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눌 말씀은 이스라엘의 2대 왕인 다윗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다윗을 도와 장차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사방에서 군대 지휘관들이 모여들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은 하나님 뜻대로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해 당대에 왕조가 끝나게 되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동 다윗이 2대 왕으로 선택이 됩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위 계승은 평탄하지가 않았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여 왕위계승을 막으려고 광기에 가까운 추격에 인생을 걸고 다윗은 사울을 피해 10여년을 도망 다니며 방랑자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사울왕이 죽고 나서야 겨우 왕이 되는 데 그것도 처음엔 12지파 중 유다지파만 다스리다 7년 반이 더 지나서야 비로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 정도로 훑어만 봐도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겪은 17년간의 세월이 어땠을까 짐작이 가시죠?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왕은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본문은 드디어 다윗에게 왕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얼핏 보면 헨델의 ‘보라 용사들이 돌아온다’ 같은 우렁찬 합창이 들려오고 사방에서 다윗을 위한 군사들이 몰려오는 희망찬 광경이 보이는 듯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안에 다윗의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이 땅에서 눌리고 광야도 겪고 눈물 골짜기도 지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다윗을 인도하셔서 결국 왕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을 보며 우리도 그 주님의 손에 이끌려 마침내 영광스런 기업을 받게 될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오늘 다윗의 삶을 통해 고단하고 지친 우리 마음에 큰 교훈과 위로가 임하시길 원합니다.
우선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에게 광야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요새라는 것이 번듯하게 세워진 견고한 성곽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8절에 보면 광야에 있는 요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숨어들어간 광야의 은신처를 말합니다.
사울왕에게 쫒겨 다윗이 위태한 광야로 코너까지 내몰린 것입니다.
왕으로 선택되어 기름부음을 받았을 뿐인데,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죽음의 추격이었으니 다윗도 참 그 인생이 풀려나가는 게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공감하시는 분들 많으시죠?
도대체 왜 내 인생이 이렇게 풀리고 있는지 이해가 안되는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이렇게 다윗이 광야에서 이리저리 쫒기며 도피하던 시기가 무려 십년입니다.
다윗의 시편이 왜 그렇게 한탄과 한숨과 슬픔으로 시작되는 게 많은지 아시겠죠.
우리의 삶 역시 때로 거친 광야에서 혼자 비틀거리며 시련의 비바람을 맞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힘든 환경 속에서 나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광야의 때를 다 겪어 보셨을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했듯이, 다윗에게도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에 이르기까지 다 인생의 광야가 있습니다.
다윗의 광야에서도 그를 지키고 함께 해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광야 길에도 독수리의 날개로 우리를 업으시고 건네주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 밖에 있는 분들은 보호자도 없고, 목적지도 없이 험난한 광야 생애를 방황하며 이생을 보내는 것이니 얼마나 인생이 고되겠습니까?
이렇게 도망친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십년 동안 한결 같이 도와주셨습니다.
또 혈혈단신이였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함께 할 사람들도 붙여주십니다.
사무엘상22장2절에 광야로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에 대해 기록합니다.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사람을 붙여주시긴 하셨는데 그게 온갖 오합지졸들이었다는 것죠.
드디어 다윗이 그 4백명의 오합지졸들의 두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리라고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상상했던 그림은 아니죠.
이 소외된 자들과 광야의 십년을 보내던 중에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용사다운 용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시는 메시지가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광야의 시련 속에서도 분명히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대박’이 없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과 길로 인도하실 때,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남이 보기에 창피할 정도로 미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십년은 투자해야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분명히 계획하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 일을 발견하고 그 일이 이루기까지 충실하게 일정기간을 수고하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발명가 에디슨은 ‘많은 인생의 실패자들은, 그들이 포기할 때 자신이 성공에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끝까지 가는 사람이 얻는 것입니다.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조급함으로는 구하는 걸 얻지 못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야 물론 사회생활이 신앙생활이고 신앙생활이 사회생활이니 적용은 똑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아가고, 도우심을 느끼고, 수많은 시련을 통해 내 속의 죄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가 눈물 나게 고맙고, 이런 가운데서 점점 신앙이 성숙해 가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원통하고 빚진 자, 가난한 자들이 몰려올 때 다윗은 기꺼이 이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 졌습니다.
우리가 지기 힘든 짐만이 우리를 단련한다는 것이 인생의 신비입니다.
다윗은 힘든 짐과 함께 하나님의 왕국을 다스릴 지도자로 준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신 환경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좋은 일, 더 보람 있는 일을 위해 준비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광야 길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좀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사람과 일과 도움들이 우리의 모든 고난 중에 신실하게 함께 하게 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때가 되자 오늘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울만한 진짜 용사들을 보내주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오늘 용사들이 몰려올 때 다윗이 얼마나 뿌듯하고 희망이 생기겠습니까?
