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하

신년설교-브라가송축의 골짜기(역대하20장13절-26절)

남수연 2014. 12. 29. 23:37

옛날, 어린 시절 새해는 왠지 좋은 일에 대한 기대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낡은 12월 달력을 뜯어버리고 새 달력을 붙이면 그것만으로도 새해가 참 참신해 보였습니다.

그때는 가난하고 기대할 게 없는데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이 꽤 설레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글쎄요, 새 날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품기엔 인생을 너무 알아버린 것 같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신년사가 보도가 되었었죠.

작년에도 세계적인 저성장 경제 속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사활을 걸고 싸웠다고 하더군요.

끊임없이 특허전쟁에 시달린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죠.

애플과의 분쟁에서 패소하면 1조원 이상을 배상해야 한다고 합니다.

대기업 총수의 마음도 작년 한해 고달펐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해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 속을 돌파해야 한다는 말에 인생이 얼마 안 남은 고령의 이회장에게 무거운 짐을 진 새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새해는 어떻습니까?

기대반 우려 반인가요?

사실 기대할 것 보다 우려가 더 많다는 것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올해 감당해야 할 어려운 일들이 뻔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생각지 못했던 어떤 일을 또 만나게 될지 모르니 낙관은 정말 근거없는 것이죠.

그러나 지난 해를 뒤돌아보면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께서 기쁨과 평안을 주시고 모든 일이 생각보다 잘 해결되어 왔습니다.

새해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앞 길을 비춰주시리라 믿습니다.

또 우리의 소망은 영원히 쇠하지 않는 영화로운 천국에 있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위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새해에 당면해야 할 두려운 일도 있고 우려할 문제들도 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역대기는 유다왕들의 업적을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역대기를 읽어보면 왕들의 평가의 기준이 하나님을 경외했는가 아닌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지나고 나서야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설마 자신이 이렇게 평가되어 영영히 기록될 줄은 몰랐겠죠.

우리 역시 이 땅의 시간이 끝난 뒤 하나님 앞에서 이 땅의 삶을 평가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위나 부귀나 명예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대단한 것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삼아 내놓겠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주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신실하게 노력한 것만이 우리의 영예이고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호사밧왕은 이스라엘왕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몇 안되는 왕 중 한명입니다.

본문은 그의 재임기간에 있었던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새해 시작부터 자꾸 전쟁에 대한 본문을 나누게 된 것은 올해 모든 싸움에서 우리를 승리하도록 도우실거라는 약속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도 송구영신예배에 이어 우리 앞의 모든 일을 어떻게 이겨나갈 지 여호사밧왕의 전쟁역사를 통해 그 비결을 살펴볼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암몬과 모압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승리한 전쟁기록입니다.

피할 수 없는 큰 전쟁 앞에서 여호사밧왕은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적의 침공 소식을 들은 여호사밧의 반응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앞 3절을 보면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왕에게 국가의 운명이 위태한 전쟁만큼 두려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패배가 뻔한 전쟁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호사밧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낯을 향하여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어김없이 기도라는 것을 여기서도 발견합니다.

여호사밧은 전쟁발발 소식을 듣고 참모들을 모아 작전 계획을 짜지 않았습니다.

되지 않을 일이란 것을 알았던 것이죠.

그는 모든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 앞을 찾아갑니다.

원치 않는 불상사가 없으면 좋겠지만 삶이 언제 얼굴을 바꾸고 우리를 공격할 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무리 불리하고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하나님께는 항상 방법이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현실을 보면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능력도 없고 돕는 자도 없고 일이 해결 된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보이고 기대가 생기는 것입니다.머리를 굴려도, 작전을 짜도 예수님을 올려다보며 주님 안에서 짜야 합니다.

모략도, 해결의 실마리도 하나님께로 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는 답이 있습니다.

이 여호사밧의 기도를 보면 우리가 두려운 환경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이 말이 너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가 이런 심정이 될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기도는 이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호사밧의 기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 기도라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진실 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데 그렇게 위장하고 포장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 아실텐데 뭘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말씀드려야하냐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내 문제를 일일이 기도하는 게 너무 세속적인 것 같이 생각되서 그런 기도는 잘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소한 기도를 믿음으로 보십니다.

좋은 부모 자식 간은 다 아는 이야기라도 하고 또 하고 그런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과 저는 틈만 나면 파리에서 김밥 먹고 식중독 걸려서 생누이병원에 입원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며 깔깔거리며 한바탕 웃습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 입을 봉하는 것은 부모님께 큰 슬픔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은 우리 부모님보다 더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도 내 생각대로 처리하지 않고 예수님과 대화하며 해결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작은 일부터 하나님께 맡겨야 큰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께 맡길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작은 일상의 문제들을 기도하며 예수님과 친밀감을 체험해 가지 않으면 큰 일에서 절대 믿음이 힘이 되지 못합니다.

새해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특히 본문 13절을 보니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다고 합니다.

유다 여러 고을에 살던 사람들이 국가적인 전쟁의 위기를 맞아 성전에서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다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그들이 아내와 자녀, 특히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하나님 앞에 섰다고 합니다.

