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sIfX615Qr1c
<2019년3월24일 주일설교 영상>
지난 주 한 종교분야 강사가 방송에서 백억부자를 만났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부자가 자기는 수중에 백억 밖에는 쓸 돈이 없어서 가난하다고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빌딩은 다 삼백억이 넘는다며 그래서 힘들다고 했다나요.
이 강사의 주장은 소유에 대한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행복하게 느끼는 마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죠.
이 기사를 읽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댓글을 좀 보았습니다.
많은 댓글이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고 분개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돈이 없는 고통을 아느냐, 어차피 불행할 거면 재산이 많은 게 더 낫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섣불리 감성팔이를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성으로 위로받기엔 다들 현실이 너무 호되게 힘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도 물가에 심어진 나무의 아름다움으로 단지 우리 마음을 위로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막같이 황폐한 세상에서 풍요롭게 생존하는 실제적인 믿음의 방식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지혜와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 살아갈 것인지 말씀을 통해 잘 깨닫고 그렇게 복되게 살아야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여주십니다.
1. 먼저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힘을 삼는 사람입니다.
그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5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향한 섬뜩한 경고입니다.
성경은 가장 최악의 죄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죄라고 정합니다.
또 세상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선지자 당시에 이스라엘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선지자는 그런 남유다의 멸망을 예고하잖아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와 악행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바벨론이 침공하고 패망시킬 것을 예언하고 죄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왕과 관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비웃듯이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애굽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대비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육신의 힘을 의지한 것이죠.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오늘 말씀으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이렇게 저주를 언급하는 것에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무고한 인간을 저주하고 벌을 준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신화에 나오는 신들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신화는 인간이 만들어 냈기에 괜하게 남을 괴롭히는 인간의 본성이 투영된 것이죠.
사람들은 하나님을 종종 그런 신으로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저주스러운 둥지를 겹겹이 짓고 있는 사람들을 거기서 꺼내주기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저주받을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두 번 경고 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무려 40년이나 반복하고 반복하시다 보니 예레미야서가 이렇게 두꺼워진 것입니다.
결국은 멸망당할 이스라엘과 이렇게 오래 씨름하신 것이죠.
이것이 단지 한 나라 고대 이스라엘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시겠습니까?
예레미야서의 다급한 경고와 책망과 탄식과 그리스도를 통한 미래의 소망은 하나님을 떠나 저주받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저주를 내리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저주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벗어나 복된 길로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복된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좀 의지할 만한 힘을 가진 사람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없는 행운인 것이죠.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이 능력 있고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격 심리학자들은 행복의 약 50%가 유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좋은 유전자를 받고,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면 더 행복하다는 것이죠.
요즘 법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간 학생들 간에도 빈부문제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로스쿨에 들어갈 정도면 다 수재들이잖아요?
그런데 돈이 변호사시험 합격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변호사시험 합격률을 50%에 맞춰 놓다보니 시험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집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공부하는 사람들은 특별 과외를 받으며 준비하는 사람들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변호사시험의 경우 오년 안에 합격하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섯 번 탈락한 사람을 오탈자라고 부른다죠.
남은 건 대출금 삼천만원 뿐이었다고 한 오탈자는 허탄하게 말하더군요.
그러니 세상이 생각하는 복 받은 사람은 머리가 좋고 재능도 있고 의지할만한 부모를 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만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오늘 말씀의 잣대를 대면 저주받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려주면 굉장히 화를 내겠지만요.
왜 성경은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과격한 심판을 내리는 것일까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9절에서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이것을 알리요마는
사람들의 동기가 선하다면 열심히 살아가는 게 왜 나쁘겠습니까?
사람들은 외적인 성공이면 다 선으로 여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성공의 이면엔 다 거짓과 부패로 얼룩져 있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더 높이 서려면 이 땅에선 반드시 남을 밟고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는데 사람 위에 섰다면 반드시 어떤 면에서든 죄가 개입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먹고 살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사실 남보다 좀 더 잘 산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는 마땅히 얻을 것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제로섬 게임이라고 하잖아요?
