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평신도가 쓴 책 한 권이 현대 교회에 쓴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옥한0 목사님의 아들이 쓴 ‘부족한 기독교’란 책 시리즈 입니다.
미국에서 세일즈를 하며 자기계발과 심리학 책을 섭렵한 그는 요즘 교회 설교가 그런 내용들과 똑같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엔 복음이 빠져있고 하나님 만족이 아닌 인간 만족만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의 주장 속엔 하나님 주권 사상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빠진 현대 기독교는 심리학과 엔터데이먼트와 성장을 위한 마케팅으로 채워있다는 것이 그는 꼬집어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복음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을 갖고 우주와 나를 다스리지 못하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국가와 민족과 인생의 주권자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죄악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며 자기 인생의 주인행세를 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그들을 심고 뽑으시는 분이 누군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됨을 믿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안전하고 풍성한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가 약속된 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먼저 오늘 본문의 핵심인 인생에 대한 하나님이 주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에서의 핵심은 우리 인생에 대해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시편139장13절을 보면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라고 증언합니다.
지음을 받은 존재는 지은 자에게 종속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20세기 저명한 저술가인 아서 핑크는 그의 책 하나님의 주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그리스도인에게 힘과 안정을 줬던 진리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이 마치 외국어처럼, 고대어처럼 돼 버렸다‘
오늘 날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얘기하면 왠 검정고무신 시절 얘기냐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겼고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시는지요.
무슨 소리냐 내 인생은 내 것이지 어떻게 남에게 맡기느냐
내가 무슨 로봇이냐
이런 생각이 속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거 아닙니까?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고 나름 헌신하는 성도들 중에도 내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자청해서 이러 저러한 일들을 선심 쓰듯 한다면 모를까 그게 내 의무라니 별로 기분내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위해 하나님이 시중을 들어주셔야지 마땅하단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하시면 내 스타일에 안 맞는 인생이 나올까 왠지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의 본성이 절대로 하나님께 내 인생의 주인의 자리를 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간섭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려하는 청소년기 자녀들을 키워 본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독립할 능력도 없는 데도 부모의 간섭이 싫고 독자적으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나에 대한 권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로 심판당할 나를 십자가의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주님을 영접해 구원을 얻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이사야 43장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 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주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입니다.
그 권리는 진흙으로 무엇이든 자신이 선택한 형상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권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십니다.
우리는 토기장이 손 아귀에 잡혀있는 흙 반죽 같은 존재들이란 말씀이죠.
실제 창세기1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서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지와 자연을 다 만드시고 갑자기 위에서 인간을 만들어 뚝 떨어뜨리신 게 아니라 지구 가운데서 물질을 취하여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의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육체는 지구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분명히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으셔서 만들어졌습니다.
육체는 땅에 속해 있지만 우리의 영은 신령한 세계 곧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과 소통을 할 수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 창조하신 목적을 이사야43장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처지를 인정하고 나면 마음 편해집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나를 지으신 주인이 되시는 걸 인정하고 나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온갖 이론과 학설을 가져다 붙이며 원숭이가 조상이라고 우길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렴 하나님의 가문이 낫지 원숭이 가문이 낫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게 우리의 영광이요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 인생을 마음 놓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맡기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4절에 보니 토기장이가 만들던 그릇의 형태가 무엇 때문인지 파상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릇이 망쳐진 게 흙 잘못이냐 솜씨가 부족한 도공의 잘못이냐를 놓고 따진다면 그게 아직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한 사람의 고단한 억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이시고 우리가 한 줌 흙임을 인정한 사람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입니다.
불면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릴 한 줌 흙과 같은 우리를 빚어서 쓸만한 그릇을 만들어 가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정말 화장을 하고 가루가 된 유골을 뿌릴 때 보면 인간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릇으로 만들어져가던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서 터졌다는 것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4절 말씀 후반부 처럼 토기장이가 그 진흙덩어리를 이용해서 무언가 쓸만한 것을 다시 만든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리 그릇이 못되고 망가져 버린 인생도 하나님 손 안에 있을 때 쓸만한 그릇으로 다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15세에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강0우박사의 인생 역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을 맞아 실명하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마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기가 막힌 절망에 몇 번의 자살시도도 해봤습니다.
주님이 그를 구하러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는 없는 것 보다 지금 가진 것을 감사하며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정말 희망의 불빛 하나 없이 앞이 캄캄한 그의 인생이 주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시각장애인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부시 행정부 7년간 백악관 직속 장애인권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냈습니다.
그의 큰 아들 강진0 씨는 세 살 때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도 눈 뜬 아버지를 갖고 싶어요.
우리 아버지는 같이 야구도 못하고, 운전도 못해요.
