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예레미야22장13절-19절 (형통한 길)

남수연 2017. 11. 28. 12:21

지난 주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일생일대 중요한 시험에 긴장해 올해도 황당한 에피소드가 많았다죠.

서울고로 가야할 학생이 수험장을 착각해서 서초고로 갔다 경찰차를 타고 가까스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아침에 하필 방문이 열리지 않아 119가 와서 자물쇠를 해체하고 나서야 수험장으로 떠난 학생도 있더군요.

여늬 해나 다름없이 볼 수 있었던 장면은 시험장에 들어가는 자식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다 결국 눈물을 보이는 부모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 보면 찡하죠.

수험장으로 혼자 걸어 들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운 것은 그 순간부터 오직 혼자 힘으로 싸워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부모에게 자식 같은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 한 주간 이리저리 치이고 깨지고 힘든 일을 혼자 감당하며 살아 온 우리에게도 하나님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를 지켜보시고 견디고 이길 힘을 주셔서 오늘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하게 된 줄 믿습니다.

본문은 우리와 동일하게 자식 같이 여기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천하만국 중에서 선택해 구원의 동반자로 삼으셨던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것은 그저 과거 역사 속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인장반지라고 했던 이스라엘왕과 나라를 심판하셨다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형통한 길을 버리고 멸망 길로 가는 걸 원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형통한 길로 갈 것을 가장 원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형통한 길을 잘 찾고 그 길로 행하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선지자가 남유다의 여호야김왕의 심판을 예언한 부분입니다.

남유다는 20대왕인 시드기야왕 때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없어집니다.

그중 오늘 본문은 18대 여호야김왕에 대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몰락이 아주 임박한 시점이죠.

 

예레미야선지자는 남유다의 마지막 40년간 선지자로 사역하고 조국의 멸망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했지만 눈 앞에서 그 일이 이뤄지는 모습을 보며 예레미야는 눈물로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세상은 불법을 행한 자기편을 싸고 돌지만 하나님은 그래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또 알고 나쁜 짓을 하면 더 많이 맞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래서 때로 안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잘 사는 데, 우리가 왜 더 힘들냐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녀들을 근실히 징계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조국이 망한다는 말을 예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서는 예언서들 중에 제일 두껍습니다.

40년 동안 이만큼 많이 망국을 예언했으니 예레미야선지자가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지만 동족에게 망한다 망한다 소리를 예레미야선지자도 하고 싶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레미야서의 심판과 경고를 목사들도 잘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교회에 가장 필요한 성경은 예레미야서 인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그 반대로 보면 그게 형통하게 되는 길인데, 그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형통한 삶을 원하지만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 길인지를 알고 지킬 때 형통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이 유다 왕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이지만 우리에겐 형통한 길에 대한 메시지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본문은 먼저 여호야김이 왜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 그 죄악상을 밝힙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형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13절과 14절입니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게 비단 여호야김 왕만의 이야기가 아니네요.

이 중 일부는 그냥 우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누구나 멋있게 집을 꾸미고 넓은 창으로 좋은 전망을 보며 살고 싶잖아요?

사람이 참 서글픈 것 중 하나가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집으로 이사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누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물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무조건 죄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모두 청빈하게 살면 좋겠지만 다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적금을 타서 헌금을 드리고 기부를 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수고한 자신을 위해 유럽여행을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본을 정해 놓고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따르라고 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억지로 그렇게 만들어질 사람들도 아닙니다.

가장 좋은 길을 우리에게 지도하시지만 결국 사람들은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도 우리가 다 맘대로 살다 왔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 다른 환경과 삶을 허락하셨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허용하십니다.

돈을 벌어서 어떻게 쓸 것인지는 성령의 감동하심과 각자의 믿음대로 하면 됩니다.

단 여호야김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에서 우리 역시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13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고용하고 임금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호야김이 왕의 지위를 이용해서 국고를 마음대로 쓰고 인건비도 주지 않고 국민들을 데려다 살 집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부정과 비리가 얽히고 설켰겠죠.

물론 여호야김왕이 비참하게 죽은 이유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17절에 그의 악행에 대한 고발이 이어집니다.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누가 봐도 나라가 강대국 사이에서 풍전등화 같이 위태로운 때 여호야김은 패악한 권력놀음과 호화생활에만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퇴진한 짐바브웨 무가베대통령과 그의 처자식을 보십시오.

아내는 명품으로 두르고 아들은 61억짜리 차를 샀다고 자랑하는 부패한 사람들이 무려 37년간이나 짐바브웨를 통치했다는 것입니다.

짐바브웨는 GDP가 세계 117위인 가난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였다면 벌써 징계하셨을 것입니다.

