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누가복음14장12절-24절)

남수연 2015. 9. 22. 17:22

 

저는 기독교 역사에서 기묘한 것 중 하나가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2천년동안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동행했던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듯 구원의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게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특히 바리새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사회의 핵폭탄이었습니다.

구원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키는 데 구원을 받지 못했다니 그들에겐 당치않은 모욕이었던 것이죠.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까지 이들과의 갈등과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로마법정에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 했던 원인이 되었던 것이죠.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그리 간단치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미시는 구원의 손을 거절하고 멸망할 예루살렘을 내다보며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19장에 나옵니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하나님의 눈물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들을 위해 목숨을 주기 위해 오셨는데 이스라엘이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에는 이들과 논쟁하시며 어떻게든 현실을 일깨워주시려는 예수님의 끈질긴 설득이 상당한 분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물과 간절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하늘나라의 잔치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천국으로 초대를 받았지만 왜 구원을 완성하지 못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도 천국잔치에 초청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샅샅이 스캔하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바리새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조차 바로 보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진실되게 밝혀줍니다.

 

오늘 내용은 지난 주에 이어지는 같은 배경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바리새인지도자가 초대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은 자리에 앉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끝자리로 밀려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식사자리를 마련한 바리새인에게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려면 되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초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을 청하라

우리도 대개 누가 밥 한끼를 사면 얻어먹은 사람이 다음에 한번 대접을 하죠.

만일 밥을 사려면 되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사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말에 그것이 대접한 사람에게 상이 된다는 것이죠.

이 말씀만을 떼어서 생각하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행을 베푸는 것이 복이 될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14장 전체를 볼 때 이 말씀을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말씀과 뒤에 이어지는 잔치비유와 다 같은 맥락에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즉 구원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이죠.

21절 잔치비유 중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자 주인이 이 12절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 두 내용이 같은 구원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죠.

주님이 두 번 반복해서 하신 이 말씀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차라리 가난하고 불구자고 맹인이었으면 좋았으리라는 주님의 탄식으로 들리시지 않습니까?

그랬더라면 그들이 하나님께 되갚을 능력이 있는 의로운 자인 줄 착각하지는 않았을거라는 것이죠.

실제로 돈과 권력이 있고 성품이 좋고 세상사는 데 만족한 사람들은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가 더 힘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원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이를만한 조건을 스스로 갖추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충실하게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율법에 더 많은 조항들을 덧붙여가며 철저히 지키고 있었기에 당당하게 천국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우리가 교회에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성경을 많이 알면 충분히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이게 바리새인들이 빠진 함정입니다.

구원의 진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만 그런게 아니라 믿고 난 후에도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불순종합니다.

지금 다들 순종하십니까? 아니잖아요.

매순간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매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며 그들은 자기들 속에 하나님의 법을 따를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구속자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죠.

이번에 장물을 취급해서 출감 5개월만에 다시 구속된 대도조세형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간증집회에 다니고 선교활동으로 새 삶을 사는 것 같았지만 다시 도둑질을 하고 감옥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죄의 근성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삼년을 살고 나와 오개월만에 또 범죄를 저지른 조세형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숨겨진 죄의 행각들을 겉으로 훤히 보여주는 것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죄인이 의인이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심지어 어느 민족도 본적 없는 하나님의 현현하신 모습을 본 사람들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바닷길을 밟고 해방된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의 해방으로 바꾼다면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돌아올 때 현해탄이 갈라지고 걸어서 한국에 돌아왔다는 식입니다.

하나님과 그 엄청난 위엄과 기적을 본다고 사람의 죄악 된 근성이 바뀌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순간에도 바뀌지 않는다고 성경은 진술합니다.

이 땅에서는 인간은 결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한번 십자가에 손을 내밀었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매일 매순간 죄를 짓고, 넘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끈질긴 원수가 우리 안에 있는데 언제 우리가 완전한 천국백성의 심령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법적인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는 것이지 본성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점점 바뀌어 가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죄와 단점을 보여주시고 그것이 우리 심령에서 천국을 뺏는다는 것을 알기에 점점 죄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고개를 들 때 죄를 따르는 게 하나님께 점점 죄송해지기에 무작정 죄에 끌려가던 옛날과 좀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정도면 내가 괜찮지 생각하는 순간 주님의 십자가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공들여 수행했더니 한순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과거의 내가 되살아나는 게 우리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자신을 통탄해 하며 죄인 중에 괴수하고 했고, 자기의 죄된 육신이 한번에 다 죽은 게 아니라 날마다 죽노라고 외친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께 되갚을 능력이 없는 주제라는 것을 아는 죄인들만이 죽을 때 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붙잡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비로서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인이구나 생각할 때, 신비한 것은 그런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찡해지는 것이죠.

