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읽었는 데 내용이 잘 이해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생소한 이름도 많이 있고 역사적인 이야기라 좀 딱딱하죠.
게다가 2천4백여년전 먼 이스라엘이란 나라에서 있었던 사건이라니 흥미를 끌기가 더 어렵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부흥 사건입니다.
시청률 떨어지고 있는 소리가 막 들리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영적 부흥, 이 얼마나 가슴이 뛰는 말입니까?
은혜를 받아 본 사람들은 영적인 부흥의 순간이 얼마나 좋은 지 우리 오감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힘에 강하게 이끌려 하나님을 향해 뜨거운 열망을 갖게 되는 게 영적부흥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이스라엘사람들이 영적인 일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구약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사실 하나님을 잘 믿은 때가 거의 없었잖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심으로 열중하신 것이 비해 이스라엘은 정말 터무니없이 하나님께 무관심했던 것을 봅니다.
어쩌면 요즘 신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충성되게 잘 믿는 것이 참 힘든 일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삶보다 자연스럽게 죄에 끌리고 거기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기독교방송에서 찬양을 들으면 참 은혜스럽죠.
한번 가요무대를 틀어보세요.
황성옛터, 동백아가씨 이런 거 한번 들으면 그건 아예 가슴을 막 후벼 파며 순식간에 우리 애간장을 녹이잖습니까?
옛날 추억과 함께 세상의 애환이 구슬프고 아련하게 마음을 마구 휘저어 놓습니다.
우리 죄성엔 세상 문화가 딱입니다.
요즘 개그프로그램에서 시청률의 제왕이라는 것을 보십시오.
드라마에 좀 착하고 훈훈한 내용이 전개되면 시청률이 막 떨어집니다.
시청률을 끌어올리려고 박대표가 요구하는 게 무엇입니까?
불륜, 패륜, 막장, 출생의 비밀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시청률이 급상승합니다.
우리 믿음이 한결 같지 않고 또 꾸준히 성장하지도 못하는 이유가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 때문인 것이죠.
때론 하나님이 우리 죄성 좀 확 뿌리 뽑아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시냐하면 죄의 본성까지 포함해서입니다.
우리의 나쁜 성품과 습관과 성질이 다 얽히고 설킨 게 나란 존재이지 않습니까?
이걸 한 순간에 바꿔버리시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 매순간 성령께서 우리 스스로 이것을 해결하고 이겨나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거룩한 삶을 싫어하는 죄의 본성이 질겨도 너무 질깁니다.
그러니 요즘 성도들이 믿음의 성장을 과연 원하기는 할까 하는 것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고민입니다.
현대 신자들은 내가 원하는 만큼 알아서 믿을테니 절대 내게 요구하지도 말고 가르치려고 하지도 말라는 것 같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소속과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맞는 것입니다.
회사에 입사하면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해야 월급을 받는 거 아닙니까?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운 기업을 누릴 사람들이 맞다면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실제적인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죄의 본성을 따라 적당히 순응하며 사는 삶이 더 편하게 느껴지시죠?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가 죄의 본성을 따라 마음과 언행을 하고 나면 왠지 비참해집니다.
죄의 결과가 비참이고 파멸이고 불행이라는 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교회에 만연한 이름만 걸어 놓은 신자들의 삶을 이제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가 한국기독교의 너무나 깊은 고민입니다.
분명히 기독교인이란 명칭은 과거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오늘날처럼 믿어도 좋은 것인지 정말 갈등이 됩니다.
요즘 가나안성도가 점점 늘어난다고 하죠.
가나안 성도가 누구냐면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뭐가 됩니까?
교회 안나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를 나가지 않고 성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1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분들이 과연 죽음 뒤에 내세가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냐는 것입니다.
또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도 생명의 위협과 일신상의 손해가 있을 때 과연 예수님을 끝까지 믿는 편에 설 수 있냐는 것이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땅에서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마지막 날에 아버지 앞에서 너를 시인할 것이다.
