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너희는 부활의 증인이라(누가복음24장36절-53절)

남수연 2015. 4. 8. 15:51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성탄절 설교와 부활절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했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인데 긴 해석이 필요하냐는 뜻입니다.

저도 좀 짧게 하려고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믿어지신다면 정말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내용을 잘 모르고 그냥 믿는 것은 뿌리가 없어서 넘어지기 쉽습니다.

성육신 탄생이나 십자가와 부활과 같은 기독교신앙의 굵직한 사건들은 특히 당시의 역사적인 근거와 성경의 기록들을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살아온 과거 역사 속에 발생했던 실제 사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살아온 발자취를 갖고 있듯이 기독교신앙은 긴 역사적인 발자취를 갖고 있습니다.

믿음이 이 역사성과 함께 어우러져야 더 견고하게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이야기 같은 것은 좀 모른다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나 부활사건에 대해서는 성경내용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장차 내게 벌어질 일인데 어떻게 거기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왜 살아나셨는지, 그날 부활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세 가지가 잘 이해되고 깨달아질 때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길 강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 땅의 모든 일은 지나갈 것이고 그 뒤에 더 영광스러운 육체와 더 영화로운 삶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은 아무리 거센 인생의 풍랑이라도 당당히 맞설 능력이 되고도 남습니다.

심지어 죽음도 두렵지 않는 것이 바로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겠죠.

세계사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된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어떻습니까?

세계사는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세계사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만을 기록합니다.

인간 역사 상 어떤 인간도 삼일간이나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만 성경 안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생생하게 부활하신 현장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백여명이 넘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부활의 증인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반대쪽 사람들에게는 단 한번도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죽어서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한 뒤 부활했다는 것도 못 믿을 일인데 제자들 밖에는 증인도 없다니 세상은 부활을 허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구구한 설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 해갔다는 도적설, 예수님이 잠시 기절했다 깨어났다는 기절설, 심지어 예수님이 쌍둥이였다는 쌍둥이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증인이 없는 게 아닙니다.

부활의 그날 성경의 기록들과 그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보면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이 다 증인입니다.

그 날 등장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아군 적군을 막론하고, 원하든 원치않든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흥미로운 증거들을 일일이 설명하자면 설교가 또 한 시간이 걸립니다.

부활의 증거는 널려있지만 가장 중요한 증거만 몇 가지 나눠 보겠습니다.

먼저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미리 여러 차례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아무 증거가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마가복음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안 믿겠습니까?

예수님은 생각도 말도 행동도 한 점 오류가 없는 가장 진실 된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어떤 사실을 믿는 것에 앞서 예수님 당사자를 믿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진짜 믿을 만한 사람을 알았던 적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믿을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가 믿고 든든히 신뢰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 주님이 부활하실 것을 예고 하셨다면 그 누구의 증언이 없어도 저는 믿습니다.

이 믿음이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의 부활신앙인 줄 믿습니다.

 

그 다음 부활의 증거는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문을 잠그고 은신하고 있습니다.

반란을 주도했다는 판결을 받고 주동자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으니 가담자도 색출해 처벌할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죽음을 두려워했던 제자들이 사도행전을 보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됩니다.

숨어 지내기는커녕 벌건 대낮에, 그것도 유대교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 한복판에서 대범하게 예수님이 부활을 증거하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절을 앞둔 며칠 전 케냐에서 가슴이 철렁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죠.

케냐대학 기숙사에 이슬람과격분자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148명이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은 기독교인이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면 총살하고 이슬람교도라고 하면 살려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같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 많은 학생들이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게 우리 모두에게 너무 큰 도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시 부활을 증거 하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교 과격주의자들에게 언제든지 돌에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변화되는 것은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이생의 죽음조차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닐 만큼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의 급속한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주님이 이생과 내생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또 당시 유대인들이 퍼트린 도적설에서도 우리는 오히려 부활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분명히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대로 정말 주님의 시신을 도둑맞았다면 당장 성전경비대가 출동해 모든 제자들을 잡아들여 심문을 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보고를 그대로 믿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비병들은 무덤 주위에 지진이 나고 천사가 내려와 돌문을 활짝 열어 빈 무덤을 보여줄 때 혼비백산해서 제사장들에게 뛰어갔습니다.

마태복음2813절에 그들은 이 사태를 이렇게 수습했다고 기록합니다.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걸로 상황을 그냥 덮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간다는 것은 1%의 가능성도 없다는 걸 본인들이 아는거예요.

불침번을 잘못 선 것에 대한 문초도 아니고, 제자들을 잡아들인 것도 아니고 단지 돈을 주고 입을 막았다는 것은 그들도 어렴풋이 부활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하나인 안식일 준수에 철두철미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는 전쟁이 나도 칼을 들지를 않았습니다.

유대전쟁사에 보면 그걸 약점으로 안식일에 쳐들어온 치사한 프톨레미란 이집트 왕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엔 전쟁도 쉬었던 유대인의 안식일 준수를 노린 것이죠.

안식일에 1.8킬로미터 이상을 걸을 수 없었던 율법 때문에 도망도 못가고 천명이상이 학살되고 예루살렘은 그냥 함락되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안식일을 목숨을 걸고 지켰던 그 유대인 제자들이 과감하게 안식일을 버리고, 안식 후 첫날인 부활하신 주일날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정해서 지켰다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분명히 유대교 신앙을 뒤집을 만한 사건이 있었기에 그 중요한 안식일을 포기하고 주일을 지키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파면 팔수록, 예수님이 그 날 아침 부활하셨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게 점점 더 확실해 집니다.

