼, 포기하고 세상을 전부로 선택한 사람들도 경종을 울리는 증인이 되는 것이죠.

늘 피곤해지기 쉬운 무릎을 강하게 하고 이 경주를 잘 달려 영광의 목적지에 이를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그곳을 가리키는 증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이 힘든 믿음의 경주를 잘 하려면 항상 힘써야 할 것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경주도 이 땅의 경기들과 같습니다.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경기력을 저하시키는 것을 버리고 경기력을 향상 시킬 훈련은 계속합니다.

선수들에게 멘탈 훈련은 특히 중요하죠.

한번 실수하고 마음이 무너지면 경기를 완전 망치기 때문입니다.

류현0 선수가 이번 시즌에 잘 던지다가 지난번 콜로라도전에서 무려 칠 점을 내 주고 내려온 날이 있습니다.

제가 다 안타깝더군요.

그런데 류선수 강점은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흔들리지 않는 멘탈입니다.

류선수가 이런 강한 멘탈을 한화에서 뛸 때 갖게 되었다들 합니다.

그때 아무리 잘 던져도 답이 없는 수비수들 때문에 항상 패전 투수가 되었다고 하죠.

류선수의 답은 동료들이 못 잡으면 내가 잘 던지면 된다며 더 혹독한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료들의 실수가 나오고 점수를 내줘도 흔들리지 않는 멘탈 갑이 된 것입니다.

결국 받쳐주지 않는 환경이 멘탈 훈련의 일등 공신이었던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마음이 되었다면 무수히 낙담시키는 환경에서 만들어진 게 분명합니다.

호날두는 지금도 하루에 윗몸일으키기를 삼천개씩 한다고 합니다.

부상 없이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 머물고 싶기 때문이랍니다.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도 당연히 영적 근육을 단련하는 기도와 말씀 같은 훈련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사도는 특히 신경써서 다루지 않으면 경주를 힘들게 하는 치명적인 문제를 지목합니다.

무거운 것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믿음의 삶에 하중을 더하는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기의 복음사역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고 고린도성도들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우리 마음을 무겁게 눌러 경주를 더디게 하는 것은 염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생활의 염려가 신앙의 성장을 방해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고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있다면 그것은 염려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걸음이 무겁습니다.

사소한 염려조차도 충분히 우리 믿음을 끌어내릴 만큼 강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 것을 아예 명령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기가 막히게 지난 주 다 우리가 염려했던 것들이죠.

사도들도 서신서에서 역시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이 염려되는 것들을 주께 맡기는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반드시 우리를 사랑으로 돌봐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 제도 안에서 사는 우리는 세상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오래 생각하면 반드시 염려에 빠집니다.

노후엔 어떻게 살지?

이 월급으로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지?언제 내 집을 장만하지?

경기가 이렇게 안 좋은 데 다음 일감이 없으면 어떡하지?

온 종일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만 바라본다면 반드시 염려가 들어오고 염려는 우리를 무겁게 짓눌러 믿음이 쇠약해지게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헤쳐 나갈 상황이 더 어렵게 되는 것이죠.

염려와 믿음은 정확히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또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죄는 일단 너무나 쉽게 우리를 얽어 맨다는 것입니다.

어느 틈에 마음과 말과 행동에 착 달라 붙어 믿음의 경주를 방해합니다.

죄가 우리를 얽어매면 믿음의 걸음을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합니다.

죄가 있는 동안은 경주는 사실 올스톱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상태에서 하는 신앙생활은 사실 믿음의 진보에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상태이고 그냥 산 것입니다.

그게 믿음의 원리입니다.

죄와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없기에 성령께서 죄를 지닌 성도들을 도와주고 축복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죄든 사소하게 생각하지 말고 벗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죄인지는 말씀과 성령이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과 성령이 비춰주지 않으시면 세상에서 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게 뭐가 문제인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문제를 지적하시고 내가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우리 의지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옳다고 해서 다 지키지 않잖아요?