통치자가 올바르지 못하면 국민들이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과거 역사 속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흥선대원군의 경우도 조선말에 왕실 권위를 세우려고 백성들이 어렵던 때 무리해서 경복궁을 중건했잖습니까?

경복궁 중건은 가난한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고, 무임금 노역에 동원시켜 고통을 가중시켰던 대원군의 큰 실책 중 하나였습니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일은 진행 중입니다.

국민 세금인 국정원 돈을 마음대로 가져다가 쓴 전직 대통령이 있잖습니까?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삼성 이회장의 자택 공사에 회사 돈 백억이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었죠?

얼마 전에도 대한항공 조회장의 자택 수리에 인천 영종도의 호텔 공사비 중 최소 10억을 사용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수사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좋은 집에서 살고 싶고 안락한 환경을 원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불의와 부정직한 방법과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세우는 집에 대해서 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분명하게 깨닫고 반드시 지킬 것은 불의와 부정을 끌어다가 우리 집, 우리 가업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손으로 하는 일에 불의와 부정, 거짓과 탐욕이 있다면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우리 일에 손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사업과 모든 경제활동에 있어서 이것을 잘 지킨다면 하나님은 우리 손을 축복하시고 번 돈으로 편안하게 사는 것을 왜 싫어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형통하지 않다면 많은 경우 부정직과 거짓과 지나친 욕심과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행위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한탄해야 할 것은 우리의 고집스런 죄성은 몸소 고난과 시험을 겪어봐야 무엇이 좋은지 깨닫고 성경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쓴지는 경험하지 않는 한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망한 대표자가 이스라엘이잖아요?

하나님은 죄의 해악을 분명히 가르쳐주시지만 죄를 이기고 형통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스스로 부정직과 비리와 욕심과 교활함을 버리려고 노력해야지 기복적인 신앙생활만 열심히 한다고 저절로 죄성이 변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못됩니다.

우리가 잘하는 것은 여호야김이 했던 것처럼 부정과 거짓말과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려는 그런 짓입니다.

깨어서 말씀을 붙잡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점점 과거의 죄악 속으로 회귀하는 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꼬막산지인 보성에서는 꼬막을 삶을 때 끓는 물에 넣지 않는다고 합니다.

갑자기 끓는 물에 들어가면 꼬막이 놀라서 몸을 움츠리는 바람에 크기가 쪼그라들기 때문입니다.

찬물에 넣고 서서이 끓이면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해서 꼬막이 오그라들지 않고 통통한 모양 그래도 삶아진다는 것이죠.

내 안의 부정직과 악은 처음부터 끔찍한 모습으로 드러내질 않습니다.

처세술이라는 이름과 융통성이라는 명목, 나에 대한 후한 평가와 합리화, 그런 모습으로 점점 우리를 여호야김의 죄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형통했던 사람의 대표자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왜 형통했습니까?

요셉이 옥에 갇혔을 때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요셉이 바르게 행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 때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정직하고 바른 행동을 위해 늘 우리를 채찍질하고 자녀들을 또한 그렇게 키워 모두가 형통한 길로만 다니시길 축원드립니다.

 

또 여호야김 왕이 왕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렸다는 것에 심판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왕으로서 당연히 국가를 바르게 세우고 국민들을 안전하고 공평하게 살게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자기만을 위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도 권력과 명예에는 의무를 요구합니다.

내 삶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권세와 명예를 주셨습니다.

고린도서에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신, 대사라고 밝힙니다.

우리가 속한 어디서든 우리는 예수님이 파견하신 대사인 것입니다.

현대교회는 개인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개인의 복된 신앙생활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주님의 교회공동체이고 더 넓게는 이 세상 전체를 포괄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권세와 현실의 지위를 바르게 행사함으로 주변에 무고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없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일지라도 약자라는 이유로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심지어 원수들이 재앙을 만나 고생할 때조차 좋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잠언2417절에서 말씀하셨죠.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역사이래로 올바른 기독교가 뿌리 내린 사회에서는 수많은 부패와 불공평과 악이 제거되고 무고한 자들의 고통이 해소되고 평등을 누렸습니다.

서구 선진국들의 복지사회가 다 기독교정신 위에 시작된 것이잖습니까?

우리나라가 폐허 위에서 시작해 이만큼 부국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한국교회의 헌신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은 내가, 나를 위하여라는 이기적인 목적만으로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 크던 작던 믿음의 분량에 맞는 사명을 골고루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충실하게 감당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없이 오직 나만을 위해 모으고 쓰는 삶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누가봐도 나라가 몰락하고 있는데 국민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비웃듯이 화려한 궁전을 짓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큰 집을 짓고, 화려하게 치장 하는 것은 현실의 불안과 신앙의 부재와 내면의 궁핍을 가리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겉을 그럴 듯하게 꾸미고 허세를 부리는 내면이 그렇습니다.

