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야베스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야베스란 인물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브룩스 윌킨스가 쓴 야베스의 기도란 책이 몇 년 전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야베스란 인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죠.
그동안 역대기 이스라엘 족보 속에 묻혀있던 야베스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역대상 앞 부분은 이스라엘 선조들의 족보입니다.
1장 아담으로부터 시작 해 대표적인 후손들의 족보가 9장까지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이름도 없이 불쑥 야베스란 인물이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달리 그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 어색한 등장 때문에 야베스란 인물을 기록하신 뜻이 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단지 야베스처럼 기도해서 복을 받자라고 해석하기엔 앞 뒤 성경 내용과 너무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야베스란 인물과 기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잘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이 말씀을 통해 힘을 주시고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야베스에게 임한 축복이 모두에게 임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먼저 야베스란 인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이란 뜻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의 이름을 질 때 장차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이름을 짓게 되죠.
우리가 들으면 다 평범한 이름 같은 데 부모들은 공들여 아이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대로 될 것 같은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야베스, 즉 ‘고통’이라고 지었다면 아이의 출생이 분명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이 얼굴을 볼 때마다 출생과 관련 된 끔찍한 괴로움이 생각났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이름을 고통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사회에도 딸 그만 나라고 딸막이, 남자 동생 보라고 후남이, 이런 식으로 여자아이 이름을 짓던 때가 있었죠.
그 아이의 출생과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야베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애가 태어나면서 집이 잘 되었다느니, 어떤 아이가 태어나며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느니 그런 말도 합니다.
야베스는 우환을 몰고 온 아들이었을지 모릅니다.
야베스의 이름에서 떠오르는 것은 이런 불우한 출생의 비밀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야베스에 대한 정보들을 실제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절에 그의 어머니가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말이 있죠.
이 말은 고통 속에서 낳았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산모의 목숨이 위태했던 난산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지은 것으로 보아서 야베스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사망한 유복자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0절에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었다는 말은 부르짖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달라는 기도는 자기 힘은 미약하고 도와줄 사람도 별로 없었다는 뜻입니다.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로 보아 그가 고난으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 모든 불행을 축복의 삶으로 바꿔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한주간도 낙심할 상황가운데 있었다면 오늘 야베스의 기도응답을 살펴보며 용기를 내고 믿음을 굳게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다음은 본문의 배경과 야베스의 시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아직 덜 졸릴 때 얼른 본문의 역사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속의 역사는 우리 믿음의 기반을 견고히 해줍니다.
본문은 두 시대를 알아야 이해가 잘 됩니다.
먼저 이 역대서를 기록한 시기입니다.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던 시기로 봅니다.
기록자는 서기관 에스라였다는 게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을 마치고 돌아온 세대는 어땠을까요?
선조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뿌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을 게 분명합니다.
귀환자들을 이끌었던 에스라가 하나님 신앙의 근본을 가르치고 국가 재건을 이루려는 의미로 역대서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역대서 속에 들어있는 본문인 야베스의 시대입니다.
본문의 야베스가 살던 시대는 가나안 정착시기인 사사시대입니다.
13절에 보면 옷니엘이란 사람이 나오죠.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였습니다.
사사라는 말은 선지자는 아니고 재판관이란 의미를 가진 지도자를 말합니다.
별다른 선지자도 없고 사사들이 다스리던 사사기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가장 혼란했던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광야40년 세대가 다 죽고 나자 다음 세대들은 하나님을 법도대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의 풍족한 생활에 마비되고 인근 부족들의 우상 풍습을 쫒게 되죠.
사사기의 마지막을 보면 그 시대를 한마디로 평가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각자가 소견대로 했으니 얼마나 무질서하고 무법지대였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따라야 할 성결하고 도덕적인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강요도 안하고 가르치지도 않고 관계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기독교인이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기준대로, 자기 형편과 경험에 맞춰 살고 있는 삶도 사실은 사사시대나 마찬가지로 어둡고 무법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사사시대는 가나안 부족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고 약탈을 당하던 시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외세의 침입으로 약탈을 당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사사라는 인물을 세우셔서 건져주십니다.
