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21장34절 항상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남수연 2015. 12. 3. 13:48

누가복음2134-36

어떤 기자가 조계사의 템플스테이를 체험한 뒤 올린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목이 연꽃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였습니다.

제목만 들어도 뭔가 한가롭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프로그램에 참가자들은 아주 이른 새벽 승려들의 은은한 타종 소리에 일어나 불당에서 독경을 배우고 불상 앞에서 정성들여 절을 합니다.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남을 헐뜯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한 번 절하고,

항상 부드럽게 말하고 남을 도와주길 바라며 또 한 번 절하고,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또 절을 합니다.

체험을 마친 참가자들은 예상 외로 고즈넉한 시내에서의 밤을 보냈다며 조금은 마음이 정화된 것 같은 가벼움을 느끼며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다짐한 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깊이 마음에 새겨 두지도 않습니다.

선한 마음을 잠시 가졌지만 지켜도 그만,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죠.

참 여유롭고 느긋하죠?

그에 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항상 죄와 싸워야 되고, 뜯어 고쳐야 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그렇죠.

스스로 조심하라, 방탕도, 술취함도, 세상의 염려도 안된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라.

때로 우리도 좀 세상에 몸을 맡기고, 쉬엄쉬엄 믿으면 어떨까 하는 유혹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종교가 아니라는 데 가장 큰 차별이 있습니다.

종교처럼 종교심 따로 인격 따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심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닙니다.

기독교 참 신앙은 우리의 믿음이 곧 인격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이기에 그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농담으로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스스로 조심하며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농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게 아닙니다.

그냥 좋은 말씀으로 듣고 돌아가 다 잊고 살아도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꽃차나 마시며 쉬었다 가는 세상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앞 둔 자식들이 책상에 코를 처박고 조는 모습을 보고 부모들이 왜 정신차리라고 깨웁니까?

침대에 누워 편안히 잠든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게 부모들에게 얼마나 흐뭇합니까?

그러나 자식들이 시험을 대비하고 그 시험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독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 주간 실패했고 부진했지만 주님은 오늘도 또 우리에게 깨어 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다시한번 마음을 새롭게 하여 매일의 시험을 이기고, 마지막 때를 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와 믿음을 더 확고하게 갖게 되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이 있는 누가복음21장은 종말에 대한 예고입니다.

제자들 세대에 곧 일어날 이스라엘의 멸망과 먼 미래 지구역사의 종말이 동시적으로 예언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주일에 십자가의 대속을 완수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성전에서 나오실 때, 제자들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46년에 걸쳐 완공 된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합니다.

이 때 주님께서 이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붕괴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소리죠.

하나님을 상징하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예고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3천억을 들여서 지은 아름다운 사랑의 교회 성전이 붕괴된다면 얼마나 성도들에게 충격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성전 붕괴 예고는 거기에 비할 수 없는 엄청난 발언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을 무너뜨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결정을 내리신 것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이 삶이 아닌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가장 조심하고 분별해야 하는 것이 신앙이 절대로 종교화가 되면 안된다는 것이기에 제가 계속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화려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헌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웅장한 성전과 제사가 사람들에게 거짓 위안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그들의 종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돌아가서 이웃에게 악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수직관계도 틀렸고, 이웃과의 수평관계도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과 틀렸다는 것입니다.

거짓 안전을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성전이라면 차라리 없애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삶은 악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만하며 산다면 그 나라를 엎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신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부분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의 욕망에 이용당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목석우상처럼 여기고 하나님이 보시는 줄 모르고 악을 행했기에 결국 엎어버리셨습니다.

40년을 더 기다리신 다음에요.

