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7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 한해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숨가쁘게 달려 온 것 같습니다.
힘이 다 소진되었는지 연말 분위기도 어느 해보다 차분하게 느껴집니다.
올 초 청년세대 소망 1위는 취업이었었죠.
그런데 얼마전 알바천국에서 젊은이들에게 조사한 내년 소망 1위는 청년실업률 감소였습니다.
청년들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언젠가 직장인들에게 물어 본 새해소망 1위는 ‘회사를 옮기고 싶다’였던 적이 있습니다.
힘들게 취직하고 나면 회사 다니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겠죠.
좋은 일인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그 일로 인해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 나이쯤 되면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바라는 것도, 또 크게 좋아 할 일들도 없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새해 특별한 바라는 것이 없다 해도 누구나 기대하는 것은 수입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겠죠.
이 험난한 세상에선 그런 작은 바램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인 힘든 일입니다.
오늘 다윗의 생애에 날마다 하나님이 도우셨던 사건을 보며 새해에 우리도 그런 은혜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올해도 그렇게 도와주신 하나님이 새해에도 변함없이 인도해 주실 것을 깨닫고 힘을 얻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니 광야를 떠돌고 여기저기 신세를 지며 살았던 다윗에게 서광이 비쳐오고 있습니다.
십여년간 사울왕에게 쫒기던 불안하고 답답한 시간들의 끝이 보이는 것이죠.
다윗이 왕으로 등극할 시점이 다가옵니다.
어둠은 새벽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물러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고 은혜의 빛이 비취기 시작하면 앞이 깜깜하던 믿음에도 윤곽이 나타나고 꽉 막혔던 환경에도 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새해가 모든 성도님들께 그런 은혜의 해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당한 고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만나는 삶의 어려움과 난관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 줍니다.
사울은 왜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집착했던 것일까요?
이 싸움은 표면적으로는 왕위를 놓고 벌어진 세속적 권력다툼입니다.
이스라엘의 1대 왕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국민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기엔 부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는 무관한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도 않고 개의치도 않고 사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죠.
사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울은 처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온 종일 예언을 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도 체험했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의 욕망을 쫓고 세속적 영광을 얻는 것만이 목표였습니다.
자기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재단했고 막판엔 신접한 무당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사무엘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 회개하지 않고 핑계로 일관합니다.
결국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다윗이 선택된 것이죠.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사울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았지만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노골적인 반기를 든 것이죠.
이렇게 다윗을 죽이고 왕권을 유지하려는 사울의 집요한 추적은 단지 세속적 권력투쟁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이래로 계속되는 하나님나라와 사탄의 대결 구도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왕조를 세우고 그의 후손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서 만백성을 구원할 계획을 밝히셨습니다.
그것을 저지하려는 사탄의 세력이 사울의 배후에서 그를 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다윗은 진액이 마르는 긴 도피생활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죠.
이런 영적 원리를 이해할 때 옛날 다윗의 삶에서도 내게 생생하게 적용될 실질적인 교훈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강력한 힘과 치밀하고 교묘한 계책으로 하나님나라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셔서 구원을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 사탄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그 길로 나가는 것을 막는 것뿐입니다.
사탄과 악령들은 피곤하지 않기에 숨고르기 할 필요도 없이 전력투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순간이 자신의 영원한 종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막을 수는 없기에 성도들을 가로막고 무능하게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지연시키려는 것이죠.
성도들이 다 영적으로 무능하고 세속적이 되면 어떻게 하나님나라가 세워지겠습니까?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 무지해서는 안됩니다.
사탄은 이제 다윗을 쫒지 않고 성도들을 추격합니다.
과거에 사울을 이용했듯이 지금도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시고 악에게서 구원해 주실 것을 매일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알아서 지켜주신다면 왜 예수님이 매일 그것을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이 문제를 기도하지 않고 지난주를 지내셨다면 어떤 방식이든 악의 세력에 조정당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영적 생활을 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라서 살지 못했고, 믿음보다 감정에 휘둘렸던 것이죠.
성도들은 이 영적 싸움을 잘 인식해야 합니다.
매일 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예수님께서 개입해 주실 것을 구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잘 분별해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에 당한 여러 가지 난감한 상황들 중엔 필시 악령의 계책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왕조가 끝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죽을 때까지 다윗을 추적했습니다.
사탄은 이미 심판을 받았지만 마지막 종말의 때까지 성도들을 추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시련을 통해 다윗을 왕으로 훈련시키고 계셨습니다.
