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있는 부패한 죄성 중에 으뜸이 교만과 탐욕인 것 같습니다.
제가 가끔 아침 드라마를 보는 데 주제가 한결 같더군요.
남의 남편을 뺏고, 재산을 훔치고, 그러기 위해 흉계를 꾸미고, 사람도 죽이고 그러다 최종회에서 다 망한다. 다 그런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욕심을 채우려고 무슨 짓을 하는 지, 그 모습이 얼마나 흉측하고 마귀 같은 지 드라마가 생생하게 보여주더군요.
하긴 뉴스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만일 드라마처럼 누가 우리의 내면을 연출해서 드러나게 한다면 우리 사는 모습도 아침드라마 못지않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쫓아 사는 것을 금지하십니다.
신자들이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것은 구원받은 것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를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십니다.
아니, 처음부터 우리가 사는 방법을 지도해주시려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영생을 아름답게 준비하고, 이 땅에서 영생의 능력을 누리며 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오늘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큰 감동을 주시고 역사해 주셔서 말씀을 통해 우리가 유익하고 잘되는 길을 발견하길 소원합니다.
오늘 제목이 ‘성령을 좇아 행하라’ 입니다.
본문을 읽어서 알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을 쫒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게 둘 중 하나라는 것이죠.
지금 성령을 쫒아 살고 있지 않다면 당연히 육체의 욕심을 쫒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이란 타고 난 부패한 죄성에서 나오는 욕망을 말합니다.
자연인들은 법에 걸리지 않을 만큼 허용된 범위 안에서 이 육체의 욕심을 쫓아 살아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욕심을 채우면 그걸 성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라고 해서 죄의 본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본성이 욕심내는 것을 얻기 위해 삽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체를 쫒아 사는 삶의 결과물들이 19절 부터 나옵니다.
이런 성적표를 받는 인생은 육체를 쫒아 살고 있는 증거입니다.
음행, 불결,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지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끼리끼리 노는 것, 분열, 이단, 시기, 술에 취함, 방탕하게 사는 것.
이 중에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것이 있습니까?
별로 취하고 싶은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의해서 살지 않고 내 맘대로 좀 살고 싶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다 추악한 것들이랍니다.
사랑도 참 아름다운 것인 데 죄의 욕구에 따르면 음행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과거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의 삶을 곰곰 생각해보면 경하던 중하던 어쨌든 이런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명백히 선을 긋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물론 우리가 죄성을 갖고 살다보니 신자라 해도 이런 육체의 일들에서 아주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여러가지 시험에 들기도 하고, 남의 험담도 하고, 술에도 취해 슬쩍 방탕하기도할 때가 있기는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는 본질적으로 육신의 욕망만을 따라 사는 세상사람들하고는 좀 다릅니다.
그러나 이런 연약한 신자들에게도 오늘 바울사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도들이라 해도 성령을 좇아 살지 않으면 결국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우리 안에서 서로 싸운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욕망이라는 자동차를 타고 질주하지만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브레이크를 걸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느니, 말씀에 주의해서 살아야 하느니 하나님을 믿는 게 참 까다롭고 힘들다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네, 믿음의 삶이 본래 그렇게 진지한 것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우편에 있던 강도처럼 죽기 전에 믿겠다고 합니다.
또 거룩하게 되는 삶은 싫고 그냥 구원만 받아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았더니 그 강도 같은 험악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만큼이나 된 것도 다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오늘 주제가 너무나 중요한 ‘성령을 쫒아 행하라’입니다.
중국에서 큰 사업을 하는 어느 집사님이 이렇게 고백하더군요.
자기가 30년간 교회를 다녔지만 ‘은혜를 받았다’거나 ‘성령충만하다’는 게 뭔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 이유는 안가면 아내가 귀찮게 하니까, 집에서 자든 교회서 자든 마찬가지다 생각하며 다녔다는 것입니다.
무려 30년을.
그런데 사업에 위기가 오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동안 관심도 없던 기도를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는 데 요한복음 말씀이 그날따라 꼭 자기에게 하는 것 같이 들리더랍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말씀이 들리다니 신기한 일이었죠.
그런데 그 다음 예배 때 마가복음3장49절 말씀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 말씀이 사업의 실패로 잔뜩 움츠러든 곤고한 심령을 만지자 갑자기 비처럼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남들이 왜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를 하는 지 이해가 안됬는 데 자기도 모르게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30년을 교회를 다닌 이 사람처럼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고 더군다나 성령을 쫒아 행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라면 성령을 쫒아 행하라고 하시는 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을 쫒아 행동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죠.
오늘은 성령을 쫓아 산다는 게 무엇인지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길 원합니다.
이 말씀은 지난 주 설교였던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해서 살아가라는 것과는 좀 다른 각도입니다.
성령을 쫓아 행한다는 말씀 안에는 성령하나님이 실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강조 된 것입니다.
