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12장1절-12절
성경의 인물들 중 믿음에 성공한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까?
실패한 인물이 많을 것 같습니까?
70%가 실패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르호보암이란 새로운 성경 인물을 탐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 사람도 실패한 70% 속에 들어갑니다.
인간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 아주 명료합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은 끈질기게 다윗왕조의 영광에 집착했지만 다윗의 신앙을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또 실패한 과거의 역사를 뻔히 보면서도 교훈을 삼지 않고 여전히 잘못 된 길을 걸었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성경을 교훈으로 삼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축복의 길을 성경을 통해 보여주고 이끌길 원하시지만 고집스럽게 제각각 원하는 길을 간다는 것이죠.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실패에 대한 예고를 항상 미리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경고를 받은 사람들이 꼭 그 길로 걸어가 결국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그가 죽기 전 분명히 아들 솔로몬왕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그러나 그 지혜롭다는 솔로몬왕 역시 다윗왕의 암시대로 말년에 하나님을 버립니다.
외국에서 데려온 많은 왕비들과 그들의 신들이 문제였습니다.
왕상11장4절을 보면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영적인 영역들이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의 우상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나라를 쪼개서 솔로몬의 신하인 여로보암에게 주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단지 다윗을 생각해서 솔로몬 때가 아니라 그 아들 르호보암 대에서 시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나마 당대에 화를 면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던 다윗을 생각해서지 솔로몬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도 그를 버린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역시 분명히 나라가 두 동강 날 것을 미리 알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거망동하다 하나님이 예고하신 파멸의 길로 갑니다.
결국 여로보암이 열지파를 떼어가 북이스라엘을 세우게 됩니다.
정통 다윗왕조의 르호보암왕은 겨우 유다지파를 다스리는 신세로 몰락하고 만 것입니다.
실패한 인생이 주는 고통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르호보암의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고 교훈을 삼아 믿음의 결말인 천국의 유업과 이 땅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은 이스라엘 4번째 왕위에 오릅니다.
말하자면 4대 만에 나라가 두 개로 절단이 난 것입니다.
비록 북이스라엘에 10지파를 뺏긴 상황이지만 르호보암은 즉위 후 3년 동안 열심히 왕권을 세웁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졌다고 말씀하죠?
그의 나라가 강성해진 이유는 앞 장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왕이 된 여로보암은 남유다에 속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드리러 가는 백성들을 막아야 했습니다.
백성들 마음이 성전이 있는 남유다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먹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열심히 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섬기는 게 보이지 않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 보다 훨씬 수월합니다.
우상신을 만들어 섬겨보면 신상에 인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얼마든지 내 원하는 대로 믿으면 되니 오히려 구미에 더 맞는 것이죠.
우상신 앞에서야 내 본질을 다 들춰내고 바꿀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종교면 됐지, 내 삶에는 간섭하지 말라는 게 인간의 본심입니다.
북왕조의 여로보암은 금송아지에 반발하는 제사장들을 다 파직하고 사이비 제사장들을 세웁니다.
결국 제사장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남쪽 유다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르호보암을 도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무리들을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로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게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우도 마찬가지 역사가 있죠.
북한이 공산화 되며 많은 목사와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피난을 와서 남한 쪽 교회가 크게 부흥된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렇게 3년이 지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자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고 온 이스라엘도 왕을 따라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1. 오늘 첫 번째 주제는 율법을 버린 르호보암입니다.
나라가 좀 자리를 잡아간다고 생각하자 르호보암은 헛된 자만심에 빠집니다.
굳이 까다롭게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길게 있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북쪽 이스라엘도 보니 송아지 우상 섬기며 별탈 없이 잘만 살고 있거든요.
예수님이 없이도 그런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르호보암과 같은 착각입니다.
인간이 얄팍해서 일이 그런대로 잘되고 발등에 불을 끄고 나면 어느새 믿음이 헤이해집니다.
어느날 문득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별의미가 없이 느껴집니다.
