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용인에서 있었던 19세 청소년의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보고 많이 놀라셨을 것입니다.
끔찍한 살인행각 중에 친구와 주고받았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니 구토가 날 것 같더군요.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한 노인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홀로 사는 노인이 토마토를 심기 위해 딱딱해진 밭을 일구려고 했지만 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매년 밭을 일궈주던 아들이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이래저래 속상한 마음으로 밭을 못 일구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서 날아 온 편지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정원을 파지 마세요. 그 곳에 시체가 묻혀 있어요.
사랑해요 아버지.
당연히 편지가 검열에서 걸리고 말았습니다.
며칠에 걸쳐 수사팀이 아버지의 토마토 밭을 샅샅이 뒤집어 놓았습니다.
며칠 뒤 아들의 편지가 아버지께 도착했습니다.
이제 토마토를 심으세요.
지금의 상황에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사랑해요, 아버지.
죄를 지은 아들과 그런 아들을 여전히 아들로 여기고 있는 아버지와의 끊을 수 없는 혈육의 정이 느껴집니다.
그리기에 부모와 자식인 것이죠.
하나님아버지께서도 오늘 감옥에 간 이스라엘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인생을 벗어나 가나안땅에 정착했던 이스라엘은 지금 바벨론에 의해 두 번째 노예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비참하게 전락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진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불러주신 편지를 대필해서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을 찾아갔던 외교관들 편에 사람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심장이 오그라들고 온 몸이 덜덜 떨리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편지가 얼마나 용기를 주었겠습니까?
본문을 읽어보면 자식 같은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아버지의 깊은 애정과 긍휼이 느껴집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다 필요한 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편지를 살펴보며 이 편지가 곧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깨닫길 원합니다.
첫째, 이 치욕적인 역사와 징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세계역사로 볼 때 이 사건은 주전 597년에 신바벨론제국에 의해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왕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유수입니다.
역사는 바벨론에 의한 정벌이라고 기록하지만 4절에 보면 그들을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사건의 배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경제가 안 좋아 가게가 문을 닫고, 빚더미에 앉았고, 가정이 파탄 나고,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것 같지만 성도들에겐 그것이 그냥 일반적인 이 땅의 고생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복되게 인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십니다.
통계와 역사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G20국가 중 상위10개 나라가 전세계 생산량의 85%를 생산합니다.
그런데 그중 9개 나라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긴 사람과 그 자손들이 잘못 된 것을 제 경험으론 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지에서 자녀가 죽고, 그런 상황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괴로운 일도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면 형통하게 해결해주시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하셨을 것입니다.
비록 문제해결이 좀 더딜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을 따라 사는 성도들의 마음엔 항상 환경을 뛰어넘는 강한 의지와 평강도 주십니다.
만일 환경적으로,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곤고하고, 총체적으로 삶이 비관적이라면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징계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먼저 우리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교훈은 하나님은 징계하시는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 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성도들에게 시련이 올 때 이것이 징계로 인한 것이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알도록 밝히십니다.
우리가 이런 고난이 오면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이런 생각이 들 때 그냥 넘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잘못했을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심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자기 백성을 삼은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이 아니라 징계로 교육하고 훈계하십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잘못을 지적당하고 책망을 받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아이들도 바른 소리 듣기를 싫어하죠?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힘든 데 잘못하면 징계까지 받아가며 사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저렇게 재미있게 잘들 사는 것 같은 데 왜 우리는 작은 잘못에 징계까지 받으며 살아야하나 억울한 생각이 들 수 있죠.
세상사람들이 죄가 가운데 사는 것이 아직 좋아보이십니까?
죄가 지긋지긋한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파멸시키는 게 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공의를 세우십니다.
죄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 위에 하나님이 축복이 임했다는 소린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이 아닌 징계를 통해 우리가 죄를 멀리하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가장 정의롭고 완전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라고 눈감고 넘어가는 법은 하나님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4장17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회개하지 않은 악인들에게 심판이 임합니다.
그래야 맞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편파적으로 심판을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모든 죄는 다 똑같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까지도 용서해주신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돌이킬 때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완벽하게 제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 없이 죄를 끊치 못하고 살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란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기에 버리지 않으시고 고쳐서 데려가시는 것이죠.
