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를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 대림절이 지나면 성탄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역사 속에서 어떻게 예언되고 그대로 성취되어 우리에게 오셨는지를 아는 것은 믿음의 뿌리를 더 깊고 강하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이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인격에 채워갈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성경에 계시해주신 하나님을 배움으로 가능해집니다.
역사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의 터전을 깊고 넓게 만들어 줍니다.
좁고 얕은 터 위에는 큰 믿음을 세우기가 힘듭니다.
삶이 무난하고 평탄할 때는 세상이 우리에게 미소 짓는 것 같지만 세상도 우리 마음도 조석으로 돌변합니다.
예수님께 깊게 뿌리내린 신앙만이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나지 않는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야 왕이 오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 믿는 바 예수님을 더 풍성히 알고 우리의 심령에 깊고 넓은 지식과 은혜가 새겨지길 소망합니다.
먼저 1절과 2절에는 악한 지도자, 목자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지난주 나누었던 22장의 말씀은 남유다 마지막 왕들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었습니다.
오늘 23장은 나쁜 목자, 위선적인 신앙 지도자에 대한 심판선언 입니다.
애석하게도 이런 지도자를 만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앙도 삶도 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양 떼를 잘못 인도한 신앙지도자들에 크게 진노하십니다.
보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양 떼들을 기르도록 목자를 세우신다는 것을 먼저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새로 태어난 생명을 잘 성장유지 시키고 안전하게 예수님 안에 있도록 목자들을 통해 인도하십니다.
인생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도자를 주십니다.
낳고 잘 길러주는 부모를 만나는 것이 최우선의 축복입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좋겠지만 부모를 선택해서 세상에 나올 수는 없죠.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은 평생을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갖춘 좋은 부모를 만나지는 못했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부모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종교분쟁을 많이 수임하는 엄상0 변호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함경도에서 피난 내려온 이분의 어머니는 과거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날품을 팔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셨습니다.
외아들인 엄변호사에게도 일부러 가난한 삶을 통해 겸손이 몸에 배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엄변호사님이 40대에 작은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평생 무섭게 모은 돈으로 서초동 법원 담 옆에 4층 건물을 하나 사주며 이렇게 말하셨다고 합니다.
‘내 아들이 돈에 팔려 영혼을 잃는 변호사가 되지 말라고 이 건물을 사주니 어떤 경우에도 더러운 짓으로 힘든 사람들 마음에 멍들지 않게 해라’
엄변호사님이 말하길 그 건물 덕에 돈 몇 푼에 더러운 일에 가담하지 않을 자유를 얻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정신적, 물질적 유산이라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자식들에게 건물을 남겨주진 못할지라도 우리는 더 나은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고, 바른 신앙의 모습으로 자식들의 인생의 좋은 지도자가 되어 주어야 할 줄 믿습니다.
또 사람은 자라면서 교육하는 선생님을 만나고 학교와 직장의 선배들을 알게 되고 존경할만한 인물들도 갖게 됩니다.
좋은 인도자와의 만남은 인생을 바꿔 놓습니다.
우리와 자녀들의 인생에서 좋은 인도자를 만나게 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무엇보다 신앙의 지도자를 잘못 만나 망한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사람들의 신앙을 잘못 지도했는지 본문 뒤 17절에서 드러납니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무시하며 사는 사람들을 책망하기는 커녕 너희가 다 평안하고 재앙은 결코 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위로와 선심성 축복이 이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일주일을 살펴보면 세속적인 나를 위해 수고했지 믿음으로 살다 지쳐 위로 받을 상황은 별로 아니잖아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회개해야 할 죄가 더 많은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위로받기 보다는 책망을 받고 돌이키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이런 모든 죄악을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용서받기 위한 제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깨끗해져야 하나님과 화목이 오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좋은 것들이 가로막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잘못은 설교를 통해서 뉘우치고 다시 말씀대로 살아갈 힘을 얻는 게 예배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데도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이유는 대개 환심을 사고 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멸망이 임박한 시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자기 영달에 있었지 양들의 영혼에는 관심도 없고 돌 볼 생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며 왜 매일 갈등을 겪고 마음이 엇갈리고 기분이 상하고 그렇습니까?
부모니까 자식을 바르게 키우려고 옳은 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듣기 싫어서 사춘기 아이들은 친구가 좋다고 밖으로 나돌고 하는 것이죠.
사랑한다면 쓴 소리, 약이 되는 소리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인기나 얻으려고 좋은 말을 하는 나쁜 목자들 때문에 점점 더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이 본문 뒤에 이어집니다.
22절입니다.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만일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해서 이들이 바벨론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사로잡혀 갈 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놔 두었겠냐는 것입니다.
