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사명자의 고난과 영광 (예레미야15장10절-21절)

남수연 2010. 5. 11. 16:00

 

오늘은 주의 종에게 임하는 고난과 영광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명언 중에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고통스런 십자가 없이 약속하신 축복만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고통과 십자가를 원하는 사람이 그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의 종에게는 고난과 영광이 함께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나누고 싶은 것은

첫째로 사명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내가 가야할 이 길이 어떤 길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실 때는 마태복음11장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로, 사명자로 부르실 때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고된 삶을 각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16장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8장34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장23절 아무든지 나를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공관복음 3군데서 동일한 말씀을 기록하여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14장28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로서의 삶을 부름 받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 반드시 그 희생과 십자가의 고통을 가늠하고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계산이 다소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계산할 겨를도 없이 떠밀려서 사명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하며 당하는 핍박을 너무나 견디기 어려워했고 그때마다 징징댑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께 직접 뭐라 하진 못하고 어머니를 원망합니다.

생일을 저주했던 욥을 연상케 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의 상황에서 우리는 차라리 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처량한 넋두리를 할 때가 있는 데 지금 예레미야가 그런 형국입니다.

분명히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1장5절에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부르셨건만

그는 낙심하여 10절에 나의 모친이 나를 세계에서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라며 부정과 극심한 낙망의 상태로 빠져갑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 한 말씀을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1장8절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10절에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굉장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예레미야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었기에 말씀을 사실대로 증거하며 당하는 환란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명자의 길은 안위가 보장 된 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건만 약속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고 뜻하지 않은 상황에 맞딱뜨리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죠

18절에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라고 원망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이건만 때때로 사명자에겐 영적인 고갈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도 지난 겨울만 해도 교회를 개척하면 곧 구름떼 같은 영혼들이 몰려오고 놀라운 부흥을 주실 줄로 알았잖습니까?

그러나 사명자의 길에는 봄날만 있지는 않습니다.

혹독한 시련도 우리에겐 준비되어있음을 계산하여 그래도 이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왜 사명에 순종하는 데도 고난이 닥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명자의 죄 문제 때문입니다.

13절에 그러나 네 모든 죄로 인하여 네 사경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명자도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명자는 심판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자라 하여서 면죄부는없습니다.

그것은 이세상의 아류들이나 제 식구 챙기기 하면서 봐주는 것이지 정의로운 하나님께는 절대로 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사명자에게 영광만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라고 다들 동의하시죠?

영국의 기지가 넘치는 극작가 버나드 쇼가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두 가지 비극이 있는 데 첫째는 세상만사가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되지않는 데서 오는 비극이며 둘째는 세상일이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되는 데서 오는 비극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케 되도록 사명가운데 고난을 두신 걸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히브리서5장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은즉 이라고 기록하셨습니다.

또한 사도바울도 딤후4장5절에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라고 기록하여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기를 권면합니다.

주의 길을 가기 시작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고난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이상히 여길 일이 아님을 살펴보았으니 더욱 힘을 내어 믿음으로 승리하리라 확신합니다.

 

셋째로 생각해 볼 것은 사명자는 결국 하나님이 견고케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 같이 될 것이라

우리를 하나님의 입 같이 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생각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하게 하시는 말씀만 전할 수 있도록 세워주시고 말씀의 권세도 준다는 뜻입니다.

20절에도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서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찌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 종을 견고하게 붙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도 결국엔 심판당하는 백성과 같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13절과 19절에도 예레미야와 이스라엘을 동일시하여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하시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이와 같이 항상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양과 함께 하며 백성의 고난, 백성의 아픔과 함께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의 길이 왜 이리 어렵고 점점 두려운 마음이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될 때 우리는 휘시스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인생의 목적은 우리의 자유를 찾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주인을 찾는 데 있다 라는 명언을 남겼더군요.

사실 우리가 자꾸 뒤돌아 보며 그리워지려고하는 자연인의 삶은 애굽의 고기가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때를 자유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죄의 종, 어둠의 종으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참된 주인을 찾아 종의 삶을 살아가려 할 때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우리의 가야할 이 길이 어떤 길인지를 환상 없이 받아들여야 하며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며 우리의 가는 길에 더 큰 확신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길에도 고난이 있음을 각오하고 그러나 그 것은 우리를 더욱 온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임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 어떤 연약함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반드시 견고케 하심을 믿고 나아가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