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는 데 성도님들 가정이 다 평안하십니까?
행복한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오래 훈련하고 인내하고 마음을 다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제 기사를 보니 돈이 많을수록 가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돈이 많지 않은 우리는 가족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가족을 만드시고 가족을 사랑할 권리와 책임을 주셨기에 가족이 단합될 때 기쁨이 있고 힘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좋은 데 가정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모순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가정은 더욱 행복해져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행복계명이 우리 가정에서부터 꼭 이루어지도록 함께 노력하길 원합니다.
오늘은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의 말씀을 통해 영적인 가족인 교회 공동체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느헤미야서가 성경 역사의 어느 부분쯤에 해당하는지를 먼저 아는 게 본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대 이스라엘의 성벽공사를 현재의 나와 관련짓기 힘듭니다.
성경을 배경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게 우리 관심사인 현실문제가 아니라 귀에 잘 안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무엇을 듣고, 뇌를 무엇으로 채우냐에 따라 바뀝니다.
꾸준히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그 말씀이 내면에 조금씩 채워지고 말씀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말씀이 사람을 점점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 말씀을 통해 역사하셔야만 사람의 내면이 변합니다.
우리가 꾸준히 성장하고 신앙인격이 성숙해지지 않으면 내 자신도 내가 권태롭습니다.
가족과 이웃들도 계속 자라지 않으면 서로 지겨워집니다.
인격에 변화가 없는 서로를 바라보며 지겨워하는 것이죠.
우리는 다 자란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서 그리스도가 느껴질 때까지 자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잘 듣고 생각하는 가운데 믿음이 충전되고 성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선 구원의 시초에서 출발해야 오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에서 나의 뿌리를 발견하고 존재를 이해해야 합니다.
단군에서부터 나의 뿌리를 찾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범죄하고 떠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한 민족을 택하고 기르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요셉 시절에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갔다 눌러 사는 바람에 결국 노예로 억류됩니다.
그리고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을 탈출 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토 가나안 땅을 향합니다.
그런데 출애굽1세대의 저항과 불순종으로 가나안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광야에서 보내죠.
그 다음세대가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 땅에 입국을 합니다.
그리고 정복전쟁을 통해 원주민을 몰아내고 약속의 땅에 정착합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못하고 가나안 문명에 동화되고 원주민을 능가하게 타락합니다.
결국 그들 역시 심판을 받아 가나안에서 쫒겨나고 국가는 붕괴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처절하게 살육 당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포로로 잡혀가죠.
이 일이 일어날 것을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두려운 것은 패망 당시의 이스라엘의 신앙과 사회모습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상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아 망할 것을 예고했고 결국 이스라엘은 그 길을 고집하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고 70년 뒤에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70년 뒤에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놀라운 칙령을 내립니다.
유대인 포로들은 고국으로 귀환해서 여호와의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칙령에 따라 3차에 걸쳐 포로귀환이 일어나죠.
1차 포로귀환은 총독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돌아와 불타 없어진 성전을 건축합니다.
2차 포로귀환에서는 에스라을 중심으로 학자들이 돌아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이 내용이 에스라서에 나옵니다.
그리고 3차 포로귀환에서 본문의 느헤미야 총독이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서 예루살렘 성을 복구시킵니다.
얼핏 보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실패했던 구원 계획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 귀환자들은 과거와 똑같은 죄를 되풀이 합니다.
과거와 똑같이 이방인과 통혼을 하고, 악덕을 행하는 모습이 느헤미야와 에스라, 말라기 등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을 데리고 무한반복적으로 구원계획을 실패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사람이 절대로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을 해낸 것입니다.
광야에 살던, 축복의 땅에 살던, 만나를 먹던, 버터와 꿀을 먹던 인간은 본성인 악을 따르지, 선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께 맞춰 살지 못한 게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불러 들인 것은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선지자와 에스겔선지자를 통해 포로귀환을 약속하실 때 분명히 무언가 달라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깨뜨린 구언약 대신 새언약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돌판에 새긴 명령이 아니라 새마음을 주시고 마음판에 새겨주시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이전에 없던 새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새마음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의지적으로 노력해도 겉은 흉내 낼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룹바벨을 통한 성전 건축도 동물제사를 계속해서 드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진정성 없는 제사 받으시기에 신물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포로귀환 뒤에 재건된 성전은 다윗의 혈통인 스룹바벨의 족보를 타고 장차 태어나실 참성전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임을 스가랴서에서 암시해줍니다.