내가 죄인이란 게 이렇게 은혜가 되는 게 참 희한한 일입니다.

이런 죄인들을 상징적으로 되갚을 게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 몇 가지를 지키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율법이 가리켰던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놓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하시는 간곡한 경고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깨닫도록 가르치고 경고하시지만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를 신봉합니다.

15절을 보면 듣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주님의 말씀에 뜬금없는 말로 끼어듭니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가난하고 병들고 눈먼 죄인들을 식탁에 초대해 봤자 결국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떡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열렬한 유대교인인 자기들 뿐이라는 것이죠.예수님의 예리한 충고와 진심이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맞지 않는 변질 된 신앙을 고수하며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신 진리의 말씀을 외면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내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십니까?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인즉, 인간은 다 옳지 못합니다.

신자들은 그걸 인정하고 하나님의 올바른 지도를 받으며 본분에 맞게 살겠다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나의 무엇이 문제인지 비춰보고 고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처럼 본질을 벗어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단순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최근 현대교회에 만연한 가볍고 단순한 기독교는 본래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에서 아주 많이 벗어난 미흡한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회에서 할 일을 하고 살아가는 건 평생을 세상 안에서 세상을 배우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고 그 나라를 알아가는 것 또한 그만큼의 세월을 집중하고 체험적으로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같은 종교유대인들은 잘못 알아 망했고, 일반 유대인들은 무지해서 망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나의 비유를 더 들어 구원역사의 그림을 더욱 분명하고 강력하게 보이시며 경고하시는 것이 바로 잔치비유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막상 잔칫날이 되어 사람을 보냈더니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식을 듣고 노한 주인은 종들을 보내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이번엔 성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강권해서 데려와 내 집을 채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인은 엄중한 목소리로 전에 초대했던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미 성경 전체를 알고 역사적으로 입증된 바이기에 우리는 비유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초대받았다 잔치에 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고, 얼결에 붙잡혀 온 사람들은 복음을 전해 받은 우리 이방인들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또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사랑한 것은 세상과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에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를 받았고 거기에 응했습니다.

17절에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종이 말한 것을 보면 이미 잔치에 초청받은 자이고 가겠다고 의사표현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잔치 비유에서 초대한 사람들이 바빠서 안 온다고 진노하는 주인을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건 와도 되고 안와도 되는 잔치를 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주인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고통스런 죄의 멍에를 메고 허덕이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으로 천국의 잔치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들을 초대하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잡으시며 하나님은 진심과 희생으로 천국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초청의 순간에 이들이 한결같이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잔치자리에 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18, 밭을 샀기 때문에 가 봐야 한다고 합니다.

19, 소 다섯쌍을 샀기에 제대로 일하는 지 좀 봐야겠다고 합니다.

20, 장가들어 너무 행복해 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인간의 애착은 대단합니다.

사실 이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했지만 마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속에 있는 믿음을 버선 속처럼 뒤집어 보일 수가 없지만 실제 생활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히려 거창한 명분 앞에서 보다 지극히 사소한 데서 그 진실이 드러납니다.

경건을 가장한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사실은 잘되는 나만을 섬기는 자기종교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고통도 아니고, 내세도 아니고 오직 현세의 자기 자신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죄성을 그대로 갖고 신앙을 덧입으면 최악의 천하무적이 됩니다.

변화되지 않고 오래 교회 다니는 신자들이 가장 무섭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희생적이고 온전하신 사랑과 한없는 겸손을 보이시며 그것이 천국백성의 본질이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깜짝 놀라서 뒤로 자빠집니다.

