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하

솔로몬 성전 낙성식 (역대하7장11절-18절)

남수연 2016. 11. 11. 13:39

요즘 우리나라 국민들이 대통령의 비선실세 사태로 큰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연일 폭로되는 이야기에 분노를 넘어 허탈해 지고 있습니다.

음식점을 가도, 상점을 가도 죄다 최순실씨 보도 내용을 틀어 놓은 채, 다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외신들이 보도하는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정치수준을 네팔이나 스리랑카 지도자들이 전속 점장이를 두고 있는 수준에 비유합니다.

국가이미지도 이만큼 실추되었지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이번 상황을 주시하고 기도하며 대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국민들과 또 성도들에게 중대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역사는 모든 인간역사를 대변하는 것이고 역사는 반복됩니다.

아우슈비츠수용소 입구에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기억 못하는 사람은 다시 그 역사를 겪게 될 것이다.’

오늘 말씀이 어려움을 당한 우리 민족과 우리 개인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성전에 대한 역사적인 면과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올라 최초의 성전 건축을 마치고 온 국민이 모여 하나님 앞에서 대대적인 낙성식을 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성전과 성전에서 드린 솔로몬의 기도입니다.

무려 칠년이 걸린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성대하게 거행 된 성전 봉헌식의 광경은 5장부터 잘 나와 있습니다.

전부를 다 읽으면 좋겠지만 제가 두루 인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 낙성식은 명절절기와 맞물려 십사일에 걸쳐 치러졌습니다.

그 규모는 이 때 잡은 소와 양의 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번제와 화목제로 드려진 제물을 보면 소가 이만이천 마리에 양이 십이만 마리라고 5절에 나옵니다.

엄청난 양이죠. 그중 일부는 번제로 태워 하나님께 드렸지만 나머지는 화목제입니다.

기름만 드리고 그 고기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는 제사죠.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십사일 잔치를 하려면 그 정도의 화목제물이 족히 필요했을 것입니다.

성전 낙성식은 이스라엘민족들에게 큰 영광과 자부심이었고 하나님께서 오셔서 안정적 처소에 영원히 계실거라는 확신에서 큰 위안이었습니다.

그동안은 다윗의 장막에 법궤가 모셔져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들 편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도 이 성전 낙성식은 특별했습니다.

본문 앞에 보면 솔로몬이 제단에 제물을 놓고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을 내려 보내셔서 제물을 태워 번제를 받으십니다.

제사장이 불을 지펴 제물을 태워서 드리기도 전에 하나님이 기다리지 않으시고 먼저 막 불을 보내셔서 스스로 제물을 받으셨다는 거예요.

솔로몬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보이시는 것이죠.

아마 이로 인해 축제는 경외심과 흥분과 기쁨이 최고조에 달했을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우린 평생 하나님을 믿어도 그 영광스런 형체의 한 줄기 빛도 못 봅니다.

그런 환희는 내세에서 누릴 몫으로 미뤄져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당시에 그 신비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형태로 성전을 가득 채우셨을까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의 성경기록을 보면 보석 같이 찬란한 광채로 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 세상에서 볼 수 없던 아름다운 영광의 외적인 현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 뿐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백성들이 다 바닥에 엎드려 경배하며 감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이 말은 미리 배워서 리허설을 하고 다 입을 맞춰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저절로 엎드려지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저절로 느껴지고 지각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말입니다.

이사야선지자가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을 환상으로 보잖아요?

거기서 하나님을 보좌하는 그룹천사들이 날개로 그 얼굴과 발을 가리고 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계속 그치지 않고 찬양하죠?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찬양과 찬사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한없이 반복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어느 정도는 그의 인격과 성품 같은 것이 묻어 나오는 것을 느끼게 되잖아요?

이스라엘국민들이 목격하고 느꼈던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셨다고 합니다.

그 영광의 형상은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계시됩니다.

예수님의 인격에선 어느 인간에게서도 볼 수 없는 선하심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다 내면에 그 악함을 감추고 있잖아요?

예수님의 인자하심은 죄인들과 병든 자들을 가르치고 돌보시던 모습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어떤 하나님을 만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뵈올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확신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처럼 기록된 성경말씀을 우리가 읽고 선포할 때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마치 그런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 기쁨과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을 믿는 게 아닙니다.

정말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셔도 계시다는 그 확신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사는 게 힘들고, 낙담할 상황을 만날 때 우리의 믿음이 때로는 흔들거리지만 송두리째 뽑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그 안전함, 죽음 다음 세상에 대한 확신과 희망적 느낌들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무 증거가 없는 것 같지만 눈으로 보는 그 어느 것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시 오늘 같은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섬겼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외적으로 백성들 앞에 그 영광으로 나타나심으로 성전에 대한 특별한 의도가 있으시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나 사물들이 있는 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이미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세울 성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한 윤곽을 알려주십니다.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한마디로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만나는 곳이 성전입니다.

