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의 막이 올랐습니다.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김연아선수의 피겨 종목 때문에 동계올림픽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속히 높아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번 평창올림픽이 평화로운 가운데 선수들이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잘 치러지길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올림픽이 평창에서 열리다보니 아무래도 전엔 알지도 못했던 종목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되더군요.
컬링이라는 경기가 그렇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알지 못하면 즐길 수가 없는 것이죠.
성경도 자꾸 읽고 들으면 그 맛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이라고 해서 어렵겠다는 선입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과거나 현대나 똑같습니다.
현대인에겐 현대 이야기가 필요했다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 성경을 쓰게 하셨겠죠.
아무리 수천년 전 기록물이라 해도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시면 관절과 골수를 분해하듯 사람의 심령에 작용합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성경을 효력 있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마음과 귀를 열고 말씀에 잘 집중하시면 성령께서 모두에게 큰 유익과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성경 역대서와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왕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왕은 남유다의 요아스왕입니다.
요아스왕의 특별한 생애는 22장부터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지 몇 줄로 요약 된 다른 왕들에 비할 때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죠.
그 이유는 그의 생애를 통해 분명한 교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아스왕의 유년시절은 사극의 소재가 될 만큼 극적입니다.
역사적 사건인 만큼 앞 뒤 내용들을 종합해서 간단히 요아스왕의 생애를 훑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아스의 부친인 아하시야왕은 북이스라엘 아합왕가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아달랴는 이 아합왕가의 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 바알숭배를 퍼뜨린 악한 아합왕가에 진노하셔서 예후의 혁명을 통해 이 가문을 철저히 징벌하십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을 방문했다 예후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아달랴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의 왕자들을 몰살시키고 자기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때 갓난아이인 요아스를 고모가 침실에 숨겨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아달랴가 나라를 지배하던 육년 동안 성전에 숨겨서 키워집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극 한편을 보는 것 같죠?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고모부인 제사장 여호야다가 비밀리에 사람들을 성전에 모으고 왕자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왕손이 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들과 함께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제거하고 조카 요아스를 왕위에 앉힙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요아스는 고모부 여호야다의 신앙에 영향을 받으며 40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본문의 앞 1,2절을 보면 이런 의미심장한 말이 나옵니다.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칠 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다스리니라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그 뒤는 좋지 않았다는 뜻이죠.
오늘 본문 15절에 여호야다의 죽음이 나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백삼십 세에 죽었다고 하죠.
야곱 이후로 여호야다 만큼 오래 산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구약시대에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왕의 시신만 안치하는 왕실의 묘에 유일하게 제사장계급인 여호야다를 장사했다고 합니다.
다윗왕조의 불씨를 살려 요아스왕을 세우고 국민들을 다시 하나님 신앙으로 돌이켰던 여호야다를 하나님도 축복하시고 사람들도 칭송했던 것이죠.
여호야다가 이렇게 영광스런 삶을 마친 이유를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지금도 그 기준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나라와 하나님과 주님의 교회에 대하여 평생 착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정받는 영광스런 결말을 맞이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문제는 요아스왕이 왜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신중하게 살펴보고 깊이 교훈을 새겨야 합니다.
여호야다의 생전에 요아스는 하나님께 특출 난 열심을 보입니다.
선조들의 우상숭배로 인해 훼파되고 무너져 방치 된 성전을 다시 수축합니다.
성경은 그의 업적으로 유일하게 성전수축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볼 수 있죠.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은 뒤 요아스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17절,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더라.
그의 평생에 가장 큰 업적이었던 바로 그 성전을 버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딴 신에게 가서 절했다는 것입니다.
사십년 하나님을 섬겼던 공적을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뜨리다니요.
요아스의 변절을 보며 우리 믿음에도 항상 경고 장치를 해둬야 합니다.
바울사도의 편지에서도 동역자들이 믿음을 버렸던 충격을 종종 언급합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요아스왕은 왜 그토록 열심이던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아세라와 바알종교를 선택했을까요?
왜 이스라엘이 건국 이래로 끊임없이 우상종교에 휘말렸고 결국 망했는지는 그만큼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알, 아세라 종교는 당시 가나안 여러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믿었던 주류 종교이자 가장 성행했던 당대의 문화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사는 문화 그 자체와 똑같은 것이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렵게 삶에 밀착된 문화였습니다.
그런 중에 이스라엘이 유일신인 여호와 신앙을 들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방이 다 우상종교다 보니 문만 열면 그냥 밀고 들어옵니다.
이미 형제나라 북이스라엘도 바알종교가 덮친 상황입니다.
요아스왕이 이 바알, 아세라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말하자면 세태를 따르는 것이고 일종의 문호개방입니다.
주변이 다 그걸 믿는 데 내가 믿는 하나님만 꼭 옳겠냐는 것입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는 외교적으로도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같잖아요?