우리가 오늘도 한 주간의 피로를 견디고 오락을 포기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굳이 교회에 나올 일이 뭐가 있습니까?
마음의 수련을 원한다면 편리한 시간에 기 수련원이나 명상센터에 가도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증언하신 대로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이 세상을 벗어난 뒤 지금보다 더 실제적인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잘 믿어보자라는 말씀을 좀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에 우리가 경각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부흥, 영적인 건강이 왜 그렇게 필요한 것입니까?
영이 건강하지 못하면 이 세상의 삶도 결코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는 말씀아시죠?
반대로 범사에 일이 잘 안되고 세상에서의 내 경영하는 것들이 흔들리고 불안하다면 영혼이 빈약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영적으로 잘되면 꼭 세상적으로 번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혼이 건강하면 잠시 세상에서 잘 안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한 강인함으로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별 부족한 것도 없고 큰 문제도 없는 데 항상 번민에 시달리고 심리적 육체적으로 쇠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혼이 빈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건강해야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아름답고 복되게 경영해갈 수가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읽은 글인 데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 소개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이 강하다. 생각이 긍정적이다.
분별력이 좋아진다. 남이 한 말을 가슴에 담아 놓지 않는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본다. 여유가 있고 감사한다.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남의 장점을 본다. 생각이 단순하고 명쾌하다.
안정감이 있다. 자신의 죄가 잘 보인다.
말이 부드럽고 사람과의 관계가 좋다. 하나님과 교제가 잘 된다.
다음은 영적으로 약한 증거입니다.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다. 생각이 복잡하고 잡념이 많다.
고집이 세다. 교만하고 부정적이다.
집착한다. 근심, 불안, 염려가 많다.
상처를 잘 받는다. 남의 탓을 하고 대인관계가 안 좋다.
자신을 포장한다.
자존감이 낮고 자아관이 부정적이다.
게으르고 나태하다. 의욕이 없고 무기력하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두 가지를 비교해 보니 확실히 영적으로 건강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않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전쟁터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죄성과 악한 영을 이기지 못하면 우리의 좋은 것들을 다 뺏길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강인하게 바로 서고 우리의 이 땅에서의 기업을 풍성히 누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럼 영적인 부흥에 대해 충분히 동의하신 걸로 알고 본문에서 그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역사적인 배경은 좀 생략하고 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 학자인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율법책 좀 가져와서 읽고 해석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건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이스라엘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옛날 모습이 우리하고 더 잘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배우려 하다니요.
그것도 새벽부터 정오까지 여섯 시간동안을 서서 말씀을 듣고 배우는 열기가 수문 앞 광장에 가득합니다.
이 일이 일주일 간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부흥과 건강한 영적인 생활은 말씀과 함께 옵니다.
우리 영이 소생되고 부흥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적 부흥이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 자연히 말씀에 관심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신기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영혼이 부흥되면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무리 새신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영혼의 깊은 영역을 감동하시거든요.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영혼의 깊은 곳이 감동될 때 빨려들듯이 거기에 집중되는 것이죠.
그래서 과거 신앙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역사들을 보면 말씀에 대한 유별난 갈망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항상 생기있고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반드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2장2절을 보면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영적으로 거듭나는 순간 갓 태어난 아기가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엄마의 젖을 찾듯이 자기 영적 생명을 위해 신령한 젖,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틴루터는 말했습니다.
‘성경은 많이 길어 마시면 마실수록 목마르게 하는 이상한 샘물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이 먹었다고 물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맛을 안 사람은 더욱 말씀을 먹고 씹으며 느끼는 그 즐거움을 점점 더 누리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고 나면 자기가 분명히 느끼거든요.
내 영혼이 강해졌다.
본문에서 그들은 유머도 없는 딱딱한 모세오경의 율법을 듣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은근히 설교가 긴 편입니다.