가족을 다 대동했다는 것은 간절함과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모습에서 하나님 앞에 함께 구원받으러 나온 가족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신년축복기도를 할 때 자녀들을 데리고 부모들이 함께 나오는 모습을 보니 제가 참 눈물이 났습니다.

한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진지하게 존경하며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것인지 모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말씀이 있죠.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외롭게 믿음 생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땅에서 혈연과 사랑으로 가장 친밀하게 연합 된 가족들이 함께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축복하십니다.

새해엔 특별히 남은 가족들이 다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더욱 힘써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또 사랑하는 친구들과 이웃들도 함께 하나님 앞에 구원받으러 나오는 은혜가 교회에 넘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렇게 그들이 정직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도움심을 구할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신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야하시엘에게 임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온 국민들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이 영이 임하시는 데 하필 성가대원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이 야하시엘이라는 사람은 아삽자손이라고 본문이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삽자손은 대대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원들입니다.

당시 예후라는 선견자가 여호사밧왕의 곁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 자리에 선견자 예후도 나와 있었겠죠.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대언해 본 적이 없을 성가대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예후선지자를 통해 하지 않은 말씀인 데 신빙성이 있을까?

왜 선지자가 아닌 성가대원을 통해 말씀하실까?

우리가 생각해도 의아하죠?

게다가 야하시엘을 통해 하신 말씀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방법입니다.

16절에 보니 내일 그들을 맞대응해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싸우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대열을 이루고 서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언제 화살이 날라올지 모르는 전쟁판입니다.

적군 앞에 마주보고 나가 서서 싸우는 게 아니라 뒷짐을 지고 서있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암 진단을 받았는 데 수술을 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만 하라는 응답을 받았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응답해주셨으니 할렐루야 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납득할 방법이 아닌 응답은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합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응답하지 마시고 뭐가 되든 내 능력으로 수습하고 꾸려나가는 게 우리에겐 더 편하죠.

오늘 이들에게 선지자 아닌 성가대원을 통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처방을 내리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다는 것은 오직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착각 할 어떤 것도 개입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예후라는 믿을만한 선지자의 입을 통해 나온 말씀이라는 작은 안도감조차도 우리의 믿음을 교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내가 의지하는 것 아무 것도 없이 하나님만을 완전하게 신뢰할 수 있느냐가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아무 싸움도 하지 말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사밧에겐 사실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17장에 보면 여호사밧에게 약 100만명의 강력한 군대가 있었다고 밝힙니다.

여호사밧이 심약하게 무방비로 하나님만 바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유다 성읍들에 무장군인을 배치하고 군사력도 최강으로 증강시켰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믿음이 강해질수록 인생을 안일하게 대처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 삶의 자세가 태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여호사밧에게 만일 군사적인 작전을 짜서 싸우게 하셨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도 인간이 헷갈리는 것입니다.

나도 좀 능력이 있어 이길만했다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내 능력이 더 컸다고 도취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것은 세상의 승리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죠.

결과는 자만이요, 다음엔 미끄러질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 내 공로와 다른 누가 도와서라는 가능성이 제로가 된 다음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전적 무능을 시인하지 않고도 내 힘으로 잘 살아왔다면 그냥 내게 주신 일반은총인 능력으로 세상방식대로 해온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높이 인생을 쌓았어도 바벨탑에 불과한 것입니다.

감당 못할 큰 위기가 오면 그런 인생은 크게 무너집니다.

그전까진 절대 하나님을 깊게 알기가 힘듭니다.

내 능력이 되는 한 인간은 절대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지 않습니다.

내가 무능하고 내 주변에 도와 줄 이가 아무도 없다면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만 신뢰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야 그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때 단지 문제 해결에 목적이 있지 않으십니다.

그걸 통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고 배운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신뢰가 없으면 우리는 매일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되뇌이게 됩니다.

인생은 황당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믿지 못한다면 신앙은 혼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끊임없이 그 사실을 떠올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로만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 게 아닙니다.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나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사랑이 진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진실이고 지금도 변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당황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 앞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를 도와주실 것을 굳게 믿고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새해에 우리 모두에게 더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이 당황스런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18절에 보니 여호사밧왕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고 고라 자손들은 심히 큰 소리로 여호와를 찬송했다고 합니다.

정신이 다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이런 응답을 받고 좋아 할 일입니까?

차라리 블레셋사람들에게 사신을 보내라, 북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내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주겠다.

이런 응답이 우리에겐 더 편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전폭적으로 믿고 기쁨으로 감사했다는 것일까요?

그 비밀은 앞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7장7절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9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그 믿음의 비밀을 아시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울 때 생명력이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믿음을 갖게 하고 우리 마음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를 목회하다 선교지로 떠날 때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너희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면 신뢰와 믿음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으로 이끄시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많이 알고 배우고 깨닫는 것은 잘 믿을 수 있는 정로이고 가장 빠른 길입니다.

