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시야왕은 다윗왕 이후 드물게 강력한 이스라엘을 세웠던 왕입니다.
잃었던 많은 땅을 되찾았고 암몬이라는 나라에게서 조공까지 받았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게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은 다윗왕 이후 단 한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늘 조공을 갖다 바치는 나라였지 받는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조공을 받았다는 것은 그냥 지나쳐가는 말이 아닙니다.
또 웃시야는 농업과 건축술과 무기 개발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하나님이 웃시야 왕을 도와주셨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5절에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7절에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15절에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또 13절을 보면 ‘왕을 도와 적을 치는 막강한 용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도 그를 돕고, 사람도 그를 도왔던 것이죠.
웃시야왕 시대를 기록하던 서기관은 가물가물 꺼져가던 남유다의 불빛이 갑자기 횃불처럼 강력하게 타올랐던 그 시대를 떠올릴 때 아무리 생각해도 당시의 부성함이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선왕이었던 웃시야왕의 부친 아마샤왕시대에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다 약탈당했다고 바로 앞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 북쪽 성벽이 다 헐렸다고 하니 마음만 먹으면 어디 나라든 와서 집어 삼킬 수 있는 가나안땅의 약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십육세에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웃시야 시대에 와서 오늘 본문에서 읽은 대로 애굽에 까지 명성이 알려진 엄청난 강국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었다는 것을 후대에 이 역사를 기록한 서기관의 안목을 통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의 ‘그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었다고 확신하는 일들이 있죠.
또 어떤 성도의 일이 잘 풀려가는 것을 볼 때, 저건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분명하다라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런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안됩니다.
부친의 시대에 모든 것을 망해 먹었다 해도, 어린 웃시야왕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강력한 나라를 다시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고 터전이 별로 없다고 문제될 것은 분명히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웃시야왕을 기이하게 도와주신 이유를 살펴보고, 안타깝게도 이후에 몰락한 웃시야에 대해서도 살펴보며 중요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웃시야왕의 강성함이 기이했기에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는 그의 몰락의 원인을 살펴보며 형통한 길로만 올곧게 걸어가는 우리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웃시야왕이 도대체 왜, 유독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받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웃시야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기에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신명기6장18절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얻을 방법을 분명하게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웃시야처럼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고 형통한 복을 얻으려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면 됩니다.
성경에서 정직은 ‘하나님 보시기에’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인 올바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했던 웃시야의 정직이 어떤 것인지 본문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왕인 아마샤가 어떻게 정직했는지를 참고해야겠죠.
앞 장에 보면 부왕인 아마샤왕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서 아마샤 역시 정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실례가 하나 나옵니다.
아마샤가 왕위가 굳어지자 자기 아버지를 암살했던 사람들을 처단한 내용입니다.
대개의 통치자들이 반대세력을 처단할 때 멸문지화를 시키지 않습니까?
화근이 될 가문의 씨를 아예 말려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아마샤왕이 모의에 가담한 사람들만 죽이고 그 자손들은 살려줍니다.
그 이유가 모세의 율법에 죄를 지은 사람만 죽이고 그로 인해 자식을 죽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수의 자식들을 남겨 놓으면 후환을 당하니 다 죽여야 한다는 게 세상 이치라면, 하나님의 뜻은 그래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통념이 갈등할 때,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영민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나면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갈등한다는 것을 아시나요?
양보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지 않고 동생과 다투고 나면 영민이도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정직하게 행하려고 한다면 매순간이 죄의 본성과 갈등하고 매일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갈등이 매일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인정받고, 특별히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들을 보면 이런 갈등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한 사람들입니다.
사업이나 직업도 세상의 방식 안에서 무작정 따라가면 밥벌이를 넘지 못하지만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하면 그곳이 바로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가 됩니다.
그릇을 닦고, 서류를 정리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그 자리에 반드시 하나님이 기이한 도우심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하나님보시기에 정직하게 사는 것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곧 정직하게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웃시야왕이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정직하게 행하도록 만들고, 하나님을 찾게 했다는 뜻입니다.