이스라엘은 서기70,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40여년 뒤에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나라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1900여년이 지나 겨우 옛 땅에 다시 건국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예언 안에는 예루살렘 뿐 아니라 또 하나의 무너질 마지막 제국이 있다는 것에 우리는 경각심을 가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예루살렘 멸망이 대체 언제냐며 바짝 다가와 물었습니다.그런데 주님은 그 답변 안에 이 땅의 세계가 무너질 종말에 대한 예고를 섞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징조는 가짜 그리스도들의 출현과 국가 간의 전쟁과 지진과 전염병의 확산과 극심한 가뭄 등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는 두려운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장차 일어날 일들로 인해 무서워서 떨 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붕괴되고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것처럼, 지구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영구적인 종말이 있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이 날은 신자들에게 두려움의 날이 아니고 구원의 날이고 영화로운 날이 될 것이기에 이런 일들이 나타나는 징조가 보이면 일어나 고개를 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진짜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농담 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구역사가 무한정 지속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분명히 지구역사를 종결하고 영구히 지속될 천상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믿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기다리는 신자들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가 바로 본문에서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적어도 지구적인 종말이 우리 세대는 아니겠지 생각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리는 어차피 이 세대 안에 개인적인 종말을 맞습니다.

지난 주 칼국수 대통령께서도 이생을 정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조문 온 전대통령께서 김대통령은 생전에 기독교 신앙이 깊었으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고 하셨다죠?

그러면서 본인은 요즘 술 담배를 안하니 좀 더 오래살지도 모르겠다며 장수에 대한 욕망을 내비치던데, 그 분도 결국 개인의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생애를 마감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땅의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우리는 곧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게 현실적으로 맞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따르고자 합니다.

 

먼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스스로에게 조심하라입니다.

느낌이 완전히 다르죠?

스스로에게 조심하라는 것은 나를 제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를 조심하고 다른 어떤 사고를 조심할 것 보다, 제일 무서운 게 나이고 나를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망쳐졌다면 가장 큰 이유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아닙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34절에서 예수님은 정확히 말씀해주십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의 달인이라는 것이죠.

스스로에게 조심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여기로 끌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방탕합니다.

방탕함이란 원어의 뜻은 낭비상태, 자원을 흥청망청 써버리는 과소비를 말합니다.

뭔가에 계속 자신이 가진 것들을 옳지 않게 쏟아 붓는 상태죠.

인간의 본성이 그렇고 세상은 방탕하도록 유혹합니다.

큰 유익이 없는 취미에 돈과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게 합니다.

자기에 대한 애착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돈과 시간을 쏟아 붓게 합니다.

나의 안전과 미래를 위해서 더 가지려고 집착하며 인생을 다 소진합니다.

인터넷과 영상매체와 영화에 빠져 별 유익이 없는 것들을 탐닉하며 시간을 한없이 낭비합니다.

요즘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냐는 얘기들을 많이 하셨죠?그 이유가 스마트폰, 테블릿PC 같은 기기들을 과도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뇌가 시간을 인식하는 데 착각을 일으켜 실제보다 빨리 지났다고 느끼게 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시시껄렁한 정보들을 읽으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무엇보다 이 방탕에는 술취함이 포함됩니다.

에베소서 518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술취함과 방탕이 거의 같이 언급됩니다.

무절제하게 현재의 자원들을 낭비하고 마땅히 할 일은 안하는 방탕에는 술에 취해 정신을 놓고 사는 일이 단짝처럼 따라옵니다.

신자들은 가급적 술을 멀리하는 게 좋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에서 술과 담배는 신자들의 금기사항으로 내려오고 있기에 공적인 자리에서는 절대 자제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술을 마시셨습니다.

당시 문화에도 우리의 술문화처럼 모이면 술을 마셨고, 기쁜 일이 있으면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술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술이 단순히 삶에 위안을 주고 기분을 전환시켜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시지 않았냐고 하신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다릅니다.

술은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데, 취한 상태는 영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죄와 악에 취약한 상태가 됩니다.

취하지 않을 만큼 마시면 되지 않냐고 말씀하시렵니까?

취하지 않으려면 뭐하러 술을 마십니까?

우리는 어린 시절 술 취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자신이 술취한 방탕의 피해자들 아닙니까?

우리가 어떤 종류의 방탕에 빠지든 결과는 똑같습니다.

