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예레미야42장1절-12절 (마땅히 갈 길과 할 일)

남수연 2015. 9. 8. 18:18

 

신자들은 갈 길과 할 일을 하나님께 물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기도도 하고 말씀을 보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다들 그러시죠?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 갈 길을 묻는 무리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구한 기도에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 복 받을 길을 숨기지 않고 묻는 자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본문 말씀은 패망한 이스라엘역사 뒤끝에 벌어지는 씁쓸한 한 사건을 통해중요한 구원의 메시지를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길을 보여주시지만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간다는 것이죠.

그 결과는 파멸이고, 수치이고, 고통이라는 것을 오늘 성경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또 다시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오늘 깨닫고 더욱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배경적인 설명이 좀 필요하겠죠.

본문의 사건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제국의 침략으로 패망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유대땅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느브갓네살왕은 유다 마지막왕인 시드기야를 붙잡아 눈앞에서 왕자들을 죽이고 왕의 눈을 뺀 뒤 놋사슬에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그는 예레미야선지자가 멸망을 경고하는 두루마리를 써 보냈을 때, 읽는 대로 칼로 베어 화롯불에 던져 넣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시한다고 안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바벨론의 칼에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죽고 귀인 사천육백명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바벨론왕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유대 땅에 남겨두고 그다랴라는 사람을 감독으로 세우고 돌아갑니다.

그 뒤에 간신히 도망쳐 목숨을 건진 왕족과 지휘관들이 슬슬 모습을 드러내고, 폐허가 된 조국 땅에서 각자가 살 궁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충분히 있을법한 이야기죠.

그 중 이스마엘이라는 왕의 종친이 심복들을 이끌고 바벨론왕이 세운 감독관 그다랴와 그의 사람들과 바벨론 군사들을 다 살해합니다.

그리고 남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암몬이라는 나라로 망명을 시도합니다.

백성들을 몰아다 암몬에 선물로 안겨주고, 자기의 신병을 보호받으려는 것이죠.

이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하난과 군대지휘관들이 쫒아가 이스마엘에게서 백성들을 뺏어 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들이 우루루 애굽 땅으로 향합니다.

요즘 난민 같은 신세가 된 것이죠.

그러던 중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도해 달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들이 정말 간곡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대로 행하겠다는 신실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각절 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겠다는 강한 의지가 나타나죠.

3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5절에서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6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에게 좋든지 나쁘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정말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무엇이든 순종할 태세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 뒤에는 어이없는 배신과 반전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다주었을 때, 이들은 언제 이런 말을 했냐는 듯, 즉시 안색을 바꿉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했으리 없다고 기도응답을 묵살하더니 예레미야선지자까지 끌고 결국 그들이 원했던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시작은 좋았는데 결말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입니다.

차라리 원래 가려던 대로 조용히 애굽으로 떠났으면 하나님을 농락하는 죄는 더하지 않았을텐데 대체 이 황당한 사건이 고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이 사건은 끝까지 자기 길을 고집하며 멸망으로 가는 인간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사극에 나옴직한 드라마 같은 이 한편의 사건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올가미에 스스로 자기 목을 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없는 경고를 받고도 결국 돌이키지 않고 패망한 나라에서 겨우 살아남은 자들이 여전히 깨닫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하난과 백성들은 그 중에서 하나님이 남겨두신 적은 무리들입니다.

자기들 입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라고 말합니다.

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칼에서 면제받은 것입니다.

진짜 이 무리들의 행동을 보면 왜 이들이 살아남았는지 우리는 의아할 뿐입니다.

44장에서 애굽에 도착한 이들이 예레미야선지자에게 이죽거리며 하는 말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멸망 중에 건져진 사람들이 그래도 그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좀 나은 사람들일거라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요렇게 말하는 자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하나님은 유대 땅에 남아있으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바벨론으로부터 계속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을 멸망 중에서 건져 주시는 것일까요?

정말 이들이 깐죽거리는 걸 보면 하나님께서 그동안 얼마나 속이 부글부글 끓으셨을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들고 불신자들하고 치열하게 맞붙어 보면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결국 이렇게 하나님을 비아냥거리는 본성을 드러냅니다.

사실 우리도 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소하던 사람들입니다.

태생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원수로 행하는 인간의 죄성에 정말 하나님이신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심판을 하고 징계를 하면 뭘 알아먹어야 하는 데, 악한 길로 계속 직진해서 벼랑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때리고 훈계해도 자식들이 계속 엇나가면 속이 터지는 부모들이 때리던 회초리로 자기 종아리를 때리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때리신 것입니다.

