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느헤미야의 성벽재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몇 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잊어버리셨을 것 같아 간단하게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 교포 3세대 정도 되는 인물입니다.
그 사이 세계정세가 바뀌고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제국이 중동아시아를통치하던 시대입니다.
이 바벨론과 페르시아 포로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스라엘의 출중한 인물들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이나 모르드개, 에스더 같은 인물들이 포로시대의 지도자들입니다.
느헤미야도 페르시아 아다사스다왕 때 상당한 신임을 받던 고위각료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의 모든 의전활동을 총괄하는 직책 쯤 될 것 같습니다.
왕의 음식을 관장하게 할 만큼 신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이미 예레미야선지자의 예언대로 고레스왕의 칙령에 따라 1,2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사이 스룹바벨성전이 건축되었고 또 80여년의 시간이 흘러간 시점입니다.이 때 느헤미야가 3차 귀환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재건 대 공사를 성공한 내용이 느헤미야서의 내용입니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은 영적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얼마나 많은 건축공사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 예루살렘 성벽 축조의 전 과정을 유독 느헤미야서 전체를 통해 집중적으로 자세히 다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전건축은 아니지만 예루살렘성곽을 쌓은 일이 그만큼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2장12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에 대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스룹바벨총독이 제2성전을 건축했지만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성벽이 무너지고 불탄지 이미 백 오십여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가파른 지형에 세워진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벽을 다시 세우는 것이 귀환자들의 힘에 부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6.25전쟁이 있은 지 63년이 지났죠.
아직도 서울에 전쟁의 잔해가 남아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요즘도 지진이나 기상재해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재난 지역 복구를 보면 국가의 힘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진국을 보면 재난지역 재건이 빠르지 않습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에 성전만 우두커니 서있고 사방이 폐허로 둘러싸여 있으니 어떻게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보이겠습니까?
느헤미야가 이 황폐한 하나님의 도성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아파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성곽 중수의 사명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마음에 감동을 받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유다총독을 자원합니다.
페르시아제국의 고위 관료로 사는 것과 폐허가 된 유다의 총독을 자원한 일을 비교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이것은 비교가 안되는 일입니다.
과거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정부의 요직을 맡은 사람들이 6.25 뒤 폐허가 된 조국에 봉사하러 돌아오는 것 같은 것입니다.
전 한동대 김영0 총장 같은 분이 그런 사람입니다.
미국의 나사에서 얼마든지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명석한 머리로 우주과학에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2천명이 넘는 나사의 박사들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인정받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사의 과학자들이 모이는 신우회에서 믿음을 가진 뒤 사명을 깨달은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와 창조과학회를 통해 성경이 과학적으로도 오류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열악한 고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지금 느헤미야의 입장이 그런 것이죠.
그러나 세상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만 비교 안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도 이 선택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을 위해 일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과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만일 느헤미야가 그냥 페르시아의 화려한 정치생활에 머물러 있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의 이름을 그 누가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경우에 따라 일찍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부와 영광을 버리고 더 가치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순종했기에 이뤄진 일은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본서1장에 예루살렘 형편을 듣고 느헤미야가 며칠 간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기도 중에서 성벽 재건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해 알 수 있는 요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에 하나님의 백성이 살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파괴된 지 백년이 지나도록 돌무더기와 폐허뿐인 예루살렘에는 사람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성벽과 성문이 없으니 어떻게 안전한 거처가 되겠습니까?
성 안에 사람이 살지 않으니 성전예배도 제대로 드려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공사를 시작했을 때 산발랏이 이렇게 비웃으며 말합니다.
‘저들이 저 황폐한 곳에서 이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가?’
성벽이 없으니 성전이 세워졌어도 예배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믿음의 삶에도 의미심장하게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성전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지만 우리 영적인 삶의 믿음의 성벽이 무너지면 온전한 예배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런 성도들의 믿음의 터전은 황량하기 그지없고 원수와 대적들이 좋은 것을 다 약탈해 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에 성벽을 쌓아 하나님 거룩한 성전 주변에 백성들이 모여들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백성들이 항상 예배드리게 하길 원했던 것이죠.