방탕하게 살면 점점 마음이 뭔가에 짓눌리는 것 같고, 죄책감과 우울감과 실패감에 빠져 들게 됩니다.

시간이나 돈이나 감정을 과도하게 낭비하고 나면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며 침울해지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게 기분 나빠서 점점 다른 쾌락과 방탕을 찾게 되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됩니다.

주말을 TV 앞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점점 속이 허해지잖아요?

그래서 치킨 시키는 겁니다.

방탕하지 말고, 술취하지말라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을 다 뺏으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경박하고 일시적인 쾌락에 가장 귀한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생활의 염려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생활의 염려는 우리 모두의 아킬레스건입니다.

염려가 없는 날이 하루인들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삶에 염려할 일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염려할 일이 없는 세상에 대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넌센스죠.

당장 근심거리가 있고 수심이 가득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어떻게 염려를 하지 말라시는건지요.

그러나 염려할 일이 있더라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안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저절로 되는 일만 하는 게 무슨 믿음이겠습니까?

염려 할 문제 속에서 매달려 살긴 살 되, 염려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4절에 이런 방탕과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다고 하는 데 그 뜻은 내리 눌림을 당한다입니다.

염려는 힘든 문제에 더 무거운 짐을 얹고 자신을 짓눌러 질식하게 합니다.

염려에 눌림을 당하면 평정심을 잃고 판단도 둔해지고 믿음도 약화되고 감정만 예민해 집니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하는 모든 문제는 정신차리고 해나가면 감당할만하다는 진단에 의해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염려하며 나를 동정하고 애수에 젖는 것은 우리를 아끼시는 하나님을 못 믿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은 선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기가 막힌 인도를 잊으셨습니까?

염려해도, 염려하지 않아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절대 삶의 문제들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로 짓눌려 소소하고 잔잔한 행복마저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종말에 대비하며 사는 신앙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일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탕으로 남은 생애를 허비하지 말고 정신차리고 알차게 살라는 것입니다.

바른 하루하루가 모이면 점점 살기 힘들어질 말세의 환경 속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대처하며 능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날은 덫과 같이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덫에 걸린 짐승은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단지 재미 좀 보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35절에 보면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자들도 그 날을 다 겪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가까울 때 세상이 어떨지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세상 돌아가는 일이 너무 두려워서 기절할 만큼이라는 것입니다.

지역이나 국가적으로 당하는 재난들을 어떻게 우리가 피해 가겠습니까?

최근 10년 새 자연재해가 30년 전보다 두 배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소한 생활의 염려로 진을 빼고, 방탕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간다면 환난의 날을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

우리 마음을 바꾸면 이겨낼 수 있는 그런 문제들로 감정과 시간을 다 과소비해버리고 어떻게 엄청난 재난을 견뎌낼 힘을 준비하겠습니까?

지진과 테러와 전쟁과 전염병 같은 문제 앞에서 지금처럼 징징대고 투정부리고 그럴 수 있는 일입니까?

어림없는 일이죠.

다섯 살 난 아이가 한 살짜리 동생을 들쳐 엎고 먹을 것을 구하러 헤매는 게 지역적인 재난입니다.

종말에 임박해서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당할 이런 엄청난 재앙도 두렵지만 살다보면 개인적인 종말의 위기도 만납니다.

아무 험한 꼴 안보고 살면 좋겠지만 모든 불행을 다 피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암 같은 난치병을 갖고 죽음과 싸우는 것만 해도 얼마나 비정합니까?

스스로 이를 악물어야지 누구도 봐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별거 아닌 일에 감정을 소모하고,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일시적인 쾌락과 만족을 위해 방탕하며 시간을 보낼 일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을 강화시키고, 마음을 스스로 연단하고 다잡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36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라.

이 모든 일들이 있을 때 기절할 듯 놀라지 말고, 이미 예고된 재난임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들은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니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다음 장에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십니다.