한숨을 돌릴만 하면 또 범죄하고, 그러면 외적이 침입하고, 다시 부르짖고, 하나님은 또 사사를 보내셔서 구원하시는 사이클이 3백년간 반복되는 게 사사기 시대입니다.
지지부진하고 발전도 없고 백성들의 삶이 비정상에 기괴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시대에 야베스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신비한 일입니다.
야베스는 이런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시대적 고통과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벗어나 존귀한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사람들이 참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다는 생각이듭니다.
현대판 사사시대, 불신앙의 시대가 아닙니까?
영국의 전대주교인 캐리경은 향후 30년 뒤면 영국에서 기독교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노라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한국교회 교인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장래 역시 낙관할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어둡고 침울했던 사사시대, 아름답고 성결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했던 야베스 같이 우리 모두 끝까지 예수님을 곧게 따르며 아름답게 섬기게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3. 다음은 야베스의 기도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복을 주셔서 나의 지역을 넓혀주시라는 것과 주의 손으로 도우셔서 환난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먼저 나의 지역을 넓혀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원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가운데 느낌이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이 부분은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고 또 복 주실 것입니다. 란 확신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나머지 내용들도 이미 지역을 넓혀 주실 것이고, 주의 손으로 도와주실 것이고, 환난을 벗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있는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야베스가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복을 주실지 모르고, 혹시 내 기도를 들으셔서 지역을 넓혀주실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도가 아닙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야베스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확신에 차 있는 것일까요?
우리도 약속이 보장되어야 기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시행하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잖습니까?
야베스의 확신은 땅의 확장은 애초 가나안에 입국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입국을 명령하시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가나안땅의 모든 땅을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싸우면 승리가 보장되었으니 가서 차지하라는 것이죠.
야베스의 기도는 바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생전에 부지런히 정복전쟁을 감행했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여전히 미정복 지역이 남아있었습니다.
어지간히 살 땅이 정해지자 정복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도 시들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땅 정복을 포기하자 하나님도 더 이상 일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전 지경에 광대하게 펴져나가야 할 이스라엘은 점점 확보한 땅 마저뺏기고 쪼그라드는 비참한 형편이 된 것입니다.
영토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차지하지 않으면 그냥 비어 있냐, 그렇지 않습니다.
적군이 우리 주변을 점령하면 반드시 우리를 압박하고 삼키려드는 것입니다.
최근 방공식별구역 문제로 시끄럽죠.
독도고 이어도고 이러다 다 뺏기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죠.
우리 것을 잘 챙겨놓지 않으면 알아서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모든 영토를 다 차지하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도 분명히 그렇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주신 명령 역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것이었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주신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엄청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명하시고 보장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 역시 영적인 영역과 육적인 영역에서의 지역을 확장해주시길 기도하며 넓은 영역으로 뻗어가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이 중심이 되어 영적인 깊이와 영역을 넓혀가야 합니다.
믿음이 허약해지면 죄성과 마귀의 영향을 더 쉽게 받고 실패의 영역이 넓어집니다.
어느 날 내 주변을 보면 온통 혼란과 불행과 문제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영적인 삶 뿐 아니라 육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도 나의 영향력이 커지고 내 삶의 행동반경이 넓어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게으르고 안주하는 태도로 인생을 꾸려나가면 대개는 지금보다 상황이 열악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좋은 것을 쟁탈해 갑니다.
우리가 자족하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도피와 무기력한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노력하는 도중에도 실망하지 말고 만족히 여기며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관할 구역이 더 확대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더 견고하고 더 좋은 교회가 되어 지역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가정도 더 번영하고 뻗어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회에서의 지위와 영향력도 확장되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 영향력과 삶의 반경이 넓혀지는 것이 보편적인 은혜입니다.
직장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하게 일을 할 때 승진의 기회도 오고 인정도 받는 것입니다.
사회생활도 성경의 원리대로 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성경말씀에 위에 있는 권위에 순복하고 회사일이든 가정일이든 예수님께 봉사하듯 하라고 하시잖습니까?
감독자들은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가 막히게 파악합니다.
또 하나님의 뜻은 우리 가정이 사랑으로 안정되고 경제력도 증가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 가정을 약화시키고 우리 가정의 불행을 남들의 호기심거리가 되게 하겠습니까?