민족 중에서 한 지파, 즉 유다지파 한 장소를 택하셔서 거기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속죄제물과 감사예물을 받을 것이고 거기서 인간 서로가 주신 복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성전에서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화목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장소로 이스라엘 땅 전체에서 딱 한군데를 지정하셨는데 바로 오늘 성전 낙성식을 하는 유다지파에 속한 땅, 예루살렘입니다.

이곳은 이전 역사 속에서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 중 3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이곳이 모리아산이라고 합니다.

여기가 무슨 일이 있었던 곳인지 아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이삭을 데리고 올라갔던 산이 바로 모리아산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때부터 봐 놓으신 곳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숫양을 예비하셔서 그 양이 거기서 제물이 되죠.

그래서 그곳 이름을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입니다.

무엇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까?

제물을 준비하셨다는 것이예요.

여기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루살렘 언덕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왜 내 눈과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을 것이며,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겠다고 하시는 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이 성전은 모든 민족의 죄를 사해주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게 된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한 국가에 오직 하나의 성전이라면 얼마나 제사 드리기가 불편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다 유일한 성전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릴 유일한 대속자가 단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전이라고 부르셨잖아요?

후에 헤롯이 증축한 두 번째 성전 앞에서 이렇게 유대인들과의 변론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키심이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진짜 성전이 세워졌으니 더 이상 제물을 올려드릴 성전은 필요치가 않은 것이죠.

정말 기묘하게도 현재 예루살렘 성전자리엔 이슬람의 모스크가 세워져 있어 유대인들이 그렇게 간절히 열망하지만 다시는 성전을 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셨던 유일한 장소, 딱 거기가 아니면 유대인들은 성전을 세울 수 없거든요.

유대인들이 솔로몬성전을 다시 세우고 거기서 동물로 제사를 드릴까봐 하나님께서 원천봉쇄시켜 버리신 것이죠.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제물로 바쳐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고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게 되셨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님을 모신 우리 스스로가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우리에게 있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은 오늘 본문에서 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솔로몬의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끝내고 그 다음 의미심장한 기도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솔로몬이 한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본문 앞 6장을 보면 낙성식에서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대표기도 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도내용이 낙성식을 하는 기쁘고 즐거운 자리에서 한 기도로는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기도를 솔로몬왕이 합니다.

이 백성들이 범죄하여 적국에 패배해 쫄딱 망하거나, 포로로 잡혀가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기근이 들거나 할 때 이 성전으로 돌아와 회개하고 빌면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좋은 날,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기도를 한 게 아니라 분위기에 찬물 끼얹는 기도를 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솔로몬왕이 덧붙인 말이 있습니다.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아무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이 악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도 그것을 아시지 않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 백성이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왕은 다윗왕조의 많은 이복 왕자들의 암투 속에서 자랐습니다.

왕자들이 반역하고 죽고 죽이는 가운데 목숨을 부지하고 왕권을 잡기까지는 살얼음판 같은 궁중 생활이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솔로몬 자신도 탄탄한 왕권과 국가의 안정을 위해 많은 위험요소들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본질과 인생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언과 전도서 같은 인생서적을 쓸 수 있었던 것이죠.

강성부국에 태평성대가 왔고 온 국민이 모여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올렸지만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알다보니 이런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장 행복한 순간 언뜻 스쳐가는 불길함을 느끼잖습니까?

부친인 다윗왕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위대한 성전건축을 마친 절정의 순간, 불길한 장래를 내다보는 솔로몬의 기도는 솔직한 기도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실패를 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솔로몬 노년에 하나님을 배신하고 정략결혼한 각 나라 왕비들이 들여온 우상을 섬기는 이해할 수 없는 우를 범하잖아요?

결국 우상숭배의 불씨를 던진 것이고 그 죄로 나라는 두 동강이 납니다.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거예요.

현재 우리나라 실정이 그렇잖아요?

지도자가 잘못되면 나라 다 말아먹는 것입니다.

다음에 동성애 옹호하는 대통령이 나오면 가정과 윤리와 미풍양속 다 말아먹습니다.

동성애 다음 일부다처 나오고, 근친상간 나오고 그러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18절에 하나님이 그의 헌신을 기뻐하시며 제시한 계약을 스스로 파기한 것입니다.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네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고 이스라엘을 다스릴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게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예언이거든요.

솔로몬의 우상숭배 결과 이스라엘은 그 길을 따르고 결국 민족은 바벨론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당초에 약속하신 다윗왕조의 메시야는 솔로몬혈통에서 오지 않으십니다.

그게 예수님의 족보에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법적 아버지인 요셉으로부터 위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 솔로몬, 다윗, 아브라함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은 법적 부친이니 요셉의 조상이지 예수님과는 혈통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도,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닌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누가복음에 한번 더 나옵니다.

거기에 나온 예수님 위의 조상들 이름은 마태복음과 완전히 다릅니다.

요셉의 아버지의 이름부터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셉의 이름으로 시작된 족보지만 실은 마리아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거기 보면 요셉부터 죽 올라가 솔로몬의 자리에 솔로몬 이름은 없고 대신 동생 나단이 나옵니다.