나중에 성벽을 완성하고 봉헌한 다음 느헤미야는 그 일을 성취하지 않습니까?
그의 소원대로 드디어 유대민족을 모아 제비를 뽑고 십분의 일을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하게 합니다.
그 때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하길 자원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원해서 예루살렘성읍에 살겠다는 사람을 모두가 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기반시설이 없어 그만큼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성전의 예배제도를 확고하게 제정합니다.
성벽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중요한 지 이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와 예배와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의 성벽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견고히 세워져야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이 교회를 잘 다니시다 점점 거리를 두다 지금은 아예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 형편에 있습니다.
지난 주도 이런 문자를 보냈더군요.
‘목사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주님께 가는 것이 쉬울 거라 생각했는 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나갈 때는 내 의지대로 나갔지만 돌아오는 길은 내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얼마나 오래동안 성벽이 폐허가 되고 예배가 없었는 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벽이 이렇게 완전히 무너지면 결국 예배조차 보장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벽이 훼손되지 않았나, 구멍난 곳은 없나 항상 살펴야 할 줄 믿습니다.
믿음의 성벽으로 나와 내 가족과 내 삶의 지경들을 견고히 둘러야 그 안에서 아름다운 예배와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안연히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성벽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적용해야 할 성벽재건의 의미입니다.
믿음의 성벽은 어떻게 견고히 쌓을 수가 있습니까?
믿음의 재료로 해야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순종, 예배와 교제들로 차곡 차곡 쌓아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안전하고 복된 믿음의 성벽을 잘 세워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다음은 성벽재건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벽재건의 과정엔 보나마나 대적들의 훼방과 방해공작이 만만치 않게 일어납니다.
4장 처음부터 보면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페르시아 속국의 대표들이 연합해서 방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훼방의 강도가 점점 심해져가는 것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처음엔 미약한 이스라엘사람들이 그 엄청난 대 공사를 감행하는 것에 대해 비웃고 조롱합니다.
마귀의 방식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서고 가정이 세워지고 꿈을 이루기 위해 결심하면 비웃는 세력과 환경의 방해가 일어납니다.
3절 보시면 그들이 성벽공사를 하는 느헤미야를 이렇게 조롱합니다.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이런 비웃음 당해보셨습니까?
4년 전 교회를 계약했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안수집사님 한 분을 알게 되었는 데 말씀을 나누다 하시는 말씀이 여기는 교회가 될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분립개척 위원을 오래 해봐서 될만한 교회자리를 너무 잘 안다는 것입니다.
자리만 보면 사실 맞는 말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계약도 다 마치고 교회 인테리어 공사를 마쳐가고 있는 데 그런 이야기를 하니 얼마나 낙담이 되겠습니까?
세상에서 믿음을 갖고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내 속에서 나 스스로도 나를 비웃을 때가 있습니다.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래?
조롱과 비웃음 뒤에는 우리를 낙망시키려는 마귀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조소와 심리전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계획대로 모든 것을 추진해갑니다.
본문에서 성벽공사는 막힘없이 진척이 되어 어느 덧 허물어진 곳이 다 연결이 되고 전체 높이에 절반이나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원수들의 공격은 더 집요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젠 아예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살륙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합니다.
일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것 같죠?
한참 시련이 올 때는 그렇습니다.
때로 돈이 들어와도 모자랄 판인 데 나가지 않아도 될 돈도 나가야 할 일이 생깁니다.
속이 상하죠.
지금 하는 일도 버거운 데 짐이 더 얹혀 지기도 합니다.
기대했던 조그만 희망의 불씨조차도 완전히 꺼져 버릴 때도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인도하심 중에 있어도 어려움이 점점 가중되고 앞이 더 막히는 때가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가려 할 때 어려움이 계속 가로막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돌파하는 것이 오늘 느헤미야의 방식입니다.
원수가 도전하면 느헤미야는 즉각 응전합니다.
사건이 있을 때 마다 느헤미야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고 적극적으로 대응합니다.