기독교신앙을 갖고 사회생활 하는 것 때로 개밥의 도토리 같지 않습니까?
회식자리에 가서 소주잔에 콜라를 따라서 홀짝 홀짝 마시는 신자들 때문에 분위기 깨지잖아요?
상가집 가서 다 엎드려 절하고 있는 데 혼자만 우뚝 서서 기도한 경험 다 있으시잖아요?
제사 자리에서 같이 절하고 한 상에서 먹고 마시면 다들 화목하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유독 기독교 신앙 때문에 어디서건 갈등이 생깁니다.
요아스가 유다방백들이 절하며 정세에 맞게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설득할 때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 넘어 간 것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볼 때 사람 본성에 하나님 섬기는 게 잘 안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 타고난 본성과 하나님과는 코드가 전혀 안 맞습니다.
이 세상문화는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 냈기에 코드가 딱 맞습니다.
그래서 세상문화를 너무 탐닉하면 죄의 본성이 점점 활성화되고 신앙생활이 어려워집니다.
세상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여하며 사는 게 좋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교회 가자고 해도 안 따라 옵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이 의심스러운 인물이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도, 그냥 세상이 더 잘 맞아서 그런 것입니다.
종교만 해도 가나안사람들이 믿던 바알신은 사람이 만들어 냈기에 인간 본성에 완전 부합됩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훨씬 잘 맞는 것이죠.
하나님 신앙은 본성을 거스르는 수준 높은 윤리까지 요구하니 더 싫은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힘으로 원하는 걸 다 하던 시대에 생경한 명령입니다.
추수할 때 밭의 한 구석은 다 베지 말고 남겨 두어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의 식량이 되게 하라고 하시잖아요?
사람 욕심이 낱알까지 다 거둬가고 싶잖습니까?
그러니 사람의 욕심과 죄와 완전히 반대로 가는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만들어 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역행하는 이 믿음을 끝까지 갖는다는 것은 요아스가 실패한 것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 남아있는 본성이 때로 믿음을 공격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믿음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교회 문을 열고 나가면 다시 세상과 과거 습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일평생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는 노력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116편에서 성도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호흡이 다 할 때까지 진심과 의리를 갖고 성도의 자리를 지키다 하나님께 가는 것이 그렇게 귀하다는 것입니다.
요아스가 40년을 믿고도, 그렇게 열심히 믿고도 하나님을 버렸잖아요.
그 결과는 하나님과 요아스와 이스라엘에 정말 불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목석으로 만든 우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로 인해 고통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악으로 의를 가리는 자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악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것은 참된 의가 아니죠.
예수님은 무지한 사람들의 완고함이 안타까워 눈물 흘리고 그러셨잖아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변절한 요아스를 돌이키려고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보내 백성들 앞에서 이 배교의 결말을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나님을 버리고 세속 문명과 우상종교를 따르는 것은 결국 자신을 형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세상 누가 우리를 형통하게 만들어 주겠습니까?
우리는 그걸 다 알지 않습니까?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껴두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어요?
그 복되신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들에게서 결국 하나님도 돌이키시고 말았습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는다고 시편 9장에서 말씀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한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특히 성령으로 거듭난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성도들과 달리 성령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내주하십니다.
반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잘 믿던 성도가 어느 날 하나님을 멀리하고 외면한다면 영적 사춘기에 집을 나갔거나, 아니면 친자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요아스의 결말을 보면 애석하게도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탕자는 친자였기에 다 망해 먹고도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은 요아스는 급격히 몰락합니다.
먼저 요아스가 얼마나 인격적으로 스스로 무너지는지를 보십시오.
우리 인격이 요만이나 되는 것도 예수님께 붙어있기 때문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21절에 보면 스가랴의 통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왕의 명령으로 그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다고 합니다.
25절에 보면 나중에 요아스가 암살당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
요아스가 스가랴만 죽인 게 아니라 다른 아들들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누굽니까?
앞23장에 보면 여호야다가 철권통치 아달랴 앞에서 목숨을 걸고 요아스를 등극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11절, 무리가 왕자를 인도해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세워 왕으로 삼을새 여호야다와 그의 아들들이 그에게 기름을 붓고 이르기를 왕이여 만세수를 누리소서 하니라
여호야다와 그의 아들들이 요아스에게 기름을 붓고, 왕위에 앉히며 얼마나 기뻐했는지가 느껴지죠.
그런 여호야다를 배신하고 그 아들들을 다 죽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은 누구든 배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하다면 사람에게도 신실해야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가랴가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을 향해 호소합니다.
22절,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의 이 탄원을 들으셨을까요, 못 들으셨을까요?
