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40도 폭염에 가스불 앞에서 음식 만드시고, 고객 만나러 다니시고, 에어컨도 없이 고생하신 분들까지 다들 힘든 한 주간 보내셨습니다.
이젠 더위가 재난인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나온 옛날 우리나라 기온 통계표를 보니 의외였습니다.
1975년까지의 평균 기온을 보니 한 겨울 평균이 영하 4도, 한 여름 평균이 25도 안팎이더군요.
정말 환상적인 기후였죠?
지구 온난화로 인해 앞으로 삼십년 뒤엔 우리나라도 여름더위가 5개월이 될 거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자연조건은 점점 살기 힘들어져 갈 것입니다.
어떤 미래를 맞을지 두려워 할 것은 없지만 지혜를 모아 철저히 준비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우리에겐 항상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를 도와주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입니다.
날이 너무 덥다보니 기력도 떨어지고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 무더위를 뚫고 오신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힘이 몸과 영혼을 강하게 하시고 새롭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예레미야서에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 조목사님께서 구약성경 전체를 잘 정리해 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셨을 것입니다.
구원의 원리와 직결 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단히만 알고 있어도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기초를 너무 모르면 설교도 더 졸립니다.
아주 짧게 정리해 드릴 테니 잘 들으시고 머리 속에 넣어 두시기 바랍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건데 잘 안 들어두면 항상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조상인 아브라함과 야곱이 살던 가나안땅의 족장시대입니다.
그 다음 기근으로 인해 야곱 가족 전체가 애굽에 내려갔다 거기서 포로가 된 4백년 포로시대로 이어집니다.
이들을 모세가 이끌고 출애굽한 40년 광야 시대를 지내죠.
모세가 죽은 뒤 여호수아가 이들을 데리고 다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 나라를 세웁니다.
건국초기 삼백오십여년은 삼손과 같은 사사들이 다스린 사사시대입니다.
그리고 1대 사울왕을 시작으로 왕정시대가 열립니다.
2대가 다윗왕이고 3대가 솔로몬왕이고 솔로몬의 아들 때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집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반역하다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당합니다.
그 후 약 백오십년 후에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에 멸망하고 국민들은 다시 포로로 잡혀 갑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선지자의 예언대로 70년만에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온 포로 귀환시대까지가 구약성경의 배경입니다.
모든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을 이 간단한 역사 속 어디에 있는지를 놓고 보면 답답하지가 않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이야기는 그 중 광야시대에 놓으면 되죠.
에스더는 포로시대에 놓으면 되고 느헤미야는 포로귀환 시대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시대는 북왕조는 이미 멸망하고, 남유다 멸망 전 40년간 활동한 예레미야선지자 때입니다.
폐망의 징조가 불길하게 드리워졌던 시대죠.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주권을 뺏기던 구한말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패망을 앞 둔 이스라엘에 대한 예레미야선지자의 사역은 바벨론을 통한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이 주가 됩니다.
9장 전체엔 장차 당하게 될 비참한 재앙의 모습을 눈에 보는 것처럼 처절하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본문 말씀을 보면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또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경각심을 갖고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세계적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경고의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도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결과는 참담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진실 된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본문 두 절 말씀의 내용은 ‘자랑하지 말라’와 ‘자랑하라’로 구분됩니다.
제가 왜 배경을 길게 설명했냐하면 이 말씀이 임박한 심판의 메시지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참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면 좋겠다는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랑하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자랑을 좀 삼가며 살라는 것이구나’ 이런 메지지가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어느 쪽을 선택해서 생명을 구원할까의 문제인 만큼 더욱 주목해서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23절은 ‘이런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혜, 힘, 돈입니다.
이런게 있는 데 자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똑똑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남들이 선망하는 전문직이나 대기업에 취직하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런 사람은 자기 한사람 자랑으로만 끝나지 않죠.
내 자식이 그렇다는 것, 심지어 나 그런 사람 안다는 것 가지고도 여러 사람이 자랑합니다.