자신을 꾸미는 사람은 겉모양에 신경 쓰지만 자신을 가꾸는 사람은 내면에 신경을 씁니다.

여호야김의 왕좌도, 그가 세운 백향목 궁도 다 불살라 없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백향목 궁에서 영원한 권력을 누리려 했지만 십년을 살지 못하고 왕좌에서 내려와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셨습니다.

15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이 우리 각자에겐 어떻게 들리고 있습니까?

윌리엄 펜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의 진정한 목적은 결코 끝나지 않는 삶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의 모든 삶은 영생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자칫하면 눈에 보이는 현재의 삶을 꾸미는 데 빠져 영생하는 나를 가꾸는 일에 아무 것도 못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욕망에 지지 말고 영원히 존재할 믿음의 나를 가꾸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형통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요시야왕을 보라고 하십니다.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하나님이 저주를 퍼부은 여호야김왕과 얼마나 대비가 됩니까?

요시야왕은 이스라엘 역사 중 다윗왕 만큼 존경받으며 전무후무하게 이스라엘의 신앙개혁을 일으킨 왕입니다.

여기서 먹고 마지지 않았다고 번역된 부분은 원문대로 보면 먹고 마셨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요시야왕이 자신의 허리 띠를 졸라매고 금욕하며 통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시야가 왕의 권력 안에서 먹고 마셨지만 아울러 정의와 공의를 행했기 때문에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올바르고 공정한 사람의 길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시편891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정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정의와 공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만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기독교는 없는 것입니다.

명성교회의 세습 문제로 한국교회가 또 한번 수치를 당하고 있죠.

아무리 그들끼리 세상의 소리를 무시하고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그건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합니다.

성도도 그래야 합니다.

요시야왕은 그의 생애에 일관적으로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행위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요시야왕의 정의와 공의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공정히 변호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시야가 이룬 전무후무한 신앙개혁 때문에 그가 형통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요시야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인자를 베푼 것 때문에 형통했다는 것을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요시야가 신앙개혁을 일으키고 유월절을 지키고, 산당과 우상을 척결한 일을 대견하게 보시고 형통하게 하실 것 같은 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도 종교적 열심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 이웃에 대해 긍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요시야가 가난하고 억울한 자들에게 마음을 통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웃과 곤고한 자들에 대해 냉담한 것은 반대로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아무리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낸다 해도 정말 그것이 하나님을 알고 하는 것인지 단지 자신을 위한 종교심일 뿐인지는 이웃을 대하는 마음에서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이건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와 공의를 행할 그런 힘도 없고 그런 존재들도 아닙니다.

나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있지만 남에 대한 긍휼은 메말라 있습니다.

내가 정의를 행하고 공의를 따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좀 나은 수준이란 게 오늘도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구나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국민들과 왕이 너나 할 것 없이 부정과 불의와 탐욕에 빠져 심판받기에 이르렀습니까?

그들이 바로 모든 사람들의 본성과 경향성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 약해 빠진 이스라엘사람들의 이야기를 성경이 이렇게 추적하고 기록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서는 정의와 공의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시야왕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표의 사람입니다.

다윗 같은 왕, 요시야 같은 왕인 다윗의 후손이 오실 것에 대한 기대하게 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나도 요시야왕 처럼 공의와 정의를 행하고 약자를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고 형통하고 복된 삶이 되어야지 라고 생각한다면 절반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었다면 왜 이스라엘이 망했겠습니까?

인간의 본성은 절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형통한 삶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그렇게 살지 못한 나를 돌아보며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가 그렇기에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내 집을 크게 하고, 내 삶을 꾸미고, 나를 위해 살았지 무슨 대단한 이타적인 삶을 산게 아니잖습니까?

언제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 문제에 그렇게 관여해 왔습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은 그게 당연한 것이지 나만큼 살아야한다는 생각조차 못합니다.

여호야김의 부정축재와 비리와 남을 속이고 더 가지려하는 것이 우리 죄와 규모의 차이지 대단히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야김처럼 하나님의 공의 앞에 망하지 않으려면 대속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섰을 때 죄가 산더미만큼이잖아요?

그것이 성경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속죄하시고 나서야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임하십니다.

그래야 우리의 화인 맞은 양심이 새롭게 됩니다.

그 마음이 비로서 정의와 공의를 알고 이웃에 마음을 통하는 삶을 조금씩이나마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시편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우리를 형통하게 이끄는 길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길입니다.

정의와 공의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여호야김의 죄를 멀리하고, 정의롭고 공정하게 살아갈 때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또 인자함과 진실함의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향해 나쁜 마음을 먹지 않고, 욕하지 않고, 긍휼한 마음을 가질 때 형통한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살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굳게 붙들어야 심판을 이길 수 있음을 항상 되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불행한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복되고 형통한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17년11월26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