왜 우리 가정을 스스로 허물고 무너뜨리려고 하는 겁니까?
성도님들의 가정이 사랑으로 더욱 견고해지고 아름다운 가문으로 뻗어나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재정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적은 데 어떻게 번영할 수 있냐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연구소에서 맞벌이 부부와 외벌이 부부의 재정 상태를 통계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둘이서 월 4백만원을 버는 가구와 혼자서 월2백만원을 버는 가구를 조사했더니 4백만원 가구가 2백만원 가구보다 월 15만원의 여유 돈이 남더라는 것입니다.
겨우 15만원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많이 벌어도 많이 나가기 때문에 적게 벌고 규모 있게 쓰는 거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적은 수입일지라도 성경적인 물질관을 갖고 규모 있게 쓰고 재정을 축복해주시길 믿음으로 꾸준히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재정도 점차 풍성히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야 우리 생활을 안정되게 할 뿐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할 여력도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야베스가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기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재벌가 사람들을 존귀하고 귀중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돈이 더 존귀하고 귀중해 보일지는 모르죠.
야베스가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된 것은 자신의 성공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믿음으로 사방은 안정되고 지경은 넓어지고 형제와 이웃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풍요롭게 살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복으로 이렇게 생명 구원의 영역을 확장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영향력이 커지고 믿음이 깊어지고 천국의 소망이 더 확장되어야죠.
청년들은 더더욱 미래를 놓고 기도할 때 나의 지역을 넓혀주시길 구해야 합니다.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가난한 신학교 시절 학교에서 학생들 몇을 선발해서 해외 신학대학을 탐방하는 기회를 주었다고 합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다니는 데 세상이 그렇게 넓은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프린스턴신학대학을 방문했는데 도서관의 방대한 책들과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되고 하나님을 배우는 숭고함에 대한 큰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친구들은 대학교 교정의 아름다움에 들떠서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이 목사님의 마음 속에 갑자기 작은 소원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당시 형편으론 너무나 가당치 않은 소원이기에 확신도 없는 작은 소리로 교정의 한 나무를 만지며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정말 될 수만 있다면 언제고 여기 와서 꼭 공부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8년 뒤 그 목사님을 그 곳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꿈과 소망이 있어도 환경은 항상 우리를 낙담시킵니다.
원하는 직장의 벽은 높고, 쪼들리는 재정은 언제 개선될지 희망이 없고, 과연 내가 계획하는 일들이 이뤄질지도 막막하죠.
당장 희망에 실마리 조차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지역을 넓히시고 복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재능과 꿈을 통해 이 땅에서 보람 있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을 기도할 때 야베스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은 우리 기도도 응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구원을 받은 것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도우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어내는 방법은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기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입시가 닥쳤으면 좋은 성적과 결과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취업의 시기가 되면 기도하며 원하는 직업의 문을 두드리며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재정이 부족해지고 빚이 늘어간다면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고 대책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차피 우리 형편을 다 아시는 데 왜 꼭 기도해야만 주신다는 것입니까?
좀 알아서 적당히 다 주시면 얼마나 좋아요?
그렇잖아도 우리의 많은 문제와 삶을 알아서 지금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온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금도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냥 모르고 불신자들처럼 우연히, 저절로, 내 힘으로 된 줄 알고 살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모든 것을 얻어도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위한 구원자라는 것을 모른다면 다 지푸라기 같은 것들입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더 친근히 알아가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아버지를 깨닫고 느끼는 것이 이 땅의 지복입니다.
그것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시고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하는 자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시지 않겠습니까?
항상 우리를 기다리시고 환대하며 기뻐하시는 주님 앞으로 나가 기도하고 응답받는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다음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야베스에겐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환난과 근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시련을 당할 때 세상이 얼마나 고통입니까?
이런 환난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손 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 TV에서 큰 환난을 만난 두 사람의 간증을 보았습니다.
한 분은 선교발레단 단장인 김수0씨입니다.