부자라면 그 재물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전에 기사를 보니 한국 사람들이 외제차를 좋아하는 것은 승차감보다 하차감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내릴 때 사람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느끼는 그 하차감이 더 만족스럽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랑은 당연한 본성인데 하나님은 왜 지혜와 힘과 돈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먼저는 일반적으로 잠언 27장1절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들이 내일 하루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만 좋은 머리 잘못 써서 결국 재판장에 앉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성경에서 사람의 지혜의 허무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의 일생 중에 큰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했을 때입니다.
압살롬의 참모 중에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그의 입으로 지략을 내면 사람들이 그걸 하나님께 받은 말씀과 같이 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완벽히 제거할 작전회의에서 이 아히도벨의 작전이 채택이 되지 않고 후새의 작전이 채택이 됩니다.
사람들이 다 후새의 작전이 더 낫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러자 아히도벨이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자기보다 더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나오자 자존심이 무너지고 지독한 수치심이 몰려왔던 것이죠.
살 맛을 잃은 것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지혜가 이렇게 허무합니다.
청소년부, 어디를 가도 나보다 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있지 않나요?
자랑한다는 것은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비교하면 언제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 나보다 더 앞서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도 재능도 비교해서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 힘으로 가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에서 분명히 말씀하잖아요?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지혜와 재능을 주시고 어떻게 세상에서 쓸모 있게 사용할지도 청사진을 갖고 계십니다.
내가 앞 일을 결정한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의 노력과 준비를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자랑한다면 반드시 남과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앞으로 중요한 진로와 진학과 취업이 있는 학생들과 청년들은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자들이 자랑하는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나가던 중소기업도 어찌어찌 하다가 빚만 떠안고 문을 닫는 일들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지엠자동차 떠난 어두운 군산 경제를 보면 그런 도시 풍경을 몇 년 전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힘과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에 가면 나는 건강에는 자신 있었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제가 최근 오랜만에 친구들을 좀 만났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본인이 유방암으로 투병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남편이 위암수술을 했고, 마지막 한 사람은 저와 만난 다음날 남편이 위암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누가 힘과 건강을 자랑하겠습니까?
권력도, 지위도, 의지했던 사람도 영원하지 않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모세는 시편90편에서 인생 80년의 자랑이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가진 무엇으로 자랑하겠습니까?
또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고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실제 상황을 근거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본장의 3절을 보면 이 당시 이스라엘이 강성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강성했던 때가 별로 없습니다.
이 당시는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침략하던 앗수르가 바벨론에 패망하고 잠시 나라가 안정되었던 때입니다.
강대국의 압제에서 잠시 벗어나 좀 살만해지자 금방 그걸 자랑하고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돈으로 용병을 살 수 있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애굽과 동맹하고 바벨론을 이길 수 있다고 자만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벨론은 나의 심판의 도구다, 항복하고 목숨을 부지하라, 연단의 때가 지나면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하나님을 깔보는 것이죠.
결국 두 나라가 다 바벨론에 패망합니다.
사람이 자랑하고 자만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위라는 뜻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랑하는 것을 붙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사람들이 조금만 바빠지고, 중요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을 떠나잖아요?
결과는 역사 속의 이스라엘이 보여줍니다.
하나님도 잃고 자랑하던 모든 것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이것을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진짜 우리가 자랑할 만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상 온 땅을 경영해 가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과 얼마나 친하십니까?
전에 어떤 집사님께 제가 ‘하나님 집사님을 알고 계실 것 같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글쎄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알고 계실 것 같지 않은데요’
이러시면 안됩니다.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든, 체험적인 신앙을 통해서든 ‘나는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부지런히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하나님을 안다’ 그런 확신과 믿음이 생기면 그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자랑이 될 것입니다.
저절로 그게 큰 자랑이 됩니다.
