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것 이상으로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유대사회에 소개했던 세례요한이 그 사실에 대해 의혹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진실된 책인지를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신격화 시키려고 했다면 당연히 이런 내용은 뺏어야 맞는 것이죠.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미 이스라엘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이사야서와 말라기서에 출생이 예언된 희귀한 사람입니다.
누가는 요한의 출생에 대해 본서1장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존경받는 제사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자식이 없던 늙은 부친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의 직무를 보다 천사에게서 아들의 출생을 통보받고 태어났습니다.
요한의 신비한 출생은 당시 유대 땅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 요한은 어릴 때부터 세속을 등지고 광야에서 살며 하나님과 교류하며 선지자로서의 자질을 훈련했던 선지자입니다.
가문도 좋고, 출생의 신비도 알려졌고, 선지자의 수련도 일찍 받았기 때문에 세례요한에 대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신뢰는 대단했습니다.
신앙적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이죠.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전국에서 몰려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이 단 한 개의 기적도 행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신임을 얻은 것은 출생의 후광 덕을 톡톡히 본 셈이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생활전선에서 일하던 평범한 목수 출신으로 갑자기 등장하셨으니, 요즘 식으로 하면 맨땅에 헤딩하신 겁니다.
메시야로서의 그 많은 증거를 보였어도 지식층과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 중에 이런 배경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때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바로 요한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먼저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세우신 뒤,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소개하게 하신 것이고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므로써 요한의 세례가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런 각본을 만들어 내셔야 했을까요?
우리가 이런 사실을 기록한 성경을 보고 예수님이 바로 ‘오실 그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당사자인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치밀한 각본을 쓰신 것이죠.
우리 각자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과정도 치밀하게 작정되어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은 두서없이 어느 날 생기는 게 아닙니다.
그래가지고는 우리의 인격과 모든 것을 다 걸만한 그런 믿음이 생기질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엄청나게 치열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 마귀가 갈등을 일으키며 만들어낸 신비한 걸작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의 목숨을 구하고 영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숨도 구하지 못했는데, 병이나 고치고, 부자 되고, 문제해결만 받으라고 꾀는 것은 혹세무민이고 사람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면 그 다음, 정말 필요하고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구하는 대로 다 주십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해서 우리 믿음이 생명을 구원받은 믿음인지 항상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화려한 신앙 경력을 가진 이 세례요한이 오늘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오늘 세례요한의 흔들리는 우리가 믿음에 있는 지 확신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세례요한은 왜 그렇게 확신했던 예수님이 ‘오실 그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나약한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남의 신앙의 실족을 경시해선 안되는 이유입니다.
요한의 의심은 우선 감옥이라는 현실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헤롯왕이 제수씨를 데려다 왕비를 삼은 것을 보고 책망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감옥같은 환경이 우리를 얼마나 낙망시킵니까?
감옥은 손발이 묶인 곳입니다.
감옥같은 환경에선 마음대로 뭘 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은 열정을 불태워 회개하라고 책망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던 사역을 박탈당하고 고립된 것입니다.
사회로부터의 고립감과 일상적인 것들을 박탈당했을 때의 충격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치게 합니다.
5층 권사님이 평생 모시고 있던 아흔두살 되신 시어머니를 시누이집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치매가 와서 자꾸 창밖으로 몸을 내미시는 데 아무래도 큰일 내실까봐 딸네집으로 모셔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권사님이 상담치료를 받을 만큼 우울증에 빠지셨다고 합니다.
평생 처음 겪어보는 너무나 힘든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짐을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하셨는데, 벗고 보니 빈둥지증후군이 덮친 것입니다.
이래서 인생이 만만치가 않은 것입니다.
함부로 짐을 벗지 말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겠죠.
사람은 영적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이 육체와 정신의 영향을 받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해왔던 사람일지라도 급격하게 환경이 변하고,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인했던 믿음도 아주 작은 현실문제에 넘어집니다.
아침에 식구끼리 기분이 상하면 주일인데 교회가 가기 싫어지잖아요.
게다가 한번 믿음에서 미끄러지면 인간의 죄성은 그냥 엎어져있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신앙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면 그렇게 오래 실족해버리기가 더 쉽습니다.
오늘 요한의 실족을 통해 고립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이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고립적인 삶을 항상 부정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래서 말세가 될수록 모이기를 힘쓰고, 믿음의 교제를 더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내 문제와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OECD국가 중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죠.
전도서 4장 12절에서 고독의 위험을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가장 먼저는 믿음과 혈통의 가족에게서, 그 다음은 예수님 안에서 가족이 된 성도들 간에 도움과 긴밀한 관계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힘든 문제를 들어준들 누가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을 열고 털어놓을 사람만 있어도 정신적으로 해소가 됩니다.