당장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라고 고함을 치지 않았겠냐는 것이죠.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자식들에게, 가족들에게 제발 돌이키라고 때로 고함을 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불행은 자신의 악함에다 설상가상 악한 목자를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 줄 신앙의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도 제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해야 한다는 부담과 두려움이 항상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저도 본성적으로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쁜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군들 악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전하려고 하겠습니까?
엄변호사가 사이비교주에게 피해당한 사람들의 변호를 맡다보니 유명 교주들을 많이 만났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은 보기에도 남다른 묘한 악의 기운이 서려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랬겠냐는 것입니다.
평범한 종교인으로 시작해서 점점 종교적 망상에 빠지고 거짓 교훈을 가르치며 신도들의 돈을 깔고 앉아 교주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속담에 여우가 설교를 하면 닭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전했을 때 베뢰아 도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그 말이 맞는지 매일 성경을 뒤졌다고 합니다.
우리 영혼을 위해 성경대로 인지 아닌지 분별할만한 신앙지식을 스스로 갖추어야 합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 있고, 성경을 펴고 지혜를 구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지도하고 가르쳐 주십니다.
얼마든지 성경을 통해서 바른 길, 복된 길을 찾고 따를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을 잘 읽어보면 거짓선지자들은 꿈꿨다, 계시 받았다고 백성들을 현혹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꿈을 믿지 말고, 예언을 믿지 말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읽고 배울 수 있는 때 열심히 익혀야 하고 매일 성경을 읽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며 몸에 기억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백성들을 망하는 대로 끌고 간 신앙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지만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이미 하나님께 멀어져 방탕하던 국민들은 내쳐져 먼 바벨론 땅으로 끌려가 회한의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이 모여질 때 우리는 가장 복되고 형통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예수님을 잘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나 3절과 4절은 이렇게 끌려간 이스라엘을 다시 본토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있는 한 어떤 시련과 징계라 할지라도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의 힘만으로 구원을 이뤄간다면 이미 우리는 발길을 돌려 세상으로 갔을 것입니다.
두둘겨 패서라도 다시 그 품 안에 모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 견고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들을 다시 원상복귀 시키실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귀환시킨다는 말씀입니다.
34장을 보면 심지어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이들이 잡혀 간 바벨론 나라에서도 상하고 약해지지 않게 잘 돌보실 것이라고합니다.
무화과가 드셔보셨죠?
얼마나 잘 뭉개지고 잘 상합니까?
그런데 바구니에 담긴 좋은 무화과를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시고 내가 그들을 이렇게 잘 돌보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도 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바벨론제국에서 하나님은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 같은 지도자들을 잘 키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기간이 끝나면 이스라엘을 다시 본토로 옮겨 생육이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축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어리둥절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실제로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70년 뒤에 역사적으로 일부분이 성취됩니다.
바벨론이 멸망한 뒤 패권을 잡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칙령을 내려 이스라엘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합니다.
그리고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출중하고 경건한 인물들을 통해 백성을 가르치고 예루살렘에 성전과 도시를 재건합니다.
이런 역사를 보면 대체 왜 하나님은 이 상대할 가치도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심판했다, 다시 불렀다, 화내셨다, 긍휼히 여기셨다 하시는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애착을 요즘 말로 1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들의 마음에 화인처럼 찍힌 그 사랑을 헤아리기나 합니까?
아무리 효자라도 부모마음의 깊이를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에 때로 아픈 매를 들기도 하지만 낙담해 지친 우리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픔을 만지시고 위로하십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도 하지만 고난 뒤에 더 나은 위로와 축복을 하나님께 받습니다.
그렇기에 세월이 갈수록 신앙과 삶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항상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치닫는 인간의 본성에 하나님은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마련하고 이루어 가십니다.
이스라엘을 풀어 준 고레스왕은 구원이 절대적 일방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선처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노예가 얼마나 큰 국가의 자산인데 그냥 풀어 보내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이 심판하신 가나안의 원주민보다 더 부패하고 악을 행했기에 똑같이 진멸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 그들을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이 그렇게 선처해 주셨습니까?
그 이유가 5,6절에서 밝혀집니다.
5절과 6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다윗과 맺은 언약대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다윗의 한 가지’ 와 그 왕은 다윗왕조의 다른 왕과 달리 ‘공의와 정의를 행한다’는 것과 ‘여호와는 우리의 공의’가 될 거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일어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시고 그의 공의가 이스라엘의 공의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불려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사무엘하 7장을 보면 다윗과 언약하시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위를 주고 다스리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그래서 이스라엘은 절대로 다윗왕조가 멸망하지 않을 것을 믿고 방종하다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백년을 이어 온 다윗왕조에 대해 이미 하나님은 염증을 느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았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이방신전을 지으며 하나님께 대한 유일한 믿음을 일찍이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때 그의 아들들의 왕위를 영원히 하시겠다는 솔로몬과의 약속을 볼 때 솔로몬의 가문은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22장에 보면 솔로몬의 적통인 남유다의 마지막 두 번째 왕 고니야 에 대한 심판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솔로몬의 적통에서 나올 왕은 다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야김에 대한 심판에서도 분명히 그의 후손으로 왕 위에 앉을 자가 없다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세운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오늘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리라.