고생했으니 좀 쉬어야지, 인생의 재미도 좀 즐겨야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별로 도와주시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2절을 보면 르호보암이 이런 맘을 먹고 하나님께 범죄하자 애굽 왕 시삭이 치러 올라옵니다.
이 때가 르호보암 즉위 5년이라고 밝힙니다.
지난 5년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열 개 지파를 장악한 북이스라엘 여로보암왕의 군사력은 막강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남유다를 치러 얼마든지 밀고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내려오지 않은 게 이상한 것입니다.
남쪽에는 애굽 왕 시삭이라는 인물이 새 왕조를 일으켜 북진정책을 쓰고 있었습니다.
안 올라 온 게 이상한 것입니다.
5년 동안 르호보암이 어떻게 전쟁 없이 성읍들을 견고하게 하고 왕권을 추스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고대 국가시절엔 밥만 먹으면 하는 일이 싸움 아니었습니까?
대적들이 르호보암에게 숨 돌릴 시간을 주고 싶어서 준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대적들의 발을 묶어 두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하나님아버지께서 날 보고 계시나의심이 혹시 드십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아버지의 손길이 얼마나 많은 재난과 사건들을 처리하고 막아주시는 지 모르시겠습니까?
부목사님과 제가 아직도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오후에 남은 국을 끓여 놓는다고 가스렌지에 약불로 올려놓고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월요일에 학교수업을 마치고 저녁에 교회에 와서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무려 30시간 동안 가스불을 켜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같이 국솥 안만 까맣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부목사님과 제가 아직도 웃으면서 이야기하길 천사가 옆에서 계속 부채질해서 열을 식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경험들 다 있으시죠?
지난 삶을 뒤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수많은 위기에서 건져주지 않으셨습니까?
의심하지 마시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순간 내가 열심히 해서 이만큼 왔고 지금 이룬 것이 나를 지탱해주리라는 생각은 르호보암의 착각입니다.
돈도, 건강도, 사람도 지금만 내 것이지 내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이 애굽을 막기 위해 남서부에 집중적으로 성읍을 세우고 군사력을 증강하고 그것을 믿었지만 4절을 보십시오.
시삭은 르호보암이 의지했던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모조리 짓밟아버립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의지했던 자신의 능력이 이것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는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율법을 버렸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율법을 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말을 무시하면 그 관계는 이미 깨졌다는 뜻입니다.
부부간이건, 부모와 자식 간이건, 직장 동료 간이건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금이 갔다는 것입니다.
막말하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회복이 어려워집니다.
말은 뱉고 나면 정말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관계건 존중하는 말을 하고 상대의 말을 존중해서 듣는 것이 관계의 황금률입니다.
사람사이에서도 인격의 교제는 서로의 말을 존중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 역시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다음 사람들이 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빠져있지만 같은 내용을 기록한 열왕기상에는 르호보암이 율법을 버린 것과 애굽왕의 침략 사이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밀려난 자리에 겉잡을 수 없이 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뇌리에서 망각하는 순간 인간 본성은 그냥 자연스럽게 죄를 짓고 그게 고향처럼 편합니다.
꼭 자기 수준에 맞는 조잡한 우상을 만들고, 점이나 치러 다니고, 퇴폐적이고, 일락을 좋아하고, 도덕적, 양심적 제재를 받길 싫어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결국은 저속한 본색이 드러나게 됩니다.
입으로 옳은 것을 주장한다고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존 하워드 요더라는 미국의 천재신학자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책은 미국 기독잡지가 선정한 20세기의 책 100권 중 5위에 올라있습니다.
산상수훈의 높은 윤리관을 강조하는 교회를 주장한 사람입니다.
한 때 요더를 읽자며 그의 신학이 한국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많은 여성들을 성추행한 사건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지난 10월 뉴욕타임즈는 이 사건을 놓고 ‘나쁜 사람이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인간의 한계를 묻는 기사를 냈습니다.
기독교영성가라고 많은 사람들이 숭상하던 헨리나우엔도 동성애 선호자였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났습니다.
말년에 그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사상을 옹호했습니다.
