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8QKaNdC-VCY
<2019년10월13일 설교영상>
지난 주에 이어 오늘 2장에서는 느헤미야가 어떻게 예루살렘 성곽 공사를 시작하게 되는지를 자세히 전합니다.
공사 일지를 쓰듯 진행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죠.
느헤미야는 당대 최고문명의 한 가운데서 왕을 섬기는 화려한 세상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어떻게 낡은 도시의 성곽을 축조하는 큰일에 휘말리게 되었을까요?
느헤미야는 아마 건축 경험도 없고 수산성에 비해 형편없이 낙후 된 시골 살이 경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매일 고위관료들과 세련된 부자들만 상대했을 것입니다.
이제 느헤미야가 할 일은 희망도 없고 자존감도 무너지고 무기력해진 귀향민들을 설득해 성벽공사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돈도 안 받고 자기 집과 상관도 없는 공사를 한다고 나오겠습니까?
느헤미야가 그런 백성들과 함께 52일만에 성벽을 완공한 것은 기적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한 뒤에도 백성들을 가르치며 예루살렘의 정상화를 위해 12년을 머뭅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빚진자, 가난한 자 문제까지 떠안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성에서 그들과 함께 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가 그랬다죠.
공주의 아들로서 누리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했다고 하잖아요?느헤미야가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나와 내 가정을 위해 살기도 버겁잖아요?예수님을 성전으로 모시고 믿음의 성벽을 세우는 일은 피곤하고 큰 힘을 들여야 합니다.
게다가 주님의 교회,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해 성벽공사에도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사는 것도 힘들 때 이 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죠.
단순하게 계산하면 믿는 게 손해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잠시 교회를 끊고 가나안성도들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보호 할 믿음의 성벽이 허물어져 있다면 더 악하고 독한 것들이 산사태가 밀려들 듯 우리를 덮쳐 올 것이 확실합니다.
매일 우리 성벽을 점검하고 흔들리고 무너져 내린 부분들을 보수해야 합니다.
그러면 힘들게 세워가는 그 믿음의 성벽이 우리와 가정을 안전하고 복되게 지켜주는 것입니다.
오늘 느헤미야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의 큰 공사를 어떻게 해나가는지를 보면 ‘아, 이렇게 살면 믿음의 성벽공사가 잘 되겠구나’를 알게 될 것입니다.
1. 가장 먼저는 느헤미야가 이 성벽공사를 기도로 해 냈다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사실 세상의 집도 성공적으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남보기에 멋있고 화려하게 세운 것 같아도 내부 골조가 흔들리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집도 믿음으로 골조를 세워야 끝까지 안전하고 견고히 세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세우는 가장 견고한 재료가 기도입니다.
청소년들이 공부하며 진로와 인격을 세워갈 때도 모든 재료에 기도가 섞여야 합니다.
청년들이 결혼이라는 새가정을 세울 때도 기도가 골조가 되어야 행복한 새 가정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중장년 노년의 성도들의 삶은 말할 것도 없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생을 꾸려가야 합니다.
손에는 힘이 없어지고 무릎도 점점 약해지는 데 어떻게 우리 힘만으로 삶을 버티고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본보기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입니다.
담담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삶을 사는 분들을 보면 다 기도의 자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늘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아침에 출근한 사무실이든, 가족들을 다 내보낸 식탁 앞이든,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몸을 눕히기 전이든 항상 기도하는 자리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왜 그게 필요하냐하면 거기에 가면 그나마 기도가 잘 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루틴이라고 하잖아요?반복을 통해서 몸에 익숙해 있는 일은 가동하는 데 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하던 곳에서는 좀 더 쉽고 진지하게 기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기도의 자리에서 모든 의미 있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문1장1절을 보면 때가 아닥사스다왕 이십년 니산월이라고 시작하죠?
1장1절을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가 같은 해 기슬르월에 시작되었습니다.
1장과 2장 사이엔 4개월의 시간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굳이 달까지 언급한 것은 내가 성벽재건을 결심한 뒤 4개월 동안 기도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4개월이 지나서야 하나님의 응답이 구체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죠.
이것은 기도의 한 원리를 가르쳐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이렇게 4개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도하고 내일 바로 응답하신다면 아마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응답은 왜 항상 늦는 것일까요?
그러나 뒤에 보면 알겠지만 이 기도하는 4개월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기도 중에 받은 지혜로 느헤미야가 성벽공사를 완벽하게 구상했던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기도하고 일어났는데 아무 느낌도 없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바뀐 것 같지 않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일의 성취를 위해 어떤 부분에서든 움직이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를 들으시고 어떤 결과로든 응답하십니다.
다만 기도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기도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이고 끈기 있게 하지도 못합니다.