오늘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야가 귀환자들과 함께 세운 예루살렘 성곽은 성전 되신 예수님을 모신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성벽재건 속에는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는 중요한 원리들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살펴보며 교회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건축할 것인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벽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잠깐 살펴보았지만 1차귀환자들에 의해 성전은 세워졌지만 예루살렘 도시 전체를 보호할 성벽은 멸망 당시 무너진 폐허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도시를 보호해줄 성벽이 없다 보니 집도 없었고 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벽이 없는 도시는 언제고 외세의 침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성읍이 발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영광스런 수도가 되어야 하는 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만 덩그러니 세워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인적이 끊어진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우가 들끓었던 것 같습니다.
성벽공사를 죽기 살기로 방해했던 대적들이 이 공사를 비웃으며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말한 게 이런 예루살렘의 형편을 말하는 것이죠.
폐허가 된 하나님의 도성에 성벽을 쌓아 사람이 살게 하고 하나님의 성전과 성읍에 영광이 가득 차는 것이 느헤미야의 열망이었습니다.
지난 주 정옥금집사님 기도하실 때 아직 빈 좌석이 많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우리가 느끼던 못느끼던 이미 성벽재건의 임무와 마찬가지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우리가 다 헌신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성벽이 재건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필수였던 것처럼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았던 성도라 해도 교회를 띄엄띄엄 나오면 신앙은 곧 퇴보합니다.
기독교박해국 신자들이 모이면 위험한 걸 몰라서 그렇게 몰래몰래 모이겠습니까?
위험을 알면서도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촛불을 켜고 지하교회라도 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신 성령께서는 반드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우리를 붙이실 뿐 아니라 다른 세포들과, 지체들과도 교회로 연결시켜 놓으십니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이것을 확실히 말씀하시죠?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5:16)
몸이 자라기 위해서는 머리되신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보다 우리가 더 잘 자라날 방법은 없습니다.
복된 믿음으로 자라기 위해서 반드시 교회에 잘 소속되고 교회의 한 세포가 되어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와 함께 성벽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긴 명단이 앞 3장에 올라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위대한 건물을 세웠다 한들 성경에 기록이 되겠습니까?
요즘은 큰 건축물을 세울 때 공헌한 인물을 벽에 새겨 넣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성벽을 세운 사람들을 아예 성경에 기록해서 지구역사 끝까지 기억되도록 못을 박아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약속인 줄 믿습니다.
느헤미야와 함께 성벽 공사에 가담한 사람들을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각 지방의 유력한 부호와 관료들부터 제사장들이 있는가 하면, 기능공과 상인들, 외국 사람들 까지 참가했습니다.
가까이 자기 집 앞의 성벽을 건축한 사람도 있고, 아주 멀리서 와서 참여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들과 손자와 함께 성벽공사를 분담한 사람도 있습니다.
3장12절에 보면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했다고 나옵니다.
당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던 여자들까지도 건축자 명단에 넣었죠?
그런데 반면 5절에 보면 귀족들 중에도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남녀노소와 빈부가 없이 다 참여할 수 있지만 누구나 그 일을 자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벽공사는 만만하게 자원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택 담벼락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옛 성벽의 무너진 잔해를 치우는 것만 해도 힘이 다 빠졌다고 합니다.
돌무더기를 실어 나르고 육중한 새 돌을 얹어 높이 10미터의 새 성벽을 4킬로미터 남짓 세우는 일은 육체적, 시간적, 재정적으로도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계속해서 성벽재건을 방해하는 이웃 민족들이 생명까지 위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자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돈이 많고 인력이 확보 된 귀족들도 섣불리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도 마찬가지고 성도들을 믿음으로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냥 멋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 육체가 땅에 떨어지고 짓밟혀지시고 묻혀서 죽은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심으로 구원의 열매를 맺으신 것처럼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교회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세워지기 위해서만도 누군가가 그 밑에서 떨어져 죽어줘야 합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를 전도해서 교회에 심었다면 그 과정 속에는 내 자신을 죽이고 속이 썩는 과정을 분명히 겪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성벽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재건을 경계한 대적들의 위협 속에 한 손으로 일하고 한 손으로 병기를 잡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위해, 내 가업을 이루는 것만도 전력을 다해 노력해도 될까말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교회를 섬기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떼어 헌신하는 것은 한손으로 일하고 한 손으로 무기를 잡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많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누군가가 세워 놓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누군가 눈물과 땀과 기도로 희생한 것은 생각하지 않죠.