여호사밧과 백성들이 갈등하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쁨으로 받은 것은 그동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역사 속에서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 40년을 만나로 먹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들이 말씀을 통해 배웠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생명력을 갖고 역사하십니다.

전도서 12장 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말씀이 우리 심령에 견고한 못 처럼 박히면 심지가 굳고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해엔 승리하는 믿음을 위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일에 힘쓰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저는 야하시엘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바닥에 엎드린 여호사밧왕에게서 감동을 느꼈습니다.

강한 군주였고 추앙받던 여호사밧왕이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코를 땅에 박고 하나님께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알량하게도 자존심이 강한지 아시죠?

자기를 높이려고 하나님도 밟고 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서면 위신과 체면 때문에 누구 앞에서든 자기를 낮추는 게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를 둔 백성들은 평안하고 안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를 둔 자녀들은 안정감과 평안을 느낍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지도자에게서 사람들은 패망의 징조를 느끼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 춤을 추다 바지춤이 흘러내리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겸비한 다윗의 시대에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눈을 의식해서 자신을 더 높이려한다고 결코 자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앞에서든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이고 제자라는 겸손한 모습일 때 오히려 그런 사람이 더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쭐대는 인간만큼 위태해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인터넷에 이런 글이 있더군요.

캠브리지 대학의 종교학 시험 문제 중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에 대한 종교적 의미를 기술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열심히 답을 쓰고 있는 데 한 학생은 답을 적지 않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험감독이 답지를 제출하라고 했을 때 학생은 단 한 줄의 답을 적어 넣었습니다.

성적은 놀랍게도 한 줄밖에 적지 못한 그 학생이 1등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답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더라"

이 학생의 이름은 훗날 영국의 천재 시인이라 불린 바이런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올릴 때 얼굴이 붉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런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전능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어디서나 높이고 경외하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꽃동산교회를 담임하는 김종0 목사님이 일병으로 군에 복무하던 때입니다.

김목사님이 웅변을 잘해서 여단에서 1등을 했습니다.

대대장이 기분이 너무 좋아 축하파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일병, 축하한다. 술 한잔 받게나.’

평소 목사로 통했던 김일병이 어떻게 할 지 순간 정적이 흘렀다고 합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이 자리는 너를 위한 자리다, 한 잔 받아라.’

‘다른 것은 다 해도 술은 마실 수 없습니다.’

대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곁에 있는 선임하사에게만 연거퍼 술을 권하더랍니다.

파티가 끝나고 상상이 가시죠.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라, 광신도 때문에 골치다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대대장이 정신교육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든지 확실하게 하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김종준 일병 정도는 돼야 한다. 상관의 술잔을 거절할 정도면 괜찮은 신자 아닌가."

우리가 대하는 어떤 사람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존귀하고 높으십니다.

삶이 힘들고 고난 중에 있다 해도 우리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존경하는 여호사밧왕과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당연히 모든 적을 물리치고 승리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20절에 보니 왕과 백성들이 일찍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적군을 마주하고 나갑니다.

전략도 없이 말씀만 믿고 나가지만 왜 마음에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때 여호사밧이 서서 외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올해 우리교회 표어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내게 지금 있는 것도, 나 자신도 신뢰할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영원토록 변함없으시고 정의와 공평과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 믿음과 인생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잡고 견고하게 설 것입니다.

새해 우리 소원이 흔들거리지 않고 형통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두려워 떠는 게 아니라 크고도 장엄한 찬송을 부릅니다.

2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크게 찬송합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바로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찬송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로 마음이 평안할 때 터져 나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역사가 불꽃을 튕기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두신 복병이 그들을 치십니다.

암몬과 모압 자손들이 서로 쳐서 싸워 다 자멸했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여호사밧도 백성들도 모릅니다.

뭔가 하나님의 복병이 적진에서 싸워주셔서 적들이 진멸되기 까지 서로 싸웠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고 돕도록 새해에 모든 일에 복병을 숨겨놓으실 줄 믿습니다.

내 머리로 계산해서 가능성이 없어도, 환경으로 볼 때 어림없는 일이라도, 하나님만을 믿고 따를 때 우리 가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25절에 보니 적진에 들어가 전리품과 재물과 의복을 거두어 오는 데 사흘이 걸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싸움을 보십시오.

불필요한 손실이 없습니다.

애꿎게 고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피의 격전지가 되었을 그 골짜기를 이스라엘사람들이 브라가골짜기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송축한 송축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27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다시 여호사밧을 선두로 하여 즐겁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적군을 이김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그들의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새해에는 우리가 가는 모든 곳이 송축의 골짜기가 되고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 되길 축원드립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리합니다.

모든 대소사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고 꾸려가시길 바랍니다.

새해 모든 가족들이 다 예수님 앞에 나오시길 축원드립니다.

여호사밧이 말씀을 가르쳐 백성들의 믿음이 견고해졌듯이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와 사랑하는 가족과 우리 가정이 견고히 설 것입니다.

또 우리 직장과 진로와 행하는 일들이 모두 형통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을 송축하는 행복한 새해를 보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