‘이제 때가 되었구나, 드디어 하나님이 나를 높이시겠구나.’그런데 17절을 보면 다윗이 나가서 그들을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찾아 온 사람들을 요새 안으로 들이지 못하고 나가서 맞았다는 것은 다윗이 이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는 말 속에서도 다윗의 불안과 두려움이 드러납니다.
만일 너희가 나를 속여 내 대적에게 넘기고자 하면 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너희를 책망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광야에서 다윗이 수도 없이 겪은 것은 사람들의 배신과 실망감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다윗은 그일라 거민들을 도와주고도 배신을 당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십사람들의 밀고로 위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다시는 추격하지 않겠다고 끌어안고 울던 사울왕이 다시 자신을 향해 창을 던지던 것을 다윗은 겪어 보아서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로 추정되는 시편116편에서 오죽하면 이런 말을 썼겠습니까?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다윗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오건, 자신을 추앙하건, 거기에 들뜨고 그들을 의지할 게 못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죠.
사람은 단지 자기의 안위와 번영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순간적인 동정심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얼른 자기에게 관심이 돌아오는 게 인간입니다.
다윗의 말 속에서 사람에 속고, 고난에 울고, 사람도 환경도 믿지 못하는 인간의 아픔이 조금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왜 다윗인지를 우리가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배신의 칼을 감추고 나왔다 할지라도 내 손으로 처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배신해서 자신을 사울왕의 손에 넘겨준다면 그 죄를 하나님이 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믿고 신뢰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모든 결정권과 주권을 다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전에 충분히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던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다윗은 자신이 직접 사울왕을 죽이기를 피했습니다.
하나님이 왕위를 약속하셨다면, 하나님이 직접 그 일을 해나가시도록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시밭이 아니라 지뢰밭을 통과한 사람들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다윗의 현명함은 자신이 나설 때와 하나님이 나서실 때를 분명히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내가 할 일은 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관을 간섭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내가 할 일을 다하고 하나님의 결과를 기다리진 못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넘겨짚고, 내 뜻을 관철하려는 데서 내일에 대한 불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 주장을 관철하려는 고집, 그것이 되지 않을 때 분노와 실망감과 원망으로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리고 현실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
이것을 오늘 다윗의 현명함을 통해 다시 배워야 할 줄 믿습니다.
다윗은 결코 그들 앞에서 자기를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소신도 없는 나약한 자처럼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결재권자임을 드러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18절에 보니 성령이 삼십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고 그 마음을 움직이셨다고 합니다.
그 용맹한 사울의 장군 아마새가 다윗에게 머리를 숙이고 다윗 수하로 들어온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나를 배신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테다,’
이렇게 쎄게 나가지 않아도 아마새 같은 용장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밑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터에서 가족과 부하들을 지키며 십여년을 보낸 다윗에게 독선과 독기가 없다는 게 참 놀랍지 않습니까?우리의 삶이 아무리 광야 같다고 해서 너무 독기를 뿜으며 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잠언에서 우리는 인자하게 사는 것에 대한 교훈을 얻습니다.
잠언 11장17절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 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잠언 19장 22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분노가 많고 잔인하고 우악스런 사람 주변에 어떻게 사람이 모이겠습니까?
다윗의 시편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는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것입니다.
모든 환난 중에 기도로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았던 것이죠.
누구와 오래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닮아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인자하심을 배우고 경험할수록 점점 우리도 인자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다윗을 볼 때 아마새 입에서도 이런 말이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우리가 봐도 누가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만한 자인지 어느 정도 보입니다.
분명히 삶은 핍절하고, 환란과 시험이 많은 것 같은 데도 이상하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돕고 계시다는 게 눈에 보입니다.
모든 시련을 하나님과 함께 겸손하고 인자하게 맞이하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직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은 멀기만 한 것 같고 내 삶이 척박하고 울퉁불퉁한 광야와 같다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돕고 계십니다.
성도님들을 다 하나님께서 돕고 계시는 게 분명히 저의 눈에도 보입니다.
두번째로 본문에서 나누고 싶은 것은 광야를 벗어난 다윗에 대해서 입니다.
19절 부터는 다윗이 블레셋의 땅인 시글락에서 일년 사개월을 거주할 때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사울왕의 광분한 추격에 지칠 대로 지친 다윗은 아예 이스라엘 영토를 벗어나 블레셋국가로 망명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블레셋으로 망명하면 더 이상 사울이 추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사무엘서27정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다윗이 예상했던 대로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사울이라는 넘어야 할 산을 피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서에는 계속되는 사울의 추격에 하나님께서 단 한번도 다윗을 넘겨주지 않으셨다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렇게 질색하며 이스라엘의 적국인 블레셋으로 까지 도망갈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자 생활에 진력이 났다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사실 사울왕의 추격이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적대국인 블레셋 국가로 망명을 갔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정말 그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미 다윗은 전에 모압으로 피신 간 전력이 있습니다.
그 때 분명히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서 그곳에 있지 말고 유다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환경을 허락하셨고 아직 특별한 싸인이 없다면 그 곳에서 견디며 배우라는 것입니다.
