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느헤미야에 대해서 살펴보며 은혜와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좀 해야합니다.
우리나라 역사도 잘 모르는 데 왜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알아야 하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하나님나라의 역사이고 바로 우리들의 구원의 역사이고 우리의 뿌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역사를 배경으로 보아야 본래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을 오해 없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역사성이 없이 성경을 대하는 것은 마치 야구지식이 하나도 없이 야구장에 앉아있는 거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 시간 경기 내내 아무 것도 즐기지 못하고 홈런 한방 날린 한 순간 열광하고 돌아오는 것이나 힘들게 성경을 봐도 전혀 이해를 못하고 어쩌다 겨우 한 말씀 깨닫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죠.
성경의 역사적인 지식과 교리들을 알면 알수록 성경 어디를 펼쳐도 그 말씀이 깨달아지고 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또 성경시대의 인간역사를 주도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내 삶에도 역사하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믿음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게 아니라 실제적이고 생생한 역사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설교를 통해 꽤 많은 성경 속 역사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천지의 창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가 머리속에 쭉 시대별로 그려지면 정말 좋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배우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점차 정리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그 역사 가운데 한 토막을 잘라서 본문의 내용과 함께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두 번의 노예 상황에서 구출이 됩니다.
한번은 이집트의 노예생활 중에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구출하신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부족의 땅에 인도되어 이스라엘국가를 이루고 정착하게 되죠.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켜야 할 법도를 버리고 가나안의 타락한 풍습과 우상종교를 좇다 선지자들의 경고대로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하고 일부는 바벨론으로 줄줄이 엮여 노예로 끌려가고 나머지는 도처로 도망가 흩어지게 됩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기드론골짜기가 시체로 가득찼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을 세계사에서 바벨론 유수라고 말합니다.
이 포로생활에서 이스라엘이 두 번 째로 구출을 받게 되는 데 풀려나는 경위가 좀 특별합니다.
이스라엘을 점령한 바벨론 제국은 이사야선지자의 예언대로 정확하게 메대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지역의 새 패권을 잡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이해가 안되는 포로 귀환을 명령한 것입니다.
에스라 1장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포로로 잡아 온 한 민족을 그냥 풀어서 보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 될 사건입니까?
그런데 이 일도 역시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 된 일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고 더 기가막힌 것은 이사야선지자가 이 일이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고레스왕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이름까지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44장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두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만에 고레스왕이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고레스왕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이 부분을 제2이사야서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의아할 뿐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정확한 하나님의 예언과 성취를 볼 때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살아계시고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이들이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 지역이 배경인 데 현재의 이란 땅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은 총 세 차례에 나누어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스룹바벨 인솔 하에 약4만명 가량이 이스라엘 본토로 돌아옵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80년 뒤 에스라 인솔 하에 약 4천명 가량이 돌아오고 마지막 세 번째가 12년 뒤 느헤미야에 인솔 하에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의 세 번째 귀환이 시작되는 것을 다룹니다.
느헤미야가 한 일은 삼차 귀환자들을 데리고 가서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대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 느헤미야란 사람에 대해 좀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니 느헤미야는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수산 궁에 살던 상당한 직위를 가진 관료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포로출신들을 요직에 등용했던 당시의 배경에는 왕비 에스더와 총리였던 모르드개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아닥사스다 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후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로왕의 아들입니다.
말하자면 에스더는 아닥사스다의 계모가 되는 셈이죠.
에스더서에는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되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죠.
비록 포로로 끌려간 처지에 있는 유대민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주목하시고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역사의 중심은 바벨론도 페르시아도 아니고 죄를 짓고 불쌍하게 끌려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것이죠.
비록 불의한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 강대국을 사용하시지만 결국 하나님이 위하시고 끝까지 인도하시는 것은 택한 백성입니다.
이 세상이 강대국들의 의지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역사의 중심은 지금도 하나님나라와 교회와 성도입니다.
우리의 직장과 주변 환경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나입니다.