그러나 다른 가지를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언약과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는 신비하게 얽혀서 구원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마태복음을 펴자마자 흥미를 잃고 성경을 덮게 하는 부분이 있죠?
바로 예수님의 족보가 죽 나열된 부분입니다.
성경을 좀 읽으신 분들은 물론 그 족보 안에서 아는 이름들을 골라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그 족보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시작됩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 인터넷에 누가 이런 질문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양아버지인 요셉은 다윗의 혈통이지만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으니 다윗의 혈통이 아니지 않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냐는 것이죠.
이런 생각 해보셨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어떻게 성경을 알고 이렇게 뼈있는 의혹을 제기한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사람들이 답해 놓은 것을 보니 각양각색이더군요.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성경이 다 못 믿을 책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사기라고 답글을 올렸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너무나 기본적인 구원의 이치를 잘 모르면 뿌리 없는 신앙이 됩니다.
조금만 시험이 와도 흔들리는 것이죠.
어느 순간 ‘내가 믿는 게 다 무언가’ 하는 의심이 확 들어옵니다.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듯이 예수님은 요셉의 혈육이 아니고 법적 부자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지만 예수님은 상관이 없는 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혈통적 자손처럼 법적 자손도 똑같이 인정합니다.
우리도 법적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혈통적으로도 다윗의 자손인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 되려면 모친인 마리아가 다윗의 혈통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에도 예수님의 족보가 나와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거기 보면 이상한 게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예수님 족보하고 누가복음에 나온 예수님 족보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윗 위의 조상들은 똑같은 데, 다윗 아래부터 예수님까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 족보가 두 개입니까?
언젠가 기독교TV에서 성경공부 프로그램 진행 중에 한 청년이 이 질문을 하더군요.
왜 두 복음서의 족보가 다르냐.
우리 청년들 예수님 족보가 다르게 나왔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까?
이 청년은 그걸 보는 순간 너무 이상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뭐가 단단히 잘못된 것 아닌가?’
그런데 강사 목사님이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변을 못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난제들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과 주장들이 있지만 여러 성경주석들을 참고로 하면 좀 신빙성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는 알 수 없다라고 넘어가 버리면 쓸데없는 의혹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는 마태복음의 족보가 요셉의 족보라면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다윗의 혈통이라는 것이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요셉의 족보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태어난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족보를 살펴보면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의 다른 아들인 ‘나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 나단의 족보를 타고 태어난 것이죠.
마태복음에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명시한 이유는 사회적, 법적 신분을 밝혀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한 때 가문을 중시했듯이 유대사회도 가문이 중요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복음서에서 법적 가문을 통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죠.
그런데 누가복음은 유대인이 아닌 데오빌로라는 로마장교에게 보내진 복음서입니다.
누가는 구태여 이스라엘의 관례를 따를 필요가 없었기에 이미 마태가 기록한 요셉의 가문이 아닌 실질적인 마리아의 가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예수님의 바로 위에 마리아라고 기록했다면 이런 복잡한 문제들이 없었겠죠.
그런데 거기도 예수님 위에 여성인 마리아대신 남편 요셉의 이름을 기록되어 있는 게 아쉽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도 신학자들은 아들이 없는 마리아 가문에 요셉이 명분상 아들 역할을 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누가가 몰라서 족보를 다르게 기록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렇습니다.
법적인 자격으로도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마리아의 계보를 통해서 혈통적으로도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인 것이죠.
오히려 왕좌에서 떨어진 솔로몬의 적통 가문이 아닌 나단의 가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고니야왕과 여호야김왕에 대한 저주의 문제까지 완벽하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의 뒤를 이을 왕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또 예수님이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태어나신 것은 창세기에 예언 된 대로 사탄을 진멸하실 유일한 여자의 후손이심을 또한 족보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인간 역사 속에서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그대로 이루신 구원이 오늘 나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무런 댓가도 치르지 않고 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그 이름대로 ‘여호와 우리의 공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의 그 자체이지만 지혜로 다스리시고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녀로 영원히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에게 인생에서 좋은 지도자들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혹시 가난한 부모를 만났을 수도 있고, 우리를 끌어 줄 좋은 조력자를 만나지 못해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그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신이시잖아요?
신을 만난 사람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건, 환경이건 신이신 예수님 앞에서 낮은 산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건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같이 연약한 자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진리와 공의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또 성경과 성령께서 우리를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나지 않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 영광을 누리게 됨을 믿으시고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를 예수님으로 늘 채우고 순종하며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7년 12월10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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