그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땅에서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고, 혹시 죽은 다음 세상이 정말 있다면 천국도 확보해 놓자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죄성이 원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자꾸 이렇게 믿으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믿었던 하나님, 그들이 생각했던 천국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잔치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들이 내세운 이유들은 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시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바쁘고, 돈을 벌어야 하고, 생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그걸 쫒으면 쫒을수록 하나님께서 멀리 던져 버리십니다.

우리가 이들처럼 벌어놓은 돈과 함께 망하는 것을 두고 보시겠습니까?

생업도 중요하고 미래도 중요하고 세상의 재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의 기뻐하실 일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때 우리가 하는 범사가 잔치집 같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보면 잘못 가진 신념을 바로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세워질 때도 유대교를 깊이 믿던 신자들이 율법의 절기들을 고집하고, 할례를 주장하고, 많은 갈등을 일으켰던 것을 봅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며 성경과 다른 잘못 된 신앙관을 자기 나름대로 구축하고 있는 신자들이 길거리에 있는 사람보다 더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고 하셨겠습니까?

먼저 들어온 잘못 된 신앙이나 다른 종교나 사회적인 신념은 올바른 복음이 뿌리내리는 데 막대한 장애요인이 됩니다.

중세 카톨릭이 왜 기묘한 기독교가 되었습니까?

로마의 민족신앙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바르고 건전한 신앙을 갖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결국 자기들만의 유대교를 정착시키고 고집하는 이스라엘은 고쳐 쓸 수가 없어서 버리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천국백성으로 구원받고 이방인들의 구원의 주역이 되길 바라셨던 하나님의 뜻은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서둘러 잔치 자리에 초대된 것입니다.

이들은 실패한 이스라엘 대신 어부지리로 오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잔치는 처음부터 큰 잔치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기 위한 잔치였다고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그렇게 될 것을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고 돌아올 기회를 주신 것은 빗나간 자녀들에 대해 결코 기대를 버릴 수 없는 우리 부모들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21절에서 주인은 빨리 시내와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일까요?

오늘 비유는 이스라엘사람들은 다 구원을 못 받고 그 이후 복음을 듣고 교회로 나온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 한가지에 기독교진리 전체를 다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초대 된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어 밖으로 쫒겨나간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초점은 이들이 다 구원받았냐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주인의 집을 채우라는 것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중엔 아직 구원받을 자리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교회가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구원의 길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부름받은 성도들은 주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어 아직 교회 밖에 있는 잃어버린 자들을 데려와 예수님과 연합하도록 힘써서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먼저 부름받은 성도들에게 맡기신 영광스런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 중 스스로 알아서 교회를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다 누군가의 강권함으로 교회로 나왔고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길 되신 예수님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바울사도는 그래서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라고 말하며 일생을 전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바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신앙이 없었다면 구원은 물론이고 이 순간에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불행과 비참한 기분 속에서 살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아래 식당 주차관리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결국 다른 분이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이분이 제게 자기를 위해 기도를 좀 해 달라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다 교회를 나가는 데 자기만 술, 담배 문제를 해결도 못했고 주일에 나와서 일하다 보니 교회를 못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마음이 그렇게 공허하고 힘들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게 불안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마음이 괴롭다며 거의 울먹이며 기도를 부탁하더군요.

희한하죠, 먼저 분도 그러시더니.

우리가 과거를 잊어서 그렇지 하나님을 보호자로 모시지 않은 사람들이 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얼마나 마음에 평안을 얻었습니까?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오늘의 걱정과 내일의 불안을 느긋이 다스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게 되었습니까?

또 우리가 장차 물려받을 천국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그곳이 잔치라고 표현하십니다.

이 땅도 이렇게 재미있는 데, 천국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기쁜 곳이겠습니까?

아직 믿지 않은 우리 가족도, 내 친구도, 동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차마 말로 다하지 못하는 이런 공허함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하늘의 잔치에 함께 앉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잠시 영상 하나를 볼텐데요.

1985년에 인도양 위에 정처없이 떠다니던 96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을 구한 전제용선장의 이야기입니다.

방송에서도 다루었던 것입니다.

그가 구했던 96명의 난민 중에 미국으로 건너간 피터누엔이라는 난민대표가 17년을 수소문해 전선장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내용이었죠.

이 아름다운 재회에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오지 못한 가족과 친구들은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다 깨져가는 조각배를 타고 성난 바다를 떠밀려 다니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서 이들을 강권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2015년9월20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