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백배의 결실을 맺는 인생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똑같이 뿌려지지만 좋은 밭에서만 백배의 결실이 맺어진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결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매일 뿌리는 대로 이생과 내생에서 그대로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어진 인생 중에 무언가를 뿌리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어떤 이는 영생을 거두었고, 어떤 이는 영원한 파멸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면 앞으로 거둘 것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복스러운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그렇게 살길 원하십니다.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그런다고 해서 복된 삶이 되질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듣고 행함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좋은 것을 거두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먼저 육체를 위해 심는 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육체를 위해 심는 사람과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육체를 위해 심던지, 아니면 성령을 위해 심던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둔다고 합니다.
썩어질 것이라는 말의 더 분명한 의미는 파멸이란 뜻입니다.
내 육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심었는데 어이없게 파멸이라는 결말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닙니다.
콩을 심었더니 콩이 나고 팥을 심었더니 팥이 나듯이 매 순간 우리가 심는 걸 그대로 우리 삶에서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거두는 것은 결국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육체를 갖고 자연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당연하게 이 땅에서 자기 육체를 위해 일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종착역에 닿아 보니 영원한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위임받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자식으로 저절로 태어난 게 아니라 창조하신 분이 목적을 갖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각각의 일생을 위임하신 것입니다.
주인 앞에서 장부를 놓고 회계를 볼 때가 옵니다.
주인은 이 땅에서의 소출, 결과물을 요구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육체를 위해 심은 결과물은 썩어질 것, 파멸당할 것 밖에 안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우리 고향,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사도는 앞장에서 더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육체의 삶을 말해줍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기에 나온 성향들은 근본적인 우리의 죄성에서 나오는 육체의 일들입니다.
이 육체의 일들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음행과 불결한 삶과 호색은 성적인 죄악을 말합니다.
결혼 밖에서 이런 것을 하는 것은 육체의 쾌락을 위해 심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 이렇게 심으면 반드시 파멸을 거둡니다.
우리 몸은 성령이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면 주께서 그 몸을 멸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적 부패와 타락은 그 사람을 더럽고 불결하게 하고 반드시 그런 육체에는 질병과 고난이 따릅니다.
다음 우상숭배와 주술과 이단은 종교성을 갖고 저지르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를 위해 복을 빌고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내일을 귀신의 힘을 통해 알아보려는 영적 호기심을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부족함 없이 계시해 주십니다.
그렇게 말씀을 따라 꾸준히 하나님을 섬기는 게 성이 안차고 조급해서 다른데 가서 물어보는 사람들은 악령에게 영혼을 농락당하고 결과는 파멸입니다.
다음, 분쟁과 당 짓는 것과 분열은 자기 이익을 위해 공동체 안에서 세력을 모아 서로 적대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사랑으로 통합하십니다.
무리에서 갈려나가고 찢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허무는 죄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생은 바르게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또 시기와 투기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탐내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입니다.
상대방을 태울 뿐 아니라 자기가 먼저 그 불에 태워지는 가혹한 범죄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은 지나친 육신의 쾌락을 즐기며 방종하고 타락한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긴 게 없는 삶입니다.
이런 게 다 죄이고,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그 영혼이 파멸을 당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에 대해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위에서 열거한 것만이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도 거론하는 죄의 목록이 있습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라
바울사도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사형에 처할 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일들을 죄의식 없이 행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도 이런 죄악에 빠져 실족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기에 심판날에 치를 죄 값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생에서는 우리 역시 심은 대로 거둡니다.
가령, 분노가 분명 육체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욕구대로 분노를 심으면 무엇을 거둡니까?
분명히 관계의 갈등과 파탄과 고통이라는 열매를 따 먹게 됩니다.
모든 죄가 다 심은 대로 이 땅에서도 거두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야 말로 우리의 삶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 주범인 것을 꼭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죄라는 단어 자체를 기분나빠하고 아예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목회자 중 하나인 조엘 오스틴 같은 경우 설교에서 죄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의 연약함이라고 말합니다.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항상 달래주신다는 것이죠.
인간은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악에는 지독하게 강한 게 인간입니다.
이번에 제2의 오원춘사건이라는 수원에서 있었던 박춘봉 살인사건을 보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게 인간인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공개 된 살인자의 얼굴을 보니 너무 순해 빠진 이웃집 아저씨 같은 얼굴이라 더 소름이 끼쳤습니다.
인간의 죄 속에 살기도 들어 있다고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최초에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살인의 추억이 죄인들 죄성 깊은 곳에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들이 사람을 죽입니다.
합법적이고 타당한 상황이 주어지면 사람은 사람을 죽인다니까요.
