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하

역대하16장1절-10절 (아사왕의 실책)

남수연 2017. 3. 21. 19:30


끝이 좋지 않은 지도자로 인해 우리나라가 아주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사회 곳곳에 금이 가고 기강이 무너져 내린 쇠락한 나라가 안타깝고 아무 말 안 해도 서로가 안쓰럽습니다.

이젠 모든 상황들이 최선의 상태로 봉합되고 새로운 대한민국이 세워지길 기대합니다.

오늘 끝이 좋지 않은 지도자 한 사람을 또 만나게 됩니다.

지난 주 이스라엘 남왕국 유다에 아사왕은 우리 믿음의 본보기였습니다.

오늘 읽은 사람도 바로 그 사람 아사왕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교훈을 삼았던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니 좀 충격입니다.

이 두 얼굴의 아사왕에 대한 기록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명료하게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성경 속 한 왕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비추어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 해주시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역사책의 한 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시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선지자들의 실랄한 고발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 어디를 펼쳐도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해 보여주시고 우리의 갈 길을 지도해 주십니다.

지난주 좋은 본보기에서 교훈을 얻었지만 나쁜 본보기에서 우리는 더 많은 교훈을 얻을 것입니다.

먼저 주전 860여년에 일어난 본문의 사건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남북한 상황처럼 분단되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왕국과 북왕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열한지파가 모인 나라기에 한지파로 된 남유다보다 국력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핵무기까지 장착한 북한의 도발을 우려하듯 남왕국 역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북이스라엘의 침입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죠.

북이스라엘은 남유다 국경을 넘어 유다의 성읍인 라마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요새화하는 큰 건축공사 까지 벌입니다.

남의 땅에 와서 자기네 요새를 짓고 있는데 남유다는 대항 할 힘이 없는 것이죠.

왜 북왕국이 국경도시인 라마를 건축하는지에는 종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북왕국엔 아킬레스건이 있었죠.

전체 이스라엘의 유일한 성전이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왕국은 북쪽에 성소를 두 군데 만들고 금송아지 우상을 두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예배가 미심쩍었던 국민들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왕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왕 바아사는 사람들이 유다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겠죠.

이들이 남침해서 점령한 라마는 조상 때부터 신앙의 유산이 많은 곳입니다.

사무엘의 집과 사무엘이 세운 선지자 학교가 있었고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사무엘이 예배드리던 제단이 있던 곳입니다.

다윗도 한 때 이곳에 머물러 사무엘과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신성한 장소인 이 라마를 예배처로 만들어 남유다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유도하고 통행을 막겠다는 것이죠.

또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8킬로미터 정도로 지척입니다.

코 앞에서 남유다를 압박하고 언제든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있는 요새로 만들려는 것이죠.

이십여년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 없이 평화롭던 아사왕이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병력으로는 상대가 안되는 아사왕은 처지에 맞게 용병작전을 벌입니다.

북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람이라는 나라에 은금을 보내고 북이스라엘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죠.

오늘날 돈 주고 무기 들여오는 안보정책과 과히 다르지 않습니다.

돈을 받은 아람왕은 북이스라엘의 재정창고가 있는 국고성 몇 곳을 공격해 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북이스라엘왕은 라마건축을 포기하고 돌과 목재들을 남겨둔 채 서둘러 수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렇게 북왕국의 군대가 떠난 뒤 아사왕은 모든 유다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돌과 목재를 날라다 라마 보다 더 북쪽 국경에 있는 미스바와 게바를 요새로 건축합니다.

이제 전쟁의 위기도 모면했고, 버리고 간 자재로 튼튼한 요새를 두 개나 세웠으니 아사왕이 한숨을 돌리고 만족하게 여길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지난 주 구스의 백만 연합군에 승리하고 돌아오던 아사에게 아사랴라는 선지자가 나타났던 것처럼 선지자 하나니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사왕의 실책을 책망합니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을 의지했기에 그간의 평안은 끝났고 앞으로는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름 위기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만족하고 있던 아사왕은 이 말에 대노합니다.