죄와 세속의 흡인력은 너무 강력해서 잠시 말씀을 듣고 제대로 해보자고 용기를 얻어도 의욕이 금방 사그러들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염려하지 않으려 해도 내일이 여전히 걱정되는 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3. 그래서 이 무거운 짐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고 믿음의 길을 잘 달려 가려면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항상) 바라보자

항상, 계속해서를 넣어서 읽는 게 더 정확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믿음의 길을 달려 갈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와주시는지 알고 때에 맞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두 가지 지식을 갖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이었고 부끄러운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성정을 가지신 예수님이 벌거벗겨 십자가 형틀에 매달리고 여섯시간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비참하고 수치스런 형벌을 견디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너를 구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감수하시겠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게 예수님께 가장 큰 기쁨이시라는 거예요.

누구에게 그런 사랑 받아보셨어요?

히브리서는 그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심을 강조합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 받기 위해 대표로 제물의 피를 들고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인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제물이 되어 그 피를 들고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 원리를 1장에서 10장에 걸쳐, 방대한 구약성경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히브리서 기자가 입증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며 다시 한번 전체를 읽다가 울었습니다.

구약성경 구석 구석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예수님께서 그 자취를 미리 남겨 놓으시고 구원의 길을 치밀하게 준비하신 그 사랑에 눈물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유일한 대제사장, 중보자는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것저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들어주십사하고 같이 중보기도 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조건은 단 하나면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것은 죄에 대한 중보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그 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것이죠.

또 매일 짓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막히지 않도록 그 피로 중보하시는 것입니다.

얽어매기 쉬운 매일의 죄는 진지한 신자들에겐 무거운 짐입니다.

믿음이 성숙한 성도들은 자기 죄성으로 인해 낙담하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남의 죄성으로 인해 시험에 듭니다.

성령이 양심을 비춰주시면 내가 지은 죄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 주님의 피가 실시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성찬식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잖아요?

우리를 얽어매고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라 해도 우리 손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복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복된 상태가 끊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이 중보하심을 믿고 주님께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모든 염려와 기도를 들으시고 도우시기에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살다보면 하루 중에도 가슴이 철렁할 위기를 느끼기도 합니다.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해 나가야 되지이런 말을 속으로 수없이 되 뇌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꾸면 되잖아요?

예수님, 이걸 어떡하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죠?’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 짐을 대신 지신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반드시 우리의 문제와 짐을 맡으시고 해결되기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내 스스로에게 묻던 것을 예수님께 묻는 것이 생각보다 잘 안됩니다.

항상 이것을 잊지 마시고 예수님께 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가 피곤하고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왜 히브리교인들은 피곤하고 낙심했을까요?특히 사람들로 인해 어려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죄인들의 거역함을 참으신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겠죠.

그때나 지금이나 본성이 동일한 죄인들이니 서로를 거역하고 피곤하게 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우리를 거칠게 거역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정말 피곤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이때도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이 육체의 힘으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려고 부단히 애써 본 사람은 압니다.

그게 안되서 나중엔 차라리 상종을 안 하게 되는 것이죠.

사람으로 인해 지칠 때, 예수님을 거역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예수님은 내가 수없이 주님을 거역하고 외면할 때도 나를 참아주셨습니다.

사람으로 인해 눈물나고 한숨이 날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 반드시 우리를 위로하시고 만져주십니다.

그 힘으로만 우리는 사람으로 인한 상처와 낙심과 원망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죄도, 염려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출발점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임을 늘 기억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경을 펼치면 수백, 수천의 증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저기에 우리가 장차 누릴 영광스런 천국이 있소.

믿음의 무릎이 약해질 때, 죄가 발목을 잡을 때, 사람으로 인해 낙심되고, 영적 피로감에 빠질 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으로 능히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또 오늘 성찬식에 참여할 때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복된 성도로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