나중엔 점점 더 잔인하게 죽이는 게 전쟁 역사에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어느 동물도 그렇게 동족을 학살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항상 동정을 받고 위로를 받아야 할 연약한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신 차리고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게 아니라 영적으로 위장 된 더 교묘한 죄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는 죄가 있다고 본문7절에서 바울이 엄하게 경계합니다.
그 배경은 12절과 13절에 기록된대로 갈라디아교인들의 할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당시 갈라디아교회에 유대인들이 들어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거기에 할례까지 받아야 한다며 성도들을 미혹시켰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할례를 조건으로 백성의 계약을 맺었으니 복음을 믿는 것은 불완전하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이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미혹을 당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할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갈라디아교인들에게서 엄청난 좌절감을 표시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면서 바울사도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왜 그렇게 할례에 쉽게 미혹되었는지를 그 내면의 의도를 실랄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으려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 잘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면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은 철전지 원수고 신성을 모독하는 살려둬서는 안될 존재들입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이 할례를 받으면 유대인들 사이에서 설 자리가 좀 있지 않겠냐는 계산이었다는 겁니다.
복음에 자기의 육신을 위해 무언가를 혼합시키려는 것입니다.
편협 된 기독교라는 화살을 피하려고 복음에 이것저것을 다 받아들이는 게 요즘의 통 큰 사람들이 하는 기독교운동입니다.
바울사도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육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갈라디아교인들이 할례를 하려고 했던 이유는 유대인 기독교신자들에 대한 선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조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선민이 되고 율법을 받은 유대교에 대한 열등감이 이방인 신자들 속에 좀 있었다는 것이죠.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파생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역사이고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 뿐입니다.
아담의 범죄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해 낼 만국의 주님의 교회를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많은 신자들이 카톨릭을 원조라는 잘못 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초대교회 신앙에서 한참 잘못 나간 것이고 성경적인 바른 신앙으로 돌이킨 것이 개신교입니다.
카톨릭을 큰집이라고 말하는 이웃교회 김목사님은 분명히 잘못 아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범신론입니다.
당시 이방인으로 복음만을 믿었던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세례 뿐 아니라 할례도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뭔가 더 있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거라고 바울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또 뭔가 복음만으로는 부족하지 않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에 대한 불신이 담겨있습니다.
할례까지 받아두면 뭔가 더 구원이 확실해지지 않겠냐는 생각은 분명히 복음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는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해 바울사도는 무섭게 책망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말씀은 세상사람들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를 읽을 갈라디아교회의 교인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고 하나님은 더군다나 그런데 속을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건 믿음을 빙자한 육체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빙자한 죄는 자기 스스로도 속일만큼 교묘합니다.
그 바탕은 엄청나게 자기 육신을 사랑하는 데서 옵니다.
죄의 본성이 교묘하게 종교의 옷을 입으면 그게 더 골치 아픈 게 됩니다.
거짓 경건이나 겉으로만 잘 믿는 것 같이 행동하는 것, 또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것 같이 보이려는 영적인 허세 이런 것이 다 모양은 신앙이지만 속은 육신을 위해 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막에서 수도했던 중세 수도자에 대한 실화들 중에 인간의 동기를 꿰뚫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한 수도자가 아무도 없는 사막의 수도원에서 금식을 하는 데 평소엔 일주일에 닷새를 금식해도 너끈하던 사람이 하루에 한번 밥 먹는 시간인 세시까지 참는 것도 그렇게 어렵더랍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막에서는 그 사람이 금식하는 것을 칭찬하고 우러러 봐 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봉사나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동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발라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교묘합니다.
자기 자신도 속인다니까요.
많은 신자들이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서 꽤 괜찮은 신앙인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영적인 허세가 가장 두려운 적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체험했다고 하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말로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지만 주인공은 자기라는 게 보입니다.
자기가 이만큼 하나님께 대우받는 영적인 가치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게 은연중에 드러납니다.
그것 역시 권력지향적인 육신을 따르는 죄성입니다.
내가 남보다 더 특별나고 하나님께 더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특별난 신앙이 아니라 모자란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다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은 철이 들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모든 사람이 죄를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저기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도 똑같이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
또 본래 그런 죄인인 나를 사랑해주신 큰 사랑을 받고도 여전히 다뤄지지 않은 내 못난 죄의 모습,
이런 사실들을 인격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게 바로 신앙이 장성한 사람입니다.
영적 허세란 독버섯이 자라게 하지 않으려면 내가 특별나게 보이도록 하고 싶은 모든 충동을 분별하고 자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명성에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앞 3절에서 바울사도는 경계합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며 깊이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 사람이 복된 줄 믿습니다.