결국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그 생각에 동조한 사람들까지 박해합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사왕이 위기를 극복한 방식이 세속사회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왕으로서 가능한 방법을 써서 나라를 지킨거니까 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지금 이것을 잘했다고 하는 겁니까, 못했다는 겁니까?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우리에게 잘 적용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능력을 발휘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속사회의 관점으로 볼 때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도 과연 잘하고 있냐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서 살면 되고, 이 땅에서는 세상사람들처럼 자기 능력과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요?그러면서 크게 도덕적으로 벗어나지 않게, 큰 죄 짓지 않고 살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아사왕이 지금 죄를 지은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것을 책망하시고 그 방법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이 차이를 파악하지 못하면 이런 말씀이 내게 현실적으로 적용이 잘 안됩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 스팩을 쌓아 좋은 회사 취직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을 사고 했는데 그게 좋지 않다고 한다면 되게 억울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아사왕이 억울한 거예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한 하나니를 옥에 가둔 것입니다.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까지 다 잡아서 화풀이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왜 아사왕처럼 최선을 다해서 인간적인 능력과 힘으로 살아가면 안되고 꼭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왜 아람왕을 의지하면 안되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면 안되고, 꼭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까?

우리가 세상사람들처럼 살아도 별로 뒤지지 않게 잘 해나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을 의지해서 성도들은 살아가야 하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근본을 알아야 할 것은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정신이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을 벗어난 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업을 하고, 정치를 하고, 장사를 하고 그런 것들이 세상적인 관점에선 문제가 없다 해도 그 뿌리를 캐보면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도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만 고려하는 것을 한마디로 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세속사회엔 모든 것들이 멋있고 번지르해 보이지만 그 안에 자기만 고려하는 죄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자기에게 좀 더 이익이 되게 생겼거나, 자기에게 손해가 되게 생겼으면 타인은 짓밟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게 세속사회의 원리입니다.

요즘 각 정당의 경선을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같은 정당에서 숙덕거리던 사람들이 서로의 약점을 캐내어 서로 비수를 던지고 망신주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세속사회의 역사는 나와 이웃에게 결과적으로 불행이고 고통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죄악을 척결했지만 또 다른 죄악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죠.

처음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며 살도록 맡기셨잖습니까?그때는 세상에 죄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타락해서 모든 인류가 죄의 태생이 된 다음에는 그 본성이 악과 고통을 만들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어요.

이제는 성령 안에서 행하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라,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전처럼 그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국민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아사왕을 보십시오.

아사왕이 자기의 머리를 쓰고 현실적으로 가장 타당한 방법을 썼지만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동안 20년 동안 전쟁이 없었는 데 왜 전쟁이 일어났을까?

아사왕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잊은 아사왕은 결국 권력을 이용해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의로운 사람들을 억울하게 박해하며 점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과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의 결과를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는 새로운 법과 계명을 따라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아사왕은 백만 대군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도우심을 구하며 의지합니다.

이일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에서 대승이라는 기적을 이룹니다.

선지자가 나타나 너는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할 때 겸손하게 순종합니다.

다시 손을 강하게 해 나라 안에서 우상을 척결하고, 제단을 다시 쌓고 예배를 회복시켰습니다.

지금은 오직 자기가 가진 것을 동원해 살아갑니다.

돈이 없었다면 혹시 하나님을 의지했을까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재산이 많고, 건강이 있고, 지위와 권력이 있다면 사람은 저속한 배짱이 생깁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가서 처량하게 고개를 떨구고 겸손히 도움을 구하려고 하겠습니까?

아프면 최상급의 병원에 가고, 돈으로 세상을 즐기고, 사람들이 알아서 대접해주는 권력이 있는데요.

지금 아사왕이 이런 것입니다.

