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하

역대하15장1절-9절 (아사왕의 개혁)

남수연 2017. 3. 15. 15:31

구한 말에 헐버트라는 선교사가 쓴 대한제국멸망사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적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적이고 고난을 당할 때에는 미신적이다.’

한국사람들을 아주 잘 본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에 불교적, 유교적, 무속적 배경이 깔려있다고 보면 됩니다.

미국 한인사회에서 명리학이라는 학문으로 사주를 보는 상담소를 찾는 고객의 80%가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속배경에서 자랐기에 신자가 되었어도 답답하고 급할 땐 점이나 보러 갈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주장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나와도 생각을 굽히지 않고 고집한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고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설령 그 반대되는 증거가 나온다 해도 끝까지 옳다고 고집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먼저 받아들인 토착사상의 영향으로 성경을 바르게 믿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익히 좋아하는 성경구절만 계속 눈에 들어와 정작 하나님이 교훈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고대 이스라엘 역사책 안에 들어있는 설교입니다.

역사가 주는 지혜가 무엇인지 다 아시죠?

과거의 잘잘못을 오늘 내 삶에 적용시켜 실패를 답습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아사왕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 중에서 좋은 왕으로 평가받는 왕입니다.

그의 좋은 점에서 우리도 좋은 성도가 되고 좋은 인생을 일군 사람이 될 교훈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왜 그에게 설교하셨는지를 생각하며 우리 신앙에 잘 적용할 수 있길 원합니다.

 

 

먼저 성경이 아사왕을 좋은 왕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좋은 왕은 전쟁을 잘하고, 외교를 잘하고, 경제를 발전시켜서, 평화롭고 부강한 나라를 이뤘기에 좋게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가들의 평가기준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잘 섬겼냐 아니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사왕은 분명히 좋은 왕입니다.

왜냐하면 17절에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온전했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사왕은 하나님 앞에서 선과 정의를 행했다는데, 그것은 백성의 우상숭배를 막고 하나님을 찾게 하고 율법을 가르친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국민들이 잘 살게 하려고 달리 노력했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다만 신앙을 회복시켰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했다는 말만 있습니다.

국가의 평안과 부강은 믿음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절로 따라왔을 뿐입니다.

앞장에 보면 그걸 보여주는 한 사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사왕 즉위 10년에 구스라는 나라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옵니다.

아사에겐 오십팔만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아사왕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죠.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병력은 반 밖에 안되지만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싸워보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벌벌 떨리고, 우리를 도와주실 이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스를 이기도록 아사왕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많은 노략물이 저절로 그의 손에 굴러 들어온 것입니다.

여기서 아사의 신앙은 현실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현실에 뿌리박혀야 합니다.

현실과 따로 노는 신앙은 평소에는 모르지만 두 배의 적군이 몰려올 때 절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지금 당장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내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사람이나 다른 어디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 들고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실제적인 공급자이시고 가장 틀림없는 지원자심을 알기 때문이죠.그래서 믿음이 좋아지면 의식주에 대한 염려가 점점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사왕이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남은 빈약한 나라를 강대국들 사이에서 꾸려나간 것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한 믿음 하나였습니다.

이걸 우리도 붙들어야 합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강대국의 외교력을 믿었던 왕들이 속속 무너질 때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아사왕은 승리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의 지도자가 언제나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독일인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삼선총리 메르켈은 지금도 평범한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스웨덴에는 복지천국의 기초를 놓은 알빈 한손총리가 있습니다.

한손총리는 밤늦게까지 국정을 챙기고 전철로 귀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23년간 집권했던 엘란데르총리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나니 거처할 집이 없어 국민들이 마련해 주었다고 하죠.

이런 리더십의 배경엔 희생, 헌신, 청렴 같은 기독교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바른 양심과 국민을 위한 봉사심을 가진 새지도자가 세워지길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선과 정의를 행하면 그 뒤이어 삶의 형통이 졸졸 끌려 나온다는 것을 아사왕의 생애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의뢰하면 그 집이 화목하고 형통합니다.

회사의 보스가 하나님을 찾고 선과 정의를 행하면 회사가 잘 굴러갑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잘 섬기면 가는 길이 평탄하고 미래가 소망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굳게 믿는 신앙인이 되는 게 쉬운 길은 아닙니다.