촉망받던 발레리나가 어느 날 사고로 한순간에 하반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발레는 영원히 그 인생에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가장 잘 하던 것을 못하게 된 절망과 장애로 주저앉은 삶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다행히 그 고통 중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속에서 발레에 대한 소원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분명한 데 그 소원이 점점 확신이 되고 발레선교단을 만들어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었습니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앉은 발레선생이 상상이 됩니까?
누가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에게 발레를 배우러 오겠습니까?
모집 공고를 붙이자 처음엔 두명, 그 다음은 여덟명, 점점 학생들이 찾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샬롬발레선교단이 생겨난 것입니다.
김단장은 벌써 18년이 넘게 선교발레단을 이끌고 휠체어에 앉아 해외선교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또 한 분은 서예0집사입니다.
스타킹 프로에 나와 3연승을 한 난치병 폴포츠란 이름이 붙은 사람입니다.
이 분이 8톤 트럭에 심하게 어깨를 부딪치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수술 후 복합통증증후군이란 난치병을 얻게 된 것입니다.
통증이 몰려오면 전기톱으로 팔을 자르고 드릴로 구멍을 뚫는 것 같은 고통이 계속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병에는 진통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음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어느 날 옥상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데 어디서 해바라기 노래가 들려오더랍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있지
그런데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나며 자기가 하려고 했던 찬양사역자의 일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 속에서도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찬양사역자의 길이 서서히 열리고 간증집회를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서집사님의 기도제목1번이 스타킹에 나가서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정말 스타킹 제작진으로부터 출연 제의 전화가 왔던 것입니다.
이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도저히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반신 장애인의 발레단 창단도 그렇고 밥숟가락도 못 드는 사람이 전국을 다니며 찬양사역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얼굴이 그렇게 편하고 밝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현실에서 자신을 일으켜주시고 그 재능으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삶이 감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들의 환난과 근심에서 누가 건져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극한 환난 속에서도 그 영혼을 건지고 사역자의 삶을 기쁘게 살게 할 수 있게 하는 분이 우리의 주 예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불가능하게 생각하고, 포기하고 싶은 상황들이 이분들 보다 더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도우시면 그런 상황에서도 최선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은 그들보다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장애, 우리의 환난, 우리의 결핍을 뛰어넘어 꿈을 이루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원전을 직역하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가져다 주셨다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했더니 하나님의 손이 구하는 것들을 직접 가져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손이 가져오시는 공급을 체험하며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4. 마지막으로 야베스의 이야기가 본문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역대기를 읽고 배울 사람들은 바벨론포수에서 귀환해 온 사람들입니다.
꿈꾸는 것 같이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형편은 비참했습니다.
성곽은 무너졌고 성문을 불탔고 70년 동안 버려진 땅에는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기대했던 조국의 번영은 요원한 상황입니다.
고대했던 다윗의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닌 페르시아 관리가 다스리는 조국의 현실은 모든 게 절망 뿐이었습니다.
오늘 역대기에 기록된 긴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거쳐 가장 화려하고 융숭했던 다윗왕조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족보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비운의 왕족들의 이름으로 끝납니다.
더 이상 다윗 왕의 후손이 조국을 다스리지 못하는 이 역사를 깨닫고 절망하는 순간.
역대기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축복의 인물이 되었던 과거의 한 인물을 조명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야베스입니다.
고통이라고 불리운 사람,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 유다지파의 한 사람,
약속의 땅을 대적들에게 뺏긴 어두운 사사시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기도했던 그 사람,
그 기도를 통해 약속의 땅을 되찾고 존귀한 자가 된 그 야베스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고 이 땅은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왜 야베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의 땅은 여전히 황무하고 많은 장애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야베스 같은 환난과 근심이 떠나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처럼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가나안 땅의 모든 것을 예비하셨던 것 처럼 하나님은 내게 복에 복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의 지역을 넓혀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이 환난과 근심을 벗어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곤경 중에 태어났고, 환난과 근심의 운명을 살아야 했던 야베스의 삶은 이 땅에서 죄악 중에 고통당하며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지경을 넓히고 행복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아버지께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구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의 손이 반드시 구하는 것을 가져다 주셔서 우리의 가정과 이웃과 기쁨을 누리며 사는 축복을 누리게 하실 줄 확신합니다.
2013년12월1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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