본문 뒤에 보면 아사왕이 발에 죽을 병이 생겼는데 그때도 하나님이 아니라 의원을 의지했다고 성경이 꼭 짚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에 비추어 오늘 우리는 과거의 아사왕과 현재의 아사왕 중 어느 쪽에 해당되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비교해 보면 내 다음 미래가 나오는 것이잖습니까?

이십년 평안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인생의 격전을 벌이며 고통스럽게 살아갈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 아사왕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동안 아사왕이 이렇게 평안하게 나라를 꾸려왔던 것이 누구 덕택입니까?

하나님의 덕택입니다.

이 남유다 만큼 약소국은 가나안 땅에 없습니다.

제가 다녀봤더니 일단 나라가 손바닥만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다윗과 솔로몬 때 외에는 주변나라가 가만 놔둔 적이 없습니다.

농사지으면 다 약탈해 가고, 걸핏하면 쳐들어와 다 부수고, 부녀들을 끌어가고, 평안한 적이 없었어요.

우리나라처럼 늘 외세에 시달렸습니다.

지금도 사방에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잖아요?

아사왕 시절, 이십년 태평성대는 남유다에게는 기적이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사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손길을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아사왕에게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이 손을 떼실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대적들이 벌떼처럼 달려드는 건 세속사에서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떼시면 사방 어느 한 나라도 상대할 능력이 없는 초라한 약소국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거둬 내면 우리에게 남는 게 무엇입니까?

처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목적도 모른 채, 슬픔으로 가득 찬 삶에 지치고, 많은 것을 잃고 상처받은 초라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은혜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삶을 축복하셨는지요.

전능자의 날개를 벗어나면 우리에게도 영광은 사라지고 죄와 고통에 신음하는 불쌍한 죄인만 남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그 무엇으로 자신을 꾸미고 높이려한다 해도 그냥 다 한심한 죄인일 뿐입니다.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쌓아 올리는 파면당한 대통령의 올림머리 같은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솔로몬이 화려한 의복으로 한껏 꾸며 봤자 하나님의 영광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들에 핀 꽃의 영광만 못하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는 성도에겐 형언하기 힘든 은은한 영광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사왕이 하나님을 따돌리고 이룬 업적이 무엇입니까?

적이 버리고 간 목재와 돌 좀 주워다가 도시 두 개 건설한 것입니다.

성전과 왕궁의 모든 은금을 다 갖다 바쳐서 얻은 게 고작 이것입니다.

아무렴 그 많은 은금으로 건축자재 부스러기 밖에 못 샀겠습니까?

그게 남는 장사가 아니죠.

세상에 투자하고 매달려 우리가 얻는 게 이런 것입니다.

아사왕이 전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략을 세웠다면 은금도 남아있고, 전쟁도 이기고, 다시 그의 후반전도 태평성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내 능력을 발휘해서 하루하루를 애써서 사는 것이 결과적으로도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들 말씀에 공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항상 먼저 고려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을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아사왕이 선지자 하나니의 충고에 격하게 분노한 것을 보면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 아사왕은 선지자들을 보내 백성들에게 율법과 계명을 가르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태평성대 이십년에 어느새 그가 의지하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나가고 평안할 때도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 훈련하고 전쟁이 오면 그 힘으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으로 견고히 되길 원한다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관심을 갖고 마음을 꿰뚫어 보고 감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향해 있으면 능력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할 만큼 힘들고 녹록치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도 넉넉한데 거들어 주신다는 건 넌센스죠.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받으며 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향해야 하고 이것은 훈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본능적으로 하면 실패합니다.

본성대로 나오고 싶을 때 나오고, 읽고 싶을 때 읽고, 기도하고 싶을 때 하면 실패합니다.

축구선수 김병0 씨는 코치로서 골키퍼를 키우며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선수들이 공을 막고, 공을 향해 다이빙 하는 데, 몸이 공에 반응하는 대로 본능에만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축구도 본능에만 의존하면 실패한다고 합니다.

모든 공에 대해 막는 자세와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걸 배우고 반복적으로 훈련해야만 된다는 것이죠.