마태복음23장35절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행하시는 모든 선한 일과 메시야로서의 증거를 보고도 주님을 밀쳐내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여기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는 스가랴선지자로 보는 것 보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로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사가랴와 스가랴가 같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왜 여호야다의 아들이 아니고 바라갸의 아들이라고 했는지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 누군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피흘린 사람은 바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 날 스가랴의 탄원을 듣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구약성경에 많은 의인들의 피가 있는데 하필 스가랴의 피에 대해 말씀하셨겠습니까?
천국에서야 당연한 보응을 해주시는 것이지만 땅의 사람들 앞에서도 스가랴의 기도대로 그의 의로운 죽음을 인정하시고 신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듣고 계십니다.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아무도 진심을 몰라준다 해도 모든 일의 진실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엉킨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떤 경우든 하나님께 탄원하고 우리 마음을 문제에서 하나님께 돌리는 게 더 빠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너희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잖아요.꼭 맞는 예는 아니지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건물에서 지정 된 주차장소는 언제고 드나들기가 편한 건물 현관 앞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3층 직원분이 거기다 슬금슬금 차를 대더니 자리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습니다.
교회에서 야박하게 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제가 음식점 앞에다 주차를 시키게 되었습니다.
점심시간 쯤에 나가려면 차들이 앞에 몇 대가 막혀서 다 빼고 나가는게 너무 불편합니다.
그래도 할 수 없이 매일 불편을 감수하며 몇 달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5층 권사님이 그 직원 분에게 왜 목사님 자리에 차를 대냐며 원래 자리에 주차하라고 교통정리를 해버리셨습니다.
목사가 양보도 모르고 이기적이란 소리 안 듣고 문제가 해결된 것이죠.
우리가 좋은 일 한다고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나쁘게 보이면 전도의 문을 확실히 막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생각을 한번 거치게 되는 것, 그게 성도들의 삶의 방식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이든, 해결하기 힘든 어떤 문제든 하나님께 묻고 의뢰하면 하나님은 기쁘게 우리 문제를 인도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잠언 3장 6절에 말씀하셨잖아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가족이라도 자꾸 힘든 얘기하고, 아픈 얘기하면 나중엔 귀찮아 합니다.
언제고 걱정 근심을 들고 나가면 내 맘처럼 같이 문제를 진지하게 들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예수님 앞에 탄원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스스로 악해 진 요아스는 외부 세력에 의해 종말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바로 서지 못하면 스스로가 악에 빠지고, 그 다음 외부 환경이 적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시겠습니다.
일 주년 말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고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요아스 통치 40년에 단 한번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스가랴를 죽이고 일 년 뒤 아람군대가 요아스를 치려고 올라옵니다.
그리고 백성 중에서 모든 방백들을 다 죽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누굽니까?
여호야다가 죽은 뒤 왕을 부추겨 신앙을 버리게 했던 바로 그 유다방백들입니다.
함께 스가랴에게 돌을 던졌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보고 계시고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24절을 계속해서 보시겠습니다.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함께 우상숭배로 갈아 탄 유다백성들도 고초를 당합니다.
성경은 굳이 아람군대의 적은 무리가 와서 심히 큰 유다군대를 징벌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이스라엘은 소수로도 막강한 나라들을 이겨왔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다면 작고, 약한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을 때, 믿었던 대단한 것들이 작은 일에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40년 태평성대에 육성한 국방력과 경제력을 한순간에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어떤 손실을 당하게 되는 지를 극단적으로 다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순진한 우리를 겁박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이런 일이 당장 일어나지 않아서 더 불행입니다.
좀 얻어 맞으면 돌아올 텐데 유기하신다니까요.
우리는 이렇게 기록하신 성경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크게 부상을 당한 요아스는 겨우 자기 궁으로 돌아왔지만 거기서 심복들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명예로운 전사도 그에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를 하나님은 명예롭게 하십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를 왕들의 묘실에 장사하지 않고 그냥 성안에 묻었습니다.
심지어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요아스는 삭제되었습니다.
잘 보시면 요아스가 빠져 있습니다.
정말 요아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이 귀중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2절에서 이미 우리에게 해답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우리 곁에 항상 말씀을 가르치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된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 줄 여호야다와 같은 제사장은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님은 영원하시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야다처럼 죽지 않으실 뿐 아니라 성경과 성령을 통해 늘 우리를 지도하시기에 우리는 안전합니다.
매일 성경을 펴고 우리를 형통하게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요시야 같이 믿음을 망하게 하는 세속의 친구들을 경계하고 말씀을 들려주고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을 가까이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호야다는 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의 묘실에 묻혔습니다.
요아스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무덤이 어디에 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여호야다처럼 하나님과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일평생 착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을 그렇게 귀중히 보실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야다처럼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께 날마다 교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누군가를 여호야다처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지시길 축복드립니다.
세상이 우리 코드에 너무 잘 맞고, 사람들이 같이 가자고 유혹한다 해도 평생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말씀의 교훈대로 살며 형통하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8년2월11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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