제자들은 이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죄악과 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결사적으로 가로막는 사탄의 세력과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전투이고 아무도 여기서 제외된 사람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무얼하고 뭘 먹고 살지 조차도 우리의 근본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키며 사는 그 싸움을 하는 곳이 바로 우리 가정이고, 직장인 것입니다.

그 전쟁을 위한 유일한 전술은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에서 지고 밖에서 망합니다.

다음 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시며 베드로에게 그러시잖아요.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그러나 슬픔과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무력하게 잠들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큰 영적 위기를 만났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을 때 그 결과가 다음 장에서 즉각 나타난 것입니다.

결과는 무참한 실패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우리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치열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영적인 존재들이 함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로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악이 이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성도들이 이 싸움을 안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깨어 기도하며 악을 대적하면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기 위해 우리의 박약한 의지와 게으름과 세속적인 경향성과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지면 우리는 더 악랄한 세력이 환경에 몰려들고,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사는 게 너무 바빠 기도할 틈이 없으십니까?경건한 삶을 위해 시간을 쏟는다면 오히려 생활 중에 쓸데없는 분주함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삶에는 여유가 생깁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영적 생명이 약해질수록 더 많은 시간과 물질과 행복을 뺏기고 허비하게 된다는 것을 다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먹고 마시고 함께 자고 사역의 현장에 항상 같이 계셨던 것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모든 시간, 모든 일에 하나님을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쪼르르 달려가 문제들을 의논했듯이 모든 일을 주님과 우리도 의논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생활과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모든 일을 하나님과 의논하면 하나님께서도 일하십니다.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면 무엇을 해 나갈지가 눈에 보이고 우리는 그 일을 하면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은 하나님께서 맡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력들을 쫒아내시고 환경을 막고 있는 교활한 세력을 물러가게 하십니다.

때로 우리의 초라한 처지가 서글프게 느껴지고, 흙수저 인생에 아무 장래도 없다고 비관적인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모든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교통하고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빛나는 하나님의 유업을 누릴 상속자입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않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우리의 보호자요, 주권자로 모시고 산다면 우리의 초라한 일은 왕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을 깨닫고 점점 더 풍성하게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에 IS가 점령한 이라크의 한 기독교마을에서 부활절예배를 드리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점령군들은 이미 기독교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살해하겠다는 통보를 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부활주일예배에 변함없이 성도들이 교회에 가득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고 비장함으로 굳어 있었습니다.

뭘 모르는 어린 아이들만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에서 성도들이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슬프면서도 가슴이 뭉클하게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예배에는 정말 우리에게 없는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입니다.

아마 그들은 이미 IS에 의해 살해당하고 지금은 그렇게 예배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 TV를 끄고,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성경책을 여는 것은 이들과 똑같은 순교의 신앙입니다.

술잔을 엎고, 내 발이 향하던 쾌락의 길에서 돌이켜 기도의 자리에 앉는 것도 순교의 신앙이 없으면 안됩니다.

한 주간 힘들게 일하고, 세상에서 시달린 몸을 포근한 잠자리에서 일으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하는 것도 육체의 욕구를 죽이는 순교의 신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하루 하루 순종하는 삶이 그 날을 우리가 능히 이기고 주님 앞에 서게 할 것입니다.

지금 못하면 그 날에도 못합니다.

지금 방탕을 삼가고 평범한 우리의 생활 속에 하나님을 친밀하게 모시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는 것이 종말에 강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하나님은 그것을 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발전하고 눈이 휘둥그레지게 대단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과 죄악으로 이미 파투가 난 이 세상을 둘둘 말아 집어 던지시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그곳에 마음을 두고 이 땅에서 천국의 시민권자처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스스로에게 조심하시고 경계하십시오.

무익한 것에 과도하게 삶을 낭비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고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십시오.

모든 시간, 모든 일에 항상 기도하며 믿음 안에서 깨어 시련의 날을 대비할 뿐 아니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누리는 매일의 안락과 평강과 만족함도 꼭 챙기시길 축복드립니다.

  2015년11월29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