교회를 세우는게 얼마나 힘듭니까?
요즘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 누가 주일 아침에 반찬통 챙겨들고 정신없이 달려오고 가스렌지 앞에서 땀 흘립니까?
교회 형편을 생각해서 만원 한 장을 더 헌금봉투에 넣는 그런 성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대형교회 헌금함 앞에서 지켜보았더니 많은 사람들이 주일헌금도 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 교회에서 편리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은 마음이면 교회 세우는 일에 가담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가 세워질 수 없었습니다.
오늘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 없다면 미래의 한국교회도 없는 것입니다.
유럽의 그 큰 교회들이 부흥할 때 작은 교회가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더 이상 새로운 교회를 세우지 않은 결과 신앙을 이어갈 젊은 교회가 사라졌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풍요를 누리기만 하던 세대가 늙고 세상을 떠나자 교회도 신앙도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 하나님을 섬기는 데 구원도 받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쁘게 헌신한 것은 말할 수 없는 영광이고 장차 주님 앞에서 큰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일궈 낸 무엇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정산하시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교회를 가장 많이 세운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아마 대의그룹 창업주인 채의0 장로님이 아닐까 합니다.
이분은 평생 백개 교회를 세우겠다는 믿음을 갖고 쉬지 않고 헌신했고 이미 백개가 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돈 있어야 교회를 세우죠, 저 사업 합니다. 밀어주세요.’
이 분이 그렇게 말하고 삼성을 그만두고 대의그룹을 창업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대의그룹은 한국GM 등 자동차 회사에 주요부품을 만들어 연매출 5천억에 달하는 기업이 된 것입니다.
세계 60여개국을 다니며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운 채장로님은 일부 나라에서는 지명수배를 당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봉헌할 때 마을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장로님도 따라서 운다고 합니다.
그동안 세 번이나 사업의 위기를 겪기도 하고 건강의 어려움도 만났습니다.
갑상선 암으로 투병도 하고 심장병 수술을 받기도 하고 혈압이 높고 당뇨병도 있었고 과로로 중풍에 걸린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백 개 교회를 다 세울 무렵 그 지병들이 전부 다 나았다고 합니다.
채장로님은 3대째 장로가족이 되었고 가족, 친지 550명 전원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자녀들에겐 더 큰 축복을 해서 천개의 교회를 세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그만한 복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큰 일은 하지 못했다 해도 우리 모두가 작은 교회 하나를 건강하게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와 자손들이 복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나와 구원받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성벽재건이 얼마나 힘든지 건축이 아니라 전투라는 것입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것, 안정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것, 우리의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세우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전투입니다.
우리가 오늘 교회에 나온 것도 영적인 전투이고 거기서 승리한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의 믿음이 그 안에서 행복하고 바르게 성장하는 것을 마귀의 세력은 결사적으로 가로막습니다.
본문의 앞뒤로 보면 얼마나 집요하게 성벽재건을 훼방하는 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롱과 협박, 그리고 공동체 내부엔 피로와 낙담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14절에서 이 모든 일로 낙담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성벽을 재건하는 싸움이 결국은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성벽을 세우지 못해 신앙의 바르게 세워지지 못했던 상황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가 5장에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종으로 잡히고 연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부당하게 높은 이자를 받아 갚지 못하는 양민들을 종으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없는 자는 자식도 내다 팔아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고, 있는 자는 하나님께또 심판당할 부도덕한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일들이 다 예루살렘성곽이 없어 성전 중심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며 믿음을 견고히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내가 살고 가족들도 구원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이 영적인 전투에서 우리만 싸우는 게 아닙니다.
신앙을 위해 우리가 옳은 일을 해나가는 중에 다가오는 어려운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대적들의 꾀를 폐하셨다고 합니다.
대적들이 꾀를 내어 성벽 건설을 방해하려 했지만 그들의 연합작전이 틀어지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합니다.
우리 힘으로 되지 않을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20절에도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우리가 현실의 문제들이 코 앞에 닥쳐 낙망케 할때도 끝까지 주님의 교회에서 섬기며 나의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힘쓸 때, 예수님께서도 우리 교회와 우리의 자녀들과 가업을 위해 함께 싸우고 일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 현민이가 필경대 위에 성경을 가지런히 정리를 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교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식당 바닥에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손님이 줍습니까, 주인이 줍습니까?
현민이가 교회의 주인이 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중요한 기둥이고 교회의 주인입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가족이 된 우리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6년5월22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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