또 믿음의 가족이 좋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같이 생각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에 귀한 것입니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세상살이에서 서로에게 기도의 동역자가 되어주시길 축복드립니다.
환경이 감옥 같으면 반드시 믿음에도 회의가 따릅니다.
그럴 땐 근본적으로 믿음의 수여자이신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오늘 세례요한이 흔들리는 자신의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께 물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혹이 생기는 건 분명히 신앙의 위기상황입니다.
이때 기다렸다는 듯이 고의적으로 실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이 약화되고 흔들릴 때 용기를 내고 의지를 다해 하나님 앞에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세례요한의 질문에 분명한 답을 주셨듯이 현실의 응답으로 답해주시고, 또 우리 약해진 믿음을 반드시 다시 세워주실 것입니다.
다음 세례요한의 의혹은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관의 문제에서 왔습니다.
요한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메시야가 오시면 너희는 끝장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야사상은 선민을 착취하는 로마제국을 징벌하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독립왕국이 온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에 빌붙어 동족을 괴롭힌 기득권자들도 다 심판해서 절단 내신다는 것이죠.
요한은 메시야가 오시면 자신의 눈 앞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리라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당장 그대로 하시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생각했던 대로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총대를 맸으면 적어도 예수님께서 지원 사격을 해주셔야 될텐데 그러실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틈틈이 보고하는 말을 들어보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고 마구잡이로 병자들을 고쳐주고 죄를 사해주신다니 요한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요한은 바리새인들이 세례 받으러 나올 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러면서 세례도 안줬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믿다가 실족하는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이 내 생각과 다를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느새 마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신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일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해 불만이 생기고 섭섭함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6절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하십니다.
여기서 ‘실족’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심각한 시험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런 역할을 하신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믿음이 원인이 되고 자기 성향과 마귀의 개입으로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실을 그대로 믿을 것 같습니까?
다 자기 생각과 편견을 섞어서 자기 식으로 고쳐서 믿습니다.
사람은 진실에다가도 교묘히 자기에게 유리한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믿음이 사실은 다 주관적이고 다 우리 마음에 들게 각색해서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탄은 그걸 이용해서 의심과 원망을 불러와 넘어지게 하는 것이죠.
지난번에 제가 함께 기도해서 안 팔리던 집이 2주만에 팔렸다는 말씀드렸죠?
그 분이 줄여서 새로 빌라를 구입했는데 리모델링을 좀 해야 된답니다.
그런데 구청에서 리모델링 비용 천만원을 저금리로 대출해 주는 게 있다네요.
그게 되게 해달라고 기도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게 한마디로 우리가 믿고 싶은 우리 식의 믿음입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가 어떻게 할 것이라는 자기 신념이 있었습니다.
불의를 징벌하고 의의 나라를 세우는 정치적인 지도자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걸 자기 시대에 보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신한 뒤에도 주님의 제자가 되지 않은 것은 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주도적으로 정치세력을 개혁하며 예수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 뭔가 일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단지 이 땅의 제국 하나를 상대해 심판하고 거기에 나라 하나를 세우시려는 게 아닙니다.
거대하고 음험한 사탄의 나라에 대한 싸움이고 볼모잡힌 죄인을 건져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으므로 이미 받은 심판의 상태로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요즘 메르스 때문에 주가가 오른 한 지방자치장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가끔 주변 인물들에 대해 얘기하는 데, 그 분들에게 무슨 나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말씀을 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다보니 그분들의 도움을 좀 받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도 이분이 페이스북에 최종 음성판정을 받고 엄마 품에 돌아온 꼬맹이 메르스 영웅을 축하해주자는 글을 올렸더군요.
이분이 무신론자였다 분당 우리교회를 10년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이냐고 묻는 말에 단번에 ‘예수님은 혁명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일반신문도 아니고 종교신문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입니다.
그분의 신앙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평소 해방신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고자 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소신이 참 고마운 일이죠.
최근 취약계층에 대해 빚탕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고액세금체납자에 대해서도 시한을 주고 갚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겠다고 강력한 경고를 해서 시민들에게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 예수님은 정녕 악한 세상을 개혁하고 해방시키는 분이라는 게 가장 절실한 고백이었을까요?
나를 죄에서 해방하고 나를 먼저 개혁시킨 분이시라는 말이 더 먼저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도님들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겠습니까?
세례요한의 질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갈등하는 요한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신앙에 대한 의심은 그 무엇보다 참 슬픈 것 같습니다.