인간이 무슨 고상한 사상을 내세우고, 특별한 척해도 인간의 죄인본색은 불변입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 아는 것이 자기의 인격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매순간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대로 살지 않는 다면 우리가 말하고 듣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는 순간 돌아보면 우리는 영락없이 죄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
르호보암이 율법을 버리고 범죄할 때 8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애굽왕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어느 것이 더 행복한지 해보라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8장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의 종이 되면 그 영역을 지배하는 마귀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마귀의 영향아래 있는 삶이 어떻습니까?
감정은 항상 요동하고 심령의 평안이 없습니다.
엎친 데 덮치는 환경을 해결하고 사람의 눈치를 보며 섬기느라 편할 날이 없습니다.
별 상관없을 사람조차 이상하게 내 비위를 상하게 하고 눈치를 보게 하고 압박합니다.
아이에서 시작해서 직장사람들과 집안 식구까지 이상하게 나를 힘들게 하고 감정이 상하게 할 때 있지 않습니까?
이게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사람을 섬기는 불편한 인생입니다.
오늘 율법을 버린 르호보암이 치욕스럽게 애굽을 섬겨야 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내 욕구대로 했을 때 자유로울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자유를 따라 행동했는 데 오히려 심령의 자유가 사라져버립니다.
내가 감정대로 뱉은 말이 나를 괴롭히고 비리가 있었던 행동이나 거짓말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경험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고 뭔가 거북한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으면 분명히 성령의 소욕을 거역하는 무언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따를 때 본성과의 갈등이 있지만 순종한 뒤에 샘솟는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주변의 문제들이 잘 정리되고 명철해지며 내일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감정의 기복으로 인해 속이 시끄러운 일도 잠잠해 집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따르면 도덕적으로 성결해지고 남에게 인정받습니다.
빈부와 지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고결해지고 존귀하게 만듭니다.
매일 비정상적이고 우울하고 퇴폐적인 세상 소식을 접하기 전,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오늘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구하십시오.
예수님의 교훈을 지키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요한복음 12장26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면 예수님 계신 천국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기쁨과 평강이 그래서 우리 마음에 있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귀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더욱 예수님을 섬기고 말씀을 따라 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다음으로 살펴볼 내용은 르호보암이 하나님을 버리자 하나님도 로호보암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절과 3절에서 엄청난 병력을 이끌고 애굽왕과 동맹국이 밀어닥칩니다.
병거가 천이백대에 마병만 육만 명이고 그 외의 보병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보호자를 버렸을 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을 일이 벌어집니다.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벌렁거릴 일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에서 어쩌자고 보호자를 버리는 것입니까?
2절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제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아주 자연스럽게 벌어진 왕국의 전쟁 같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범죄한 그들에게서 하나님도 보호의 손길을 거두신 것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서를 보면 하나님을 반역한 이스라엘 모든 왕들에 대해 반드시 붙어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평생에 전쟁이 있으니라
욥기에 보면 세상의 모든 인생에 전쟁이 있지 않냐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 삶이 전쟁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시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는 인생은 끊임없이 인생의 전쟁터에 대적들이 밀려들어옵니다.
본문에서 대적들은 순식간에 예루살렘 코 앞에 들이닥쳤습니다.
5절에서 급박하게 예루살렘에 모인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하나님은 스마야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 넘겨버리면 그들을 건질 더 강한 손은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면 이 말씀이 우리를 송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먼저 버린 쪽은 르호보암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먼저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친 것은 제자들이었고 그들을 다시 찾아 나선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 역시 너무나 쉽게 주님을 외면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눈 앞에 있는 한 줌 이익을 위해 말씀을 외면하고 현실과 타협하고 세속적인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을 모른 척했던 전적이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이 어떤지 9절에 나와 있습니다.
애굽왕 시삭은 결국 예루살렘까지 치고 들어옵니다.
이집트의 상당히 유명한 명소가 고대 암몬신을 섬기던 카르낙 신전입니다.
이 신전 벽에 보면 시삭왕으로 추정되는 쇼생크왕이 이스라엘의 180개 성읍을 약탈하고 승리한 내용이 부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삭은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다 약탈하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뺏어갑니다.