나단 위에 다시 다윗이 나오고 아브라함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솔로몬의 불길한 기도대로 범죄 한 자신은 혈통적인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솔로몬을 여디디야라고 부르며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그러나 언약을 파기하고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의 공의 또한 정확하게 시행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절정의 자리에 오른 인간에게 내려갈 일만 남는다는 것을 알았고 그 역시 인간이 갈 길로 간 것입니다.

이번에 최순실씨 변호사가 최씨가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인간이 부족함 없이 절정에 오르면 그 다음은 죄짓고 추락한다는 거예요.

남자들이 성공하고 권력과 부를 거머쥐면 그 다음 뻔하잖아요?

건강하고 돈 있으면 가정 버리고 바람피우고 못된 짓합니다.

여자들 남편 잘나가고 돈 있으면 모여서 허영심만 키우고 자식자랑하다 괜한 집에 와서 자식들만 잡습니다.

우리가 가장 만족하고 풍요로운 순간에 있을 때는 솔로몬의 기도를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또 반대로, 그렇기에 아직 우리의 삶에 만족할 결실들이 없다 해도 낙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자주 다니는 공원 산책길에 큰 모과나무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보니 어느새 무성하던 푸른 잎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 내리고 감춰있던 모과열매들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더군요.

가지마다 얼마나 많은 모과열매들이 달려있는지 가을의 풍요한 인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는 것은 나무로서는 한 생애를 마감하는 겨울이 가까웠다는 뜻이구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에 기다리는 만족스런 열매가 없다면 아직 더위와 싸우고 병충해와 싸우는 여름이고 아직 더 살아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열매가 없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때가 되면 우리에게도 좋은 열매가 맺을 것이고 아직 우리에게 최절정의 순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장 일이 잘되나 못되나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다 복을 받고 잘됩니다.

역사가 증명하잖아요?

기독교 정신을 따라 세워진 나라 중에 가난하고 망한 나라가 없어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면 순리대로 라도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대로 정직하게 기업하면 손해보고 망할 것 같습니까?

인간 관계의 생명이 정직이잖아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따르면 당장 모든 것을 잃는 것 같더라도 내세에 대한 보장 뿐 아니라 이생에서 보상까지 약속해 주셨습니다.

다만 먹고살만하면 앞을 다투어 하나님 앞을 떠나고 예수님의 교훈을 버려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계속 흘려보내라는 하나님의 복이 개인 안에 고이고 썩어 세상이 여전히 어둠과 고통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3절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시 시련이 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삶이 황폐해지고, 빈곤이 찾아와 쪼들리고,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때가 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14절에 나오죠.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 말씀을 반대로 해보면 내 백성들이 악한 길로 몰려갔고, 스스로 낮추지 않고 교만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이 우리 가운데 있다 해도, 아무리 복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해도 법도를 어겨 악한 길로 가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라는 법도가 무엇입니까?

인간 사이에서 정의와 인애이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갖고 겸손하게 섬기는 것이잖아요?

이게 없는 예배라면 차라리 성전까지 뽑아서 던져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악 된 모습보다 믿는 사람들의 죄악 된 모습을 더 가증히 여기시고 못견뎌 하십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인해 삶이 괴로울 때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을 찾으면 죄를 사하고 땅을 고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갖가지 고통이 찾아온다면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인생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고난의 이유를 속단할 수 없습니다.

때로 성도들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 때로 죄악 된 길에서 돌이키기 위해서 고난이 옵니다.

누군가의 구원을 위한 대속적인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모르시는 고난은 없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하나님께로 얼굴을 향하고 돌아와 간구하면 땅을 고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악화 된 우리 삶을 치유하고 다시 복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 언약을 변개치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회가 많이 어수선합니다.

정국이 어떻게 요동할지 모르는 상황에 어려운 민생과 경제는 직격탄을 맞고 있습니다.

이번에 최순실사건을 터뜨린 뉴스룸 책임자는 이 보도가 사람들에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지게 하고 사람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던져주고 있기에 고민한다고 말합니다.

국민들은 요즘 사태에 분노감을 느끼지만 사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현실적인 문제들로 발을 동동 구르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80%가 일자리를 걱정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이번 국정스캔들의 여파로 경제가 큰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아래층 식당만 해도 지난 주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더군요.

요즘 누가 밥 사먹고 놀러 다니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우리가 다시 돌이킬 수 있는 희망의 불씨가 되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국가도, 가정도, 내 앞의 막막한 문제도 악한 길을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고쳐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한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원칙을 다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오늘 솔로몬처럼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지나친 정죄자가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다만 책임져야 할 대통령의 올바른 결단과 철저한 수사와 처벌로 사태가 빠른 시간 안에 해결되어 안정을 되찾도록 기도합시다.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강한 의존성입니다.

의존하는 것은 나약할 것 같지만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나를 통해 나타나기에 참된 성도는 우리처럼 시시해 보여도 가장 강한 사람이고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은 참된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이럴 때 더욱 우리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라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두가 되도록 노력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016년11월6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