부활을 처음 목격한 그날 분위기를 기록한 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도, 열렬히 환영하지도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숨기고 부활을 주장하다 모두 다 순교했다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조작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분명히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왜 중요하고 지금 나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에 자신이 구약 시대부터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던 이스라엘과 온 민족의 구세주임을 드러내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어떤 유명인이 이런 말을 하고 다닌다면 지금도 모두에게 웃음거리겠죠.

당시 종교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래? 그럼 증거를 보여 봐라고 주님을 추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이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란 증거가 바로 무덤에서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이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우리의 죄를 속죄할 구세주도 아니었다는 게 됩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주장하신 대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속죄했다는 확증인 것입니다.

조지 멕도웰은 이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네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번, 예수님의 주장이 거짓이었고,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고의로 거짓말을 한 위선자이고 악마이다.

이번, 그의 주장이 거짓이었고, 그가 망상에 사로잡혀 그런 말을 했다면 그는 미치광이다.

삼번, 그의 주장이 사실이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당신은 그를 선택할 수 있다.

사번, 그의 주장이 사실이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그를 거절할 수 있다.

다들 고르셨습니까?

어릴 때 내가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집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들을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여학생 때 잘사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과 비교가 안 되는 부자 친구 집에 놀러갔다 돌아오면 비좁고 누추한 우리 집이 더 싫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출생을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그런데 이만큼 살아보니 초라한 환경만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환경보다 더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못난 내 자아더라는 것입니다.

나를 확 갈아엎고 싶을 만큼 내 자신에게 실망스러울 때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렇지만 출생을 바꾸지 못하듯, 태생이 그런 나를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그것 또한 나의 일부고 지고가야 할 육신의 짐인데.

그렇지만 이생이 끝나고 우리가 맞이할 내세는 우리가 그 모든 조건과 출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등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과거의 나를 못 박고 죽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영광스런 몸과 영생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은 죄의 본성을 따라 살던 삶에서 유턴해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창조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아서 입니다.

오늘 내 마음이 편안치가 않다면 분명히 창조의 매뉴얼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매뉴얼대로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가면 마음에는 평강, 삶에는 질서와 안정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생을 마친 뒤, 영과 육이 새롭게 변화 된 아름다운 형상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왜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려면 어깨고 목이고 뻐근하고 피곤이 풀리지 않는지 육신도 정말 무거운 짐입니다.

부활의 완벽한 몸을 생각하니 어제 아침에도 부활의 몸을 빨리 덧입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생각 자체가 이미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말씀의 지평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 진리를 알면서 깨닫고 누리게 되니 삶이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이런 부활의 몸으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이겨나가고 내세에 영화로운 삶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주님을 믿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그 다음 열매가 된다는 뜻이죠.

그 부활의 몸이 어떤 것인지 오늘 예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그 신비한 몸을 조금 엿보게 하십니다.

이 땅의 자연세계에서 볼 수 없는 신비한 부활의 형체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서 보여지는 몇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형체는 물질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영과 육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갑자기 제자들 가운데 와 계셨다고 합니다.

걸어 잠근 문을 통과해서 갑자기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턱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에서 제자들이 혼비백산해서 예수님의 혼백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주님께서는 혼백이 아니란 걸 보여주시기 위해 배도 안 고프신데, 식어 빠진 생선 한 토막을 그 앞에서 잡수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도 장차 이렇게 몸은 있으되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달아 없어지지도 않는 신비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바울사도를 통해 이 사실을 이렇게 정리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몸처럼 지금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가장 이상적인 몸을 다시 한번 갖게 될 것입니다.

참 꿈같은 일이죠.

그리고 천국에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한 부활의 형체를 하신 예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다시 본래 하나님의 형체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그냥 인간의 육체로 눌러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 옛날 하나님의 영광스런 존재 형태로 돌아가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우리와 똑같은 형체를 취하셔서 우리를 친근히 사랑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섬기며 선하신 통치를 받을 하나님은 낯설고 두려운 신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형체를 취하셔서 우리를 자녀같이, 형제같이 사랑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전혀 다른 인격체시라면 어떻게 그런 하나님과 함께 살겠습니까?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인간의 몸을 취하고 계시기에 그 마음과 인격을 느낄수 있지 않습니까?

본문은 주님이 붙잡히실 때 다 도망갔던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대변하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친히 그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다정한 인사를 하십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실패를 나무랄 마음이 없어 보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 줄 아십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신 예수님은 오늘 서둘러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부활 이후의 있었던 다른 일들을 저자인 누가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제자들을 파송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누가는 부활하신 주님이 얼마나 간절하고 다급하게 복음을 전하길 원하셨는지 깨달았기에 긴박감 넘치게 본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이 명령때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전한 부활의 복음을 우리가 듣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부활의 믿음으로 살면 말로 복음을 전하든 전하지 않든 사람들이 알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믿음을 두고 사는 지 왜 안보이겠습니까?

저절로 우리는 본향을 천국에 둔 사람, 부활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기적을 눈으로 본다고 해서 우리가 그걸 믿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적은 우리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더 실감이 안 나고 더 안 믿어집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두려워하고 마음에 의심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44절 부터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 죽은 뒤 삼 일 만에 부활하실 내용들을 가르쳐주셨다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직접 보여주시면서도 보는 대로 믿어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기록된 성경을 가지고 설명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합니다.

기록된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무맹랑한 것을 무조건 믿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여기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우리도 그런 영광스런 형체로 부활할 것이 믿어지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영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나눈 성경말씀에 대해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 모두가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우리가 상속받을 하나님나라 사역에 동참함으로 만족과 보람으로 꽉 찬 그런 삶을 사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5년4월5일 부활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