돈 벌려고 매달리고 좋은 직장 가려고 스팩 쌓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바르고 강한 믿음을 갖는 게 더 어렵습니다.

나를 위해 돈 벌고,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본성적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비본성적이라 꾸준히 하는 게 어렵습니다.

왜 지난 한 주간 세상 일은 갈등 없이 열심히 했지만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은 그렇게 안되었는지 아시겠죠?

그래서 아사에게도 본문처럼 그의 믿음을 강하게 할 설교와 격려가 계속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승을 거둔 아사왕이 엄청난 전리품을 챙겨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대승을 거두고 많은 재물들을 싣고 돌아오는 왕을 맞으며 나라는 축제분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사랴라는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준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아사여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어찌보면 모두가 승리에 도취 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미 잘하고 있는 아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믿음의 승리 뒤엔 영적 위기가 종종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크게 승리한 뒤 죽고 싶을 만큼 영적 탈진이 왔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내다가도 어느 순간 영적 피로감이 몰려와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어 큰 기쁨을 맛본 뒤에도 묘한 침체가 옵니다.

일이 잘 풀려가면 하나님을 의지했던 손아귀의 힘도 스르르 풀립니다.

아사왕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하느라 수고했지만 신앙에서 휴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힘써서 주님을 따랐지만 계속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믿음은 늘어난 고무줄 마냥 다시 과거로 회귀하려 합니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몇 년 째 제자리를 맴돌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구태의연한 신앙을 갖고 사는 신자만큼 멋없고 질리는 게 없습니다.

작년의 신앙 그대로라면 벌써 남들이 보기에 답답합니다.

요즘 그런 걸 사이다는 없고 고구마만 먹인다고 하더군요.

지난주에 현민이와 단우에게 물으니 요즘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정체 또는 지체된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아이들도 자기 상태를 안다는 것입니다.

고구마만 먹은 것처럼 목이 메이고 답답하거든요.

왜 오늘 승리한 이 순간에도 또 신앙을 개혁하고 바로잡아야 하는 지 아사랴가 3절부터 6절에 과거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 그들이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찾으매 그가 그들과 만나게 되셨나니

그러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예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제사장도 곁에 없고 하나님의 율법도 가마득히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환난 때가 돼서야 겨우 하나님께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역사거든요.

그걸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들의 삶이 어땠다고 합니까?

그 때에 온 땅의 모든 주민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하지 못하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치고 피차 상한 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고난으로 요란하게 하셨음이라

전쟁과 소요가 끊이지 않아 마음껏 돌아다니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방이 적이라 큰 길로 못 다니고 오솔길로 다녔다는 기록이 사사기에도 있습니다.

빚쟁이를 피해서 돌아가야 하고,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사무실 출입이 불편하고, 집에 가도 편하게 안식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멀고, 말씀이 없는 환난의 때라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항상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이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 삶에서 손을 떼십니다.

단 우리 곁에 여전히 계시며 우리가 찾을 때 반드시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쫒아 다니며 미리미리 발 앞의 돌부리를 치우시고, 구덩이를 메꿔 놓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은 성숙하고 완전하게 사랑하십니다.

아이를 많이 키워본 부모는 아이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사랑하되 훈육하죠.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찾는 것은 본성상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

하나님을 찾고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는 우리의 노력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강하게 믿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누가 내게 믿음을 떠 먹여주는게 아니라 내 손으로 나를 위해 스스로 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결단과 수고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사왕은 이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손을 들어 즉각 순종합니다.

이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회복을 위해 개혁을 일으켰지만 다시 고삐를 쥐었습니다.

아사가 행한 신앙의 개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앴다고 합니다.

가증한 물건이란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 만연 된 우상 숭배를 말합니다.

우상신앙들은 인간의 죄된 본성에 맞게 발전 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우상종교는 사회문화 전반에 퍼진 삶의 방식입니다.

죄의 본성이 좋아할 요소들로 꾸민 우상 종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보다 훨씬 죄인에게 매력적입니다.

요즘은 고난주간 앞서 지키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브라질의 유명한 삼바축제 아시죠?