웃시야왕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인 것이죠.
웃시야왕의 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따라 정직히 행하고, 오직 하나님만 찾도록 조언하는 스가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가 죽고 웃시야왕에게 말씀을 지도할 사람이 없어지자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도 않게 됩니다.
우리 안의 죄성은 약화되지 않고 남아 있다 기회만 되면 하나님을 벗어나도록 우리를 지배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계속해서 인식하고 하나님을 꾸준히 따르도록 지도받지 못하면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어느 순간 하나님 앞을 아예 떠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지도를 받고 말씀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 서로 삶을 나눌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웃시야왕이 더 이상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을 때 하나님도 더 이상 그를 형통하게 하시지 않았다고 오늘 본문은 기록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으며 올바른 길로 들어선 우리 모두가 끝까지 성경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만 찾음으로 형통한 삶을 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다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형통하게 하시면 하늘의 기업과 땅의 기업이 강성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했고, 하나님만 찾은 웃시야왕은 매일 성전에서 예배만 드리고 성경만 배우며 은둔한 게 아닙니다.
그에겐 지켜내야 할 나라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고, 믿음이 좋아지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세상의 일과는 담을 쌓고 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오늘 웃시야왕을 통해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믿음에 서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들은 세상에서도 점점 자기의 기업을 확장하고 지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신실했을 때, 웃시야는 그 누구보다 강한 능력과 성공을 이룩했습니다.
본문에서 순서를 보면 4절과 5절에 웃시야왕이 열심히 말씀을 따르고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6절에서도 웃시야가 나가서 싸웠을 때 7절에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말씀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믿음이 바로 서면 세상일에도 담대함이 생깁니다.
웃시야의 신앙은 하나님의 지원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강성대국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과 리더십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공을 바치며 강대국을 의지했던 선조들을 비웃기나 하듯이 적군을 향해 달려 나가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고, 말씀에 비추어 내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고 바르게 정렬하지 못하면 당장 세상에 대해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세상이 두려워지고, 잘 하던 일에도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바로 서면 지금보다 더 세상일도 최상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아무리 세상을 살아갈 모든 조건을 갖추고 준비했다 해도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손을 들어주셔야 이깁니다.
사무엘상 2장7절에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저는 번영신학은 아니지만 믿음 안에서 정직하게 행하며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인생에서 낙오되고, 빈곤으로 쩔쩔매고, 사방의 악재로 기가 죽어 사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큰 믿음은 큰 일을 해냅니다.
본문에서 웃시야왕은 국가의 경제력을 키우고, 군사력을 증강하고 성읍을 건설하고 남의 나라의 조공을 받을 만큼 성공적으로 왕의 역할을 해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기 재산도 늘리고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실컷 했다고 합니다.
10절에 보면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기르고, 좋은 땅이 많아 포도원지기를 두고 좋아하는 취미생활인 농사를 마음껏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을 뺏으려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것이 죄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기쁘게 그것을 채우십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런데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않고 나를 원하지 않았다고 시편에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유독 웃시야왕만을 이렇게 기이하게 도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웃시야가 하나님만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의 몰락한 왕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우상에게 구하고 이웃나라의 원조를 구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찾은 웃시야왕에게 하나님은 가장 완벽하게 응답하신 것이죠.
하나님은 웃시야왕에게만 기이한 도우심을 베푸시는 게 아니라, 누구든 하나님을 구하고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나오는 자들에게 기이한 도우심으로 함께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만을 유일한 도우심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얇팍한 내 지식을 믿고, 그리 많지도 않은 재산을 의지하고, 내 경험과 판단을 더 의지하기에 기이한 도우심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대어 가는 게 혼자 가는 것보다 안전하고 빨리 갑니다.
우리 교회에서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이 얼마나 믿음으로 잘 양육되고 있는지 저는 감사할 뿐입니다.