앞 장에서 느헤미야의 기도를 유심히 보면 응답에 대한 확신이 넘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기도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데 나와 조상들이 그렇지 못해서 이 꼴을 당한 것을 회개합니다.
돌이켜 주님을 따르면 다시 복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응답해 주실 것을 꼭꼭 짚어가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니 어김없이 들으실 것을 믿고 기도한 것이죠.
우리 성도들 역시 성경의 약속을 근거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가 막연히 천지신명에게 구하는 게 아닙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의지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그래서 우리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는 응답을 받기 위한 주문 같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내 죄를 속죄한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이죠.
우리 이 사실을 다 믿잖아요?
물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속죄하심을 믿는다는 것 안에는 우리 죄에 대한 자백과 회개가 느헤미야처럼 들어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회개하며 기도했듯이 우리도 항상 성령님과 양심이 지적하는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면 응답받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약속하신 유일하고 합법적인 통로가 예수님을 통해서라는 걸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심도 믿으시고 기도로 믿음의 삶을 잘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2. 다음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넉 달이 지난 어느날 느헤미야가 한 잔치에서 왕에게 포도주를 따르며 의전을 챙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왕이 유심히 느헤미야의 안색을 살핍니다.
느헤미야의 안색이 밝았을까요, 어두웠을까요?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 낼 것을 생각할 때 안색이 밝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근심이 있으면 얼굴에 드러나잖아요?
예루살렘 성은 페르시아왕의 조서에 의해 현재 재건축이 금지된 상태입니다.
그 조서를 내린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는 아닥사스다왕입니다.
가장 큰 난관은 왕이 자기가 내린 법령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느헤미야가 얼마나 고민스럽겠습니까?
즐거운 자리에서 느헤미야가 수심이 가득차 술을 따르니 왕이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에게 묻습니다.
‘너 왜 보통 때와 달리 얼굴에 그렇게 수심이 가득한 것이냐, 속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지?’
긍정보다는 좀 부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암살과 암투가 벌어지는 궁중의 생활에서 왕은 최측근도 믿으면 안되던 시대입니다.
특히 아닥사스다왕은 부친인 아하수에로왕이 신하에게 살해당한 뒤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의심이 묻어나는 왕의 말에 느헤미야가 크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뭔가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면 가차 없이 끌려 나갈 수도 있는 판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것이 그동안 기도했던 그 기회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많은 경우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어떻게 알게 되던가요?
기도하다 확신이 들기도 하지만 응답은 외부로부터 옵니다.
환경적으로 결정적인 일이 터짐으로 진로가 바뀌잖아요?
또 누군가의 대화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깨닫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연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 응답을 받으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 문제를 꺼내기가 너무 어려우니 왕이 먼저 말을 꺼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이 문제로 왕과 정면승부를 해야 합니다,
이때도 머뭇거리고 뒤로 미루면 안되는 것이죠.
느헤미야는 자기 얼굴에 수심이 있는 이유는 조상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아직도 불탄 채 무너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끝까지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쓰지 않고 조상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고 합니다.
왜 그랬겠어요?
조상의 성읍이라는 말은 경주 같은 고도를 연상시키잖아요?페르시야에 반역할 정치적인 도시 같은 느낌이 들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왕이 과거에 예루살렘에 내렸던 조서를 지금 떠올리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적재적소에 맞는 말의 지혜도 다 기도할 때 오는 줄 믿습니다.
기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말의 지혜를 얻게 합니다.
사람들과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고 좋은 만남을 가졌다면 십중팔구 기도생활이 잘 될 때입니다.
느헤미야의 말에 왕의 의심은 한 순간 사라지고 이렇게 묻죠.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기도 한 뒤에 달라지는 것이 또 무엇입니까?
설득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의 마음이 누그러진다는 것입니다.
잠언에서 주신 교훈은 대인관계에서 황금률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와도 화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친구도 자꾸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쁘면 십중팔구 사람과의 관계도 나빠집니다.
부담스러운 사람도 간절히 기도하고 만나면 의외로 호의적으로 나오는 걸 저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이 기회를 주자 신속하게 하나님께 묵도를 합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은 조짐이 보여도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형통한 삶에는 언제든 마귀가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매사에 신중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하는 것이죠.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세우도록 자기를 유다에 파견에 줄 것을 요청합니다.
쉬운 부탁이 아닙니다.
매일 왕의 의전을 살펴야 하는 최측근 신하가 자기 볼 일을 보러가겠다는 것이잖아요?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직무유기이고 왕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입도 안 떨어질 말이죠.
그런데 6절에서 왕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그래? 얼마면 되니, 얼마간이나 걸리겠냐고 묻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이 본래 인자하고 신하들의 복지를 잘 챙겨주는 사람이라서 그랬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만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땅의 왕의 마음을 감화하셔서 응답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내 정성으로 감복시키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럴수록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합니다.