원수들의 선전 포고에 느헤미야는 어떻게 합니까?9절에 보면 파수꾼을 세워서 밤낮으로 경비를 서고 대비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성벽공사를 좌절시키는 또 다른 변수가 돌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것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성벽을 다 연결하고 높이를 반이나 올린 유다사람들이 지쳐버린 것입니다.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무너져 내린 성벽의 돌과 흙을 짊어졌던 사람들이 이젠 힘이 다 빠졌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제주도 돌담 같은 담이 아닙니다.
성벽은 적의 폭격을 막을 만큼 두껍게 축조해야 합니다.
옛날 성곽들을 보면 사람이 몇이 지나다닐 만큼 폭이 두껍습니다.
아직도 반이나 남은 이 공사와 과거 건축폐기물을 실어나르는 것 까지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남은 일을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풀린 것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는 데도 갈 길이 멀어 보일 때 그만하고 싶을 때가 왜 없겠습니까?
남은 성벽의 반을 생각하면 지쳐 주저앉고 싶은 것이죠.
그 뿐이 아닙니다.
이제 가족과 고향사람들까지 동원되어 일을 만류하기 시작합니다.
지방 성읍에서 차출되어 나온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무려 열번이나 와서 일을 방해했다고 12절은 기록합니다.
그러니 가뜩이나 지쳐있는 데 적들의 위협은 더해가고 주위사람들도 도와주는 게 아니라 포기하라는 상황인 것입니다.
정말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완공하기까지는 설상가상, 엎친데 덮치며 난관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워렌위어스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라.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린 것처럼 일하라.
내 취업이 오직 내 기도에 달렸다는 생각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노력하고 준비하는 것에 따라 두드리는 직장의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고 철저히 노력하라는 것이죠.
합격을 위해서라면 기도가 전부인 것처럼 기도하고, 공부가 전부인 것처럼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고정주영회장이 가난하고 배운 것도 없이 현대그룹을 일으킨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정회장이 생전에 항상 달고 살던 말이 있습니다.
“이봐 했어? 해보기나 했어?”
자신의 힘만을 믿고 최선을 다한 사람도 굉장한 것을 이루었던 것이죠.
그런데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데 왜 우리가 실패하겠습니까?
결론은 승리이고 성취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최악의 상황에서 두 가지 강력한 대응을 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백성들을 가문별로 모이게 한 다음 칼과 창과 활로 무장을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새롭게 정신무장을 시킵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먼저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혼자 앞장 서서 낙심한 백성들을 격려하고 외부의 대적들에 대항하며 이 큰 성곽공사를 마쳤는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이런 추진력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느헤미야가 항상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이렇게 말하는 것을 빈번하게 봅니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알고 있는 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4절에 보니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이 얼마나 광대하신 지 잘 안다는 것입니다.
cts에서 창조시리즈라는 프로를 방영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프로라 모두 다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에 비할 때 티끌도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끝도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를 자연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죠.
지구의 모습이 우리 은하계에서만 해도 한 점에 불과하더군요.
그런데 그런 은하계가 수없이 모인 은하단에선 우리 은하계가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은하단이 수도 없이 모인 초은하단에서 은하단은 또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은 상상도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두렵고 경이로우신 분입니다.
번개가 번쩍이고 벼락이 치고 할 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창조주의 위엄 앞에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습니다.
지구에는 하루 4만번 정도의 번개가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번개가 칠 때 공기 중의 질소를 질소화합물로 바꿔 땅을 비옥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단지 위용을 나타내실 목적만이 아니라 그걸 통해 인간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나비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지난 여름 수련회 가는 중에 곤충박물관에 들렸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 형형색색의 나비를 하나님의 섬세하고 심미적인 손길이 만드신 것입니다.
생물학자들이 그 아름다운 나비날개에서 색깔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못했다고 합니다.