사탄의 허용여부는 절대적으로 성도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조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죄와오염을 그런 시련을 통해 닦아 내시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다윗의 고난을 보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문제와 시련들도 어느 정도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광야 도피생활 중에서 우리는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만들어 가는데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다윗이 숨어 지내던 아둘람 굴에 찾아왔던 사람들이 있었죠.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자, 심지어 악한 자와 불량배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처음엔 다윗에게 이런 사람들이 날마다 모여 들었습니다.
다윗을 돕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뭔가 얻을까 해서 모였던 것입니다.
다윗에겐 그저 짐 같은 존재일 뿐이죠.
그런데 다윗은 그들을 흩어 버리지 않고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시작하십니다.
스가랴 4장1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우리에게 모이는 사람들이 비록 하찮고 도와 줘야 할 입장이고 내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시시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모든 일의 시작은 시시하고 미약하기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큰 걸 잡으려고 하던 사람들이 평생 아무 것도 잡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가끔 생생정보를 보는 데 대박집 사장들 치고 실패와 고생 없이 이룬 사람들이 없더군요.
정말 가게를 접어야 될 상황에서도 밤새 음식을 연구하고 소스를 계발하고 혼자 몇 사람 일을 해가며 피땀을 흘려 결국 열매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자리를 맡기시기 전에 먼저 작고 초라한 일을 주십니다.
낮은 자리, 보잘 것 없는 환경이 새해에 주어질 때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꺼이 주님이 지어주신 짐으로 알고 견디면 그것으로 큰일을 감당할 기반을 닦게 되는 줄 믿습니다.
다윗의 십년 고난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려운 사건과 고비마다 각각 인내하고 훈련할 시간들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탄식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고, 오늘 생존한 것, 일용할 양식에도 감사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을 광야의 시간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약한 자로 키우시는 게 아니라 강한 자로 키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상한 갈대 같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 사실은 언제까지나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어 매여 있을 때만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강한 자로 연단하시는 것이죠.
그런 경험이 없이 잘 된 인생은 겉은 멀쩡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상한 갈대입니다.
언젠가는 꺾이고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올해도 크고 작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내년에도 모든 일이 다 형통하고 괴로움이 없을 거라 희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만나건 염려하지 말 것은 하나님께 붙어만 있으면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하며 멋지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연단에 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때가 되자 이제 훈련 된 강한 장수들이 다윗에게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12장은 이스라엘 여러 지파에서 다윗의 사람이 되기 위해 장수들이 찾아왔다고 기록합니다.
16절에서 베냐민지파와 유다지파에서 유력한 용사들이 다윗을 찾아옵니다.
17절은 이들을 맞으러 나가 다윗이 대화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어떤 인물이 되었는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평화로이 내게 나와 나를 돕고자 하면 나와 하나가 되겠지만 나를 속여 사울에게 넘기고자 한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능지처참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광야의 훈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신앙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훈련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그래서 독기가 점점 없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독기를 내뿜다 보면 스스로 머쓱해 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지나치게 남을 성토하지도 않고 본 때를 보여주겠다는 그런 생각이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결코 자기를 찾아 온 사람들 앞에서 위엄을 부리거나 강한 자인 척 허세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소신도 없는 나약한 자처럼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결재권자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뒷배가 되 주시는 사람들의 특징은 스스로 강한 척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나서서 설치지 않아도 성령께서 사람을 감동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라고 말씀하죠.
아마새는 베냐민 지파 장군입니다.
사울과 같은 지파로 사울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을 성령께서 감싸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아마새의 마음이 다윗에게 기운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실 때 환경과 사람들을 통해 이뤄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주변에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으면 고달픕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주변에 나를 돕고 위로하고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을 붙여 주신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사울의 집 안 사람들마저 감동하시잖아요?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조건도 없이, 협상이 풀려갑니다.
아마새가 지금 그런 것입니다.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아무 조건 없이 다윗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계하고 있는 다윗을 위해 평안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인시켜 줍니다.
지도자라고 위로가 필요치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라 해도 때로 자녀들의 위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직장의 보스들도 그 짐을 지기 위해서는 직원들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어느 공동체든 지도자가 넘어지면 큰 시련이 옵니다.
저도 성도님들의 따뜻한 위로와 기도가 힘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낙담한 우리를 다독이고 세워주시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성령의 충만하신 영향 아래 있으면 성도들을 안위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됩니다.
새해에도 우리 모두 가족간에나 성도간에나 직장에서나 위로자가 되길 바랍니다.