내 사업이 나라 경제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내 직장문제가 사장의 의견대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나를 중심으로 환경을 바꾸기도 하시고 없던 길도 내시며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체험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나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간다고 착각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겠습니까?
단 저 형제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걸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때로 내 처지가 꼼짝 못하게 묶인 것 같고 소망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은 나를 쉬지 않고 지켜보시고 길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자아상은 불신앙과 똑같습니다.
아무리 매일 실패해도 하나님은 나를 천하로 여기십니다.
느헤미야에겐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뭐라고 민족을 대신해서 막 회개하고 그러잖습니까?
1절에서 이 느헤미야가 하가랴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있는 데 성경에 하가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일하게 등장합니다.
대단치 않은 사람이라는 얘기죠.
유대인은 족보를 중시해서 사람을 소개할 때 왠만한 가문이면 위로 몇 대까지 족보를 들먹입니다.
가수 은지0씨와 박근0대통령이 5촌 조카와 고모사이라고 하죠.
은지원씨의 할머니가 박근0대통령의 큰 고모가 된다니 보통 사람들에겐 생전 얼굴도 모르고 지낼 먼 관계 아닙니까?
그야말로 대통령의 사돈의 팔촌까지 후광을 받게 되는 것이죠.
달랑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는 정말 내세울게 없는 보통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다니엘처럼 왕족출신 포로로 특별교육을 받고 등용된 것과는 다른 신분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왕의 신임을 받는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느헤미야서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그의 경외심과 철저한 자기관리와 성실함 때문이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배경 없이 태어났어도 한탄할 것 없다는 걸 주인공인 느헤미야를 통해서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경외하고 내게 주어진 삶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성심을 다하면 어떤 자리에서건 인정받고 중요한 사람으로 세워주십니다.
원치 않아도 점점 등용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내 문제와 내 인생을 해결할지 방법에 골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관심입니다.
이 엠 바운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방법을 찾으나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사람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우리의 문제를 뛰어넘는 능력도 주시고 길도 열어주십니다.
우리 문제가 방법이 없어서 안 풀리는 게 아닙니다.
느헤미야서에는 탁월한 그의 지혜와 추진력과 지도력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손이 도우셨다는 말을 사건마다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복잡한 인생을 풀어갈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 받기를 소원합니다.
특히 우리 주나산의 자라나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다 느헤미야와 같은 인재로 성장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다음 2절을 보면 하나니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느헤미야를 찾아옵니다.
이 하나니는 뒤에 보면 느헤미야의 친동생이라고 밝혀집니다.
아마 하나니는 2차 귀환 때 본국으로 귀환했고 느헤미야는 왕궁의 일로 함께 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의 질문에 그가 얼마나 고국에 대한 간절한 관심과 돌아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지가 묻어납니다.
이미 포로 일 세대는 모두 죽었고 이들은 단 한번도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후세대 사람들입니다.
수산궁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무려 12,000킬로나 됩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에스라가 2차 귀환 때 예루살렘까지 돌아가는 데 4개월이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오갈만한 만만한 거리가 아니죠.
그립던 고국을 보고 돌아온 아우에게 고국의 형편을 물어보는 느헤미야의 심정이 다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그렇게 애타게 동경하던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은 기대와 달리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이웃 부족에게 환난과 능욕을 받고 예루살렘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탄 채 방치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벌써 두 차례나 많은 사람들이 조국 재건의 꿈을 안고 귀환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에 의해 화려하게 중건되었을 예루살렘의 영광을 듣길 기대했던 느헤미야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가 4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며 수일 동안 슬퍼했다고 하죠.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고 예언하신 대로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했다면 당연히 이스라엘의 영광을 신속하게 회복시켜 주셔야 맞는 것 아닙니까?
벌써 첫 귀환이 있은지 90년이 지났는 데 아직도 예루살렘이 그 모양이라면
뭐하러 포로를 귀환 시키셨냐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포로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시지만 그 다음 일은 사람과 협력하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지만 성숙한 신앙으로 구원의 풍성함과 영광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영적인 순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스룹바벨과 일차 귀환한 사람들은 곧 바로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구별된 삶은 예배입니다.