원래 나비의 몸은 인편이라는 작은 비늘로 덮여있는 데 거기에는 아무런 색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인편이 특수한 파장만 흡수하고 반사해서 그런 무늬와 색깔을 만들어내도록 유전정보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며 이것이 우연히 일어난 진화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피조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창조주의 사랑과 위대한 능력을 알도록 만드셨습니다.
김영길총장님이 그걸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 아닙니까?
과학자가 하는 일이 이 우주와 피조세계에 있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과학의 법칙을 연구하고 발견하는 과정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왜 이 자연에 이런 법칙이 있는 것일까?
우연히 생겼다면 모든 게 혼돈되고 뒤섞여 무질서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자연에 법칙을 만드신 분이 있다는 게 아닌가?
느헤미야는 이렇게 크고 두려우신 창조주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만나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이런 창조주 하나님만 알고도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외아들을 내주시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아들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의 고초를 당하시고 나를 살려주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자랑스럽게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담대해야 하는 것이죠.
느헤미야는 자신이 체험하고 신뢰하는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적과 환경과 현실의 두려움을 이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더더욱 나를 구원하고 동행하시는 나의 주님을 신뢰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이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기억하라고 말합니까?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믿음의 성벽을 쌓은 일은 힘들지만 결국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올해 우리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을 묻는 물음에 1위가 가족 간의 소통이었다고 합니다.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은 가정의 행복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한해 가장 힘들었던 것은 45.7%가 돈 때문이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을 이겨낸 것은 토끼 같은 자녀 때문이 1위, 든든한 배우자 때문이 2위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는 지 알 것 같지 않습니까?
바른 가정이야말로 언제 덮칠지 모르는 인생의 풍랑에서 지탱하게 하는 힘입니다.
삶의 혹독한 한파가 몰아칠 때 서로의 따뜻한 온기로 녹여주는 것이 가족입니다.
전도서4장11절은 말씀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가족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묶여있으면 절대 패하지 않습니다.
작년에 작고한 애플의 스티브잡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처음 췌장암 판정을 받았을 때 의사가 주변을 정리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곧 죽을 거라는 완곡한 표현이죠.
그 때 가족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잡스가 수술을 하고 한동안 완쾌되어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스티브잡스가 말하길 췌장암으로 죽음을 앞두었던 그 날 가족과 가졌던 그 시간이 최고의 날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미워하고 싸우고 원망하며 살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사형선고를 받고나서야 가족을 생각할 게 뭐가 있습니까?
지금 마음을 받아주고 사랑을 나누면 좋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가정을 고안해 내신 하나님은 우리가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천국 같은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가정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그 인구보건복지협회 설문에 올해 가장 바라는 것들을 보니 다 가정과 관련되어 있더군요.
새해 목표 1순위가 나와 가족의 건강, 가족에게 바라는 1순위도 배우자의 건강이었습니다.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면 서글픈 인생입니다.
불행한 집에서 문을 열고 나와 어디론가 향하는 어깨는 쳐지고 다리에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인정하고 보듬어 주는 가정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이걸 위해 더욱 우리 믿음의 성벽을 쌓는 영적인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의 극력한 원수들의 공격이 언제 끝나는 지 아십니까?
6장16절에서 끝이 납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우리가 모든 지경에 믿음의 성벽을 완성할 때 마귀의 공격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뒤 10장을 보면 성곽이 완성되어 봉헌식을 하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온 백성들이 모여 장엄한 행렬을 벌이고 완성 된 성곽 위 길을 따라 양쪽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향해 행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성벽을 쌓아 내 영혼을 두르고, 내 가족과 가정을 두르고, 내 가업과 미래를 두르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견고한 믿음의 성벽을 쌓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그런 기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데 어떻게 어둠의 세력이 우리를 능멸하겠습니까?
믿음의 성벽이 훼손되어 방치되고 구멍난 곳이 생기면 적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행복을 약탈해 갑니다.
느헤미야가 이 성벽을 세우는 역사와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했는지를 다시 한번 기억하기 원합니다.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해서 싸우라.
이 말씀을 오늘 잘 기억하고 이 모든 것을 위해 믿음의 성벽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며 기쁨과 번영을 누리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년1월23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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