사회전체의 이익이 일정하기에 한쪽이 득을 보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유한 것을 마땅히 여기면 안되는 것입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누려야 하고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것을 따져 물으실 것입니다.
요즘 같은 미디어 시대엔 재벌이나 정치인이나 유력인사들의 인격과 삶이 TV를 통해 고스란히 생중계가 됩니다.
정부각료로 추천 된 인사들을 검증하기 위해 사생활을 들여다보면 불의와 편법으로 얼룩지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의 인생은 거짓과 부패한 마음 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수정해 줘야 할 가장 중요한 양심이 부패했으니 심각한 죄를 짓고도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던 한인 사장이 현지 직원들의 월급을 떼어 먹고 야반도주한 사건으로 우리나라가 참 부끄럽습니다.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체불임금이 60억을 넘는다고 합니다.
아내 명의 집을 처분해서 6억인가를 마련했다는 회사 사장의 말이 참 어이가 없더군요.
현지에서 10년 살다보니 자기보다 10배 이상 체불하고 달아난 사람도 많은 데 자기만 표적이 된 게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인공노할 악을 저지르고도 자기가 옳다고 뻔뻔하게 나오는 걸 보면 양심 자체가 부패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들을 정확하게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판단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어떤 훌륭한 인간의 업적도 선으로만 이뤄진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훌륭할수록 부패하고 악한 마음을 교묘히 위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의로운 사람을 하나님이 저주할까봐 걱정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정체를 다 알 수 없고 드러나지도 않은 인간의 내면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10절,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이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공의의 눈에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에겐 저주입니다.
이 땅의 공소시효는 지나고, 증거가 없어서 세상의 형벌은 면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생을 결산할 때 그럴 일은 없습니다.
한번도 꺼내 놓지 않은 그 폐부에 있는 것까지도 심판하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결말은 어떻다고 합니까?
6절,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권력자들을 많이 알고 육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번창하고 잘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 그저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세상을 부러워말고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패한 마음을 따라 욕심을 채우며 교만하게 살아가는 죄인들의 집은 화려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곳은 영혼이 쉴 수 없는 광야의 간조한 곳입니다
소금기가 있어 생명이 자랄 수 없는 건건한 땅입니다.
사람이 행복할 수 없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모든 게 풍성하고 얼굴엔 기름기가 흐르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닐지 모르지만 그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재벌가의 자식들이 왜 그렇게 마약류에 손을 댑니까?
이번에도 수면마취제 프로포폴을 투약했다는 의혹을 받는 재벌2세가 있잖아요?
그 많은 돈과 권력에도 영혼이 피폐하다는 오늘 말씀의 증거입니다.
돈이 많던 적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받을 저주는 단지 이 땅의 삶의 황폐함이 전부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 눈으로 좋은 일, 천국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저주인 것이죠.
그러나 현세에서도 한 때 무성해 보이는 삶이 어느 덧 허망하게 무너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11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2.그렇다면 이에 대조되는 복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7절,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내 편이라서 복을 주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을 알기에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게 곧 거짓과 부패한 본성으로 산다는 걸 알기에, 그 결말이 내게 저주라는 것을 알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여전히 내 머리와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결과는 안 믿는 사람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잖아요?
지난 한 주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내 머리로 살았습니까, 순간 순간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며 사셨습니까?
거짓과 부패한 마음으로 살았잖아요.
우리는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먼저는 우리가 그런 사람이란 걸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내 안에서 나오는 계획도 온전치 못합니다.