믿음과 의심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뇌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오늘 요한의 실족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마지막 인물이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말씀합니다.
세례요한은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에 서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약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믿지만 성령이 오셔서 근본적으로 출생이 변화된 신약성도들과 다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신약시대 성령의 역사에 대해 에스겔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예수님의 속죄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영을 살리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갖게 하는 믿음은 구약의 믿음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와 달리 하나님을 친애하며 따를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똑같이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바울사도도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참수형을 예견하면서도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면 상황이 어떻든,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적어도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닙니까’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불평하고, 신앙생활에 좀 게을러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사춘기때 엄청 속을 썩이고 말을 안듣는다 해도 걔들이 우리가 부모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들이고, 내 삶을 바꿔 하나님을 믿을 결단을 한 사람들에게 오신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고하게 보증하십니다.
로마서8장16절이 그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래서 아직 성령이 내주하지 않으시는 세례요한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구약의 이 큰 선지자 세례요한보다 더 나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 하나님이 아버지인지 아닌지, 오실 그이가 예수님인지 아닌지 불확실한 새신자들은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의지하고 성령받고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그것을 자각하도록 하기 전까지는 오늘 예수님의 처방대로 말씀을 근거로 해서 믿어야 합니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어찌 보면 구약적 성도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어찌 보면 구약적 성도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구주로 확신하는 진정한 믿음은 교회나왔다고 해서 한 순간 생기는 게 아닙니다.
수년에서 어쩌면 수십년에 걸쳐 하나님의 끊임없는 설득과 감동하심, 버티는 우리의 죄성, 미혹하는 사탄의 세력들의 긴장 속에서 빚어내는 새창조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배하는 회중들은 각자 다양한 구원의 과정 중에서 혹은 아직 구원을 받기 위한 단계로, 혹은 구원받은 후의 성화의 단계를 지나며 함께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갈등하고 흔들리는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은 가서 전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메시야가 와서 하실 사역에 대해 예언한 것입니다.
요한의 예상이 빗나가고, 감옥에 갇힌 처지가 되었지만 감정도, 환경도, 자기 판단도 믿지 말고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흔들리지 않는 불변하는 지표는 구원 전이나 후나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성경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감옥에서 자기가 잘못 짚었는지 불안해 하는 요한에게 왜 믿음이 없냐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거듭나지 못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믿음에 실족할 때 비웃지 않으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너는 말씀에 대한 확신대로 나를 믿어라. 너는 이미 최선을 다해 사명을 완수했고 네게는 선지자의 상이 있을 것이다.’
요한은 어두운 감옥에서 예수님이 전해준 말씀을 듣고 자기가 했던 사역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하며 기쁘게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오늘 다시한번 물으시길 바랍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그이’가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확신하십니까?
예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말로 표현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혐오스럽고 추하고 악랄한 내 인격의 죄를 속죄하시고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자꾸 도덕적으로 짓는 죄를 생각하는 데, 우리의 근본적인 죄는 인격자체가 타락한 그 뿌리가 썩은 죄를 말합니다.
내가 죽어 보니 하나님이 계시는 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그 거룩하고 위엄에 가득 찬 시선에서 내 인격의 죄를 가려주실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게 우리의 고백이되어야 합니다.
왜 구세주는 예수님만이 되실 수 있습니까?
인터넷에 보니 불경과 성경의 유사한 부분을 짚어가며 불교가 먼저니 성경이 카피했다는 장문의 글을 보았습니다.
불경과 성경의 일부분이 같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경이 편성된 것은 예수님 이후 100년경에 일어난 일입니다.
화엄경은 AD2세기에, 법화경은 AD4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석가의 사상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의 사상을 기록한 것들입니다.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거기서 순교했던 도마의 행적을 볼 때, 성경이 구전되다 인도 불교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런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석가든 누구든 간에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을 속죄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가 태산이고 자기가 심판을 받아야 될 형편인데 어떻게 남의 죄를 속죄합니까?
아무리 사랑해도 내 자식의 죄를 내가 씻어줄 수 없습니다.
내 죄를 대신 갚아줄 수 있는 사람은 그래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되고 준비되었던 ‘오실 그 분’이 맞습니다.
그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 눈먼 나를 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주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영원히 죽을 병을 고치셔서 살리신 것입니다.
아직 이런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은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열심히 구하며 말씀을 통해 진리가 이해되도록 읽고 배워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이미 얻은 성도들은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형상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향해 더 깊은 신앙인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구약성도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만 지키면 되었지만, 성령이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신약성도들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한 것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굳게 잡아 가장 소중한 목숨을 구원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심을 받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5년6월21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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