아버지 눈 좀 뜨게 해 주세요’
강 박사는 아들의 기도를 듣고 아픈 마음을 갖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눈은 지금은 고칠 수 없다. 그러나 미래에 의학이 발달해서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 눈을 고쳐주면 어떻겠니?”
어려서부터 아버지 눈 고쳐주는 생각을 꿈으로 간직했던 큰아들은 하버드를 졸업하고 세계적인 안과의사와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모두 쓸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고 터졌던 인생들일지 모릅니다.
형편없이 뭉개진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다시 만지셔서 쓸만한 그릇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범죄한 인간을 영영 버리시겠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대로 고쳐서 쓸만한 그릇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온전한 그릇이 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직 아무렇게나 뭉쳐져 하나님의 손 안에서 빚어지고 있는 한 웅큼의 훍덩어리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옛날의 내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형태가 터져버린 파상의 고통을 겪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쓸 만한 그릇으로 만드실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꼭 알맞은 귀한 그릇들로 지어 주실 줄을 확신하며 우리 한 몸을 안심하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주권을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주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면 우리 인생에 실패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선택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절대적인 타락으로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사용하시지만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삶을 주님의 뜻대로 경영해 나가도록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에게 양도하셨다는 뜻이죠.
그러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은 주권을 갖고 정의로운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주권조차도 하나님은 행사하시길 미루고 회개를 기다리고 기다리심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8절과 10절에서 사람의 행위에 따라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겠다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결과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악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그 재앙을 돌이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9절에 보면 민족이나 국가나 개인의 가정이나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지 않는다면 유익하게 하시려던 복을 돌이키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도 국가의 흥망 성쇠와 개인의 인생에서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유럽의 패권을 쥐었던 나폴레옹황제가 러시아 정복을 떠나기 전날 밤, 그는 러시아에 대한 정복 계획을 한 귀부인에게 자신만만한 투로 설명했습니다.
그때 그 부인이 “각하, 사람이 계획은 하지만 성패는 결국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인, 나는 계획도 하고 이루기도 합니다.”라고 거만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러시아 원정은 크게 실패했고 그것으로 그의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추방당한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비소중독으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이사야 14장 24절은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우리 삶의 고통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행동들과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한 복의 박탈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곤고한 인생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주를 위한 고난인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이 그런 대우을 받을 만큼 쎄지도 못합니다.
우리 고난이 기도하지 않고 성급하게 판단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지금 가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나태함의 결과인 경우고 내 죄성 대로 방종한 삶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 때문인 고난이 많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위해 약속하고 준비하셨던 유익한 것들을 우리가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늘 부족하다 해도 우리 구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거짓말 좀 하고 속을 썩일지라도 그 당시 미운생각이 든다해도 근본적인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러나 용돈인상은 없습니다.
사준다고 약속 했던 최신형 스마트폰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 그들을 유익하게 해주시려던 복도 보류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되고 더 형통한 것 처럼 보이십니까?
아니요, 우리 눈에 보이는 한 두가지 화려한 성공을 보고 그들의 행복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후지이 가오루가 쓴「엔딩, 나의 인생에 후회가 있다」라는 책은 인생에서 누구보다 일찍 성공했지만 스스로 몰락해간 사람들 26명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클래식으로 미국 음악을 만들어낸 조지 거쉬인은 천재적인 음악가였지만 거만하고 오만한 성격에 모든 친구가 떠나고 뇌종양으로 쓸쓸히 죽음을 맞았습니다.
벤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안무 배경 음악이 그의 작품입니다.
오스카와일드는 젊은 나이에 인기작가가 되었지만 동성애에 빠졌고 술과 쾌락으로 지내다 종양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헤밍웨이 또한 명성을 얻었지만 신앙을 버리고 우울증으로 시달리다 권총으로 자살을 했죠.
슬픔이여 안녕이란 소설을 쓴 최고의 여류작가 프랑소와즈 사강 역시 부정적인 삶의 태도로 결국 알콜중독과 약물남용으로 비참한 삶을 마감합니다.
아무리 인정받는 재능을 갖고 화려한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사랑을 놓쳐 버리면 돈도 명예도 지위도 권세도 행복을 갖다 주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 마음에 원하는 것이 결핍되었을 때 마음이 괴롭습니다.
필요한 돈이 부족하고 원하던 소원을 이루지 못했을 때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러나 딱히 부족하거나 염려스러울 일도 없는 데도 불안하게 가라앉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있는 일도 아닌 막연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뿌연 안개 처럼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참 신기하게도 우리 마음이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있어보면 기분이 점점 좋아지는 게 아니라 십중팔구 점점 침체되는 것을 느껴보셨습니까?