공의와 심판이 진실이고, 사랑도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벌하시고 죄를 눈감아 주려하셨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조차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는 것이 오늘 남겨진 자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발로 걷어 차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구원의 방책도 하나님이 마련하셨고 구원받을 백성들도 하나님이 강제로 끌어오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끌고 오지 않으시면 어떤 인간도 스스로 구원의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원해서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오늘 말씀이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이 호의를 베풀어도 그냥 싫어서 도망친다는 걸 보여줍니다.

지난 주 한 장의 사진이 세계인들을 울렸습니다.

터키의 해변에서 익사체로 발견 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아기 에일란의 사진이었습니다.

정말 그 조그만 남자아기가 해변에 얼굴을 대고 죽어 있는 사진을 보니 속이 울렁거리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 생명의 죽음에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하는 데,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들이 죽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보시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런 죄 없는 아이들이 고통을 당하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대신 죽이시고 이런 말도 안되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 망할 세상에서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디 있나며 원망은 하지만 아무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어떤 목사님이 의료사고로 숨진 신해0 씨를 전도했던 이야기를 하더군요.

신해0 씨를 전도하기 위해 애를 쓰던 지인이 도저히 안되겠으니까 이 목사님께 어떻게 좀 전도해 보라고 만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쏟아 놓더군요.

신해철씨가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뜰 거라고 말했던 노래가 민물장어의 꿈이라고 합니다.

그 노래의 마지막이 이렇습니다.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은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그 목사님 말씀이 내가 분명히 말해 줬는데,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하냐는 거예요. 또 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해줬냐는 거예요.

욥기3314절에 구원에 있어서 철저히 가망이 없는 인간의 한계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국 소수의 무리를 강제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애굽으로 내려갔던 이 무리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호의를 무시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러 내려갔던 애굽에서 바벨론의 칼 날에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또 소수를 구원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44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그들에게 재난을 내리리니 애굽 땅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이 칼과 기근에 망하여 멸절되리라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내 말과 그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

그 중에서 또 하나님의 은혜로 일부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원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 중에서 계속해서 소수의 사람들을 추려내시고 또 구원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계속해서 그 긍휼하심으로 구원에 초청하시고, 거부하는 자들 중에서 계속해서 또 일부를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예정과 알미니우스의 자유의지의 신비스러운 조합이 여기에서도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성경에서 동시에 보여지는 이 논리가 모순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이해되는 논리로 영적인 진리를 다 설명하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분명히 순종하면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불순종한 일부를 구원해 내셨다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다만 우리도 거부하고 불순종했지만 칼을 면하고 살아 남겨진 소수의 남은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우리가 순순히 복음을 듣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온 게 아닙니다.하나님의 백성이 된 뒤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맞서고 죄를 짓지만 또 용서를 받으며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있는 소수의 무리입니다.

여기에 말할 수 없는 구원에의 황송함과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까지 칼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남겨진 사람들은 끝까지 우리를 골라내신 하나님의 그 큰 은택에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빳빳한 목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적은 무리는 그래서 44장에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이 옳으셨다는 것을 이 땅에서 증언하고 영원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찬송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소수의 무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여주십니다.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응답은 가나안에 남아서 바벨론을 섬기고 애굽으로 절대 내려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바벨론에 의한 멸망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죄에 빠질 때면 이웃나라들의 침략을 통해 징계하셨습니다.

세상임금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 중에서 뭐가 나은지 스스로 당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절대로 나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존심 상하며 엉뚱한 데 눈치 보며 굽신대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대개 그렇게 실패의 쓴맛을 보며 조금씩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게 낫다는 걸 알고 믿음에 진지해지는 것입니다.

애굽은 성경 전체에서 상징하는 대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창조의 목적을 벗어난 멸망할 세상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항상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을 경고하십니다.

애굽은 절대로 돌아가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요하난과 무리들에게 애굽에는 전쟁도 없고, 공습의 나팔소리도 들리지 않고, 궁핍도 없는 안전한 곳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둘러보면 때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는 하나도 없고 그저 다 잘 먹고 재미나게 사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말씀대로 살고 믿음을 지키다가 세상에서 나만 뒤쳐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 듯 들 때가 있습니다.

좀 들 믿을까? 적당히 세상도 즐기며 사는 게 인생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왜 안 들겠습니까?

그러나 애굽 세상은 이미 그 죄악으로 인해 심판이 결정된 곳입니다.