지혜와 힘과 돈, 없어도 초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자랑거리가 없는 삶이라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자랑거리가 많은 것은 축복 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자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했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과 부요와 행복을 소유한 것이잖아요?
이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좋은 것들, 강점들도 그걸로 자랑삼으면 그것과 함께 망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자랑하면 우리의 복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자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부지런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잖아요?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온 세상에 행하시는 분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우리 성경에 ‘사랑’ 또는 ‘은혜’, ‘인애’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상대에 대한 측은함으로 조건 없이 흘러나오는 불변의 사랑을 말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단어죠?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에 대해 항상 측은한 마음이 있습니다.
더 좋은 집에서 태어나지 못해 고생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늘 있죠.
늘 책을 붙잡고 있고, 이 찜통 더위에 학원 다니느라 고생하지만 어찌 될지 모르는 아이들 미래를 생각하면 불쌍한 생각이 들죠.
부모의 측은히 여기는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에 좀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저처럼 어머니를 떠나 보낸 사람들은 때로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데 순간 쓸쓸함을 느낍니다.
요즘 같이 더운 날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참깨와 잣을 갈아 넣은 그 시원한 콩국물 한 병이 참 그립습니다.
자식들이 이 더위에 우리한테 짜증내고 억지를 부리는 게 다 자기를 받아 줄 유일한 대상인 줄 알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의 부모만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겐 더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하나님아버지가 계십니다.
때로 맘 편히 쉬지 못하고 늘 종종대야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고생하는 것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몸이 아파도 결국은 혼자 앓고 견뎌야지 누가 살뜰히 챙겨주겠습니까?
그런 내가 불쌍해 울컥해 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 마음을 살며시 위로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너 괜찮니?’하고 다가 오시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강한 책망과 죄를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만큼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거둘 수 없는 사랑을 절절히 표현 한 성경이 없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이것이 예레미야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더 절실히 깨닫고 세상에서 자랑하며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이런 헤세드의 하나님은 한편, 정의와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정의와 공의는 악을 바로 잡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 행위에 따라 정의와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측은히 여기셔서 베푸신 헤세드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입니다.
우리가 불쌍해서 독생자를 주셨잖아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헤세드를 멸시한 사람들에 대해 마지막 날 주님께서 친히 모든 사람들 그 선악 간에 심판하십니다.
이것을 예레미야2장에서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요즘 우리사회가 사법부의 비리와 타락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법이 공정하지 못할 때 그 사회가 가장 불안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법부에서 형평성을 무시하고 구속해야 할 죄인들을 줄줄이 풀어 줄 때 국민들 마음속에 울분이 쌓이잖아요?
우리는 잠시 불법주차 해 놓고도 딱지 뗄까봐 안절부절 합니다.
권력자 재벌들은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산다지요.
최근 최저근로시간, 최저임금 문제로 대기업들이 타격받았다는 소리는 못 듣잖아요?
겨우 작은 사업체 하나 갖고 힘들여 경영하는 사람들만 직격탄을 맞고 있습니다.
사람 사회에서 공정하고 공평하게 법이 적용되길 바라는 건 순진무구한 생각인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유일하게 선택하고 키우셨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다른 국가들 보다 더 공의가 무너진 것을 얼마나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까?
오늘 ‘나는 인애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을 안다면 너희도 그렇게 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렸지만 인애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보면 그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 믿지 말라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더 이상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불의한 세상은 장차 하나님이 한 점 의혹도 없이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인애와 공의와 정의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있고 힘이 있고 재산이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도 없고 힘도 없고 돈도 없으십니까?
하나님이 나로 인해 자랑하라고 하셨다면 그것은 맞습니다.
지혜보다 힘보다 돈보다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이 더욱 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시잖아요?
지금 당장은 가진 것이 부족하다 해도 점점 더 큰 위로와 기쁨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이 땅의 모든 차별과 우열이 없어집니다.
오히려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와 공의를 깨닫고 그렇게 살았는지가 우리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고 점점 더 복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018년8월5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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