본래 카니발이라고 하는 데 한자어로 사육제라고 하죠.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사십일 동안 금욕하기 전에 온 국민이 실컷 먹고 노는 축제입니다.

1년 중 남미 전체가 가장 문란한 때가 이 카니발기간입니다.

이때 무절제로 임신 된 아이를 카니발 베이비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게 로마종교의 농경제에서 나온 축제입니다.

가나안의 우상종교들이 이랬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뭇가지로 초막이나 지어 놓고 그 안에서 광야생활을 회상하며 조용히 보내야 하는 그런 이스라엘의 명절에 비할 때 얼마나 재밌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불과 한세대 만에 가나안의 종교로 갈아 탄 것입니다.

오늘날 우상 문화란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서 쾌락과 재미를 찾는 세속문화입니다.

세속문화는 우리가 자라온 배경이고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물론 세속문화가 다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죄가 고향이고 과도하면 반드시 죄로 이어집니다.

아무리 중립성을 가진 세속적 취미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방해하면 우상숭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활동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시간과 돈과 열정을 과도하게 들이는 부분들이 분야는 달라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쇼핑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하고, 미용이기도 하고, 탐식이기도 합니다.

도를 넘는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성경은 지목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이건 좋은 것이건 결과적으로 신앙과 삶에서 큰 시련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걸 아는 아사왕이 어느 정도로 철저히 우상숭배를 뿌리 뽑았는지 뒤에 나옵니다.

태후인 외할머니가 그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자 아예 폐위를 시킵니다.

어머니라고 번역되었지만 할머니가 맞습니다.

손자에게 외할머니가 어떤 존재입니까?

옛날 할머니들은 잔치집에 갔다 오면 손수건에 곶감 하나, 전 몇 조각을 싸 가져와서 손주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이런 외할머니의 사랑을 순주들이 압니다.

우리 서원이도 어렸을 때 나중에 자기가 돈 벌면 외할머니한테 수영장 딸린 집을 사드린다고 공수표를 날렸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외할머니를 폐위시키는 게 쉬운 일입니까?

그러나 우상숭배가 가져오는 치명적인 파괴력을 알았기에 혈육이라도 끊어내는 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사왕이 이렇게 이미 수십년간 토착화가 된 이 우상숭배를 뿌리 뽑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민들의 반발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우상은 내다 버려야 합니다.

내게 우상의 자리를 노리는 세속문화가 있다면 걷어내고 잘라내는 싸움이 오늘 필요한 것입니다.

 

다음, 아사왕의 개혁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8절에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제단을 재건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제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제단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놋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아사왕의 할아버지인 르호보암 때 애굽왕이 쳐들어와 왕궁과 성전의 모든 보물을 약탈해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놋은 금, 은 다음으로 귀중한 보물이었기에 놋제단을 떼어갔을 것입니다.

그때 없어진 제단을 이제야 재건한 것을 보면 그동안 제물을 드리는 제사가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아사는 제단을 재건하고 엄청난 양의 제물을 드리며 절기를 지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예배에서 시작되고 예배로 완성됩니다.

예배는 아사왕이 백성들과 함께 정해진 절기에 드렸듯이,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속죄의 많은 제물을 드렸듯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는 속죄의 제물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제물이 없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전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나와 실질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속의 무언가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떠올리며 예배드려야 합니다.

내 눈 앞에서 예수님께서 내 죄의 벌을 대신 받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이 지금 역사 속에 오셨다면, 나 한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 눈앞에서 기꺼이 십자가에 오르셨을 것입니다.

아직 깨달아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사실을 생각하고, 믿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면 반드시 모두에게 상급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만나게 될 거라는 오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배를 삶에서 가장 중요히 여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이런 신앙의 개혁을 단행하는 아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결과 아사왕의 시대에 그 땅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19절에도 말씀하죠.

이 때부터 아사 왕 제삼십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성도에게 주시는 이 땅에서의 상급입니다.

우리 사방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평안하고, 내 자식이 평안하고, 내 가정이 평안하고, 내 삶의 모든 영역이 평안해질 것입니다.

이 평안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스스로 힘을 내어 강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행위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2017년3월12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