욥기 5장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징계의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경제적인 곤란으로, 대인관계의 고통으로, 심령의 기갈로.
욥기 33장 19절을 보면 어떤 질병은 하나님의 징계라고 하죠.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인간이 일으킨 전쟁처럼 보이지만 오늘처럼 하나님의 징계인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즉각 징계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 기회를 주십니다.
어느날 불현듯 재앙이 닥친 것 같지만 아닙니다.
무수한 하나님의 경고사인이 있었습니다.
그걸 무시했다가 큰 낭패를 당하고 돌아오는 사람들 많잖습니까?
이들이 가나안 땅에서 쫒겨나 바벨론까지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으셨을 것 같습니까?
그들은 사실 가나안에 국가를 세우면서부터 범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축복의 땅에서 쫒아내는 데 까지 칠백여년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할 법도를 우습게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수히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즉각 심판하지 않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그들이 오히려 경홀히 여겼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편 50편21절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들이나 똑같이 어리석은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렇게 모른다는 말입니다.
모리스 로버츠목사는 이런 통찰력 있는 말을 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런데 타락 이후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다시 만들어 왔다.’
얼마나 우리가 멋대로 하나님을 내 생각대로 치부하고 하나님을 다루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면 놀라실 겁니다.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믿어야 하고 그거라도 하나님은 고마워해야 한다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다윗왕이 변방에 모셔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려고 한껏 들떠서 법궤이전식을 계획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3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고 악대를 조직하고 새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싣고 소가 수레를 끌고 이동합니다.
그 때 갑자기 소가 날뛰는 바람에 수레를 몰던 웃사라는 사람이 궤를 붙잡았는 데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한창 흥겹게 진행되던 법궤이전식이 완전 공포로 얼어붙어 버립니다.
그때 다윗왕이 법궤이전을 포기하고 궤를 오벳에돔의 집으로 메고 가게 한 뒤 휑하니 궁궐로 돌아옵니다.
성경은 다윗왕이 분을 냈다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법궤는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다윗왕이 자기 생각대로 모셔오려다 하나님과 충돌하자 댑서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모시는 대로 잠자코 오실 일이지, 내 계획에 찬물을 끼얹는 그런 까다로운 하나님은 모시고 싶지 않다 이런 뜻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다 이런 속셈을 갖고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아시지만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억력이 너무 좋으셔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하나도 잊어버릴 수 가 없으십니다.
우리는 잊어버렸고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억력은 영원하십니다.
세상 만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절대 오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 중 하나가 재판을 굽게 판결하는 것이라고 성경에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산이 얼마나 정확하신지 보시겠습니까?
10절에 보면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가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필 칠십년입니까?
실마리를 주는 성경이 한 군데 있습니다.
역대하 20장에서 본문의 이 상황을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사람들이 다 잡혀가고 경작할 사람이 없어지니 토지가 70년간 안식년을 누렸다고 말씀하죠?
레위기36장에 보면 본래 하나님이 주신 법은 육년간은 땅에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7년째는 땅의 안식년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안식일 개념과 같습니다.
6년째 되는 해에 세배의 소출을 주실 것이니 7년째는 파종하지 말고 밭을 쉬게 하라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받고 이스라엘사람들이 땅의 안식년을 지켰다는 말이 성경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6년째에 세 배로 거두고 더 신바람이 나서 안식년에도 파종을 했겠죠.
당장 거액의 소출이 왔다 갔다 하는 땅의 안식년을 누가 지켰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땅의 안식년을 계산하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제대로 된 왕정국가가 생긴 햇수를 계산하면 칠십 번 정도의 안식년을 지켰어야 맞습니다.
땅이 칠십년을 한꺼번에 쉬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식이라는 단어는 보통 단어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서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년을 지키라는 것은 그곳이 진정한 안식의 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짜 안식할 날, 영원히 구원받을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는 진짜 의미입니다.
장차 진정한 안식을 주실 예수님의 오심을 상징하는 것이 안식일이고 안식년입니다.