성도의 영광의 회복을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예배하는 것이죠.
그런데 성전을 재건하던 이들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재건을 방해하는 대적들의 모함으로 성전 건축이 중지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자로 나가는 축복을 방해하는 마귀의 방법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 신령한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죠.
오늘도 그런 보이지 않는 태클을 우리가 넘어서 예배의 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그들은 이 시련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성전건축은 그 뒤 20년을 방치되었고 아무도 다시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학개선지자가 기다리다 지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성전재건이 막히자 백성들이 재목으로 자기 집을 멋내서 세우고 자기 가업에 몰두하느라 돌아온 목적 자체를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다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 삶에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보다 열심히 세상일에 치중했지만 그들이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손에 쥐었던 모래처럼 다 빠져나가고 남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녀가 하나님 없이 잘먹고 잘살게 절대 두지 않으십니다.
다 털어야 진심으로 돌아오면 다 털기도 하시는 게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학개와 스가랴선지자의 권면을 받으며 써 성전건축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나자 율법학자였던 에스라가 2차 귀환자를 이끌고 돌아와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도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헤미야가 돌아가서 할 일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해서 안전하게 살게 하는 것이죠.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순서가 곧 우리의 영적인 삶이 회복되는 순서입니다.
제일 먼저 성전을 세워야 하듯이 우리 삶의 가장 우선 순위는 하나님과의 진지한 관계이고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라가 율법을 가르쳤듯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그 다음이 우리의 삶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거할 성벽이 굳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세우고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고 훼파 된 모든 것을 바로 세우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예배와 말씀을 중심으로 내 삶의 패턴을 정할 때 모든 것이 안전한 지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 중엔 끊임없는 원수의 방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가 대적하면 승리는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만한 시험이 아니면 절대로 하나님이 허용조차 않으십니다.
우리 주변에서 지쳐 넘어지고 함정에 빠지고 절벽에 떨어지고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으로 보호받고 독수리 날개 아래 안겨있습니다.
뒤돌아보면 수많은 위기와 눈물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의 대적은 마귀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도 한 몫합니다.
시험이 올 때 믿음으로 이겨낼 생각보다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문제입니다.
시험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육적인 과거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과거는 너무나 편한 우리 죄성의 고향이거든요.
우리 믿음이 이래서 더디 성장하고 집안의 문제며 기도제목들이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 가정을 복의 근원되게 하시려는 것은 정말 의심할여지 없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원리대로 중시해야 할 순서를 지키며 믿음을 발휘해 적극적으로 시험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지만 신앙을 견고히 구축하고 영광을 되찾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음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힘써 예배에 성공하고 말씀대로 살며 견고한 믿음의 성곽을 세우고 약속하신 영화와 평강을 누리는 삶을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의 반응과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조국이 비참한 지경에 놓였다면 타국에 있는 사람들 반응은 어떨까요?
우리나라 금융위기 때 제가 잠시 외국에서 살고 있었는데 교포들의 반응은 걱정보다 그 와중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에 대해 무척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국에 대한 염려와 걱정도 있지만 일단은 내가 안전하고 내가 누리는 것들이 보장되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는 것이죠.
본문에서 예루살렘의 황폐를 들은 느헤미야가 울며 수일 동안 슬퍼한 것은 그런 면에서 볼 때 보통 사람의 상식적인 반응하고 많이 다릅니다.
느헤미야의 심정 속에 끓어오른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조롱당하고 이 땅의 유일한 하나님의 나라가 폐허로 방치되어 있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이름이 폄하되고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을 받을 때 함께 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볼 때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은 한 성령을 받은 지상의 교회이고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고충과 하나님의 교회가 나의 일처럼 마음에 걸리는 게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타인에 대해 냉정하고 무정한 인간의 마음은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절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반응하지 않습니다.