다윗이 위로하는 아마새의 말에 따뜻한 감동을 받고 그를 받아들여 군대 지휘관을 삼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위로할 줄 아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바나바가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대로 위로자였잖아요?
또 그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원수의 마음도 열어 우리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도울 사람을 항상 곁에 보내주시길 축원드립니다.
마지막으로 19절 부터는 광야의 망명생활 중에 있었던 다윗의 실책을 언급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영적침체라고 할 수 있죠.
신앙생활에서 오래동안 은혜를 체험하지 못할 때, 시련이 오래 지속될 때, 크게 낙심했을 때, 하나님께 실망하고 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세상을 의지하게 되고 세상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하게 되죠.
다윗의 경우 시글락으로 망명한 사건입니다.
이 시글락 사건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데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전에 설교를 나누었는데 다 기억하시리라 믿고 싶습니다.
다윗이 시글락으로 망명을 떠난 사건을 19절부터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을 전부 다시 살펴볼 수는 없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두신 광야학교에서 교육을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를 피해서 도망치다 진흙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시글락 사건이 보여줍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추적이 지긋지긋해 이스라엘의 원수나라인 블레셋으로 망명을 가잖아요?
블레셋 왕의 비호 속에 처음엔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서는 안 될 곳에 가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을 때 더 큰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마침 블레셋과 사울왕 사이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집니다.
사탄이 실수한 다윗의 약점을 이용해 즐겁게 마련한 작전인 것입니다.
블레셋왕은 당연히 자신의 은혜를 입은 다윗이 참전할 것을 요구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아시겠죠?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라야 할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워야 할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광야를 피했더니 진흙탕에 빠지게 된 것이죠.
진흙탕은 광야보다 우리를 더 기진맥진하게 합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위기를 만났으니 다윗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블레셋을 따라 이스라엘과의 교전장으로 떠날 수밖에요.
그러나 우리가 실수하고 미끄러졌다 해도 하나님의 길이 막히진 않습니다.
다윗처럼 궁여지책으로, 혹은 우리의 연약함으로 실패했을 때 하나님의 손이 제자리로 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들고 일어나 다윗을 전쟁터에 데려갈 수 없다고 합니다.
다윗이 마음이 변해 이스라엘 편에 붙을지 누가 알겠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삶을 돌이켜 보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던 실수와 선택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게 하시고 엎질러진 물을 줏어 담으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일행이 다시 은신처인 시글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일이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 아말렉부족들이 노약자만 남은 시글락에 쳐들어와 재산을 다 털어가고 사람들은 모조리 인질로 잡아가 버린 것입니다.
다윗의 아내와 자식들도 다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처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들이 격분해서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다윗의 정치 인생에 완전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잘못 된 선택에 의한 나쁜 결과는 생각보다 끈질기죠.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음을 보게 되니 놀라울 뿐입니다.
20절에 보면 마침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갈 때에 므낫세 지파에서 다윗에게 돌아온 용맹한 장수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무리가 다윗을 도와 도둑 떼를 쫒아가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오게 됩니다.
다윗의 시글락 사건은 자칫 하나님의 계획에 큰 차질을 빚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결정적 실수라 해도 하나님의 뜻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랬다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실수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다윗을 인도하셨고, 또 우리를 오늘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삶에 다윗이 당한 이런 고비들은 반복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고비를 넘기고 날마다 돕는 사람을 보내주셨던 그 은혜가 새해 우리에게도 임하시길 소망하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내하며 건강한 신앙생활을 잘 지속하는 것입니다.
또 17절에 다윗이 한 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내 손에 불의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손에 불의가 묻어 있을 때 잡아주시지 않습니다.
그걸 씻고 버리게 하신 뒤 잡아 주십니다.
하나님나라의 법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이번에 소망교회의 부동산 취득 문제가 뉴스화 되며 교회가 또 한번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소망교회가 아니라 절망교회라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주는 게 아니라 절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불의와 나쁜 죄들은 나와 내 주변에 절망이 됩니다.
새해는 부정직과 거짓말과 불법을 버리고 다윗처럼 내 손에 불의함이 없다고 고백하며 당당하게 하나님께 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힘으로 뜻을 이루고, 재산을 늘리고, 건강을 지키고, 이런 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손에 불의가 없을 때 하나님은 구하는 모든 좋은 것을 누리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우리의 마음을 맞추어 걸음걸음이 복된 새해를 맞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7년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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