즉 인격체이신 성령님과 관계적인 면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지금도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의지해서 살라는 것이죠.
성령님의 인도를 쫓아 살지 않으면 거듭난 성도라 해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결과는 본문에서 말씀한대로 누가 봐도 현저하게 악하고 무익한 육체의 열매들을 맺습니다.
지금 내 인격과 삶의 형편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분명히 육체의 소욕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들 성령을 쫒아 사는 삶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오늘은 본문대로 어떻게 해야 성령을 쫒아 살 수 있는 지를 지금부터 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성령을 좇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까?
무엇을 근거로 우리가 성령이 들어와 계시다고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말씀을 근거로 입니다.
성령님을 우리가 어떻게 마음에 모실 수 있는 지는 성경의 기록된 말씀대로 할 때 우리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는 방법을 성경에서 몇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기도하며 구할 때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사도행전2장38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얻고 성령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을 종합하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성령받기를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 이제까지 하나님 없이 잘 살았던 내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내가 창조 된 목적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완전히 삶을 유턴하는 것 까지 포함합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죄 문제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대신 갚아주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으로 따르겠다고 작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행할 때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으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오셨는지, 안 오셨는지는 약속의 말씀대로 오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회개하고 진심으로 믿으려 했다면, 하나님도 정말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속이지도 않으시고, 속지도 않으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은 느낌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느껴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시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령님과 남다른 교제를 하면서, 감각할 수 있는 방법인 시각, 촉각, 청각, 육감 등으로 자꾸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악한 영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베일에 싸인 하나님이라고 알려져 있듯이 존재 자체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합니다.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 때 불과 바람소리 같은 현상을 보이시며 땅이 진동하며 성령이 오신 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령의 강림하심을 누구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셔야 했기 때문에 가시적인 방법을 취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감각하는 신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뭔가 다른 영이 내 안에서 감각이 되면 이상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안 느껴지는 게 정상입니다.
아직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믿음이 없으신 분들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 나눈 말씀대로 우리가 할 부분을 진실 되게 하고, 그 다음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분명히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영적 세계를 깨닫고 은혜를 체험하는 삶은 성령을 쫓아 행하며 점점 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님을 쫒아서 행해야 하겠죠.
성령께서는 보이지도 않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도 없는 데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어떻게 우리가 그 인도를 따라 살아갑니까?
그것도 말씀에 근거해서 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16장1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우리가 지금 말씀을 들으려고 애를 쓸 때 성령님은 깨달을 수 있도록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믿음의 삶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길 항상 기도하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무슨 문제를 결정할 때 뿐 아니라, 내 작은 행동이나 생각이나, 시간관리나, 대인관계, 학업과 직장생활을 어떻게 해나가야 맞는 지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내 판단이나 생각보다 백배 낫습니다.
그리고 당장 하고 싶지 않고, 불편하고 싫더라도 성령님의 인도를 순종하겠다는 마음의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순종하기 힘든 길로 인도하셔도, 하는 데 까지 한번 순종해보겠다는 그런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반드시 약속대로 우리 삶 전체를 지도하고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님의 세미한 인도는 대부분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양심의 좌소를 통해 아주 미세한 터치로, 마치 내 스스로 느낀 것처럼 들립니다.
양심을 민감하게 해주셔서 선악간에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이죠.
로마서9장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노니
성령님이 양심을 통해 말씀하실 때 기준은 변질 된 자연인들의 양심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계명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양심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나름대로 다 ‘나 양심껏 살았다’ 하는 것하곤 다릅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정도는 신앙생활의 경륜과 개인의 믿음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구하면 각자에게 맞는 단계로, 반드시 모든 일을 잘 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하나님은 예수님의 영이시고 주님과 똑같은 신실한 인격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도하며 항상 성령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해놓고 신앙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힘들겠죠.
성령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수록 점점 분명하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것은 따분한 것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건 아니겠죠.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지나치게 영계의 비밀을 캐내려는 듯 영적인 현상들을 탐닉하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잘못 된 영과 접촉하기 쉽습니다.
성령님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상의 일들을 지도해 주십니다.
지금 게으름 피우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고, 이젠 거짓말 그만해라,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왜 낙심하고 있냐 하나님이 아버지신데 네게 필요한 것 다 아시니 걱정하지 마라 이런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우리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인도하십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질주하지 말고 성령의 음성에 신중하게 집중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는, 깨닫게 되기는 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본성이 부패하고 욕심이 가득한데 어떻게 우리의 양심을 통해 자극하신 대로 정의와 사랑을 행할 수 있냐는 것이죠.
깨달은 말씀대로 한번 실행하려고 해보세요.
얼마나 힘든지 아마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유명한 세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스펄전, 켐벨 몰간, 마이어목사님입니다.