제가 조금씩 늘려서 아마 잘 느끼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이 우리 영혼을 살리는 양식이라는 것을 믿고 집중해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복 받은 성도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잖아요.
말씀을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유익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따라야 할 율법을 주시며 뭐라고 말씀합니까?
신명기4장6절에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이 말씀대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지키려는 사람들에겐 세상과 다른 명민한 지혜와 총명이 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할수록 자기 자신도 점점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살 때 인생의 혼돈과 애매함이 사라지고 사리가 명료해지는 축복이 분명하게 옵니다.
답이 없을 것 같은 복잡한 문제도 실마리를 찾아내고 자기 스스로가 감탄한 적 없으십니까?
또 여호수아1장8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이 가장 큰 복이고 가장 안전하고 형통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네비게이션이 처음 나왔을 때 내비게이션 괴담 같은 게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비게이션을 처음 사서 낯선 길을 떠났는 데 점점 주위는 깜깜해지고 내비는 점점 산길로 안내를 합니다.
그리고 한 순간 절벽아래로 추락하더라 이런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비게이션 삼으면 우리 인생이 절대 추락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이 말씀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냥 읽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성령의 조명해 주심을 구하며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독교에 열심을 보이고 오래 믿어도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으면 미신적인 신앙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우리 주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그 인격과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성경을 보시며 성령께서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바랄 때 말씀을 통해 점점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면 이건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열렬히 기대하며 읽고 묵상하고 지켜 행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영적부흥의 증거입니다.
5절부터 보면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일어나고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그러자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다고 기록합니다.
영적 부흥이 있고 영적으로 건강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두려움에 대한 자각이 생깁니다.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들어왔던 것들이 바로 이것이구나 순식간에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위대하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죠.
믿음의 삶을 시작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듣고 느낄 때 은혜를 받고 마음의 평안과 안정감을 느낍니다.
믿음이 성숙해 갈수록 엄위하고 거룩하신 공의의 하나님께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경이롭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길 때 역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정의와 광대하심을 느낄 때 오히려 안도감을 느낍니다.
사랑의 하나님만으로는 공권력이 무너진 나라에서 같은 방종과 불안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피조물로 창조되었기에 마땅히 섬길 위대한 대상인 하나님을 섬길 때 영혼이 만족감을 갖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 자청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본문에 나타난 이 경외심이 충만한 거룩한 경배를 교회에서 찾아보기가 얼마나 어렵게 되었습니까?
예배는 어느 새 인간이 주인공이 되고 자기를 드러내고 영광을 받으려는 진행자들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없이 앉아 있는 청중들로 가득합니다.
예배가 공연장이 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코란 앞에서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이슬람교도들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니까요.
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냐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하고 부끄럽습니다.
석가탄신일에 사찰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대웅전에서 예불을 올린다고 북적댑니까?
불자들이 불상에 절을 할 때 보셨습니까?
얼마나 경건한 예를 갖추고 동작 하나 하나에 혼신을 다해 절을 하잖아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독교만 지존하신 하나님께 대한 겸허한 경배가 결여돼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백팔배하다가 휴대폰 들여다보는 사람 있습니까?
영적인 부흥은 본문에서 처럼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느끼게 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우리 교회가 매 예배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르게 예배하는 축복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열어놓은 길로 나아가 하나님을 사모하며 경외하며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음 본문에서 주목할 사실은 말씀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이 울면서 율법의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이 역사하시고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면 눈물을 흘리는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야 말로 진정한 영적 부흥의 증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만이 우리의 잘못을 드러나게 하고 회개하는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임재를 느끼게 되면 그 다음에 필연적으로 죄로 인한 두려움과 깊은 죄의식과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청종하다 깊은 죄의식에 흐느끼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으면 절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 자기자신을 잘 모르고 삽니다.
성령께서만 말씀을 통해 내 자신을 정확히 보게 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신체 중 얼굴은 직접 보지 못하죠.