본문의 앞 부분을 보면 솔로몬왕이 전성시대에 금으로 5백개의 방패를 만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방패는 나무나 가죽으로 만들어야 기동력이 있어 전쟁에 쓸 수 있습니다.
무거운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다는 것은 전쟁무기에다 멋을 부릴 정도로 태평성대라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국을 감히 침입할 자들이 없었다는 것이죠.
왕상8장56절에서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의식주에서 전쟁무기에 이르기 까지 그만큼 화려하고 부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그 금방패를 다 뺏기고 맙니다.
왕국의 영광도 끝났고 더 이상 태평성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에 놋으로 방패를 만들었다하죠.
르호보암의 놋방패가 얼마나 처량합니까?
놋방패를 광나게 닦고 금처럼 번쩍이게 하면 뭐합니까?
어차피 왕국의 화려했던 영화는 저물었습니다.
아무리 과거의 영광을 우려내려 해도 놋방패는 더욱 처량한 현실을 말해줄 뿐입니다.
게다가 5백개나 되던 금방패 대신 만든 놋방패의 개수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불필요한 말을 덧붙인 것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궁문을 지키는 자 손에 있어야 할 놋방패를 왕이 성전에 들어갈 때 경호하기 위해 빌려 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르호보암의 왕국이 이런 비루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죠.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으니 어디서 복을 얻고 영광을 얻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성실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오는 은혜는 어느 순간 분명히 메마르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짓는 크고 작은 죄악들이 은혜의 길을 막는 것이죠.
우리가 어쨌든 죄를 짓고 나면 스스로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당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풍성한 은혜의 생수가 우리 심령을 기름지게 하시도록 우리 마음을 열고 말씀을 사모하며 신실하게 지키는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금방패를 다 뺏기고 놋방패를 닦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이 과거의 내 신앙의 화려했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삶과 믿음의 황금기는 매일 오늘이어야 합니다.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순종하는 성도에게 영광이 퇴색하는 일은 결코 없는 줄 믿습니다.
금방패의 은혜와 축복을 절대 뺏기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스마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르호보암과 방백들이 즉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하죠.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고 뉘우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겸비하여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작정하신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7절에 보면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큰 수모와 고통을 당했지만 이 일로 교훈을 삼게 하시고 다시 구원해 주십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유다를 정벌한 시삭이 애굽으로 돌아가 이유 없이 일년 만에 갑자기 사망합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에서 돌이켜 복된 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이킬 때 용서하고 뜻을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시는 순종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율법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구약시대엔 그 길을 이탈할 때 선지자를 통해 잘못을 지적하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시대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양심을 일깨워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 세상을 다 살 때까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지도해 주시겠습니까?
그만큼 죄에 대한 우리의 본성이 끈질기고 강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르호보암은 일시적으로 회개했지만 다음 장에 가서 또 다시 악을 행하며 평생을 살다 생을 마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 뒤에 여지없이 이 구절이 덧붙어 있습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예수님의 계명을 일깨워 주실 때 죄의 본성을 이기고 승리하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독한 죄성을 가진 우리에게 한없이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기는 방법은 신기하게 한없이 약해보이는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떠올릴 때 깊은 곳에서 믿음이 나를 힘차게 받쳐주는 것을 느낍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런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어느 날 대학시절의 늙은 은사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얼마 전 아내를 병으로 잃고 상실감을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던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만일 교수님이 먼저 돌아가셨고 부인께서 남아계셨다면 이 고통을 부인이 견디셔야 했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노 교수가 눈물을 흘리며 일어나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래, 차라리 내가 당하는 게 낫지. 그 사람은 나보다 더 못견뎠을거야.
노교수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그런 사랑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래, 차라리 내가 당하는 게 낫지. 너희들은 지옥의 고통을 못 견딜거야.
이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도 우리를 향해 무한하게 흘러오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알 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마음의 감동이 있고 힘써 지켜보려는 결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주시는 그 사랑을 힘입어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능력과 은혜가 충만히 임하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고 영화롭게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2013년11월3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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