사람은 쉽게 자기가 갖고 있는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남이 바꾸려고 하면 더 꽁꽁 문단속을 합니다.
마음을 움직이고 싶다면 하나님께 요청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와의 불편한 관계를 위해 기도해도 상대의 마음이 딱딱하기만 하고 부드럽게 열리지 않는다면 상처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기도가 부족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굳이 그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도 별 중요치 않은 기도는 패스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하고 모두에게 호의를 받으며 살아야 된다는 생각도 큰 짐이 됩니다.
아무리 도리를 다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대로 둔 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적이 많으셨잖아요?
왕이 호의적으로 나오자 느헤미야는 준비한 것들을 일사천리로 쏟아 놓습니다.
7절, 조서를 써주셔서 유다 땅 까지 가는 중간에 있는 왕의 속국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주시고
8절, 삼림을 감독하는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성곽의 문과 내가 살 집을 짓는데 필요한 재목들을 주게 해 주옵소서.
어떻게 중요한 순간에 이런 계획들이 일목요연하게 나오겠습니까?느헤미야가 기도하는 4개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모아 모든 계획을 다 짜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극적인 결과가 보이지 않는 기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성실하게 응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일이 형통하게 풀리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 모든 일을 느헤미야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8절, 내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나를 도우므로 왕이 허락하고
이게 얼마나 두렵고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느헤미야가 알잖아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나를 도우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심지어 느헤미야가 구하지 않은 것도 왕이 덤으로 자꾸 얹어줍니다.
9절,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기도한 사람만 하나님의 손이 나보다 크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성도님들 매일 기도하고 응답받으며 하나님의 선하신 손을 매일 체험하며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느헤미야가 갑니다. 예루살렘으로.
3. 이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아무 장애물이 없이 진행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0절에 불길한 사람들이 등장하잖아요?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이들은 그 뒤로 온갖 방해를 하고 심지어 느헤미야를 암살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벽을 세우는 일에는 하나님이 늘 함께 하셔서 형통하게 하시지만 장애물이 없는 형통이 아닙니다.
성경의 형통이란 말은 장애물이 없이 내 소원대로 모든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형통했다고 하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려 갔을 때도 성경은 그가 노예 생활 중에도 형통했다고 합니다.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감옥 안에서의 삶이 형통했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있다면 어떤 상황에 있어도 형통한 것입니다.
당장 아닌 것 같아도 그 결과를 보면 형통한 인도였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아무런 난관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잖아요?
세상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에 엮여서 복잡하고 다양하게 돌아가는데 좋은 곳만 짚어가며 사는 길은 없습니다.
제가 직장을 퇴직하고 오래 개척교회를 하다 보니 자연히 경제적인 면에서 점점 부족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모든 은퇴자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건너편 쌍용아파트에 살다 그 아래 백조아파트로 이사를 하려는데 아파트가 오래돼서 너무 허름한 거예요.
현관 중문의 유리는 여기저기 깨져있고 주방 싱크대는 삐걱거리고 화장실 문짝은 구멍이 나있었는데, 서원이 한테 너무 미안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살다보니 너무 좋은거예요.
주변에 편의시설이 빠진 것이 없고 사는 데 제일 편했습니다.
서원이는 방이역이 코앞이라 너무 좋아하며 잘 돌아다녔습니다.
정말 아쉬운 것 없이 한 육년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하남으로 이사를 갔잖아요?
서울특별시민으로 살다 경기도 하남시민이 된다는 게 좀 서글픈 마음이 든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또 너무 좋은 거예요.
주변이 한적하고 사방에 공원이 많더군요.
집 밖으로 나가면 산책하고 운동할 공간들이 많고 그래서 또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게 다 발전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공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늘 인정받고 계속 잘 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나와 함께 하시므로 주님의 뜻 안에서 잘 이겨나갈 것이라는 확신과 신뢰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형통할 때 함께 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손에 감사하십시오.
또 당장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을지라도, 겉사람이 점점 쇠퇴해가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은 늘 함께 하셔서 우리를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느헤미야의 말에 의하면 무너진 성벽 때문에 수치를 당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우리 믿음이 무너지면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조롱하고 멸시하려 듭니다.
세속적인 일들이 바쁠지라도 기도로 믿음의 성벽을 늘 점검하고 보수하며 든든히 하시길 바랍니다.
내 믿음의 성벽을 무너뜨리지 말고 잘 세워 가셔야 합니다.
주님의 일에도 더욱 힘쓰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서도 성벽을 세우는 자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우리를 도와주셔서 주 안에서 계획하고 기도하는 일들을 이루게 하시고 매일 복되고 평안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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