어린이부 뿐만 아니라 우리 청소년부 학생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며 제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고 간절한지 모릅니다.
어린이부 아이들이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교회의 젊은 세대들이 믿음에 바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올바르게 행함으로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며 이 땅의 기업도 훌륭하게 일구고 행복하게 살게 되길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16절부터 웃시야왕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강성해지고 나서 마음이 교만해져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된 것을 처음에는 인정하지만 사람은 결국 그것으로 자신의 자랑을 삼게 됩니다.
그래서 안될 때 보다 잘될 때가 성도들에겐 더 위기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모든 일에 거침없이 잘되게 밀어주시지 않는지 이유를 아시겠죠?
저도 성도님들의 가정의 기도제목들이 다 응답되고, 몸도 항상 건강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직장에서도 승승장구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대로 되지 않을 때 애가 탑니다.
하지만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받으신 자식은 알아서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인내가 필요하면 광야학교에 집어 넣으시고, 겸손이 필요하면 병상에 눕히시고, 거룩이 필요하면 세상 재미를 거두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자녀마다 그 질긴 죄의 속성을 다루시는 방법을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온전한 자녀로 기르시는 것입니다.
만사가 형통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떠날 수 있지만, 힘들면 못 떠납니다.
혹시 큰 실망과 실패가 있어도 택한 자녀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형통하고 교만해지면 마지막 상대가 하나님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교만한 인간은 마지막에 하나님에 대한 오만방자한 본심을 드러냅니다.
웃시야왕이 거칠 것 없이 잘나가자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사의 규례를 멋대로 어기고 제사장들만 하게 되어있는 분향을 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잘 보십시오.
웃시야왕이 제사를 안드리고, 방탕하고, 다른 신을 섬겼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자기 원하는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도 문제지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경험과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도 문제입니다.
웃시야왕이 하나님의 묵시에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히 따르지 않은 결과, 나병에 걸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별궁에서 쓸쓸히 지냈다는 것이 역사가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경외하며 따를 때, 그 많은 일을 이루었지만 교만이 드러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조차 자기를 높인 순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폐인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과거에 눈부신 성공을 했다한들 뭐하겠습니까?
웃시야왕은 다시는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고 별궁에서 처량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역대기를 보면 수많은 왕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그를 평가합니다.
그 평가 기준은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다윗왕 같이 했냐, 안했냐입니다.
왜 역대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그렇게 모든 왕들을 끈질기게 다윗왕의 잣대에 비추어서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웃시야왕과 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는 왕이 나타날 때 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실 메시야가 아닐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든 열왕들이 결과적으로 인간의 약점을 가진 제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하며 끝까지 하나님이 보내주신 완전한 메시야왕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다윗의 후손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남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로 강성한 복을 내리심으로 증명해 보이신 역사입니다.
신약시대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뺏기지 않고, 변하지 않는 더 나은 복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잘됨은 현실적인 축복의 열매들로도 나타난다는 것이 신약시대에서도 여러 곳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 미국에 가보니 정말 축복받은 나라가 분명합니다.
다만 살림이 불어나니 사람들의 살도 참 많이 불어났더군요.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강한 미국을 세웠을까요?
미국의 조상인 청교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북미 대륙에 들어갔을 때, 이미 그곳엔 인디언들이 있었고 멕시코인들이 있었는데, 왜 같은 땅에서 미국만이 그런 복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마을의 중심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국가와 개인의 삶에 중심에 두고 하나님만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마침내 세계의 중심에 서고 풍요를 누릴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모든 안일함을 버리고 조선같이 미개한 나라들에 가장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 이런 나라를 찾아와 꽃같은 젊은 피를 흘렸겠습니까?
그들이 받은 축복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힘들다고 낙심하지 마시기바랍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나라와 이 땅의 기업에서 모두가 형통하도록 말씀안에서 바르게 행하고 하나님만을 찾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6년1월31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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