누가복음6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잖습니까?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그래서 안식일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더 이상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부활하신 날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안식년을 소홀히 생각하는 것은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이죠.
출애굽기3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습니까?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 니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바벨론70년의 포로생활은 그들이 못 지켰던 70번의 안식년인 셈이죠.
하나님께서 억지로라도 못 지켰던 안식년을 지키게 하시고 그들을 끝까지 하나님의 안식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굳은 의지를 말씀합니다.
우리 역시 믿음의 길을 벗어나 불순종하면 당연히 징계를 통해 우리를 견책하며 인도하십니다.
징계는 많이 아픕니다.
징계를 통해 우리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철저한 교육을 경험한 사람은 다시 매맞지 않으려고 정신차리고 살게 됩니다.
아무리 사랑의 매라도 아프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이 말씀이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징계를 받고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볼 때 창자가 들끓는 아픔이 하나님아버지께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서 70년 징계의 날이 가면 그들을 회복시킬 것을 서둘러 말씀하며 달래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힘든 포로생활 중에 반드시 함께 하시고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매일 성령께 의지해 우리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 착한 성도의 복된 삶을 누리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다음은 징계 받은 자가 포로생활 중에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두렵고 고통스런 노예의 삶을 살아내야하는 지를 말씀해주십니다.
노비문서가 오가는 시대는 아니지만 현대에도 많은 사람이 종처럼 살고 있죠.
자기가 원하는대도 빠져나올 수 없는 환경에 있다면 노예나 다름없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께 등을 돌린 인간에게 이 땅은 죄에 포로가 된 노역의 땅이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이 항상 불편하고 고난과 슬픔이 덮쳐오는 것을 보면 성도들에게도 여기가 축복의 땅이 아닌 것이죠.
그러니 우리도 바벨론에서 포로 된 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영적 바벨론과 같은 세상 속에서 그 약속을 의지해서 이겨내야 합니다.
지금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정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곳을 고향삼아 예전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5,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살고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그리고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번성해서 줄어들지 말고 인구를 늘리라고 하십니다.
이민 간 것도 아니고 뭐 이렇게 쉽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저들에게 죄의 값을 치르며 탄식하고 지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압제를 벗어나 돌아오려고 독립운동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날 동안 순순히 고난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도 여전히 일상적인 삶을 이어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거부했던 그들에게 내린 징계는 이 갈대아 사람들을 섬기며 그들의 죄를 낱낱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여전히 과거와 같이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왔을 땐 회개하고 자숙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해야 합니다.
잘못을 찾아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고 징계 받는 현실을 벗어날 강구를 아무리 한다 해도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될 뿐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 말씀은 징계 가운데, 힘든 이 땅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최소한 우리의 일상의 삶을 보장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고 매일 힘껏 노역하고 결실을 맺고 많던 적던 인생에 주신 소소한 기쁨을 맛보며 그 곳에서 정착하고 번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같으십니다.
어느 환경이건 우리가 평안 가운데 우리의 분깃을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징계의 날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선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알아서 본토로 옮겨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70년 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가나안 땅으로 귀환했습니다.
설령 우리의 힘든 인생이 게으르고 악한 우리의 죄 때문이라 할지라도 죄를 회개하고 겸손히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고난의 때를 지나가는 하나님이 주신 방법입니다.
때가 다 차면 우리 가정과 인생에 놀라운 회복과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포로생활 중 이들이 해야 할 일은 7절에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백성이 그들을 위해 중보하고 평안을 빌 처지입니까?
이들은 자기신앙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징계 받고 끌려 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자들에게 지금 세상나라들을 맡기고 계십니다.
당시 중근동을 제패했던 바벨론제국의 평안이 제왕 느브갓네살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포로로 끌려온 이 별 볼일 없는 하나님의 백성에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징계를 받아 모든 것을 잃고 맨발로 비참하게 끌려 온 처지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환경과 이웃의 운명을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회사도 직장도 가정도 내가 몸담고 있는 어떤 곳이든 내가 그들의 평안과 안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믿기 힘든 말씀입니다.