일차 포로 귀환 때도 수많은 바벨론의 유대인이 있었지만 돌아간 사람은 4만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돌아간 이유를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1장5절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동한 사람들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타국이 고향이 된 사람들이고 삶의 터전도 사업도 친척도 다 거기 있었지만 두고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자고 돌아간 것이죠.
느헤미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고급관료로 당대 최고의 문화를 꽃피운 화려한 페르시아 궁전에 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훼파 된 성벽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의 영광을 복원하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포기한 것은 하늘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는 줄 믿습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비참한 조국의 현실을 어쩔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말았다면 그는 왕궁의 관료로 편안한 여생을 보냈겠죠.
그리고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충성과 헌신을 기뻐하시고 그의 모든 역사를 성경에 기록해 영원히 전해지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느헤미야3장에는 그를 도와 각기 자기 집 근처의 성곽을 쌓는 역사를 감당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우리는 의지를 다해 순종하며 주님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지금 작은 헌신을 요구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과 주의 나라를 위해 사용한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희생만이 천국에서 영원히 기념되는 것입니다.
나의 이기적인 삶을 위해 사용 된 모든 것들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이고 때로 주님의 책망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항상 시간에 쫒기고 월급은 늘 빠듯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엔 몸과 마음도 지쳐있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늘나라 내 영원한 처소를 위해 남길 것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나의 재능을 드리고 이웃의 영혼을 돌아보고 작은 선을 베풀고 용기가 될 말 한마디를 해주는 것도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면 천국의 우리처소에 아름답게 기념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아멘.
느헤미야는 귀국을 염두에 두고 간절하고 실제적인 기도를 5절에서 11절까지 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다음 기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그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오늘 종이 형통하여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기도했을 때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국으로 돌아갈 길과 도움을 받기 위해서 왕에게 은혜를 입기를 기도했을 때 실제 그가 승진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술관원이면 왕의 모든 식탁에 동석해서 음식물의 독을 점검하던 사람입니다.
고대 앗수르 문헌에는 술관원이 왕의 최측근이고 권력의 2인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땅하고 필요한 것이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응답되는 데 걸린 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2장1절을 보면 그가 왕 앞에 나가 예루살렘 파견근무를 요청한 날짜가 나옵니다.
본문1절에 기슬르월에 시작 된 기도가 니산월에 응답되는 데 기간이 약4개월 정도가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느헤미야는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고 이루어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를 면밀하게 검토했습니다.
실제 그 기도를 통해 그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플랜을 그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52일 만에 의기소침한 백성들을 일으켜 무려 4킬로미터가 넘는 성벽의 대공사를 마치는 기적 같은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기도는 끈기를 갖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피에르 뒤퐁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체하고 계신 것을 절대 거절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견뎌내라, 인내야말로 가장 훌륭한 재능이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짐을 지기로 결정한 느헤미야와 동참했던 성도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알렉산더대왕과 그의 부하들은 먼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리품으로 얻은 금을 한 마차 가득 싣고 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나귀가 마차를 끌고 있었고, 마부 한 명이 나귀를 몰고 있었습니다.
워낙 먼 거리라 나귀는 지쳐갔고 곧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 때 마부는 마차에서 금덩어리 몇 개를 꺼내더니 자기가 메고 걷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알렉산더 대왕이 이상히 여겨 물었습니다.
‘왜 자네가 금덩이를 짊어지고 걷는가?’
마부가 말했습니다.
‘나귀가 너무나 힘들어해서 짐을 덜어주고 있습니다.’
감동을 받은 알렉산더 대왕이 말했습니다.
‘짊어진 것은 다 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기가 짊어진 것만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의 삶을 살기도 벅차고 힘든 세상이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짐을 질 때 분명히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주를 위해 사는 자의 기쁨과 축복을 누리며 사는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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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8장1절-12절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라) (0) | 2017.06.01 |
너희 집을 위하여 싸우라 (느헤미야4장14절-20절) (0) | 2016.06.01 |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울 때에 (느헤미야4장7절-20절) (0) | 2014.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