그걸 알기에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시도록 구하는 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믿고 살다간 반드시 실패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부패하고 거짓된 본성에서 나오고 저주를 불러오는 것이라고 오늘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게 지혜와 힘과 능력이 없고 지금의 상황이 어둡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렇다 해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는 있잖아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들이란 것을 살아가면서 점점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복된 성도들을 이렇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복된 사람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힘을 공급받기 위해 뿌리를 뻗치고 있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의 사인을 기다리고 이미 깨달은 말씀대로 성실히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요란하게 큰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뿌리를 깊이 내릴수록 큰 나무가 되고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막의 떨기나무 같은 사람은 마치 광야의 마른 떨기나무가 굴러다니듯이 항상 요란하고 굉장한 일을 하는 것처럼 분주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보면 정작 풍성하고 좋은 열매가 달리지 않습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을 향해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평지의 나무들보다 강둑의 나무들이 훨씬 더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그렇기에 강둑의 나무들은 더위에도 잎이 시들지 않고 가뭄에도 윤기가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태풍이 덮칠 때 평지의 나무들이 다 뿌리 채 뽑혀도 강둑에 심겨진 나무들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좋은 곳에 심으셨다면 우리가 할 일은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단단히 접속해 살아갈 때 성도들의 삶은 걱정 할 것 없이 풍성한 은혜가 공급 됩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는 더위에도 가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걱정이 없다고 합니다.
더위도 없고, 가뭄도 없다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도 평지의 나무들처럼 똑같이 더위를 겪고 때로 가뭄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로 끊임없이 물을 빨아올리기 때문에 그 잎사귀는 마르지 않고 청청합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절을 토막 내 살펴보면 더위와 가뭄에 고통당하던 때가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온 시간들을 통째로 보면 그 혹독한 가뭄에도 말라 죽지 않고 살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힘과 지혜와 도우심이 공급되었기에 고난을 이기고 이렇게 푸르고 생기 있고 열매를 맺으며 서있는 것입니다.
때로 이 지리한 현실을 벗고 좀 새로운 삶으로 탈출하고 싶기도 합니다.
나를 심으신 지금의 현실, 거기서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면 풍성하고 행복한 결실이 그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막의 떨기나무가 사람이 없는 땅에 고독하게 사는 것과 달리 결실이 풍성한 나무엔 생명들이 모입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 새와 곤충이 모이고 사람도 모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의 주변엔 결실을 나눌 사람들이 즐겁게 모여들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성도들이 삶에 복을 받으면 자기 혼자 그걸 누리지 않습니다.
가족과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타인들과 나누며 물질로 인해 더 많은 좋은 관계들이 생기는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복 있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복과 저주의 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복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이 잘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함께 잘되는 것은 영혼과 육체를 함께 지으신 하나님의 원리에 일치됩니다.
물론 신앙의 삶에 완벽한 공식은 없습니다.
때로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만족과 높은 경지의 기쁨을 누리지만 삶에는 큰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일만 끊어서 보지 말고 조금 더 길게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저주라고 생각했던 일들도 복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좀 더 길게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는 어쨌든 당할 수밖에 없는 고난도 영화로운 천국의 삶에서 볼 때 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서원이 유학문제를 조금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서원이가 고든콘웰 신학교를 선택하기로 결정을 했다고 전에 말씀드렸죠.
그런데 그 후에 보스턴대학과 고든 콘웰을 동시에 다닐 수 있는 길이 생겼습니다.
두 대학에서 전 과정을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고든콘웰에서 일부 수업만 받아도 좋다는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두 수업을 병행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보스턴대학에 다니며 거기서 받는 생활비로 부족한 고든 콘웰의 학비까지 커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학자가 된다 해도 일반학문의 박사학위를 가진 것이 나쁘지는 않은 것이죠.
제가 교회를 개척해서 여기까지 오는 데 사실 우리 부부의 퇴직금이 다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전부터 서원이는 공부시킬 돈이 없으니 하나님이 시켜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이번에 고든콘웰에서 받는 장학금을 빼고도 보스턴에서 받는 학비와 생활비로 받는 수혜가 일년에 칠천만원쯤 됩니다.
오년을 생각할 때 삼억오천만원 정도를 받는 것이죠.
제가 교회에 썼던 만큼 서원이가 그대로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또 돈이 전부겠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던 결과는 신앙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너무나 값지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된 것이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결코 틀리지 않다는 걸 보여주시는 일화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여기까지 과정이 쉽게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 길을 따라 가려는 성도님들께도 반드시 큰 축복을 허락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특히 우리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각자에게 예정하신 보람되고 복된 길을 잘 인도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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