비틀즈의 멤버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존 레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인기 절정에 있을 때, 이젠 내가 예수보다 더 유명해졌다 라고 자기의 성공에 도취되어 불경한 말을 했습니다.
그 이후 아내와의 누드집을 내고 마약과 타락한 삶을 살다 광팬이 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아름다운 음악적 재능을 육신을 위해서 다 허비하고 파멸한 가엾은 영혼입니다.
주나엘찬양팀 처럼 은사를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데 써야죠.
육신을 위해 심던 모든 삶을 돌이켜 성령을 위해 심는 우리 모두가 되어 영생을 거두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위해 심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을 위해 심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욕구를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이 주시는 소욕이 있고 육체가 주는 소욕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오시면 과거에 별로 개의치 않았던 일들에 대해 민감해 집니다.
아직 거듭남이 확실치 않은 사람들은 양심이 그 기능을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선악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욕이 분명치 않은 사람은 최소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의 본성대로 심다가 파멸을 거두지 않게 됩니다.
대개 성령께서 주시는 소욕은 내 본성과 거스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각은 거의 내 맘에 잘 들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 생각과 감정과 반대로 하면 거의 성령님이 주시는 소욕입니다.
만일 내 원대로 시원하게 달렸다면 당연히 육체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걸 억제하고 거슬려 성령의 소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를 위해 심었더니 결과는 파멸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야만 영생의 확증인 성령의 열매가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기억하시죠.
사랑 희락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것들이 내 인격에 풍성하게 맺도록 하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소욕대로 사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당연히 육체의 일 쪽으로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법을 따르다 쓰디쓴 열매를 따 먹어 본 사람은 점점 성령님이 주시는 소욕을 따라 움직이는 게 백번 내게 유익하다는 걸 인정하고 그것을 따르게 됩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성령을 위해 심는 일은 대체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우리는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고 특히 믿음의 한 가족이 된 성도들의 가정에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 대한 결실은 이 말씀대로 낙심이 되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결과가 더디다는 뜻도 됩니다.
여기서 선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악에 대해서 오래 참고 견디며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엔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을 거쳐야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선을 행하고 착하게 심었다면 때가 이르면 반드시 아름다운 결실이 있을 줄 믿습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은 말씀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은 분명히 빛의 열매입니다.
성경 전체를 잘 살펴보면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양심적이고 착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거듭나고 나서도 더욱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기고 결국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백배의 결실을 낸 밭이 착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악랄하고 잔인하고 인정머리도 없고 이기적인 사람인 경우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어도 신앙의 큰 열매를 맺기 힘듭니다.
그 죄의 본성이 독하고 두텁게 더께가 앉아 떼어내기가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가끔 신앙간증에서 자기가 과거에 얼마나 나쁜 인간이었다 구원을 받았는 지 감동적으로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 성품이 많이 개선된 것 같지만 현재의 나 속에는 여전히 과거의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과거에 못된 짓 하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 성격이 그대로 나옵니다.
한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하고 다니던 김태0 이나 조양0 같은 조폭들이 결국 다시 본래의 죄악 된 삶으로 돌아간 것이 그래서 입니다.
우리도 과거의 약점이 어느 순간 여전히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게 되는 것이죠.
인간됨이 어떤지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도 큰 영향이 있습니다.
양심이 좀 불량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꼭 양심 불량하게 믿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인정이 없는 까칠한 성격은 예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에 있어서도 항상 자로 잰 듯이 거리를 두고 좀체로 자신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은혜 속에 푹 잠그기가 어렵습니다.
이게 오늘 말씀대로 심은 대로 거둔 원리 때문입니다.
내 평소에 심은 대로 육체의 열매로 가득한 인격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 우리는 더욱 힘써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하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부단히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치들을 깨달았다고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은 우리의 육체를 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육체와 싸우고 성령을 위해 심기 위한 각오로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내 옛사람이 튀어 나올 때 마다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록 우리의 옛사람,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추악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14절에 보니 그럴때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고백한다고 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런 못난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죄의 욕망을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개 끌려가듯 욕망과 죄에 끌려갔지만 이제 저항 할 이유가 있고 성령께서 버틸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내게는 신앙의 좋은 품성과 결실들이 이렇게 늦게 나타나는 지 이상하게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이 심은 대로 정직하게 거두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못박고 있습니다.
열매는 정직합니다.
매일 육체를 위해 심고 있는 데 어떻게 성령의 좋은 열매들을 거둘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심은 씨대로 열리는 것이 열매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육신대로 뿌리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심고 영생과 함께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좋은 열매들을 많이 맺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2014.12.14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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