공을 막고 나서 일어날 때도 반드시 두 동작 안에 일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무려 다섯 동작에 거쳐 일어나더랍니다.

그러면 2, 3차 방어가 어려워지는 것이죠.

이게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방법에 따라 훈련해야 성장하고 견고해 진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매주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도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하지 않으면 설령 믿음이 있다 해도 아침에 몸을 일으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신앙에는 감성 뿐 아니라 인내와 지구력이 필요합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유익한 걸 얻을 때 공짜가 없습니다.

우리 청소년부 학생들 게임을 참고, 놀고 싶은 것을 참아야 실력이 늡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도 매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말했습니다.

훈련이 싫고 내 생각대로 살면 더 편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훈련을 통해 몸에 익은 기술은 차원이 다른 선수가 되게 합니다.

전반에 잘 하다 뒷심이 부족해서 꼭 밀리는 선수들이 있죠.

뒷심은 잘 다져진 기초와 훈련에서 나옵니다.

훈련으로 잘 다져진 성도들을 보면 흔들리지 않는 뒷심이 있습니다.

훈련이 안되고 고삐를 죄지 않은 죄의 본성은 사방에 죄를 낳고 죄가 결국 사람을 옥죄어 옴짝달싹 못할 상황으로 끌고 다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 안에서 그 말씀을 순종하며 따르는 것은 속박이 아니라 진정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아사왕이 자기 지혜와 세상을 의지한 결과 남은 생애 전쟁을 두려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노년에 발에 난 병으로 죽습니다.

하나님과 엮이지 않고 마음대로 살려고 했는데 결과는 발에 난 병으로 발이 묶여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인과관계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의지하는 삶을 위해 몇 가지 실천적인 훈련방안을 제안합니다.

먼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새 하루를 주시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루를 의탁하십시오.

식사 때도 하나님을 계속 의식하며 음식을 드시길 바랍니다.

유대 어린아이들은 밥을 먹으며 찬양을 부르게 한다고 합니다.

밥 먹을 때조차, 하나님을 늘 의식하도록 부모들이 훈련하는 것이죠.

운전할 때 공부할 때 업무 중에도 틈이 나면 수시로 주님을 의식하십시오.

순간순간 하나님께 대한 초점이 흐려질 때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상상으로 머리 속에 그리는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이 거기 계시다는 존재감 자체를 믿고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거기 계신 것을 믿습니다. 저와 함께 해주세요.’

저는 참 신기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깊은 심호흡이 되고 그렇게 평안해 집니다.

우리가 숨조차 길게 못 쉴 정도로 바쁘고 힘겹게 살고 있다는 것이죠.

모든 일에 수시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성도들은 나중에 생각 자체를 자기 머리로 우선 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다보니 하나님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 머리에 주시는 대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얼마나 지혜롭고 온전하게 판단하며 살겠습니까?

내 판단대로 살아봐서 아시잖아요, 얼마나 불완전하고 골치 아픈 결과가 나오는지.

이렇게 예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고려하는 것을 꾸준히 훈련하면 우리는 늘 하나님을 찾고 의지함으로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능력 안에서 훌륭하게 이 땅의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훈련은 지루하고 고달픈게 아닙니다.

제가 TV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잠깐 보았는데요.

조련사와 매 사이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매가 조련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매가 잡은 사냥감을 조련사에게 가져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매가 사냥감을 잡으면 그것보다 더 맛있고 좋은 먹이를 주며 신뢰감을 형성한다고 합니다.

조련사가 자기 것을 탈취하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준다는 신뢰감을 쌓는 것이죠.

하나님도 그런 면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세상 것들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면 항상 보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신뢰할수록 마음에 평안이 오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항상 즐거움이 있고 자발적이 됩니다.

그렇게 사는 생애야 말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타인을 위해서 가장 복되고 보람 있는 생애가 되는 줄 믿으십니까?

그럼 오늘 말씀을 잘 적용해서 훈련하고 지키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7년3월19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