어떻게 나같이 믿음도 연약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겠냐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믿음하나 제대로 못 지켜 포로신세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할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지위에 세워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무엇이든 담대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자격이고 신분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과 직장과 가족과 대면하는 이웃들이 평안하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절대 나 혼자 평안할 수 없습니다.
만일 사회가 타락하고 부도덕한 범죄로 넘쳐나는 모습을 방관하고 있다면 머잖아 나와 내 가족들이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성읍이 평안함을 기도함으로 우리도 평안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와 사회의 평안과 정의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죄책감과 양심이 바닥난 극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자식을 키우고 행복한 삶을 살겠습니까?
휴전선 너머 고통당하는 북한을 그냥 무심하게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지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입니까?
북한은 끓는 가마솥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 예레미야가 어떤 환상을 봅니까?끓는 가마가 있는 데 그 가마가 북쪽에서 기울어져 있는 환상을 봅니다.
바벨론제국이 북쪽에서부터 내려와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파멸시킨 것입니다.
북한이 지금 끓고 있는 가마솥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한 구국기도와 북한주민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끊이지 않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저 휴전선을 막고 계신 줄 믿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이 민족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한국교회가 통일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북한의 지하교회와 성도들을 먼저 도와야 합니다.
조국의 통일을 위한 유일한 해법은 한국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독일 통일이 그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민주와 공산주의가 대치한 분단국가였죠?동독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민주적으로 통일이 된 이유 중 전문가들은 서독교회의 역할을 주목합니다.
독일이 분단되어 있는 수십년간 서독교회들은 교회 재정의 40%를 동독교회로 보냈습니다.
동독의 성도들의 정치범으로 수용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돈이 얼마든지 상관없이 보석금을 주고 그들을 빼내 서독으로 데려왔습니다.
서독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공급되는 물자와 원조에 동독 사람들이 말로만 지상낙원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걷어차고 교회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무신론인 공산주의를 버리니 베를린 장벽이 정말 맥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우리 교회도 장차 북한 교회를 위해 후원하고 도와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라를 위해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직장과 학교, 가정이 의롭게 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회가 권력자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것 같지만 국가도 직장도 가정도 다 우리가 비는 평안에 달려 있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나 하나 정도가 무슨 힘이 있냐 생각지 마시고 오늘 말씀에 순종해서 기도할 때 우리에게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결과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꼭 계산해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포로생활을 감당해야 할 이들에게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포악한 군주 밑에 노예로 살아갈 일이 만만하겠습니까?
힘든 세상에서 우리를 압제하는 여러 환경과 문제들을 이겨내려면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상황이 악화 될수록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그럴수록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다.
현실의 고통이 심하면 저절로 알 수 없는 탄식이 터져나오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게도 됩니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었다는 말이 나오면 그 다음에 꼭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는 말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자녀의 부르짖음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부모가 있습니까?
부르짖어야 할 만큼 힘든 환경 가운데 있다면 오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미국의 심장건강협회의 회장인 스미스박사가 이런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신자 중에 묵상기도하는 사람과 발성기도하는 사람을 비교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발성기도로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부르짖으면 속에 쌓인 것도 해소되고 기도 뒤에 인도에 대한 확신도 오기에 스트레스 관리도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기도든 꾸준히 우리 문제를 하나님께 아뢸 때 들으심을 꼭 믿으시길 바랍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와 마귀는 우리가 엎드리면 도망간다, 개는 돌을 줍는 줄 알고 도망가고, 마귀는 기도하는 줄 알고 도망간다.”
하나님께서는 11절에 하나님의 생각을 분명히 말씀하시죠.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니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 선하신 뜻을 믿고 우리를 도와주시길 믿고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바벨론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처참하게 끌려가 숨죽여 울고 있는 저들을 위로하고 또 위로하십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도 눈을 뜨면 힘든 나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이 땅에서 집을 짓고 텃밭을 만들고 과실을 키우고 그 열매를 먹으며 번성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줄어들지 않고 번성하고 평안한 날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죄를 쌓아두지 말고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와 이웃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고, 불안과 고난 중에도 부르짖어 기도하여 축복의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13년7월14일 주일예배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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