15절에서 분명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에 살기로 고집하면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가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을 것이라

우리가 살 길과 소망은 끝까지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을 섬겨도 이 뻔하고 팍팍한 내 인생이 당장 뭐가 달라지냐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믿음 안에서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고 헐지 않으시며, 심고 뽑지 않으신다10절에서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12절에 하나님이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리니 그들도 너희를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과, 환경들과, 질병들과, 고민들이 우리를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을 뒤로하고 세상적으로 돌아가 세상을 의지할 때 그것들과 함께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서도 잘 들 자기의 인생을 세우는 것처럼 보입니까?

세상을 좋아라 의지했더니 가정도 허물어지고, 건강도 허물어지고, 인간성도 허물어지고, 장래의 모든 소망도 허물어 졌다는 게 오늘 메시지입니다.

지금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이란 믿음을 더욱 굳게 간직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애굽행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의 실패는 분명히 우리도 미끄러질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예레미야선지자가 가져온 기도응답이 틀려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했던 결과가 아니라서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말을 듣길 기대합니다.

사람들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대개 자기가 원하는 말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설교에서도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은 거부하고, 지나쳐버립니다.

항상 자기의 생각을 합리화 해 줄 내용만을 선호합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갈망은 대부분 탐욕과 이기심과 죄와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걸 정해 놓고 하나님이 무조건 밀어주시길 기대하는 게 우리의 믿음이고 우리의 기도라면 그건 이들처럼 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백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시면 그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과정엔 환경과 내 생각과 마음의 소원과 여러 가지가 협력하지만 시작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앞서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무시하고 우리의 판단대로 밀고 나가면 요하난의 무리처럼 칼바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도 이미 많은 것을 잃고 아주 적은 것들이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이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거절하고 애굽행을 결심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다급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이 바벨론 왕이 세운 감독관 그다랴와 바벨론 군사들을 죽였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정말 큰 일이 나게 됩니다.

당장 군대가 쳐내려와 그나마 살려줬던 자들을 다 죽일 것이고 요하난은 틀림없이 주동자의 누명을 쓰게 될 판국입니다.

애굽으로 가는 게 살 길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들의 선택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오히려 살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급한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대처하는 것은 이만큼 어렵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을 아무 생각없이 우리 식으로 해치웁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고 하나님께 길을 묻는 훈련이 되지 않으면 큰 일을 만날 때 하나님의 인도를 몰라 큰 낭패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큰 일 뿐 아니라 작은 일도 별 거 아니게 보고 내 생각대로 했다가 나중에 아주 성가시게 되는 일도 사실은 종종 있습니다.

사람은 대개 습관적으로 삽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따지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오래 훈련하고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누누이 강조하신 게 자식들에게 일찍부터 신앙교육을 전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별하며 사는 것은 세상지혜를 뛰어넘는 능력이 됩니다.

찰스 라이리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통해, 최선의 방법으로 최대의 결과를 가장 오랫동안 가져오게 한다.’

최선의 방법과 최대의 결과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는 방식이 세상과 똑같지 않습니다.

세상은 원수를 갚으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이익을 위해 너무 정직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짓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천국문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이 이렇게 다른 데 이것을 어떻게 분별하고 무슨 능력으로 옳은 일을 행하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이렇게 많은 사건과 민족들의 역사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 예수님의 설교와 제자들의 증언들은 우리의 교과서입니다.

이 말씀들을 배우고 듣고, 읽어서 깨닫고 마음 깊이 저장해 두면 매일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할 때 신속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갈 길과 할 일을 지시하신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요하난의 무리들처럼 그냥 자기 원대로 살겠다는 것이고 위장 된 믿음입니다.

각박하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를 때 당장은 손해를 당하기도 하고, 이래서 될 것인지 두렵기도 합니다.

최근 미국에 있는 한 한인교회가 동성결혼과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교단을 탈퇴했습니다.

대개 교단에 가입할 때, 교회의 모든 재산은 교단 소속이 됩니다.

이 교회가 교단을 탈퇴하려면 30억짜리 예배당을 그대로 두고 나와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300명의 교인들이 투표한 결과 97%의 성도들이 건물을 주고라도 진리를 왜곡하는 교단에서 탈퇴해야 된다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죄라고 하는 것을 옳다고 배우고 가리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청년들과 어린자녀들 거느리고 예배당을 비워줘야 하는 이 교회는 당장 어려움이 있겠지만 믿음으로 배에서 나왔으니 하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주실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교회와 그 성도들을 책임지지 않으시겠습니까?

진리를 가르치신 예수님을 따르고 말씀대로 지킬 때, 당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진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할 기회가 없다면 우리 믿음이 진실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항상 세상과 말씀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끝까지 순종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축복된 남은 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5년9월6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