답답하고 지지부진하게 내 인생이 전개되는 것 같더라도 지금 내 환경은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고, 인도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어제를 돌아보고 작년을 돌아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환경 속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도 좋으니 편한 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물론 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학교에 우리를 두셨다면 거기서 교육을 다 마쳐야 합니다.
광야를 피해서 도망치다 진흙탕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다윗의 시글락 사건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야 블레셋 아기스왕의 비호를 받으며 시글락에서 다윗의 무리들이 잠시 한 숨을 돌렸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서는 안될 곳에 가고, 해서는 안될 일을 했을 때, 더 곤혹스런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침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집니다.
블레셋왕은 당연히 자기가 돌봐준 댓가로 다윗이 같이 출전해서 싸워줘야 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라야 할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워야 할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광야를 피했더니 진흙탕에 빠지게 된 것이죠.
진흙탕은 광야보다 우리를 더 기진맥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옷은 진탕에 빠져 더러워지고 신고 있던 신발까지 벗겨질 수 있습니다.
믿음도 잃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부분인 줄 믿습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위기를 만났으니 다윗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아기스왕을 따라 이스라엘과의 교전장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한 것은 우리의 잘못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빠졌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 중에도 은혜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19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블레셋 방백들이 들고 일어나 다윗을 전쟁터에 데려갈 수 없다고 합니다.
교전 중에 다윗이 마음이 변해 이스라엘 편에 서지 말라는 법이 있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삶을 돌이켜 보면 정말 큰일날뻔 했던 실수와 선택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게 하시고 엎질러진 물을 줏어 담으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일행이 다시 은신처인 시글락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 아말렉부족들이 노약자만 남은 시글락에 쳐들어와 재산을 다 털어가고 사람들은 모조리 인질로 잡아가 버린 것입니다.
다윗의 아내와 자식들도 다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처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들이 얼마나 황망했으면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울다가 다윗을 돌로 치려고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나마 겨우 육백명 정도 추종자를 거느리던 다윗의 정치 인생에 완전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잘못 된 선택에 의한 나쁜 결과는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선하신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음을 보게 되니 놀라울 뿐입니다.
20절에 보면 마침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갈 때에 므낫세 지파에서 다윗에게 돌아온 용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무리가 다윗을 도와 도둑 떼를 쫒아가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왔다고 오늘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았다면 정말 큰 일 날 뻔 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날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아벡전투에서 사울왕이 전사합니다.
일년 사개월만 더 참고 블레셋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오점과 위기를 당하지 않았을텐 데.
우리도 얼마나 이런 다윗의 갈등과 같은 상황에 빠지게 됩니까?
지금 내가 바로 가고 있는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건 아닌지.
언제까지 광야와 같은 세월을 보내야 하는 지,
과연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고 계신 것인지.
이런 것들이 얽혀 우리 입에서 기도가 아닌 신음소리가 나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오늘 다윗의 생애를 반추하며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교훈하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도와주시고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을 왕으로 삼으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 까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하심만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자기 손으로 불의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했는지 그가 기록한 무수한 시편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불의함을 손가락질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불의함을 버리고 강건한 영성을 갖추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마음껏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또 다윗이 이런 모든 광야의 시련을 통과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받고 축복받은 왕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드린 무수한 기도때문인줄 믿습니다.
다윗의 시편 중 많은 부분이 억울하게 시련을 당하고, 힘들 때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은 기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있게 다윗은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32장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모든 위기를 기도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내 힘만으로 어떻게 이 험난한 생애를 다 살아내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자 하는 사람을 끌어다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보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마지막 22절은 그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끌어들이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왕의 전사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의 능력을 진작에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암울한 바위 요새에도 빛이 비취고 용사들이 돌아오고,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무엇이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게 하십시오.
그런데 이 마지막 22절의 말씀에서 어떤 분위기가 느껴지십니까?
‘왕년에는.. 그 때는 그랬었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과거를 회상하는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십니까?
이 본문인 역대서를 기록하고 있는 시점은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때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나안의 향락과 죄악에 빠져 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빈털털이 인생이 된 자신들을 돌아보니 기가막힌 것입니다.
지금 역대서를 기록하는 사람, 에스라라고 추정되죠.
역대서를 기록하는 에스라는 그 아름답던 이스라엘의 황금기, 다윗왕의 통치를 아련하게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신실하게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했던 다윗과 같은 왕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와 같이 번성하고 강했던 그 때를 다시 소망하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 장차 세상에 오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다윗의 자손 메시야에 대한 고대와 간절한 소망이 묻어있는 것이죠.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군대와 같기를 원하십니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우리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개인의 인생도, 이 땅의 모든 우리 산업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었을 때, 가장 아름답고 풍성하고 보람있게 세워지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윗처럼 우리의 행위에 불의가 없도록 말씀대로 행하고 고난 중에 기도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며 기대할 때 반드시 계획하신 복된 일들을 우리 삶에서 다 이루게 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멘.
2014.11.2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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