거울에 비춰봐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자기 얼굴입니다.
그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춰볼 때 뿐입니다.
매일 말씀 앞에 앉아 자신을 비춰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내가 오늘 한 대부분의 행동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죄라는 것입니다.
내 결심과 의지로 열심히 행한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 행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결코 하나님을 위해서도, 형제를 위해서도가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 오늘도 산 것입니다.
직장과 일터와 학교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조차 다 자기가 영광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죠.
사람이 거의 대부분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일수록 그런 자기의 실체를 밝히 볼 수 있다는 차이이고 빛의 속도로 회개한다는 게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조명해 주시는 말씀을 매일 대하며 기도할 때마다 심령이 젖어드는 것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
바울사도 처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구나.
우리가 바울보다 더 예수님께 헌신했고 열정을 다해 말씀을 지켰습니까?
우리는 과연 죄인 중에 괴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우리가 날마다 죄를 느끼지 않는 한 예수님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으신 것입니다.
깊이 자기의 끈질긴 죄성을 자각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속죄 받으러 감사와 눈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예리한 칼 끝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죄를 자각하고 울고 있는 이들에게 느헤미야가 말했죠.
오늘은 여호와의 성일이니 울지 말라.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영적인 부흥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함께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자각과 용서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뻐하려해도 되질 않아요.
그런 경우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은 아무리 짜내려해도 안됩니다.
지갑에 두둑한 현금이 주는 기쁨만큼도 못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정말 맛본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25년전 교회를 처음 다니고 얼마 뒤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경험이 있습니다.
아마 그 날 하나님을 정확히 인식한 것 같습니다.
하늘을 올려다 보는 데 하나님이 계신 것이 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 그래. 역시 하나님이 계셨구나. 그럼 그렇지. 그래서 세상과 내가 있는 것이지, 너무 좋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신 게 너무 좋고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니 그렇게 안심이 되고 좋은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도 생각이 완전 달라지고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무서웠고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해 항상 막막하고 두려웠거든요.
그 기쁨이 얼마나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지 당시 참 힘들 때였는데 호되게 시달리던 고통도 사라지고 그 뒤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이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힘들고 일이 좀 어렵게 되어도 낙담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신뢰할 때 우리를 무너뜨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CCM사역자인 유은성전도사의 앨범엔 자신의 집회에서 있었던 간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성도가 여든이 다 된 나이였지만 교회를 위해 더욱 헌신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항상 걷기 힘든 구부정한 다리를 수술하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는 데 재활치료 중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고 나니 다시는 일어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재수술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잘 걸으려던 소망은 이젠 남은 여생 휠체어에 앉아 살아야하는 하반신 마비의 처참한 결과로 끝났습니다.
예배당 맨 뒤에 휠체어에 앉은 채로 예배를 드리는 데 원망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날 찬양집회를 인도하던 유은성전도사가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노성도는 갑자기 마음에 울컥하는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79년을 걷게 해주셨는 데 이제 걷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음이 돌처럼 굳어졌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때 누군가 다리를 툭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만져도 감각이 없던 다리였습니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며 평생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순간 두 팔로 휠체어를 짚고 벌떡 일어서서 걷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영육을 회복시키는 힘이 되는 줄 믿습니다.
아무리 인생에서 기쁨이 사라져가고 답답한 현실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아도 근심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관심, 큰 죄의식과 회개와 눈물, 그리고 경외심과 감사와 기쁨이 묘하게 조화되는 것이 영적 부흥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런 신앙의 모습이 작아도 지속적으로 드러나면 우리가 영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와 말씀생활을 회복해 영적인 건강을 꼭 지켜나가시길 바랍니다.
매순간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십시오.
믿어지지 않을 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을 위해 도와주실 모든 준비를 해두셨습니다.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 좋으신 아버지를 의지하고 우리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형통하고 강건한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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