본래 미국에서 사역하던 몰간목사님이 영국에서 사역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마이어목사님이 나중에 고백하기를 몰간목사님이 미국에 있을 때는 그를 위해 중보기도를 했었는 데 같은 지역에서 사역하다보니 기도가 잘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마음에 말할 수 없이 괴로움을 당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본인도 자기 자신이 싫었겠어요?
사람이 아무리 존경받는 목사가 되도 실은 이런 존재입니다.
나쁜 줄 알면서도 버리기 힘들고, 선한 일인 줄 알면서도 하기가 그렇게 힘든 것이죠.
성령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려면 우선은 싫어도 그렇게 하겠다는 우리의 의지적인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게 큰 믿음입니다.
내 게으름 때문에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지적해주시면, 이제 내 게으른 생활 중에 특히 어떤 부분을 고치겠다는 의지적인 결심을 해야 합니다.
내가 남의 험담을 하는 문제를 지적하신다면, 다시는 남의 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죠?
바로 그 다음은 성령께서 내가 실행할 수 있게 능력을 주시고 도와주시길 또 기도로 구하는 것입니다.
긴 기도가 아닙니다.
잠시 잠시 마음을 집중해서 도와주심을 수시로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반드시 내가 결심한 의지를 더 강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내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게 해주시고, 내 지혜 위에 성령님의 지혜를 더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내 일상생활의 지도를 받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절차가 까다롭고 어려운 것 같지만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에 의존해서 살면 삶이 평안하고 걱정이 적어지고 천국이 마치 내 맘에 지금 있는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성령님 안에서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와 풍성한 사귐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그 삶과 인격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죠.
22절에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열매라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다해 우리가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이런 열매는 우리 힘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맺지 못합니다.
인간의 의지를 다해 유사한 가짜 성령의 열매는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 차이는 현격합니다.
성경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은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죄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자기 의지를 다해 절제의 열매를 맺었다고 합시다.
그 부작용은 오히려 노력 안한 것보다 더 나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형편이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며 도움을 받아 우리가 협력하여 살 때 진짜가 열리는 것입니다.
아홉가지 열매를 하나 하나 다시 읽어 볼테니 내게 이 열매가 있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특성들이 작년에 비해 올해 내가 더 깊고 강해졌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성령을 쫒아 잘 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의 이 완전한 성품을 향해 더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내 신앙과 인격이 이미 장성해서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재능과 연구에는 한계가 있지만 영적인 풍요한 삶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지금 마음에 희락이 있다면, 더 좋은 희락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인내심이 있다면, 더 깊고 견고한 인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선하고 착함이 있다면, 더 부드럽고 완전한 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한 두 가지 부분에서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좋은 면을 보이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결코 자비롭지는 못한 데 충성은 아주 잘되고 있다.
그러면 그 충성이 성령의 열매에 의한 충성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질인 경우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자기 명예를 걸고 충성하는 성격이라는 것이죠.
내 안에 희락은 없는 데, 절제는 잘되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기질이 자기 제어를 잘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복수가 아니라 묶어서 단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로 따로 열리는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한 개의 열매라는 것이죠.
바울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별 의미 없이 이렇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기질과 성령의 열매를 잘 구분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타고난 재능이나 기질 때문에 유사하게 보이는 것에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쫓아 산다면 아홉가지 열매가 함께 아름다운 인격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유난히 인내심이 부족하거나, 착하지 않거나, 온유하지 않거나, 어쨌든 다른 사람에게 시험이 될 만한 부분이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성숙도는 가장 부족한 그 부분만큼 입니다.
왜 이렇게 힘들게 성령을 쫒아 살아야 하는 지 그냥 친숙한 세상에서 해오던 대로 편하게 살면 안되는거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잖아요.
성령을 쫒아 행하지 않으면 육체의 소욕을 따르게 된다고.
육체의 소욕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위장해도 어둠의 일이고 사탄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제 어느 쪽에 더 친해져야 하는 지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면 영원한 천국이 점점 더 친숙해집니다.
이 죄의 친숙한 세상에서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곧 우리는 자연세상과 다른, 친숙하지 않은 낯선 세상, 영생하는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다 친숙한 예수님 앞으로 올라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오직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면 충격적인 내세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심는 자는 썩어질 육신의 것을 거두고 영으로 심는 자는 영원한 것을 거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따라 계속 살아가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해서 거두는 모든 것은 썩어질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한 내 진짜 생애를 위해 아무 도움도 영광도 되지 않는 썩어질 것을 위해 귀중한 이 땅의 삶을 허비하는 것이죠.
성령을 쫓아 사는 삶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이런 영적인 싸움으로 인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매일 고민하고 때로 실패하겠지만 잘 훈련하셔서 성령의 소욕을 따라 승리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가 우리에게 풍성하게 맺히고, 우리 인생이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정말 잘 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2014년7월20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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