정말 마음이 불편한 이유 없는 불만족이 어느새 묵직하게 나를 누르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괜히 모든 게 불편하고 부족하게만 느껴집니다.
이사야서28장20절 말씀처럼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기뻐할 것도 없고 걱정해야 할 것 투성이인데도 우리 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구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려고 할 때 잔잔한 기쁨과 평안이 우리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의 뜻을 따라 순종한 끝에는 반드시 축복이온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김병0교수는 경제논리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결코 가난해 질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자라고 하면 돈이나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을 생각하지만 부에는 재능이나 경험, 성품 같은 무형재산도 포함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령 영국축구선수 베컴이 그의 전 재산1600억을 몽땅 잃어버린다 해도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풍족히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죠.
경제학에서는 이런 능력을 인적자본이라고 부르고 개인의 부의 구성요소에 포함시킵니다.
무형자산까지 포함 해 부를 정의한다면 기독교인이야말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약속 된 이 많은 복을 무형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니 결코 가난해 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무형자산을 늘리는 것이 주의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기독교인으로서 부자가 되는 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주께 순종한 만큼 우리의 자산은 증가한다는 말씀이라는 것이죠.
이와 같이 엄청난 무형자산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계속 가난에 머물러 있기가 어렵다는 것이 경제전문가의 결론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은 국가가 오랫동안 빈곤에 허덕이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선진국의 특징은 무형자산이 발달해 있다는 것이죠.
그 무형자산의 발달에 기독교가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각국의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 분석한 연구들에 따르면 기독교인 수가 많아질수록 인적 자본의 축적은 많아지고 경제 성장은 촉진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다만 우리의 행위에 따라 그 복과 화가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을 보면 마치 토기장이가 만들던 그릇을 망가뜨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도 당장에 그러실 수 있다고 시작됩니다.
그런데 말씀의 끝은 11절에 나와 있듯이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아름답게 하라입니다.
불순종하고 악한 이스라엘을 향해 당장에라도 심판을 내리실 것 처럼 시작하지만 결국 그러니 제발 좀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한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들의 글이 전체 4분의1에 해당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아모스 등 다 비슷하게 느껴지는 내용으로 이스라엘의 죄목을 세세하게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호소하는 내용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마음과 뜻을 밝히신 것이 성경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더 이상의 하나님의 뜻을 물을 것도 없습니다.
모든 상황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이미 다 나타나있습니다.
성경을 늘 가까이 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읽고 묵상하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그 때 그 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귀한 말씀 중 그 많은 분량이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짓는 각종 해괴한 죄악들을 조목 조목 지적하고 회개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에 우리가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 만큼 우리가 온갖 죄에 쉽게 동조하고 늘 죄를 짓는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정말 행복하고 만족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갈라 놓습니다.
죄 가운데 있으며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은 절대 죄가 있는 자리에 풍성한 영적 은혜를 내려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더러운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가 있는 자리라면 주님은 기꺼이 자신의 거룩한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예레미야선지자를 데리고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레미야야, 어서 가자, 저기서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
그곳에 토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심혈을 기울인 토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물레에서 그릇을 만들 때 잠시만 딴 생각을 해도 여지없이 그릇이 파상됩니다.
공방은 도공의 뜨거운 열기와 구슬 땀으로 후끈 달아올랐겠죠.
여기저기엔 도공의 생각에 미달 된 토기들의 파편이 널려있었을 겁니다.
가끔 우리가 영화 같은 것을 통해 보면 도예가는 자신의 원하던 그릇이 나오지 않을 경우 비장하게 도자기를 깨뜨려 버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분청사기란 도자기의 명인 정0수씨가 있습니다.
그는 40년을 넘게 분청사기에 매달렸고 명인이 되었지만 그동안 자기 마음에 꼭 드는 그릇이 단 한 개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릇에 나를 심어 나를 그대로 나타낼 수 있을까
그 한 점 그릇을 위해 흙 속에다 자신을 심는다고 그는 말합니다.
단 한 개라도 마음에 꼭 드는 그릇을 만들 수 있다면 자기 인생에 후회가 없다는 그의 말에서 도공이 얼마나 혼신을 다해 그릇을 만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공을 다 들여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정성을 다해 우리를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도공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는지 모릅니다.
한 개의 그릇을 빚을 때 마다 온 정신을 심고 마음을 들여 온전한 것을 기대하는 도공의 마음과 같이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빚으시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께 노예가 더 필요한 게 아닙니다.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 이해하시죠?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면 하나님도 내리려던 징계에서 돌이키십니다.
가끔씩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인생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시길 고백하며 매일 주님과 동행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한 새 그릇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때 그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귀한 그릇으로 빚어가실 줄 믿습니다. 아멘.
전도서12장1절의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 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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